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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은 변안열(大隱 邊安㤠)의 소설 불굴가(不屈歌)
김용채
2. 태흐(Тахь)
심양 초입, 강물을 따라서 황톳빛으로 살찐 배를 드러내 놓고 강둑이 길게 누워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다. 그 위로 흙먼지 두 뭉치가 앞뒤를 다투면서 하나로 합쳐졌다가 나누어졌다가를 반복한다.
“쉬었다 가자.”
앞서가던 흙먼지가 속도를 줄인다.
“조금만 더 가서요.”
뒤따라오는 흙먼지도 속도를 줄여 보조를 맞춘다. 두 뭉치의 흙먼지 속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부터는 속도를 줄이세요. 돌밭 길이니까요.”
나이는 비슷해 보이는데 사용하는 말투가 서로 다르다. 앞 말에 탄 소녀는 낮춤말을 쓰는데 뒷말에 탄 소년은 존칭어를 쓴다.
“얘,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하랬잖아. 높임말은 듣기 싫다고 몇 번을 말했니?”
“알았어요, 공주님.”
“또 그러네, 공주님이라 부르지 말고 그냥 이름을 불러, 이름을. 말도 편하게 하고….”
“알았어. 부다시리.”
부다시리는 공주의 이름이다.
“그래, 그렇게 불러야지, 한 번 더 불러 봐.”
“부다시리.”
“잘하네, 호호호.”
“그러게, 하하하.”
“부다시리, 말 타는 실력이 많이 늘었네. 나 몰래 혼자서 연습이라도 했던 거야?”
“연습은, 무슨. 그것도 혼자서 … ?”
소녀는 원나라 공주 ‘보르지긴 부다시리(孛兒只斤 寶塔實里)’였고 소년은 심양후 변양(諒)의 둘째 아들 충가(忠可)였다. 충가는 열 살, 부다시리는 아홉 살인데, 어렸을 적부터 소꿉친구로 자라온 사이다.
“내친김에 마저 달려가자.”
“그래? 그러자. 자, 달려!”
둘은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돌멩이가 말발 굽에 채여 사방으로 튀고 있다. 넓게 펼쳐진 들판을 지나 가벼운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 되어 여름을 즐기고 있다. 그 숲의 발밑을 적시며 개울물이 흘러간다. 드디어 길이 끊기며 말을 타고 달릴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르자 멀리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온다. 폭포수 소리다. 폭포수는 제법 크고 깊은 웅덩이를 만들고 술래잡기하면서 빙빙 돌다가 무넘이를 타고 이내 자드락 밑으로 이내 사라진다. 그 물은 언제나 맑고 푸르며 사시사철 마르는 일이 없었다.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을 타고도 한참을 달려야 하는 곳이니까. 그들은 폭포가 만든 그 웅덩이를 선녀탕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온통 먼지투성이다. 땀과 흙먼지가 범벅이 되어 구정물이 온몸을 타고 내리고 옷은 소낙비를 맞은 것처럼, 흠뻑 젖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말도 마찬가지다. 사람이나 말이나 다 같이 가쁜 숨을 토해낸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리고 ‘고생했어.’하며, 말 엉덩이를 탁 친다. 마음대로 가서 쉬라는 신호였다. 말은 근처에서 주인이 부를 때까지 풀을 뜯게 될 것이다.
소년 소녀는 선녀탕으로 달려간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서 헹군 뒤 볕 바른 바위 위에 널어놓는다. 부끄럼을 탈법한 나이인데도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원시인이 된다. 부다시리가 먼저 선녀탕으로 뛰어든다. 충가는 말들이 홀랑 벗은 자기들의 나체를 훔쳐보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선녀탕으로 뛰어들 준비를 한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해?”
물속에 먼저 뛰어든 부다시리가 손짓을 하며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부다시리는 이제 갓 아홉 살이 되었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의 몸매가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한 살이 위인 충가도 점점 남자가 되어 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 그것도 세상에 태어나던 처음 모습 그대로, 밑바닥까지 훤히 비치는 선녀탕에 함께 들어가기가 망설여질 법도 할 터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그런 스스러움이 없어진 지 오래다. 그들은 지난해 여름부터 이 선녀탕에서 같이 멱을 감기 시작한 것이다.
“알았어, 지금 들어가.”
충가는 대답하면서도 금방 물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물고기처럼 헤엄치고 있는 부다시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여름 햇살이 선녀탕의 속살까지 꺼내 보려는 듯 미친 듯이 쏟아진다. 갈맷빛 물빛은 하늘보다 더 푸르고 유리알처럼 맑았다. 그 속에서 세상 모든 것을 다 잊고 헤엄치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들은 물고기였다. 마치 한 쌍의 산천어와도 같은….
“빨리 들어오라니까. 여긴 엄청 시원해.”
부다시리의 재촉이 연달아 쏟아진다.
“지금 가.”
