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둔지미(둔산)의 역사와 운명 그리고 삶
오늘날 대전의 중심지는 둔산이다. 그리고 그 모태는 둔지미였다. 둔지미, 둔지미산은 전국에 여러 군데 있는, 어찌 보면 보통명사인 듯한 고유명사였다.
대전의 둔지미는 이른 선사시대부터 살아왔던 선조들의 흔적들이 1990년대 전후 무렵을 기점으로 지형과 더불어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숨결만은 둔산(屯山)이란 이름 속에 아직도 면면히 보이지 않게 남아 흐르는 곳이다. 무명의 옛 한촌은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둔지미는 구한말까지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던 공주부 천내면(公州府 川內面)의 일개 한촌이었다. 海東地圖에도 도산서원(道山書院)은 등장하나 둔산 관련 이름은 없었던 정도였다. 그러다가 일제시대부터 지도(1911년 일본 육군참모부 발행)에 비로소 갈마리(葛馬里)의 둔지산(屯之山)이 보이고 1919년 총독부 발행 지도에 유천면 둔산리의 하둔산리(下屯山里), 상둔산리가 행정리(杏亭里)의 한 마을로, 1964년 지도에 둔산리의 자연마을로서 아래, 가운데, 윗둔지미가 공식적 우리말 이름으로 지도상에 오른다. 그러나 구한말 조사된 지명자료 朝鮮地誌資料에 토박이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둔지미는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었다고 여겨진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속 ‘(儒城)縣東十里 鳴鶴所’ 기록에서 과거를 추측할 수 있다. 이 일대가 고려시대 명학소가 근처였을 가능성이 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이곳 사정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오죽 했으면 망이 등이 난리를 일으켰을 것인가.
유성으로부터 건너와 윗둔지미, 지치울, 배우니, 장자울, 숯뱅이를 지나 수침교를 건너는 유성 방면 소로가 구한말 지도상에 나타나고 대덕대로는 더 작은 길로 표시된다. 1913년 그 소로가 일제에 의해 2등도로의 공주가도로 격상돼 수침교 건너 서대전까지 확대, 직선화함으로써 훗날 32번국도(대전-태안)의 기저가 된다. 징검다리 수준의 수침교도 이 무렵 다리로 바뀌고 도로확장과 더불어 1932년 도로를 확장하면서 시멘트로 이뤄진 것으로 여겨진다. 가루고개(갈마육교)부근 비행장 자리인 윗둔지미 일부, 지치울, 방죽골 등은 낮은 구릉지였다가 1940년대 초 비행장이 들어서면서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태평양전쟁 직전 학생들까지 동원하면서 공사를 했다는 증언이 있다. 일제가 물러가고 그 자리에 국방경비대가 일시 들어왔으며 곧이어 이형근 장군을 중심으로 정식으로 국군 제2연대로 창설돼 육이오 때 중부전선 등에 투입 활약했다(현재 제2연대 창설기념비가 갈마공원에 세워졌다). 육이오가 종식된 이후는 일대에 국군의 시설들이 들어섰다. 1940년대 이후에는 비행장을 위시해 군사시설들이 탄방동과 윗둔지미 지역을 점령해서 해방 전에는 현 대덕대로 동쪽, 시청 남문 앞에서 32번국도 북쪽, 도산서원 서쪽의 비행장 지역 범위만 지도에서 사라지나 해방 후 70년초 무렵 이후에는 32번국도 남쪽 현 경성큰마을아파트 지역이 헌병대와 육군통신학교 그리고 윗둔지미(현 둔산중, 둔산여고 부근)지역이 3관구사령부 등 군사시설로 묶여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6.25때는 비행장은 공군보급기지, 미군전방지휘소로 활용됐었다가 전후에 공군교육사령부, 기교단이 입주했다. 현재 시청 북문 앞 보라매(공군 상징)공원의 잔디광장과 F-5 전투기 한 대가 이곳이 비행장터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50년 전 이곳에서는, 금강방어선(대평리)이 무너짐에 따라 아군은 비행장 옆 갑천에 방어선을 치고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했다. 둔산을 서북으로 둘러싼 갑천은 6.25때 월평산 줄기와 더불어 대전 방어를 위한 마지막 방어선을 설치했던 곳이어서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둔산 일대는 피아간에 엄청난 화력을 퍼부으며 대단히 치열하게 격전을 벌였던 장소다. 그러나 야크전투기와 탱크를 앞세운 적의 공격과 게릴라전에 밀려 아군은 7월 19일 끝내 비행장을 포기하고 후퇴한 끝에 20일 오후 대전을 잃었다가 3개월 만에 되찾았다. 당시 여기서 미군 810여 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 오석으로 조성한 영웅추모비로 현지 보라매공원에 전해진다.
