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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 라 (李 愛 羅) (1894. 1. 7~1921. 9. 4) … (선생은) 품성이 현숙 효순하여 범사에 관후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양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서기 1919년 3․1독립만세 때에 애국부인회를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평양, 공주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서울에서 일 헌병은 부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빼앗아 타살하고 부인을 체포 연행하였다. 그 후에 부군 리규갑씨가 독립운동을 하는 시베리아로 밀행하다가 함경북도 승가항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 순국하다(충남 아산 영인면 소재,「忠國殉義碑」비문 중에서). 우리는 36년간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한 몇몇 여성운동가들을 기억한다. 남성 못지않은 활동을 한 여성 운동가로서는 유관순 열사와 남자현 여사를 꼽을 수 있다. 남자현 여사(1872. 12. 7∼1933. 8. 22)는 여자의 몸으로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무찔렀고,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 까지도 독립만세를 절규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에 비해 정정화 여사(1900. 8. 3~1991. 11. 2)와 같이 직접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말없이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이 있었다. 물론 정정화 선생도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한국국민당․(중경)한국독립당․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김마리아(1891-1944)와 같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서 국내와 중국 上海에서 활동하다가 순국한 운동가도 있다. 이들 이외에도 손꼽을 수 있는 여성 운동가는 적지 않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성 독립 운동가의 수는 그다지 많은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렇다면 일제시기를 살았던 한국 여성들에게 조국의 독립이라는 과제는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인가. 결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 많은 여성들은 각자 자신들의 위치와 상황 속에서 독립을 위한 역할을 수행했기에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을 뿐이다. 독립운동가를 가족으로 둔 여성은 독립운동가 당사자와 마찬가지로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뿐만 아니라 생활의 대부분을 떠맡고, 아이의 양육을 홀로 감당했다. 여성의 역할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엄한 감시 속에서 남성들이 하기 힘든 연락책과 문서전달도 여성의 몫이었다. 그러한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이나, 자식을 잃는 고통도 경험했고, 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독립을 갈구하며 산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뛰어난 활동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성 운동가들은 그다지 많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이애라 선생도 남자현이나 유관순 여사와 같이 독립운동 전선에서 산화한 또 하나의 인물이지만 영성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더구나 이애라 선생은 약관 20대에 순국하였고, 더구나 이역 땅에서 운명하였으므로 남긴 자료는 더욱 더 소략하다. 선생은 1894년 1월 서울에서 완사후인 시중 이춘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애일라(李愛日羅), 이심숙으로도 불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이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던 중 독립운동가인 이규갑(李奎甲) 선생을 만나 20세에 결혼을 했다. 이규갑 선생(1888.11.5-1970.3.20)은 충남 아산출신으로서 한성사범학교와 신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목사로서 종교와 육영사업에 헌신하고, 독립운동가로서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이애라 선생은 결혼 이후에도 남편인 이규갑 선생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 교편생활을 계속했다. 선생은 공주 영명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1917년에 평양의 정의(正義)여학교로 전근하게 되었다. 이규갑 선생이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로 일을 하게 되면서 이애라 선생도 평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월부터 동지들의 연락이 있자 이규갑 선생은 직장을 그만두고 상경했다. 