충가도 물속으로 뛰어든다. 떨어지는 폭포 뒤쪽에서 부다시리는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드는 충가를 보았다. 충가가 물속으로 뛰어들면서 지른 소리는 폭포 소리에 묻히고 만다. 다만, 사타구니에서 웃자란 풋고추 하나가 불끈 일어선 채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덜렁거리는 것이 얼핏 눈 속으로 들어와 신비감을 준다. 부다시리는 숨이 가빠지는 것을 가볍게 느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건장하고 우람한 충가의 몸매, 그것은 분명히 여자라면 침을 흘릴 만도 할 사내의 알몸이었음에도, 상상의 날갯짓은 거기에서 멈춘다. 올해는 처음 보지만 작년만 해도 여러 번 보았다. 그저 사내아이들의 그것은 저렇게 생겼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충가가 웅덩이를 가로질러 폭포 쪽으로 헤엄쳐 갔다. 그러자 부다시리가 다시 물속으로 첨벙 뛰어든다. 둘은 물고기가 된다. 마주 보고 헤엄쳐 오던 둘의 어깨가 마주친다. 서로가, 서로를 와락 껴안는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껴안은 채 물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부다시리의 긴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위로 치솟으며 흩어진다. 편발을 풀고 들어온 충가의 머리카락도 물풀이 되어 떠올랐다. 머리카락은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수직으로 떨어지는 제기를 연상시킨다. 두 개의 제기였다. 제기는 할아버지의 고향 나라인 고려국에서 널리 즐기는 놀이 중의 하나라고 여러 번 들었다. 충가는 실제로 제기를 만들고 제기차기를 해본 경험도 있다. 둘은 다시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푸아.”
“푸아”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을 훔치면서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확 토해낸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튕긴다. 흩어지는 물방울 사이로 얼핏 무지개가 서린다. 선녀탕의 요정이 보내준 축하의 꽃다발인지도 모른다.
“부다시리, 너는 왜 이렇게 귀엽고 예뻐?”
“아이참, 왜 그래, 부끄럽게…. 충가, 너도 참 멋있어.”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더 껴안는다. 둘은 다시 유리알 같은 물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두 개의 몸뚱이가 보드라운 감촉을 느낀다. 충가의 고추가 부다시리의 옥문을 가볍게 스친다. 부다시리는 다시 숨결이 가빠왔다. 이것이 전율이라는 것인가 보다. 그들은 불에라도 데인 듯 반사적으로 서로를 확 밀어낸다. 부다시리의 귀밑 볼을 스치며 조금 전에 떴던 무지개가 급하게 사라진다.
“우리 잠시만 쉬자.”
부다시리는 폭포가 쏟아지는 물줄기 뒤쪽으로 헤엄쳐 간다. 충가도 그 뒤를 따라간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부분은 물속이 더욱 깊었다. 얼마나 깊은지는 모른다. 마치 두 사람이 상대방에 쏟고 있는 정령의 깊이를 알 수 없듯이…. 폭포수는 그 물 위에다가 여러 개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작지만 무겁게 떨어진다. 마치 두 소년 소녀의 원시림 같은 사랑이 작은 나이테를 하나씩 보태면서 서로의 가슴을 적셔가는 것처럼…. 옛날 어느 명창이 득음의 장소로 즐겨 찾았을 법도 한 곳이다. 지금 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오선지를 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참 오랜만이지?”
충가가 말했다.
“그래, 참 오랜만이야.”
부다시리도 맞장구를 친다. 그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의 밀어는 모조리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낮말을 듣는 새도, 밤말을 듣는 쥐도 없었다.
“나갈까?”
둘은 웅덩이 밖으로 나왔다. 부다시리는 작은 어깨를 두 팔로 감싸고도 추워서 가볍게 떤다. 충가는 부다시리를 다시 꼭 껴안아 준다. 벌거벗은 채로다. 따뜻해진다. 퍼렇게 젖은 입술도 북을 치고 있는 가슴까지도…
“옷이 다 말랐네.”
햇볕이 젖은 옷을 바짝 말려 놓았다. 참 고마운 햇볕이다. 해가 두어 발이나 서쪽으로 더 기울었다. 옷을 챙겨 입은 두 사람은 다시 말 잘 타는 소년 소녀가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다시리와 충가는 타고 왔던 말을 찾기 시작한다. 연못가에서 싱싱한 풀을 뜯으면서 한창 배를 불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는데, 저만치에서 덤불에 가려져 있는 말을 발견했다. ‘휘이익!’하고 휘파람을 불면 말이 금방 달려올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충가가 막 휘파람을 불려는 순간이었다. 부다시리가 충가의 팔을 급하게 잡아당기며 말이 있는 쪽을 가리킨다.
“잠깐 기다려 봐, 뭔가 이상해.”
충가도 휘파람을 불려다가 멈추고 말이 있는 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느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둘은 말이 있는 쪽으로 발소리를 죽이면서 다가갔다. 아뿔싸, 그들은 사랑을 나누는 중, 이었다. 말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한동안 서로를 애무하더니 드디어 큰일을 치른다. ‘히히힝’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를 내지르며 절정의 순간을 맞는다. 사랑을 나누고 난 순간의 종착점, 그들이 정상 상태를 회복하려면 시간이 약간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쉴 시간이 필요할 거야. 왠지는 모르지만, 마부들이 하는 말을 들어서 나는 알아.”
