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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특공대
2차 세계대전때 일본 공군의 특공대들이 연합군의 큰 군함들을 향해 돌격하여 함께 폭사했는데 이들을 일러 '가미가제 특공대(가미가제 독고타이, 신풍 특공대)'라 한다. 이는 세계 전쟁 사상 유래없는 일로 일본인들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다.
'천황을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라는 구호 아래 17세에서 24세 정도의 젊은이들은 500kg정도의 탄약이 실린 전투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연료는 가고시마에서 오키나와까지밖에 주지 않았다. 즉, 돌아오기 위한 연료는 없었다.
강아지를 안은 특공대 사진
최초 실시된 세키 유키오 대위의 가미가제는 항공모함을 격침시켰고 그 후 몇 번의 피해를 입혔으나(항공모함 갑판에서 출격 대기중이던 비행기를 불태우거나 출격 대기중인 조종사들용 방을 그대로 불태워 죽게 했다던가) 미 해군의 방비가 강화된 후에는 그 의도만큼의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일본 비행기들이 접근하려는 순간에 이미 함대와 더불어 상공에는 상당한 수의 전투기가 포진해 있었고 특히 '곧 죽을 운명'으로 낙인된 조종사들 중 상당 수는 그 조종능력에 있어서 이착륙 및 이동경로를 따라가는 훈련 정도 받은 상태에서 막상 충돌하려는 순간 겁을 먹고 폭탄의 발화장치를 풀지 않아 충돌한 채로 폭탄을 불발 시키는 경우가 많아 결국 터지지 않자 자신의 비행기와 적진함대의 일부분만 파괴하는 정도, 또는 함대의 앞에서 바로 바다로 돌진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세키 유키오 대위의 경우도 항공모함 갑판 정중앙에 출돌 후 비행기가 폭탄채로 갑판을 뚫고 내려가 그 아래 항공기용 가솔린 탱크와 충돌, 그것이 폭발한 것이었다
최근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이 사설에서 밝힌 가미가제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 군인 사병으로 그들 주변에 함께 있었다 가미가제 특공대 또한 우리가 아는 것 태반이 왜곡되었다 가미가제 대원들이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맹과 기쁨으로 돌진했다는 것은 모두 정치인들과 역사인식이 부족한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며, 겁에 질려 일어서지도 못하는 대원이 태반이었다 이렇게 겁에 질려 일어서지도 못하는 대원들을 강제로 비행기로 밀어넣는 경우도 있었으며, 순순히 이행하지 않을시에는 폭력도 불사했다]
역사적 상황과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감정은 차치하고라도 당시 인간으로서의 절대적인 불안감은 존재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가미가제 특공대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먹물을 마시게 했다는, 그래서 먹물의 효과는 이러이러하다는 한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였다 알 수 없는 기분이 교차하는데 쓸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ㅡ,,ㅡ
그릇된 충을 위해 쓰러져간 젊은 영혼, 일본
일본어로 가미가제는 '신의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1274년,1281년 두 차례에 걸쳐 몽고군 함대가 일본 규슈섬 남쪽을 침입하려 했을 때 갑자기 이상한 태풍이 불어 이들의 상륙을 막았는데, 일본인들은 이 바람을 신이 일으킨 바람, 즉 가미가제라 불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일본군에게는 연합군에 대항할 만한 군수 물자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노릇이기에 결국 일본은 가미가제식 공격밖에 연합군의 진군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고 평균 연령 20세 정도의 지원병을 모집하여 전투기 1대에 미군함 1대를 폭격할 것을 명령하고 자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KBS 다큐멘터리 <유교 2500년의 여행> 촬영팀이 일본에서 가미가제 특공대 생존자 하마조노 시게요시 씨를 만났다고 합니다.
" 전투기를 조정하려면 2년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1년 만에 전투기를 조종했습니다. 2년의 교육을 마친 미군기에 대항하여 공중전을 벌인다는 것은 무의미했습니다. 또 최전선에서 적의 공격에 당하지 않으려면 65도에서 70도 정도로 급강하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데, 우리는 평소에 45도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90% 이상이 적의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었습니다. 게다가 표준 적재량이 250kg인 고물 전투기에 폭탄 500kg을 실었고, 이 때문에 연료를 반으로 줄였습니다. 공격 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연료량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 수 없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동기 200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한 두 명뿐입니다. 일본은 조종사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적군을 죽이기만 하면 그만이었지요.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다니, 있을 법한 일입니까?"
가미가제 조종사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왜 전쟁에 참여했을까?
"천황을 위해 싸우다가 죽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길이라는 정신 교육이 철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교육은 사람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조종사들은 이 정신교육에 넘어가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서슴없이 연합군 함대로 돌진했습니다."
가미가제 조종사들은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마주해야 할 죽음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종사들 가운데 85%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전장에 나가기 전 송별회 자리는 늘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출격을 앞두고 쓴 조종사들의 일기 일부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효도다운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해 그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전장에 나가면 언제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을지.... 충과 효는 동일하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효행이지만 제가 죽은 후 부모님이 어찌 사실지 걱정이 되어 눈물이 흐릅니다. 아주 복잡한 감정의 눈물입니다. 하지만 비겁한 짓을 하여 살아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제게 국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 아, 동기의 사쿠라 中 )
놀라운 것은 가미가제 조종사들에게 천황과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데 '유교'가 이용됐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일본의 유교가 천황과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끌어내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을까요?
일본의 유교는 원래 지배계급을 위한 학문으로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로 넘어오면서 천황을 신성화하는 수단으로 변모했습니다. 그 이유는 개국 초기부터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추진한 메이지 정부는 국민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천황의 권위를 내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유교를 통해 국가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91년에 공포함 '교육칙어'입니다. 메이지 정부는 '교육칙어'를 '천황의 가르침'이라면서 대대적으로 교육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전통적인 유교 윤리를 열거하고 있지만 핵심은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 천황에게 모든 것을 바쳐 영원히 계속될 천황과 황실의 운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국민은 한 가족이며 천황은 그 가족의 아버지이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듯 천황에게도 무조건 충성하라는 내용입니다.
가미가제 특공대에게도 바로 '교육칙어'와 동일한 내용이 주입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지배계급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소중한 생명을 무모한 전쟁에 던진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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