부인인 이애라 선생도 그 뒤를 따라 1남 2녀 중 젖먹이인 막내딸만 안고 서울에 올라와 운동을 뒷바라지 했다. 또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3.1독립운동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평양 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방이 되자 곧 바로 동지들과 합류하여 충청도와 수원지방 등을 다니며 해외에 나가있는 독립지사들을 후원할 모금운동을 하는 등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애라 선생은 어린 딸아이를 업고 아현동(阿峴洞) 너머 친정 형님 집으로 가던 도중에 일본 헌병을 맞닥트려 등에 업은 아기를 빼앗겼다. 이 아기는 백일이 갓 지난 상태였는데, 일본 헌병은 아기를 빼앗아 길에 내 동댕이를 쳐서 즉사케 하고 선생을 체포했다. 이애라 선생은 아기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피체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때 뒤에 물러 서 있던 유득신이 아기를 안았으나 애처롭게도 아기는 이미 목숨을 거두었고, 유득신은 아기의 시체를 거두어 아현성결교회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이 때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이규갑 선생이 상해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에 석방된다. 이규갑 선생이 1919년과 1920년대 초에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인 이애라 선생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 선생은 1919년에 남편인 이규갑 선생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선생은 남편인 이규갑 선생은 물론 한남수(韓南洙), 김사국(金思國), 홍면희(洪冕熹) 등과 비밀히 연락 회합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 소집을 위해 노력했다. 국민대회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919년 4월 23일에 서울에서 열린 집회이다. 3.1운동 직후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서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는데, 국민대회도 그러한 노력 가운데 일환이었다. 즉 ‘국민대회’의 절차를 밟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규갑, 한남수, 김사국, 홍면희 등 외에 신숙(申肅), 안상덕(安商悳), 이교헌(李敎憲), 윤이병(尹履炳), 윤용주(尹龍周), 최전구(崔銓九), 이용규(李容珪), 김규(金奎), 이민태(李敏台) 등 천도교, 유림 세력이 참가했다. 이들은 3월 1일 직후부터 비밀리에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러한 조직과 구성에는 이애라 선생의 희생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당시 이규갑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날부터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지하로 잠적하였으므로 모든 연락은 이애라 선생이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애라 선생은 홍면희, 김사국,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전구, 이용규, 김규, 이민태 등과 연락하여 비밀리에 이규갑 선생의 은신처에서 회의를 열 수 있게 했다. 이애라 선생의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에 힘입어 이규갑 선생은 4월 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개최된 회의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漢城)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다. 인천에서 열린 회의는 4월 23일에 열릴 국민대회의 개최를 위한 준비회의이자 일종의 국회의 임무를 대행한 자리였다. 이애라 선생이 투옥 중이던 1919년 4월 중순에 부군인 이규갑 선생은 망명을 한다. 당시 신변의 위험을 절감한 이규갑은 上海에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국외에 있는 동포들과 연락을 함으로써 국제적으로 활동을 함은 물론, 이후에는 만주, 시베리아로 가서 독립운동을 할 계획으로 국외 망명을 택한 것이다. 당시에는 이애라 선생이 투옥 중이었으므로 이규갑 선생의 망명길은 동대문 교회 유득신 권사가 도와주었다. 이규갑 선생은 유득신 권사의 도움으로 평안북도 용천까지 가서 뱃길로 러시아로 들어갔다. 이규갑 선생은 떠나기에 앞서 아내인 이애라 선생에게 국내에서 여성운동을 담당해줄 것을 부탁했다. 망명을 한 이규갑 선생은 서울독립단 본부 특파원으로 1919년 4월 10일에 上海에 도착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그 후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을 거쳐 의정원 청원위원이 되어 국채통칙(國債通則)과 공채발행조례(公債發行條例)를 통과시키는 등 의정원 활동에서 많은 성과를 냈다. 