충가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나도, 알아.”
부다시리도 지지 않고 말했다. 두 소년 소녀는 괜히 남의 일에 신이 나서 떠든다. 부다시리와 충가의 귀밑 볼에 석양을 수 놓는 햇빛이 스쳐 지나간다. 그 뒤를 따라 드디어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다. 벌써 한 식경이나 지난 것 같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어 말을 불렀다.
“피곤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를 집까지 다시 태워다 줘야겠어. 미안해.”
충가가 말갈기를 손으로 빗겨 주며 말했다.
“그 대신 집에 가면 맛 있는 콩을 듬뿍 먹여줄게, 잘 부탁해.”
“부러워하지 마, 너도 맛있는 거 많이 줄 테니까.”
부다시리도 지지 않고 맞장구를 친다.
둘은 마치 자기들이 몰래 사랑을 나누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약간 붉어졌지만, 정작 뜨거운 사랑을 나눈 말들은 큰 눈을 껌뻑거리기만 할 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란 조금도 없었다. 참, 얼굴 두꺼운 녀석들이다.
두 사람은 숲속을 빠져나왔다. 구릉 하나만 넘으면 강줄기를 따라 둑길이 시작된다.
“잠깐 쉬었다 갈래?”
“좋은 생각이야. 지금부터는 평탄한 길이니까 …. 말도 큰일을 치르고 났으니, 몸에 무리가 가서는 안 될 테고….”
“얘, 너는 어쩌면 그렇게 어른스러운 생각만 하니?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은 심성이 착하다는 증거일 거야. 너는 이다음에 꼭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
부다시리로부터 때아닌 칭찬이 쏟아진다. 충가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부다시리의 칭찬에 충가는 더욱 신이 났다.
“부다시리.”
“응?”
“저쪽 하늘 끝 좀 봐. 온통 무지갯빛이야.”
“그러네, 장작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아. 하늘 끝이 다 타버리고 말겠어. 굉장히 아름답지?”
“그래, 굉장히 아름다워. 부다시리.”
“응?”
“저렇게 타오르는 하늘을 보고 느껴지는 것 없어?”
“무슨 느낌?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기는 해. 저렇게 타오르는 하늘을 흠뻑 마셔 보고 싶어지는 기분도 들고 ….”
“저것은 하루의 일을 마치는 태양이 자기에게 남은 그날 치 마지막 빛을 온통 불태우고 있는 거야. 마치, 우리 인생이 살아온, 멀고 고달픈 길 끄트머리에서,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위해, 마지막 남은 자신의 정열을 불태워 버리는 것과도 같은 거야.”
“그거 아주 근사한 말이네? 그런 말을 어디에서 배웠어? 나도 배워보고 싶어.”
“그건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야. 자신의 가슴 속에서 저절로 일어나고 느껴지는 것이야. 나도, 저 태양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 하늘을 후회 없이 불태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 저 찬란한 태양의 마지막 빛을 봐,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답니? 그래서 어떤 야심 찬 젊은이는 자신의 호를 홍운(紅雲)이라고 짓기도 한다더라.”
“……”
부다시리는 할 말을 잃는다. 충가는 말만 잘 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도 자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자주 느껴 오는 터였다.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이 심양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뭐라고 부르는데?”
“석양이 아름다운 땅이라고 부른대.”
그때 마침 서산머리에서 낙조가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도 아름다운 석양이네, 아름답게 불타는 노을에, 아름다운 사람 곁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말이야.”
부다시리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가는 것 같다. 저 석양빛보다도 더 예쁘다고 생각하며, 충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가자, 너무 늦었어.”
“내 정신 좀 봐, 까맣게 정신 줄을 놓고 있었네. 마치 동화책 속으로 들어온 것만 같애.”
부다시리도 일어나면서 무척 깊은 감흥에 젖은 목소리로 말을 받는다. 두 사람이 말을 달려 궁궐 앞에 이르렀을 때는 보름달이 두어 뼘이나 오른 뒤였다.
“혼자 가실 수 있겠습니까, 공주님?”
충가는 궁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처지다.
“응, 혼자 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병사들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도 돼. 재미있었어, 잘 가.”
“네, 공주님. 편한 밤 보내세요.”
충가는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난 뒤 집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면서 박차를 가한다. 말발굽 소리가 아련한 여운을 남기며 달빛 속으로 사라진다. 부다시리의 눈길이 그 뒤를 쫓아간다. 충가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따스하고 달콤한 부다시리의 체온이 남아 있다. 가슴은 작은 양철북을 쳐대고 있었다. 아마 부다시리도 그랬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마친 충가는 피로감을 느낀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잠 속으로 빠져드는데, 아버지의 호출이 떨어졌다. 뻔한 일이었고, 예견된 일이라서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지는 참에 호출을 받고 나니 살짝 짜증이 났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오늘,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너무 늦었구나. 어찌 된 일이냐?”