둔산은 80년대 중반 경 신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소로였던 대덕대로 전신의 도로가 확장돼 덕산마을을 거쳐 갑천을 건너고 뒤이어 90년 전후 EXPO개최와 선사유적지 발굴, 신도시 건설이 추진됐다. 그 통에 목숨이나마 유지해 오던 가운데와 아랫둔지미마저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만년들 끝이자 대덕대교 직전 덕산마을 근처 잿들, 은들 등 들판도 모두 메워져 흔적도 없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앞 들은 개발 직전 큰비 때마다 물로 흥건하던 모습이 선하다. 이곳 민초들의 고향은 아파트 방바닥이 됐다. 어느 아파트의 화장실로 변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곳에 뿌리를 두었던 이들의 일부가 세운 둔지미 유래비만이 이마트 북편 공원에 서서 옛 주민들의 향수를 자아낸다. 이것이 대전 둔지미의 마지막 운명이었다.
개발 전 둔지미들은 대둔산 줄기상 갈마동의 가루고개(현 계룡로 갈마육교)에서 낮은 구릉을 형성하면서 내려와 마지막으로 둔지산(둔지미)이 만년들 초입에서 문득 멈춰 섰다. 그 구릉을 중심으로 가운뎃둔지미와 둔지산 아래 아랫둔지미마을에는 그리 넉넉지 못한 달동네집들이 둔지뫼(산) 아래 옹기종기 회색 지붕을 하고 모여 있었다. 3관구사령부가 점령하기 전 윗둔지미도 마찬가지였다. 둔지산 밑 아랫둔지미에는 옹기를 구워 팔던 가마골, 점말(점촌) 등도 있었다. 이 점에 대해 황하연 옹(용문동 거주. 84세)도 둔지미에는 질 좋은 대토(胎土-찰흙)가 생산돼 여럿의 옹기장들이 있었음을 증언해 주었다. 사라진 윗둔지미의 비행장 북편 담 이래(방축리)에는 작은 방죽과 붉은 기와공장도 황토밭 가운데 있었고 비행장 서편 담너머에는 비행장에서 나오는 소위 짬밥을 이용하는 돼지우릿간들은 비행장이 사천으로 옮기기 전까지 미루나무 늘어선 가운데 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랫둔지미 동편 현 서구청 동편 샘머리마을(지금은 샘머리공원 들어섰고 일제는 井頭里라 했음) 동남부는 삼천이다. 대전천과 유등천 합류 지점이어서 그리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잿들 건너 도룡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갑천을 거쳐야 한다. 황 옹으로부터 거기에 설치됐던 섶다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뭇가지 등을 얽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섶다리는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 마을의 인력들이 동원돼 다시 세우곤 하던 추억이 깃든 곳이란다. 먼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오륙십년 전의 일이다.
길게 뻗은 둔지미 구릉 서쪽 전면에는 모래사장이 있어서 이름 붙여진 갑천변 사징이(沙亭)마을, 북쪽에는 은들, 만년들, 잿들, 샘머리, 삼천이 등이, 그리고 동남방의 지치울, 배우니, 장자울, 서원말, 숯뱅이 등은 둔지미 주변에 있던 마을 이름들이다. 황 옹의 말에 따르면 숯뱅이에는 오륙십년대까지 숭어리샘(탄방동-현재 도산서원 뒤의 석간수를 지칭하는 듯)이란 맑고 좋은 우물이 있어 개발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다 한다. 역시 1970년대 초 무렵까지의 이야기로 황 옹에게서 들은 바다. 현재는 샘자리에 집들이 빼곡이 들어서 흔적이 없지만 현지에 가서 들은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행장 담밖이자 탄옹 묘소 옆(도산로9번길)에 맑은 물이 솟구치는 물자리가 있어 집짓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황 옹이 지적한 곳과 거의 일치하여 그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숭어리샘 외에 배우니샘(백운리), 샘머리샘, 둔지미샘(아랫둔지미?) 등 공동우물들이 더 있었다고 대전지명지는 전한다. 이런 공동우물들은 식수제공과 더불어 아낙네들의 스트레스 해소, 안부와 소식을 전하는 정보 교환 장소였다.
