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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노동조합 원문보기 글쓴이: 카프
“진정한 배려가 있어야 사회가 이뤄지는 거란다.”
정철(58)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노동조합 분회장이 아들에게 매번 하는 말이다. 정철 분회장은 아들에게 항상 “가장 하기 싫은 일을 먼저해야 한다”는 말과 “그 다음 배려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렇게 정철 분회장은 세상에서 남들이 하기 싫은 일을 먼저 도맡아 하는 것이 오히려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철 분회장은 “내가 조금 더 손해 보는 쪽으로 살았죠.”라며 그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승빈 기자
공공노조 의료연대서울지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노동조합 정철 분회장
알코올 고통을 알게 된 후, 인생반전이 시작됐다
전북대 공대를 나온 정철 분회장은 그리 공부를 즐겨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회의식이 투철했던 학생도 아니었다. 별다른 굴곡 없이 공대를 나와서 남들 다 그렇듯이 전공을 살려 기업에 취직했다.
그러다가 당시 취직하기 전에 약속받았던 1년 뒤의 진급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당시 기업에서 벌었던 돈으로 정철 분회장은 과감하게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둔 후, 목욕탕 사업, 식당업 등의 생소한 업종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하지만 역시 사업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는 사업을 접고 한동안 슬럼프를 겪다가 한국주류산업협회에 입사하게 됐다.
그의 인생은 늘 굴곡없는 아스팔트길마냥 평탄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48살 때까지는 계속 편안하게 살았죠. 3번의 직장, 2번의 사업 등 어찌보면 굴곡있는 인생같지만, 사업이 망해도 견딜 만큼 망했고, 흥해도 견딜 만큼 흥했던 것처럼 크게 흔들린 적이 없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가 날 받쳐줬기 때문이고, 더불어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의 나이 30세 때, 그는 주류산업협회에 입사했다. 주류산업협회에서 기획차장으로 일한 그는 대국민약속으로 설립된 음주문화연구센터의 모태가 된 주류소비자보호사업 계획 첫 기획서를 입안했다. 그는 좀 더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음주문화연구센터가 설립된 후 직장을 옮겼다며 “제가 나름대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살펴봤더니 여 건상 이직이 손해였으나 보람있는 일로 여겨져 결국 음주문화센터로 옮겼다”고 말했다.
당시 음주문화연구센터는 새롭게 생긴 곳이기에, 사람들의 만류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정철 분회장은 자신의 소신 있는 마음을 따랐다. 그렇게 그는 음주문화연구센터 행정부장으로 일하게 됐다. 정철 분회장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를 통해 알코올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면하게 되고, 함께 지내면서 점점 그들의 고통을 느끼게 됐다. 알코올 고통을 알게 되면서, 그의 인생의 반전이 시작됐다.
음주문화연구센터는 1997년 주류에도 건강증진기금을 부과하자는 입법이 추진되자 이에 반대한 주류업계와 국세청이 주도해 만든 기관이다. 주류산업협회는 매년 50억원의 재단 운영 출연금 지급을 약속했다. 그런데 협회는 2010년 말부터 최근까지 100억원에 달하는 출연금 지급을 미루고 있다고.
이에 센터 운영이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세청은 국민과의 약속으로 만든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임원직에 낙하산 인사를 보내고, 또 사업비마저 탐을 냈다고 한다. 그렇게 정철 분회장은 2006년도에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는 “나름대로 깨끗한 물방울이 돼서 사회 오염을 씻어보자 하는 심정으로, 국세청하고 싸우게 됐고,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아무도 노동조합을 이끌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정철씨가 분회장을 맡게 됐다.
그때부터 정철 분회장의 싸움은 시작됐다. “저도 나오면서 출사표를 던졌죠. 감옥을 가도 좋다는 심정으로 노조를 시작했죠”라고 말하는 그는 평범하던 성격이 싸움닭처럼 변했다고. 그만큼 현재 정철 분회장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소신을 가지고 끝까지 가고 있는 중이다.
정철 분회장은 “주류협회와 재단의 국세청 퇴직 임원들은 출연금 전용 기도를 계속했으며, 2007년 국세청공문을 통해 다시는 재단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각서에 도장도 찍었지만, 마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 마냥 역시나 지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재단엔 2010년부터 출연금이 들어오지 않고 있고, 주류협회는 병원사업포기하지 않으면 출연금을 주지 않겠다고 공문을 보내는 등 재단사업을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철 분회장은 “이는 국세청이 재단을 설립할 때와 달리, 재단사업을 더 이상 이끌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며 “국세청 산하에 재단을 재편해서 낙하산자리를 더 만들고자 추진하는 것이고, 사업비는 고갈되어가고 있다”고 상황의 심각성을 알렸다.