충가는 사실대로 말씀을 드렸다. 어차피 다 알면서 묻는 것일 터였으니 달리 구차하게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딱히 야단맞을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신을 단련하고 공주님을 모시는 일은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공주님은 어린 여자의 몸으로 무술을 익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직은 서툴 것이다. 그리고 도심과 너무 멀리 떨어진 곳까지 공주님을 모시고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못된 도둑이라도 만난다면 너 혼자서 어떻게 할 셈이었느냐? 가령 공주님이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고? 제일 경계할 일은 너무 늦게 귀가하는 일이다. 대궐에서는 얼마나, 걱정을 했을 것이냐? 그로 인하여 아랫것들이 받아야 하는 고초는 또 얼마나 컸겠느냐?”
아버지 변양의 길고 긴 훈시였다. 틀린 말씀은 아니다. 충가도 그런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떤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공주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벌을 내리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제 겨우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직은 어린애라고 해야 할 나이인데도, 용서를 빌지는 않는다.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래, 네가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사실대로 말했고,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 있으니 다행이다. 어찌 일부러야 그랬겠느냐. 그러나 앞으로는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서 깊이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면 좋겠구나.”
늘 그렇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이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진심으로 반성하며 고치려는 의지를 무척 높이 평가하는 분이다. 역시 한 고을을 다스릴 만한 큰 그릇이었다.
“그래, 공주님은 잘 모셨겠지? 혹시 예에 벗어나는 일은 없었느냐?”
아버지는 크게 걱정되는 일이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확인한다. 충가는 가슴이 덜컹했다. 설마하니 내가 공주님과 미역을 같이 감고 존칭어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지? 그러나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까지도 곧이곧대로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제가 크게 예에 벗어난 행동을 한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점은 염려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그래야 하고말고. 그러나 항상 언행을 삼가고 예에 어긋남이 없는지 조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은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는 더욱 그렇다.”
할아버지께서는 고려국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전쟁통에 심양으로 건너와 천호후를 거쳐 심양후까지 지내셨다. 그 뒤를 이어 아버지도 심양후가 되었다. 그러나 몽골족이 아닌 소수 이민족의 후손이라는 점 때문에 주위 사람, 특히 몽골족의 매서운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궁궐에는 고려국에서 조공으로 진상되었거나 인질로 잡혀 온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들이 어떠한 대우를 받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그들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얼마나 매서운지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고려국의 후예라는 것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되며, 고국을 위하여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늘 힘주어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무예를 익히는 일과 글을 익히는 일에 있어 어느 쪽으로든 너무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할아버님이나 나는 무예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마는 글을 익혀 선현의 가르침을 받들어야만 자신의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있는 거란다. 요즘 너를 보면 무예 쪽으로 많이 기우는 것 같아서 좀 걱정이 되는구나. 글을 잘 익혀야, 병서를 잘 보아 더 훌륭한 장수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운 심성을 기를 수가 있단다. 내 마음을 곱게 닦은 다음에 무예를 잘 익혀야 나와 내 이웃을 더욱더 잘 지킬 수 있고 심신이 건강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피곤할 테니 이만 가서 쉬어라.”
아버지의 훈시는 의외로 간단히 끝났다. 예전 같으면 변 씨 가족의 내력을 처음부터 아버지 대까지 장황하게 죽 흩어 내렸을 것이다. 아니 충가를 포함한 변씨 가문의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을 남김없이 일러주고 나서야 말씀을 끝냈을 터였다. 아버지께서 몸이라도 편찮으신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 오늘은 충가 자신의 몸이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하였다. 딱히 몸을 많이 쓰지도 않았는데, 종일토록 몽롱해진 정신이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분은 또 왜 이리 좋단 말인가? 공주님의 얼굴이 눈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사이 충가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활은 언제부터 쏘셨습니까? 공주님.”
“올봄부터.”
충가(忠可)가 공주를 활터에서 만나기는 처음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간질인다. 그러나, 아직도 여름이 다 지나가지 않았는지 한낮이면 조금만 움직여도 몸에 땀이 밴다. 공주는 사내 복장을 하고 왔다. 활동이 편하기도 하겠지만 천성인지 여간해서는 여복 차림을 보여주지 않는다.
“올봄부터라면, 지금쯤 활에 살을 메울 줄은 알겠네요.”
“에게, 겨우 활에 살을 메울 정도로밖에 안 보여?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
“기분이 언짢으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야, 그냥 해본 소리야. 실력을 보여줄게 …. 잘 봐.”
공주는 사대(射臺)에서 시위에 살을 메워 힘껏 잡아당겼다가 놓는다. 화살은 오십 보 앞에 놓인 관혁(貫革)의 가운데 동그라미 부분을 조금 비켜서 박힌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충가가 박수를 친다.
“참 잘했습니다, 공주님.”
자존심 강한 공주는 만족한 눈치가 아니다. 정중앙을 꿰뚫지 못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더욱이 겨우 오십 보 앞에다 세운 관혁을 쏜 것이 아닌가. 화살이 관혁에 꽂히는 힘도 그렇다. 살촉 끄트머리가 살짝 박혀서 겨우 매달려 있을 정도다.
“잘하긴…, 한 번 더 쏠 테야, 기다려.”