그런데 숭어리샘이란 이름은 현재 유승기업사 주변의 마을길로 붙여져 있다. 아직까지 칠팔십년대의 지역을 반추하게 하는 흔적이 일부나마 남은 곳이다. 비행장 정문 앞 도로 건너편으로 군 주둔 시절 흥청대던 곳이다. 황 옹은 이곳에 붙여진 도로명에 대해 의아하게 여긴다. 실제로 숭어리샘은 여기가 아니라 도산서원 옆 부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재개발 예정지로 들어가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이란다. 다행스럽게도 새로 들어설 아파트 이름은 숭어리샘아파트라 할 예정이란 이야기도 들려 앞으로는 그를 통해 자취를 추억하게 할 듯하다.
지금의 서구청, 샘머리공원, 월평동 일대 아랫둔지미 지역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것은 수령 200년 가량의 늙은 느티나무였다. 개발 과정에서 한때 그것이나마 살려 보자고 거액을 들여 샘머리공원으로 이식했으나 그마저도 어느 새 소리도 없이 사라져 생물로서는 마지막 숨을 거둔 셈이다. 공원 한 쪽에 무덤처럼 솟은 둥근 자리가 바로 그 위치다. 일제시대는 이 부근을 행정리(杏亭里)란 이름을 붙였던 것을 보면 아마 큰 은행나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탄방동 주공아파트와 롯데백화점 옆의 삼사백년 느티나무 거목들도 역사를 같이 하는 증인들이다.
둔지미 느티와 은행나무뿐 아니라 둔지산 자락의 병락정, 남선공원 근처 모정도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거창신(愼)씨 문중의 여각과 효자 유천(惟天)의 비만 갈마공원으로 약간 옮겨 앉아 그래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이 일대는 거창신(愼)씨 가문의 집단 세거지였다). 둔지미 구릉 서편에는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과거 병락정이란 정자가 갈마초 아래 부근에 있어 현재도 병락정사거리 등 이름이 전한다. 이를 두고 찬 샘이 있어 병자의 병을 떨어지게 하여 病落亭이라 한다느니 하는 전설도 붙어 있다. 옛날 물과 바위, 나무가 어울린 하천변 전망 좋은 곳에 세워졌으니 모두 함께 즐긴다는 의미의 竝樂亭이 맞을 것 같다. 동쪽 현재 세이브존 지역은 모정(茅亭)이 자리했었다. 송시열, 송준길, 김경여, 권시, 이시직 등 소위 내로라하는 대전의 부유층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놀았다는 모정(茅亭)에 비해 병락정이 훨씬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지금에 이르러는 위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과거 행정리란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미뤄 은행나무 곁들인 정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와 더불어 주변 들을 배경으로 한 어느 부자가 살았다는 탄방동의 장자울, 서원말(도산서원마을), 문정촌(文亭村) 등의 이름들에서는 옹기장 등 둔지미 지역 서민들과는 대조적인 과거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남선공원 밑에는 숯굽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음을 탄방동 지명이 들려 준다.
둔지미라는 지명은 전국 곳곳의 큰 하천변에 산재해 있다. 단양 어상천 둔지미산도 그 중 하나다. 둔지미는 유독 큰 수난을 많이 겪은 이름이기도 하다. 특히 도시 주변의 것들이 그렇다. 서울 용산의 둔지미(용산 이태원 일대)가 그렇고, 대구 동구 둔산동 둔지미(대구국제공항 겸 공군비행장) 그리고 대전 둔지미(둔산) 들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한강, 금호강, 갑천 등 큰 하천이나 강변 둔치에 위치한 점, 일제강점기 이후 군사기지화의 수난을 당한 점, 그로 인해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타의에 의해 고향을 등지고 떠난다는 점 등이 공통적이다.
