贊成公表石陰 記
公諱諱柱天, 字叔勳, 系出安東豐山縣. 在麗朝有諱之慶, 國學直學. 侃都僉議舍人. 侑密直使. 演寶文閣大提學. 龜中郎將. 俶左軍司正. 繼宗司圃別提, 贈左通禮. 禹甸副司勇, 贈左承旨. 曾祖諱脩, 副司直, 贈左贊成. 祖諱履祥, 大司憲, 贈領議政. 考諱𩆸, 南原府使, 贈左參贊. 妃, 貞夫人, 平壤趙氏. 文忠公諱浚之九世孫, 司勇紹之孫, 副司勇安國之女, 參奉成德隣之外孫也.
公生於萬曆戊午十一月初八日. 壬午登進士. 戊子始筮仕爲禧陵·康陵參奉·廣興奉事·氷庫別檢·義禁府都事·司瞻直長·掌樂院·典牲署主簿, 出爲陽城縣監. 時直量田, 撿覈均一, 民賴以其惠. 二年而歸, 累帶訓局郞. 辛亥四月二十日, 易簀于城南寓第. 嗚呼痛哉!
初配, 安東金氏. 高麗太師宣平之後, 文正公諱尙憲之孫. 同知中樞府事, 贈領議政 諱光燦之女. 牧使, 贈左承旨, 金琜之外孫也. 夫人, 生於丙辰九月二十四日, 卒于甲辰十月二十四日. 有令德, 事舅姑以孝, 待娣姒以誠. 繼室, 完山李氏. 我世祖大王七代孫, 士人柱國曾之女. 葬在高陽高峯下城洞里寅向之原, 先妣祔右, 後妣祔左, 同墳異室, 卽先塋之外麓也.
先妣有三男二女. 長男萬源, 進士, 縣監. 娶縣監李景沆女, 生二男二女, 重績·重謙. 重績, 二子幼. 次男萬潮, 文科. 娶奉事權瑱女, 生四男二女, 重亨, 生員. 重休, 生員. 重寅, 重欽. 女適生員睦天顯, 次適南夏成. 重亨, 生二子, 蓍輔·藎輔. 三男萬東, 早夭. 長女婿申休錫, 生二子一女. 子德涵, 進士, 德泳. 女適李時昉, 次女婿趙泰興, 進士, 生一子幼.
以不肖, 奉先蔭泰, 職二品追恩封贈. 公資禀峻正, 操守堅確, 孝友敦睦, 行誼純篤. 居官, 奉法甚嚴, 律己簡約. 雅不事生産, 甔石屢空, 而處之淡如且. 不喜交游, 所往還厪戚故若而家. 公之潛德隱行, 有非區區文辭所可形容, 謹敍. 世系官爵如右. 云爾.
男, 通政大夫 守 全羅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全州府尹 萬潮, 泣血謹識.
從侄, 嘉善大夫 漢城府尹 右尹 兼 五衛都摠府 副摠管 朴慶 後書
崇禎紀元後六十六年癸酉 月 日立
찬성공표석음기
공의 휘는 주천(柱天), 자는 숙훈(叔勳)으로 안동 풍산현에서 계통이 나왔다. 고려조에 휘 지경(之慶)이 있었는데, 국학 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하였다. 간(侃)은 도첨의 사인(都僉議舍人)을 역임하였다. 유(侑)는 밀직사(密直使)를 역임하였다. 연(演)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다. 귀(龜)는 중낭장(中郎將)을 역임하였다. 숙(俶)은 좌군 사정(左軍司正)을 역임하였다. 계종(繼宗)은 사포 별제(司圃別提)를 역임했으며,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우전(禹甸)은 부사용(副司勇)을 역임하였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증조의 휘는 수(脩)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휘는 이상(履祥)으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탁(𩆸)으로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하였으며,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으로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문충공(文忠公) 휘 준(浚)의 9세손이며, 사용(司勇) 소(紹)의 손녀이며, 부사용(副司勇) 안국(安國)의 딸이며, 참봉(參奉) 성덕린(成德隣)의 외손이다.