공주의 고집은 꺾이지 않을 터이다. 다시 화살 한 대가 날아간다. 역시 관혁의 한가운데를 맞추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람 가르는 소리는 날카롭다. 겨우 몇 달 익힌 솜씨치고는 놀라운 성과다. 충가는 활쏘기를 삼 년째 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제 겨우 자세가 잡혀가고 있을 뿐이다. 관혁도 주로 일백 보 지점에다 설치한다. 이백 보 삼백 보…,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본 공주의 활 솜씨는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공주님, 빈말이 아닙니다. 대단한 실력입니다. 조금만 더 연마하시면 눈부신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 설마 나를 놀리는 것은 아니겠지?”
“놀리다니요? 그럴 리가요.”
“이번에는 충가가 쏴 봐.”
충가는 사대에서 자세를 취한다. 관혁은 일백 보 지점에 세우게 했다. 화살은 정확하게 관혁의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이번에는 공주가 깡충 뛰면서 박수를 친다.
“충가, 아주 멋진 사나이야. 부러운데, 잘했어, 아주.”
한 살이 많지만 건장하고 늠름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충가가 오늘따라 더 멋있어 보인다.
“그 활 쏘는 솜씨, 나도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자존심 강한 공주지만 결과에 승복할 줄 아는 깔끔한 성격을 가졌다. 신분이 공주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쉽게 갖출 수 없는 덕목이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로서는 큰 영광이지요, 공주님.”
충가는 공주에게 짧은 지식과 별로 자랑할 것도 없는 솜씨지만, 예를 갖추어 선생의 자리에 선다. 이왕에 사대에 섰으니까, 활쏘기의 실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이전에 수련한 것을 되짚어 본다는 생각으로 배우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분을 다치는 일이 있으면 즉시 말씀해 주십시오.”
“알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공주라고 사정 봐주지도 말고 혹독하게 가르쳐 줘, 화를 내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스승님으로 정중히 모실게”
공주는 외눈을 찡긋하면서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짓는다. 충가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런 공주에게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추라고 말한다.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는 것이 웃음을 더욱더 자아내게 한다. 충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르치는 일에 열중한다. 활쏘기의 기본기를 설명한다. 그 밖에도, 활시위에 힘이 너무 들어가면 관혁의 중앙을 정확하게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 화살을 시위에서 놓을 때 활시위가 뺨을 치거나 귀를 치는 것은 턱을 너무 들어 올린 탓이라는 것 등등 소소한 기술까지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어린 선생과 같은 또래의 학생이 가르치고 배워가는 모습,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난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시지요, 공주님.”
“좀 더해도 되는데…. 선생님이 피곤한 거야? 그러면 언제 또 배워?”
“제가 특별히 가르쳐 드릴 것은 이제 더 없습니다. 다음부터는 같이 연습하고 익히면서 하나씩 스스로 깨우쳐 나가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말입니다. 저는 공주님과 같이 무예를 익히고 또 학문도 토론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습니다. 외람되다고 꾸짖지 마시고 허락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공주님.”
“그래, 그렇게 하자. 오늘부터는 다음 수련할 날짜를 미리 잡자. 그런데 오늘은 이게 끝이야?”
공주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충가는 활에 대한 몇 가지 토막상식을 더 말해 준다.
“공주님이 마술과 궁술을 익히는 것은 제가 직접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마는 검술을 익히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 물론 검술도 병행하여 익히고 계시겠지만 한번 볼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너무 무례한 청을 올렸습니까? 그렇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니야, 무례는 무슨…,”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공주가 충가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이 말한다.
“내가 예의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했지? 자꾸 그러면 삐질 테다. 조심해, 알았지?”
그리고는 다시 큰 소리로 자신의 칼 쓰는 솜씨를 언제든지 보여주겠다고 흔쾌히 허락한다.
“사두(射頭)는 이제 물러가도 좋소. 나는 저녁 바람이나 좀 더 쐬다가 갈 것이니, 먼저 돌아가시오.”
“주위를 물리쳐도 괜찮겠습니까? 끝까지 잘 모시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알고 있소. 걱정하지 마시오. 하문하시거든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간다고 말씀드려 주시오. 사두도 걱정하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 여기 든든한 호위무사가 떡 버티고 있지 않소.”
공주는 사두와 그 부하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충가와 단둘이 남는다.
“충가, 이제 우리 둘뿐이야.”
“그렇네요, 공주님.”
“우리 둘뿐이라니까, 왜 그렇게 둔해? 말 편하게 해.”
“아, 네. 그렇지만…. 제가 불편해서요.”
“불편하긴, 뭐가 불편해. 아무도 없는데 ….”
두 사람은 편한 말투를 쓴다. 그리고 기울어 가는 저녁 해를 가슴으로 안으면서 나란히 선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그것은 젊은 피를 끓어 오르게 한다. 넓고 큰 날개를 활짝 펼치고 지평선 너머 저쪽까지 훨훨 날아 보고 싶게 한다. 그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한 쌍의 백조, 충가와 부다시리이다. 공주라는 신분도 무거운 갑옷도 다 벗어 던져버리고 저 태양을 따라가서 밤이 오지 않는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어서 한 쌍의 백조가 되어 살고 싶다.
