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언제까지 인지도 모르고 단지 보건 선생님이 다니는 학교라는 사실만으로 기간제를 수락했다 .
용남초에서 만나 같이 근무한 보건샘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선량한 사람이다.
나는 푸르지오 2차, 보건샘은 한선 1차 아파트.
담장과 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서 살고 있어 같이 출퇴근 하자 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은 없다. 출퇴근 길에 혼자 차를 몰고 가며 듣는 KBS 1FM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다.
물론 기간제 나가기 전에 하고 싶은 것 실컷 하기도 했다.
가고파이모님들과의 늦가을 여행, 명희랑 단둘이 한남동 블루스퀘어에 가서 팝페라 콘서트도 가고.
오늘은 12월 17일,
기간제 나간지 거의 한 달이다. 눈 한 번 깜짝 한 거 같은데 그새 한 달이 지나갔다니.
아이들은 언제나 예쁘다.
예측되지 않는 행동,
언제나 선의가 바탕이 된 마음들.
그 모든 것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연발시킨다.
다 좋은데 문제는 체력이다.
종일 근무 하고 나면 기력이 딸려 일단 저녁부터 먹고 자리에 눕는다. 한 잠 자고 일어나야 살아난다. 그러다 보니 잔고가 바닥이던 통장에 돈이 가만히 들어앉아 있다.
도대체 쓸 시간이 없으니까.
열흘 전에 찾아 둔 돈이 그대로 지갑 속에서 잠자고 있다.
남편은 흐뭇한 표정이다. 아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니 보기 좋은 모양이다. 간혹 책도 읽고, 글도 쓰니 이제 당신이 제자리로 돌아온 거 같다나 뭐라나.
주중에는 체력을 비축했다가 주말이면 여행을 간다.
가까운 곳, 다소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간다.
남편은 이제 사람 사는 거 같다 한다.
만상이 펴진 얼굴이다.
나는 주중에는 무조건 쉬기로 작정하고 일을 벌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수요일이 지나면 서서히 입안이 헐고 목감기가 온다. 응급실에 가서 링거도 맞고, 집에서도 맞는다.
생전 먹지 않던 정관장 홍삼도, 생강조청도 들고 다니면서 먹는다. 체력이 예전같지 않다.
이렇게 하는데도 일주일 전에 사 둔 무가 다용도실에 그대로 처박혀 있다.
손끝에 찬물 닿는게 무섭다.
아이들은 아프면 보건실도 가고 결석도 한다.
선생은 아프면 절단이다.
몸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해야한다.
뭇서리가 내린 오늘은 살만하다.
토요일은 윤이상메모리홀로 장셰프의 첫 데뷰 무대에 갔다.
까사베르데에서 크리스마스꽃다발을 만들어서.
역시 지은이는 최고의 플로리스트다.
꽃다발 하나도 단연 돋보인다.
장셰프의 올블랙 의상에 딱 어울린다.
국제음악당 이용민국장은 시민 음악가 다섯 분을 발굴해서 무대로 모셨다.
장셰프는 클래식 기타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라그리마(눈물), 민주당 젊은 시의원 이승민은 통키타 라이브로 라구요와 거꾸로 강을 거슬러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칠순의 바리스타 황학기는 펜플룻으로 외로운 양치기와 고향의 노래를,
쥬얼리 디자이너 최유정은 오카리나로 할아버지의 시계, 만약에를,
조신영샘의 제자 고봉균은 피아노로 에릭샤티와 슈만곡을.
신선하고 멋진 무대였다.
역시 이용민국장의 창의력과 기획력은 남다르다.
일요일은 좋아하는 사람들과 황학기의 카페 로피아노에 들러 강구안 밤바다를 보며 밤 늦게 까지 실컷 놀았다.
콘서트 때 연주 하셨던 고독한 양치기를 두 번이나 들려주셨다.
가곡 고향의 노래도, 김광석의 사랑하기 때문에도.
주말은 원도 한도 없이 실컷 놀았다.
출 퇴근 하는 길.
새로 난 산복도로로 달린다.
KBS 1FM을 들으며.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나날의 날씨에 맞춰 들려주는 탁월한 선곡들.
주차를 하기 전에 곡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린다. 아쉬워서.
출근길엔 빈 손일 때가 거의 없다. 한쪽 손에는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2, 3층 선생님들의 간식을 들고 간다.
조금 여유가 있는 날에는 1층 식구들 간식까지 챙겨간다.
약초꾼이 따 왔다는 거창 산사과, 선배 언니가 사다 주는 전주 한옥마을 달인 꽈배기,
우리 집 마당의 단감나무에서 자란 단감으로 만든 감말랭이.
간식이 어중간한 날에는 삶은 달걀이라도 15개 가져간다.
내 자식 또래의 선생님들.
출근길에 편의점에 들려 대충 끼니를 때운다고.
어떨 땐 다이어트 중이라는 여선생님들을 위해 견과류를 듬뿍 넣어 레몬즙과 유자청을 갈아만든 소스를 뿌린 샐러드도 만들어 가져간다. 견과류와 아몬드 슬라이스 위에는 발사믹 글레이즈를 듬뿍 뿌려서.
한동안 만들지 않았던 샌드위치도 만들어 간다.
수업 시작 전과 중간놀이 시간에 다같이 모여 커피와 함께 먹는다.
젊음이 보기 좋다.
반짝 반짝하는 아이디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감, 부럽다 .
젊음은 그저 보기만 해도 싱그럽고 좋다.
청춘은 다소 낭비 해도 좋을 만큼 넉넉하고 찬란한 시간이다.
학교는 좋다.
아이들은 더 좋다.
그러니까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지.
출 퇴근길,
통영대교를 지나 넘실대는 바다를 끼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때는 마치 여행자가 된 느낌이다 .
월요일 출근길, 꽃을 사 들고 교실을 들어서면 무슨 꽃이냐고 묻는 아이들.
꽃 향기가 이런 거 였냐고 묻는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면 너무나 예뻐 하며 주변을 에워싼다.
아이들은 늘 내게 뭘 도와 줄까냐고 묻는다.
학교의 시간은 다 참 좋은 시간들이다.
체력만 허락한다면 언제나 기쁘고 보람되다.
하지만 몸이 아프먼 죽도 밥도 아니다.
나이는 정직하다.
잠시 잠시 멈춤이 필요하다.
마음은 훤한데 몸이 말을 잘 안듣는다.
그래도 어느새 방학이 코 앞이다.
여행을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