또한 정철 분회장은 인터뷰 내내, 알코올 폐해의 심각성을 알렸다. 그는 “시중에 나오는 주폭은 알코올 폐해의 일부분이다. 전국에 치료를 요구하고 있는 알코올중독자는 160만에 이르고 있으나, 단지 그들 중 6%만이 치료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며 “알코올치료병원은 더 만들어져야 하고, 주류업계는 원인물질 제공자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철분회장은 음주문화연구센터의 투쟁이 사회공익성확보를 위한 정당한 투쟁임에도 잃은 것도 많았다고 한다. 정철 분회장은 “모든 것이 다 날라 갔죠. 주류산업협회에서 19년간 근무했는데 그때 쌓았던 인맥들이 이 싸움 7년 때문에 다 적이 되어버렸다”고 말하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알코올 폐해가 얼마나 심각하고,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가 얼마나 그들에게 절실한 곳인지 알기에 더욱더 포기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빈 기자
공공노조 의료연대서울지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노동조합 정철 분회장
나를 지탱해준 고마운 사람들
또한 그가 지금껏 버틸 수 있는 것은 그의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기도 했다. 첫눈에 보자마자 “내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그의 아내가 가장 큰 지원군이다. 그는 당시 아내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얼굴은 하나도 안 예쁜데 보고 그냥 반했다. 아내를 만나기 전엔 장가를 안 간다고 주위에서 많은 걱정이 있었는데, 아내를 보자마자 일주일 만에 장가를 간다고 했다”고 말하며, 현재는 자신이 어떤 것들을 던져도 받을 준비가 돼있는 사람이자 가장 믿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그는 그만큼 아내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며, 아내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또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아버지가 가는 길이 힘든 일이어도 보람된 일임을 알기에, 아버지를 응원하고 있다고 듬직해한다.
원래 정철 분회장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하지만 평생 술로 아픔을 안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술을 마시지 않게 됐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들은 술을 평생의 화두로 안고 간다. 그 사람들은 술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고, 거의 머릿속에 항상 가지고 다니는 생각은 술 마시지 말자”라며, “그들은 한잔만 마셔도 다시 재발이 되고, 평생 재발과 회복의 굴레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만큼 그가 알코올 중독자들의 고통을 더욱 더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한 알코올 환자 때문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있다는 알코올 환자 00씨는 정철 분회장이 8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당시 00씨는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를 통해 재활의 길을 찾았고, 그 후 산림 감시원 등 여러 가지 일을 통해 가정생활도 제자리로 잡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합병증이 찾아왔고, 결국 병원 생활을 하게 됐다. 정철 분회장은 00씨를 회상하며 “알코올 중독자에겐 암 등 여러 가지 병들이 합병으로 오는 경우가 많다. 당시 그분은 암에 걸리게 됐다. 저희 병원 옆에 일산병원이 있는데, 00씨는 우리 병원이 잘보이는 곳에 병실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우리병원을 보며 1주일을 투병하다고 돌아가셨다”고 말하며, 00씨로 인해 더욱더 알코올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없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정철 분회장은 오히려 자신들이 알코올 중독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 자신들이 돌려받는 것이 크다고 말한다.
정철 분회장은 힘든 길을 가고 있지만, 결코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다고 말한다. 정철 분회장은 “민중의소리를 비롯해 다른 매체들도 도와주시고, 일산에 있는 비정규대안센터 분들은 투쟁기금을 모아주기도 한다. 집회가 어려울 때 기도회를 해주시는 목사님도 헌금을 저희 투쟁기금으로 다 돌려주시기도 하고, 고양시민단체 연대회의 박평수 공동의장님도 성명서 내주고 직간접으로 도와주신다”며 많은 분들의 도움을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라고 전했다.
그 중 가장 고마운 이들은 함께 하는 50여명의 조합원들이다. 다양한 얼굴만큼 여러 생각들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조직을 끌고 가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듯 조합원들은 단결과 독려를 통해 서로를 믿으면서 지금까지 왔다.
맏형역할인 정철 분회장은 “조합원들 결혼 주례도 선 적 있고, 대체적으로는 내가 나이가 많아 설득하고 독려하고 그런거죠. 그저 조합원들이 저를 믿고 따라와 주는 것이 고맙다”라고 마음을 표현했다.
그만큼 그는 많은 분들의 응원이 있기에 더욱 절실히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내년 정년을 앞두고 싸우는 그에겐 지금이 제일 고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정년 전까지는 해결을 하겠다는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이승빈 기자
공공노조 의료연대서울지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노동조합 정철 분회장
야망을 위해 행복을 포기하지마라
군입대를 앞둔 아들을 둔 아버지의 마음은 미안함이 가득하다. 그는 “곧 있으면 아들이 군대를 간다. 하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항상 미안함뿐이다”라고 말했다.
정철 분회장의 꿈은 결코 크지도 작지도 않다. 그는 자신의 야망이자 꿈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를 살리는 일이다. “어떤 글귀에서 ‘야망을 위해서 행복을 희생하지 말라’고 하더라. 나의 야망은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를 살리는 일인데,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니 그게 곧 나의 행복이다”라고 말했다.
세상이 허락할 때까지 의미 있는 일을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정철 분회장의 꿈은 배낭여행을 떠나 세계 곳곳에 있는 피조물들을 직접 눈으로 보는 일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하고 있지만, 재밌게 하고 싶다는 그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하기 싫다고 안하면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고 전한다.
“살다보니까, 이 자리에 와있는 모든 이유가 ‘배려’ 때문인 것 같다. 배려는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할 때,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정철 분회장은 항상 자신이 조금 더 손해 보는 쪽, 자신이 더 희생하는 그런 삶이 더 편하다고 한다.
지난 10월 23일 국회에서는 국내 유일의 알코올 치료 전문기관인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파행사태와 관련한 국세청 국정감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정철 분회장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은 고마움이 더 많다고, 자신이 기꺼이 사회를 위해 배려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한다. 그의 희생이 언젠간 꼭 빛을 볼 것이라는 것을, 그의 확신찬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 카페
정철분회장이 투쟁하고 있는 모습
<강민선 기자 mmss8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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