또한 상해한인청년단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화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출옥 이후 이애라 선생은 1920년에 수원(水原)·공주·아산(牙山) 등의 지방교회를 다니면서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모금운동을 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일을 했고, 서울에서는 서상숙과 윤득신, 이리에서는 정근선 등 교회의 유력한 여성들과 교류했다. 당시 국내에는 각지에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애라 선생은 바로 그러한 운동의 중심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지원하면서 그 산하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여성단체로서 서울 본부에는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李惠卿), 총무 황에스터[黃愛施德], 적십자부장 이정숙·윤진수(尹進遂), 결사부장(決死部長) 백신영(白信永)·이성완(李誠完) 등이 있었고, 서울·대구·이리·평양·원산 등에 지부를 두었다. 이리 애국부인회는 부인들을 각성시켜 국권과 인권의 회복을 목표로 했으며 국민된 의무를 다하고 공화국 국헌을 확장하려고 했다. 활동이 활발하던 1919년 11월 말경 한 간부의 배신으로 모두 체포되었다. 국내에서 애국부인회의 활발한 활약이 있자, 1919년 10월 13일 상해에서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조직되어, 임시정부를 보조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사상의 유입으로 활동이 미약해졌으나, 43년 충칭[重慶]에서 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갖고 7개항의 <남녀동권항유강령>을 선포했다. 평양의 애국부인회는 1919년 11월 평양의 여성 기독교인들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서 1919년 6월 평양 장로교(長老敎) 소속의 한영신(韓永信)과 평양 감리교(監理敎) 소속의 박승일(朴昇一)·이성실(李誠實)·손진실(孫眞實)·최신덕(崔信德) 등이 각각 부인회를 조직하여 배일사상(排日思想)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그 해 11월 평양 신양리(新陽里)에서 양파의 대표 각 6명이 모여 기존의 부인회를 서로 통합하여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평양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지부(支部)를 두었으며 특히 20년에 군자금 2400여 원을 2차에 걸쳐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 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많은 관련자가 체포되고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애라 선생이 공주로 내려가자 공주지역의 경찰은 이애라 선생을 연행하여 유치장에 가둬두고 고문을 하면서 이규갑 선생의 행방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연악한 여성의 몸으로 고문을 받으면서도 행방을 발설치 아니한 후 죽을 고비를 겨우 면하고 풀려 나와 아산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아산은 인가가 얼마 안 되는 마을이어서 집들이 적고 가옥의 구조가 사람을 숨겨둘 만큼 아늑한 구석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선생은 산으로 올라가서 가난한 동리사람들이 쪄다 주는 겨개떡 등 험궂은 음식으로 연명하면서 도피를 다니다가 산에서 상처를 입기도 했다. 날카로운 돌 뿌리에 오른손 장심이 뚫려 피범벅이 된 것을 싸매고 지내다가 시일이 많이 지난 뒤에 상경을 하여 병원에 가니 상처가 심해져서 으스러진 뼈를 추려내고 살로 합창을 시켜야할 정도였다. 선생은 여러 차례 겪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지육신에 상처가 심했으나, 고달픈 몸을 이끌고 생계를 위해 천안 양대여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그 덕분에 두 아이를 키우며 근근이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흘이 멀다 하고 형사들이 찾아와 남편을 찾아내라고 행패를 부리고, 걸핏하면 천안읍 경찰서로 연행을 하는 통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선생은 이러한 감시를 피하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시숙인 이규풍(李奎豊)이 거주하는 러시아로 망명할 결심을 한다. 이때가 1921년이었다. 선생은 두 아이를 데리고 야간도주를 하여 서울까지 온 후 다시 경원선 열차로 원산에 도착했다. 원산에서 선로를 이용해 함경북도 웅기(雄基)항에 다 달았으나 배에서 내리자마자 마중을 나온 일본 순사에게 이끌려 다시 피체되었다. 이애라 선생은 ‘요시찰’ 인물이었으므로 웅기 경찰서의 순사들이 이미 총독부 경무국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웅기 경찰서에서 순사들은 이애라 선생의 짐을 수색함은 물론, 고문을 하면서 이규갑 선생의 행방과 이애라 선생이 가려고 하는 망명지를 심문했다. 이미 여러 차례의 고문과 오랫동안의 투옥생활로 목숨이 경각에 달하게 된 선생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게 되자 행여 사망할 것을 걱정한 경찰은 의사를 불렀다. 경찰서에서 갑자기 숨이라도 끊어진다면 문제가 시끄러워질 것으로 생각되어 당황한 나머지 의사를 부른 것이다. 이 때 마침 이규풍의 아들이며 이애라 선생의 큰 조카가 되는 이민호(李敏鎬) 선생이 병원개업을 위해 허가를 받으러 경찰서에 왔다가 형사의 청으로 이애라 선생을 진찰하게 되었다 . 