공은 만력 무오년(광해군 10, 1618) 11월 8일에 태어났다. 임오년(1642)에 진사에 올랐다. 무자년(1648)에 비로소 관직에 나아가 희릉 참봉(禧陵參奉)·강릉 참봉(康陵參奉)·광흥 봉사(廣興奉事)·빙고 별검(氷庫別檢)·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사첨 직장(司瞻直長)·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를 지냈으며, 나아가 양성 현감(陽城縣監)이 되었다. 당시에 직접 양전(量田)을 시행했는데, 균일하게 실상을 검사하니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었다. 2년 뒤에 돌아와 훈국 낭장(訓局郞掌)을 여러 차례 맡았다. 신해년(1671) 4월 21일에 성(城) 남쪽의 우거하던 집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 애통하구나!
첫 번째 부인은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고려 태사(高麗太師) 선평(宣平)의 후예로 문정공 휘 상헌(尙憲)의 손녀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휘 광찬(光燦)의 딸이다.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김래(金琜)의 외손이다. 부인은 병진년(1616) 9월 24일에 태어나 갑진년(1664) 10월 24일에 죽었다. 아름다운 덕이 있어 시부모님을 효로써 섬겼으며, 오누이간을 정성으로 대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다. 우리 세조대왕의 7대손이다. 사인(士人) 주국(柱國)의 증손녀이다. 고양(高陽) 고봉(高峯) 아래 성동리(城洞里) 인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오른쪽에 묻고 두 번째 부인은 왼쪽에 묻으니 같은 봉분에 다른 묘실이다. 즉, 선영의 바깥 산등성이다.
첫 번째 부인은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만원(萬源)은 진사로 현감을 역임했다. 현감 이경항(李景沆)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중적(重績)과 중겸(重謙)이다. 중적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차남은 만조(萬潮)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봉사 권진(權瑱)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생원 중형, 생원 중휴, 중인, 중흠이다. 장녀는 생원 목천현(睦天顯)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남하성(南夏成)에게 시집갔다. 중형(重亨)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시보(蓍輔)·신보(藎輔)이다. 삼남 만동(萬東)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신휴석(申休錫)에게 시집갔는데,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덕함(德涵)으로 진사이며, 덕영(德泳)이다. 장녀는 이시방(李時昉)에게 시집갔으며, 차녀는 조태흥(趙泰興)에게 시집갔다. 진사(덕함)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불초한 자가 선조의 음덕을 받들어 2품 벼슬에 추은되어 봉작과 증직되었다. 공은 자질과 품행이 높고 바르며, 지조가 확고하고 효도와 우애는 두텁고 화목하고 바른 행실은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받드는 것이 매우 엄격하여 자신을 다스림에 간소하고 검약하였다. 항상 생업을 챙기지 않아 자주 곡식이 떨어지는 형편인데도, 그것을 담담하게 처신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왕래한 이가 겨우 가까운 친척 몇 집뿐이었다. 공의 감추어진 덕과 숨겨진 행적이 저의 문사로서 형용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삼가 서술한다. 세계와 관작은 위와 같다. 이와 같다.
아들 통정대부(通政大夫) 수(守)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전주부윤(全州府尹) 만조(萬潮)가 피눈물로 삼가 적는다.
종질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윤(漢城府尹) 우윤(右尹) 겸(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 박경(朴慶)이 뒤에 기록한다.
숭정기원후 66년 계유(1693) 월 일 세우다.
첫댓글 12세조 찬성공의 묘표 번역을 지원구 아산시 문화유산과 팀장님께 의뢰 하였다.
앞으로 대동보 편찬 때 양효공 행장, 찬성공 행장, 노성공 행장을 빠짐없이 수록 하겠다.
公 이(1618~1671) 돌아가신 23년 후 만퇴당께서 묘소를 정비한 후 묘표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