용산 둔지미(조선시대에는 屯之坊이 있었음)는 일제시대 경부선 개설과 1910년대 일본의 대륙진출기지로 삼은 탓에 지역과 더불어 주민들도 대거 소개돼 일찍이 지형은 물론 이름조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구둔지미는 1930년대 일제의 공군기지 건설지로 강제 수용돼 지형과 더불어 주민들도 대거 소개됐으나 다만 거기서 벗어난 일부 지역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나마 둔산동으로 명칭이 변경돼 둔지미란 이름은 아직까지는 나이 지긋한 대구사람들에게 구전으로만 전설처럼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조상들이 터를 다지고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대전 둔지미도 일제말(40년대 초) 비행장 건설과 6.25 후 국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위둔지미 대부분이 잠식됐으나 80년대 말까지는 이름과 지형이 그래도 살아 있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신시가지 개발의 희생물이 돼 이제는 서울처럼 이름도 지형도 모두 잃어버린 신세가 됐다. 다만 대구마냥 변형된 이름으로 겨우 그 자취만이 남았을 뿐이다. 둔산이란 한자이름 속에서 둔지미 정다운 이름을 자취니마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인지. 이것이 둔지미들의 공통된 운명이었다. 토박이들이 모두 떠나고 상전벽해가 된 지금은 둔산 이마트 북측 길가 둔지미 공원에 둔지미 사향비만 여기 살던 사람들의 이름 일부를 담은 채 서 있어 수구초심의 향수를 달래 줄 뿐이다.
숭어리샘과 관련 전설을 충남의 전설집(최문휘 편. 1986)에서 간추려 적는다.
옛날 어느 고을에서 쫓기는 몸이 돼 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와 숨어 사는 부부가 있었다. 배운 것이란 글 읽는 것뿐. 띠집을 짓고 살면서 쉬지 않고 땅을 파 일을 하고 고기를 잡으며 딸은 나물을 캐어 살면서 근근이 터를 잡았다. 이 근처에 나물을 캐러 오던 딸은 맑은 샘이 있어 잘 가꾸며 물을 마시고 그 물로 목욕을 했다. 몇 년 뒤 뙤약볕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 열이 끓고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시원한 물 한 그릇을 드리니 어느새 병은 씻은 듯 사라지고 딸은 그 후로 더욱 정성을 다해 샘을 돌보았다.
혼기를 넘긴 딸을 걱정하는 부모를 피해 그 날도 샘에 나와 바위틈에서 나는 맑은 물에 얼굴을 비췄다. 그 때 얼굴 너머로 어떤 남자가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도망치려는 여자를 안심시킨 그는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 떠나면서 “나는 지금 당신 집처럼 떠도는 운명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오겠노라”는 말을 남겼다.
몇 해가 지나 서른이 넘었던 어느 가을날 부모들은 하루 사이를 두고 한꺼번에 모두 죽었다. 장사를 치르고 홀로 남은 여인은 샘 근처에 살면서 조석으로 샘 가꾸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고 할 제 사립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옷을 바로 하고 나가 보니 지난 날 그 사람이었다. 그렇게 재회하여 두 사람은 부부가 돼 어디론가 떠나 잘 살았다고 한다.
전설은 대개 주인공이 안타깝게 죽는다든지 하는 식의 비극으로 마무리지어 듣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 전설은 좀 밋밋하고 싱겁긴 하다. 그러나 숭어리샘이 영험하고 좋은 샘이었음을 전하고자 한 의도로 전해 온 것 같다.
이런 배경 하에서 둔산이란 이름을 군사주둔과 관련지어 민간어원적으로 해석하려는 오류를 공공기관에서 발행한 책자에서조차 범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래서 屯之尾니 屯之美(味)니 심지어 芚芝美니 등으로 적는 일조차 벌어졌다. 둔지미는 다분히 의도성 짙은 일제시대 한자지명화 이전부터 있어온 것이란 점, 둔지미가 큰 강이나 하천변 둔치와 연관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토박이말 ‘둔치(강이나 하천변 두둑한 곳-우리말큰사전 : 한글학회)+뫼(산)→둔지미’, 그것을 한자어로 그릇 인식해서 붙인 일제시대 잔재를 안이하게 답습, 둔산(屯山)으로 명명한 것이다. 과거에 군사 주둔지였기에 그렇다고 해석하거나 한 술 더 떠 심지어 대둔산 줄기여서 그렇다고 하는 것은 말장난꾼들의 이야기로 들린다.
기와공장 부근에서 본 둔지미
1911년 지도 속 둔산
둔산의 군사기지들
1989년 둔산 지도(국립지리원)
대전비행장
80년대 말 개발 중의 둔산
2015 경성사거리
둔지미 유래비
첫댓글 둔지미 둔산에 대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