유치장에 들어온 조카는 의외의 상황에 놀랐으나 침착하게 서로가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진찰을 했다. 의사는 며칠간 왕진을 다닌 후 경찰에 “환자의 병세가 위독하여 유치장 안에서는 치료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에 경찰서장은 이애라 선생에게 조용한 사처를 정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때 경찰이 정해준 선생의 객주집은 병원과 경찰서에서 모두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의사는 하루 두 번씩 왕진을 했고, 간호부의 내왕도 빈번했다. 경찰은 “암만해도 생명을 구하기 힘들겠다”는 의사의 말을 믿고 도피할 우려가 없다고 생각하여 감시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의사인 조카는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서 비밀리에 선편을 주선하여 숙모인 이애라 선생과 사촌동생들을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톡으로 피신을 시켰다. 목적지에 도착한 선생은 먼저 아이들을 큰 아버지인 이규풍 선생에게 보내고 자신은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은 더 이상 목숨을 무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당시 부군인 이규갑 선생은 당시에 러시아 울락간에 창설한 한국 독립군 사관학교 교장으로 일본 마적단과 교전을 하는 등 무장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이민화와 지청천 등이 교관으로 있던 한국독립군 사관학교는 일본 마적단과 교전 끝에 서로 간에 많은 사상자를 낸 이후였다. 교전을 마친 후 이규갑 선생은 삼천리 길을 달려 형님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규갑 선생은 뜻밖에도 피골이 상접한 아내 이애라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년 만에 부군을 만난 이애라 선생은 겨우 며칠을 지낸 후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충남 아산시 명인면 아산리 280에는 이애라 선생 및 남편인 이규갑 선생, 박안라 여사(이규풍, 이규갑의 모친), 이규풍 장군, 오사라 여사(이규풍 장군의 부인), 이민호 의학박사(이규풍 장군의 장남)를 추모하는 충국순의비(忠國荀義碑)가 세워져서 이들 가족의 뜻을 기리고 있다. 이애라 선생의 시댁은 온 가족이 독립운동으로 헌신한 인물이었다. 가족 가운데, 이규갑 선생을 제외한 가족 전원이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에 순국한 보기 드문 집안이다. 이러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가족사는 당시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 독립투사를 배출했던 이화학당에서 수학하고 모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확립된 이애라 선생의 민족의식과 독립투쟁정신이 결혼 이후에도 뜻을 꺾지 않고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규풍과 이규갑 선생의 모친이 되는 박안라 여사는 형제를 모두 의병전선에 내 보내는 등 독립투사로 훈육함은 물론, 자신은 경기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지를 다니며 애국지사들을 격려하고, 이후에는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다가 생을 마쳤다. 이규풍 장군도 나라가 멸망하자 아우와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1908년에는 고종의 밀지를 가지고 노령으로 가서 의병을 이끌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후에는 중국 만주에 가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1931년에 국내외로 파견한 동지들이 일본경찰에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피를 토하고 분사했다. 이규풍 장군의 부인인 오사라 여사는 1919년 3.1 운동 이후에 시베리아에 가서 독립운동을 내조하다가 이규풍 장군이 순사하자 아들 이민호 박사를 데리고 중국 북경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던 중 1939년에 북경에서 순국했다. 이규풍 장군의 장남인 이민호 박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 인술사업에 종사하다가 3.1운동 이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 3.1운동이 일어나자 황해, 경기, 충청, 전라 등지에서 순회하며 만세운동을 지도하다가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평양에서 투옥된 후 만기출옥을 하자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활동을 전개한다. 부친의 사망 이후에는 중국의 북경으로 가서 지하공작활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피체되어 해방을 목전에 둔 1944년 3월 16일에 심한 고문 속에 순국했다. 이와 같은 가족 전체의 희생과 투쟁 속에 이애라 선생의 투쟁도 중심을 이루고 있다. 결혼 이후 줄곧 이어온 투옥과 고문, 그리고 일상적인 감시 속에서도 국민대회를 성사시키고 독립자금을 모금하며, 동지들에게 힘을 주었던 이애라 선생의 업적은 가족사에서나 민족사에서 두루 두루 빛을 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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