“부다시리.”
“응?”
“너는 가고 싶은 곳 없어?”
“가고 싶은 곳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가고 싶은 곳이 있어. 단 한 번만이라도 꼭.”
“그게 어딘데?”
“여기서 동쪽으로 가다 보면, 고려국이라는 나라가 있데. 그곳이 우리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인데, 할아버지의 고향 추억담은 전설처럼 아름답고 신비했어. 태양이 떠오르는 나라라고 했어.”
“그랬구나….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네.”
“고려국 사람들은 우리랑 많이 닮았데. 친형제처럼 말이야. 그러나 두 나라는 여러 번 싸움질도 했다는데 싸움에서 이긴 원나라가 전리품도 많이 챙겼다는구먼. 귀한 물품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인질로 잡아 왔데. 우리 할아버지도 그때 고려국에서 원나라도 넘어왔던 거래. 물론 잡혀 온 것은 아니고 …. 궁궐 안에는 지금도 고려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던데, 너는 몰랐니?”
“그랬데?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 이모랑 또 다른 선조 할머니들이 고려국으로 시집 간 사람이 여럿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 그래서 두 나라는 친척 간이라고도 했어.”
“너도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고려국은 원나라의 사위 나라가 되고, 고려국 왕자들은 원나라에 외갓집이 있어서 어렸을 때는 원나라에서 자라면서 공부도 했단다. 그리고는 고려국 국왕이 되어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한 뒤 고국으로 돌아갔고…, 지금도 고려국 왕자 한 분이 볼모로 와 있는 것 같던데, 우리 또래라지 아마…. 오신 지가 벌써 몇 해가 지났다던데 …. 너는 궁궐에서 사니까 한 번쯤은 만나보았을 거 아니야?”
“난 아직 못 봤어. 궁궐에서 나는 항상 궁녀들에게 둘러싸여서 지내는걸. 가족 말고 만나는 남자는 딱 한 사람이야. 바로 너지. 그것도 내가 무술을 좋아하니까 너하고 친구처럼 지내면서 무예를 닦으라는 뜻이래. 나는 숫제 갇혀 사는 새라니까.”
“그랬구나, 참 답답하겠다. 앞으로 자주 만나자. 함께 무술을 익히고 학문 이야기도 나누다 보면 덜 답답할 거야.”
“그래야겠어. 그런데 고려국은 무척 아름다운 나라인가 봐, 원나라 공주가 시집을 가고 싶어 할 만큼 살기 좋은 나라 ….”
“그런가 봐, 나도 잘 몰라. 그저 할아버지께서 하는 이야기를 조금씩 들었던 것이 전부야.”
“네 말을 듣고 보니까 나도 한번 가 보고 싶어지는걸. 네가 간다면 나도 따라갈래. 안될까?”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지, 어떻게 갈 수 있겠어? 참, 너는 원나라 공주니까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네가 고려국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나를 꼭 데려가 주면 좋겠어. 미리 부탁할게.”
“내가 고려국으로 시집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나는 왕비가 되겠네. 호호.”
“그러게, 그때는 부다시리를 만나기가 무척 어렵게 되겠지? 아 싫다. 너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어. 너를 못 보는 건 싫다, 정말 싫어.”
“왜 그래? 내가 금방이라도 고려국으로 시집이라도 가는 것 같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미리 실망하지 마.”
“그래도 지금 약속해 줘, 네가 고려국으로 가게 되면 꼭 데려가겠다고 말이야.”
“그래, 알았어. 꼭 데리고 갈게.”
우연히도 둘 사이에 하나의 밀약이 성립된다. 비록 문서로 작성된 것은 아니지만 문서보다도 더 미더운 것은 두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대궐에서 기다릴 것이다. 지난번에도 늦게 돌아와서 걱정을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충가는 그날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공주님을 너무 늦게까지 잡아 두지 말라는 말씀을. 그리고 만일의 사고에 항상 대비해야 하며 그러한 빌미는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부다시리. 이제 돌아가자.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어.”
충가가 엉덩이를 털면서 먼저 일어선다.
“벌써 이렇게 됐나? 그래 가자. 서둘러야겠다.”
충가가 손을 내민다. 부다시리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선다. 한 사람이 내민 손을 또 한 사람이 잡고 일어선다.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 그림이 언제까지 심양이라는 큰 집의 대청마루에 덩실, 걸려 있게 될까? 내일 일을 알 수 없듯이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인 것이다. 떨어지는 태양이 마지막 그림 한 폭을 하늘에 그리고 있었다. 역시 석양이 아름다운 땅, 심양이었다.
여름의 자투리를 소금 땀을 흘리며 보내고, 단풍이 한창 무르익을 때까지, 두 사람은 창술과 검술 궁술 마술을 고루 익히고 백병전을 대비한 기술도 터득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이제, 보통 사람들이 연마하고 있는 무예는 모두 섭렵한 것 같애. 그런데 여태까지 우리가 익혔던 무예는 예외 없이 말이나 무기가 있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들이었지. 그런데 무예는 왜 배우고 익히는 줄 알아?”
