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봉림사(鳳林寺) 이건(移建)’의 유래
보물 제1612호인 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 및 복장유물(永川鳳林寺靈山會上圖 및 腹藏遺物)을 소장하고 있는 봉림사(鳳林寺)는 조선시대인 영조 18년(1742) 징월(澄月) 스님이 창건하여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 소재하며 은해사의 말사입니다.
봉림사의 전신은 신라 문무왕(661 ~ 681) 때 의상(義湘, 625 ~ 702) 대사가 창건한 법화사(法華寺)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래 법화사는 이곳으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화북면 법화동 보현산(普賢山)에 있었던 큰 사찰로, 어느 때인가 폐사되어 버리자 징월스님이 남은 건물을 이곳으로 옮기어 봉림사를 창건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고려 중엽 조정에서는 전국 명산에 사찰을 보내 보국안민을 빌게 되었다. 그 당시 영천군 화북면 법화동 보현산 중턱에 지은 절이 바로 보현사였다. 절이 창건된 후 빼어난 산수 덕분인지 많은 승려들이 찾아와 수도하였고 신도 또한 많이 출입 하였던바 사찰은 날이 갈수록 번창해져 인근에서는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어느 해 봄의 일이었다. 깊은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개구리들은 온 들녘에 헤매며 울어대고 앞산에는 파릇파릇 산록이 피어나고 법당 앞을 아롱지는 아지랑이는 절간의 모든 스님들의 눈을 스멀스멀 감기게 만드는 그러한 봄날 속세를 떠나 갓 입산한 사미승 한 사람이 부처님 공양을 위하여 속가로 내려가 탁발하러 다니던 중 큰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다행히도 근처의 보현사 신도 가정에서 요양을 할 수 있었다. 인정이 많기로 유명한 보현사 신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병든 사미승을 친 살붙이 이상으로 몇 날씩 지새며 간호하였고 약도 정성스레 달여 먹였다. 온 산을 울긋불긋하게 수놓던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긋한 향기를 질투한 하늘이 온통 찌푸린 채로 소낙비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지루한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신도들의 따뜻한 정성에 부처님의 보은이 내리셨는지 사경을 헤매던 사미승의 병세는 차차 호전되어 갔다. 그러나 오랜 병상 끝이라 그런지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여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예로부터 지루한 장마가 걷히게 되면 변덕스런 하늘은 찌는 듯한 더위를 뿜어대기 시작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더위를 이겨내기 위하여 집집마다 ‘닭을 잡는다.’, ‘개를 잡는다.’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곤 하였다.
그 해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자 예외 없이 개를 잡아먹기로 하고 동네에서 제일 큰 개인 순돌이네 누렁이를 잡기로 하였다. 누렁이와 형제처럼 다정스레 지내던 순돌이 녀석의 ‘앙, 누렁일 잡지마.’라는 하늘을 찌를 듯한 절규를 뒤로하고 누렁이는 동구 밖 미루나무에 목을 매었다. 보신탕을 장만해 놓고는 갓 앓고 일어난 사미승에게도 권하게 되었다. 보살계를 받은 신도들도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게 부처님 율법인데 더군다나 사미승으로서는 10중 대계에 속하는 죄를 범할 수 없었다. 젊은 사미승은 완강하게 거절하고 문을 닫아걸었다. 문을 잠근 사미승이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생각이 있었다. 개고기가 건강에 좋다는 말을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 소승이 살아야 부처님께 공양을 드릴게 아닙니까.”
“아니야, 나는 부처님께 귀의 했잖아.”
악마와 양심은 끝없이 싸움질 쳤다.
“쳇 한 번쯤 먹었다고 알게 뭐람.”
하던 중에 마을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다. 옳다구나 싶었던지 사미승은 문을 박차고 뛰어 나와 개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아니 걸신들린 사람 마냥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개고기를 먹은 덕분인지 다음 날 아침 몸이 나는 듯이 가뿐해지고 마음도 쾌한 듯하여 몇 개월 만에 다시 보현사로 돌아가게 되었다. 지나는 길목에서 순돌이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이 날이 바로 밤하늘에서는 은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하늘의 커다란 강을 수놓은 까마귀 떼가 놓아 주는 오작교 위에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 눈물로 지새던 1년간의 회포를 풀고 하늘의 별들은 제마다 아름다운 빛의 경연을 벌이는 칠월 칠석 날이었다.
그러나 예년과는 달리 보현산에는 별빛이 반짝이는 대신에 번쩍 번쩍 번개가 사찰은 대낮같이 밝혔다가는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희롱하는가 하면 먹구름이 까맣게 덮인 하늘 위에선 노도와 같은 천둥이 일어 산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고서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이에 놀란 스님들은 제각기 방에 들어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는 비가 그치게 해달라고 부처님을 향해서 염불만을 외고 있었다.
밤새 무서움에 떨던 스님들이었지만 보현산의 사납던 하늘이 동녘에 밝아 오는 아침 햇살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시치미 뚝 떼고 화알짝 웃는 것을 보고는 휴우 한숨을 내쉬며 여느 때처럼 부처님께 아침 공양을 드리려 법당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공양을 마치고 간밤에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하던 중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없어졌음을 알고는 깜짝 놀라서 온 절간을 찾아 헤매었으나 어디서도 그 중을 찾지 못하고 또 영영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칠월 칠석이 다가왔고 하늘은 작년과 같이 큰 울음을 터트렸다.
다음 날 아침 해는 예년과 같이 떠오르고 아침 공양 후에 또한 스님이 없어졌음을 알고 모두들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그 후 매년 칠석날마다 보현산에는 폭풍이 일고는 다음 날 아침 해는 밝게 웃으며 떠오르고는 영락없이 스님 한 사람이 사라지곤 하였다. 누구하나 원인조차 몰랐으며 또 속수무책으로 그저 자신의 무사만을 빌며 그렇게 몇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 주지스님은 모든 스님들을 모아 놓고 칠석날 사건에 대해 깊은 의논에 들어갔다.
“공양이 적어 부처님이 노했어.”
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가 부처님의 율법을 어겼을 거야.”
하여튼 별의별 말이 다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젖혀 두고 사라지는 스님의 행방이라도 알기 위하여 명주실을 구해다가 각기 몸에다 지니기로 하고서 그 실 끝을 절 한 쪽 끝에다 묶어 두기로 하였다. 모든 스님들이 두려움에 떠는 칠석날 밤에 명주실만 만지작거리며 염불을 외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고 법당 앞에 모인 스님들은 명주실을 쫓아서 산길을 내달렸다. 동구 밖 나무를 빙빙 감은 명주실은 냇물을 건너고 있었다. 재를 넘고 건너편 산중턱에 도달한 일행은 명주실이 수십 길이나 되는 바위굴 속에 들어가 있었기에 약간 주저하였다. 주지승을 앞세운 일행은 조심스럽게 굴속으로 기어갔다. 거기에서 챙이 보다도 더 큰 지네가 곤하게 자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몇몇 사람이 까무러쳤다.
그 후 보현사를 폐찰 하고 옮겨지은 것이 바로 봉림사라 불리는 절인데 이것 이 약 500여 년 전의 일로 추측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 지 봉림사를 찾는 신도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스님들 역시 그 사실을 잊은 듯 수풀 속에서 노니는 산새의 울음와 물 흐르는 소리를 벗 삼아 조용히 불경만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