무예를 닦을 때는 충가가 주로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 가을이 한창 짙어가는 어느 날, 무예를 익히다가 잠깐 쉬는 사이에 충가가 부다시리에게 화두를 던진다.
“무예를 왜 배우고 익히느냐고? 그거야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지. 위험할 때 자기 몸도 지키고, 남도 도와줄 수 있고 또….”
부다시리가 학생다운 태도로 대답한다.
“또, 뭐야?”
… 너와 함께 배우는 재미도 있으니까’.… 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꾹 참는다.
“재미있으니까.”
무예가 재미있다는 것은 부다시리가 징기스칸의 후손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부다시리가 충가와 함께 무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점이 더 컸을 것이리라.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런데 싸울 때마다 항상 무기가 옆에 있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아.”
… 내가 네 곁에 없을 때도 있을 거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충가도 꾹 참는다.
“그때는 별수 없이 맨몸으로 싸워야겠지?”
“그야, 그렇지.”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우리는 평소에 체력을 길러야 하는 거야. 그리고 맨손으로 싸우는 특별한 기술이 있으면 더욱 좋고….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 수박(手搏)이라는 맨손으로 하는 싸움이 있었어. 그런 경기를 벌이는 대회도 있는데 그것을 수박희(手搏戱)라고 했어.”
“어머, 그런 것도 있어? 참, 재밌겠다. 그래, 그 수박희라는 것은 뭐야?”
부다시리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면서 묻는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수박은 맨손으로 승부를 가리는 무예지. 수박희는 그 수박을 놀이로 삼는 것이고.”
충가는 수박희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한다.
“수박희는 고구려에 전해졌고, 그 뒤를 이은 고려국에까지 계승되고 있어.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나에게도 몇 가지 기술을 가르쳐 주셨지. 그러나 아직, 까지는 무예로 널리 공인, 받지 못하고 있어. 그러나 호신에 아주 긴요하게 쓰일 수 있는 기술임은 분명해. 할아버지 나라에서는 지금도 수박희가 열리고 있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알고 있겠네. 어떻게 하는 거야? 나도 배워보고 싶어. 수박희를 하는 방법은?”
“하는 방법은 실기를 통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어. 서로 마주 서서 붙들고 하는 싸움이야.”
“나도 가르쳐 줘.”
“내가?”
“그럼, 너지 누구겠어?”
“예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을 텐데….”
“알았어, 그 예라는 것이 도대체 뭣이길래 이렇게 거추장스러워. 내가 다 이해할게. 그러면 됐지?”
“그렇지만…. 나는 썩 내키지 않는데….”
“내키지 않는다고? 그럼 내가 명령을 한다. 당장 가르쳐 줘, 어서!”
“그래,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거야. 힘들고 거친 운동이거든. 언제부터 시작할까?”
“당장”
“그럼, 내일부터다. 장소는 잘 찾아보자. 사람들 눈에 띄면 내가 곤란해져.”
수박희는 굉장히 거친 싸움이다. 육체적인 힘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기술이 따라야 한다. 건장한 남자에게도 벅찬 운동이다.
구름장이 바다처럼 푸른 하늘에 수없이 둥둥 떠 있다. 구름 색깔이 엷은 것으로 보아 금방 비가 쏟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수박희를 하기에 날씨는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바람까지 살랑거리고 있다.
“일찍 왔네. 부다시리. 용케도 잘 빠져나왔구나. 뒤따라온 사람은 없겠지?”
“몰라, 없을 거야. 점심을 먹자마자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왔거든.”
두 소년 소녀는 말을 몰았다. 여름 어느 날 달렸던 강둑을 따라 숲이 우거진 그곳으로 길을 잡는다. 그때 말이 사랑을 나누던 근처에 넓고 평평한 풀밭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폭포수 소리도 다시 듣고 싶었고 진초록 물빛도 보고 싶었다.
“여기야. 멈춰.”
말을 풀어 놓는다. 예전처럼 사랑을 나누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보고 저들은 저들의 일을 보면 그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때 찾아 헤매는 일이나 없으면 그만이다.
“부다시리, 이 옷으로 갈아입어.”
“그게 무슨 옷이야? 지금 입은 옷은 어쩌고?”
“이건 내 누이동생의 무예복이야. 입고 있는 옷은 벗어서 잘 개켜 놓아둬, 수박희를 마치고 다시 갈아입으면 되니까.”
“너는? 네 것은 없어?”
“나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바로 내 무예복이야. 걱정 안 해도 돼.”
충가와 부다시리는 수박희를 가르치고 배우기 시작한다. 부다시리의 무예 재능은 타고난 것, 같았다. 기술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익히는 속도가 남다르다.
“잘했어, 내가 깜짝 놀랄 정도야. 조금만 더 연습하면 내가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은데….”
기본동작을 익히는 데 불과 두어 식경 걸린 것 같다. 그들은 잠시 땀을 식힌다. 구름이 끼어 있어서 햇살은 뜨겁지 않았지만, 수박희가 워낙 거칠고 힘을 많이 쓰는 무예라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옷은 흥건하게 젖고 말았다.
“기본동작은 모두 실습을 해본 거야. 그러나 이것은 수박희라는 놀이를 하는 규칙이고 가장 기본이 되는 기술일 뿐이야. 실전에 들어가면 문자 그대로 백병전이 될 텐데, 문제는 이 백병전에서 이기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점이야.”
충가는 마른침을 삼켜 가면서 설명에 열을 올린다. 부다시리의 눈빛은 점점 더 초롱초롱해진다. 설명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 모두 진지해진다.
“그래서?“
”그러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놀이를 위한 규칙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야. 중요한 것은 그 기본동작을 잘 익혀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순간적으로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기술을 실전에 응용할 때는 꼭 기본기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어. 목표는 오직 승리, 즉 이기는 데 있으니까. 때로는 잔인해질 필요도 있는 거야. 알았지?”
“아유, 뭐가 뭔지 모르겠어. 머리만 어지러울 뿐이야. 그래도 구미가 당기는데.”
“알았어, 오늘은 기본기 훈련은 그만하고, 좀 무리가 가기는 하겠지만, 지금 내가 한 말을 잘 새기면서 실전을 해보면 어떻겠어?”
“실전? 어떻게?”
“간단해, 너와 내가 무기 없이 맨몸으로 싸움을 벌인다는 거야.”
“좋아, 한번 해보자. 나도 악착같이 해낼 테니까.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아라.”
부다시리는 전의를 불태우면서 실전에 임할 자세를 잡는다.
나무들이 이제 막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넓은 잎사귀를 깃발 삼아 흔들면서 마침 불어오는 바람결에 서로의 몸을 맡기고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자, 덤벼!”
“간다!”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부다시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덤벼든다. 충가의 옷을 잡아채며 쓰러뜨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충가는 주로 방어만 한다. 그러다가 부다시리에게 조그마한 틈새라도 생기면 전광석화와 같이 달려들어 풀밭에다 메어꽂는다. 부다시리는 점점 약이 오른다. 담배 한 대를 피울 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두 사람은 첫판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부다시리, 오늘은 그만하자.”
충가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연습을 마칠 것을 제안한다.
“그만하자고? 어림없는 소리, 오늘 꼭 결판을 내고 말 거야. 자,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는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러나 그들은 호적수가 아니었다. 몇 번 메치기를 당하자 부다시리는 죽을 둥 살 둥 덤벼든다. 어쩌다가 충가가 보기 좋게 나둥그러진다. 부다시리가 충가의 다리 허벅지 부분을 뒤에서 껑충 뛰어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사정없이 밟아 버린 것이다. 충가는 정신을 못 차리고 몇 바퀴를 떼굴떼굴 굴렀다. 사내대장부의 체면이 있지, 이대로 두 손을 들 수는 없다. 다시 두 사람은 성난 쌈닭이 되어 한동안 밀고 당기고 메어치고 뒹굴었다. 충가는 잠시도 틈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작은 틈만 보여도 큰 사고를 치고 말 것만 같다. 부다시리는 잔뜩 약이 올라 있다.
충가도 온몸의 힘을 다 쏟아낸다. 부다시리도 온 힘을 다 동원한다. 충가의 저고리 소매 부분이 찢어진다. 그러나 부다시리는 도무지 놓아 줄 생각을 않는다. 사생결단이다. 충가도 부다시리의 저고리 가슴께를 용케 움켜잡았다. 이때다 싶은 생각이 들자 본능적으로 낚아채어 땅바닥에 냅다 메어꽂는다. 그러나 부다시리는 땅에 내려꽂히면서도 충가의 소매를 놓지 않는다. 충가는 다시 한번 부다시리를 메어꽂을 셈으로 힘껏 낚아채어 올렸다. 그때 찌익하고 요란한 파열음 두 개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충가의 옷소매가 드디어 쫙 찢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상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다시리의 옷섶 부분이 뜯어져 가슴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란다. 토끼 눈을 하고 서로를 바라본다. 충가는 뜯어진 부다시리의 옷섭을 재빨리 수습하여 가슴을 가려 준다. 자신의 옷소매가 찢어진 것은 개의치 않는다. 부다시리도 엉겁결에 가슴을 가린다.
“미안해. 부다시리.”
몹시 당황한 목소리다.
“……”
“놀랐지?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알지?”
충가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한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미안하긴…, 내가 미안하지. 내가 너무 억척스레 덤벼들어 애먹었을 거야.”
“그래, 단단히 혼이 났는걸. 그러나, 부다시리의 그 정신은 아주 좋다고 칭찬해 주고 싶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지켜낼 수 있어야 해. 정말 잘했어.”
“고마워, 나는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몹시 궁금했어. 그리고, 화가 났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고…. ”
부다시리는 충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의 정적, 그리고 깨끗함. 흩어진 구름 조각을 쓸어 내면 갈맷빛으로 더욱더 높아질 것만 같은 하늘, 그래서 충가는 가을 하늘이 좋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