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코로나로 교회학교가 거의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가운데 마니또놀이의 여건이 어렵지만, 하여튼 ‘마니또’는 ‘매우 가까운 친구, 친밀하다’의 뜻을 갖는 스페인어 'manito'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유래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이러한 ‘마니또’는 기본적으로 제비뽑기 등을 통해 지정된 친구의 수호천사처럼 되어주는 것으로, 상대방 몰래 옆에서 선물이나 편지 등으로 은밀하게 도와주고, 들키면 안 되는 일종의 놀이로 계절성경학교에서 심심치 않게 행사로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마니또’의 개념이 성경에서는 수호천사의 일종으로 천사들 여럿 중에 하나의 존재로 인정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천사(말라크)를 인간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이나 백성들을 돕는 특명한 사명을 지닌 존재로 기술되기도 합니다(출14:19 ; 민 22:22 ; 왕상 19:7 등). 신약에서는 천사(a[ggelo")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실 때나, 거지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도 천사가 등장합니다.
특히 가톨릭에서는 수호천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신앙적 삶에 도움을 주는 존재로 하나님의 명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회에서는 수호천사에 대해서 그다지 강조하지도 않고, 그 존재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보다는 성령하나님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라고 보아도 큰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수호천사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을까요? 그 물음이 마태복음 18장 10절에서 대답해 주시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여기서 ‘그들의 천사들이’(oiJ a[ggeloi aujtw'n), 누구의 천사들이라는 겁니까? 바로 ‘이 작은(mikrw'n) 자’의 천사들이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작은 자들에게 속한 그들의 천사들이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작다는 ‘미크론’(mikrw'n)이 마이크로의 단위인 ‘미크론’(Micron)으로 ‘미크로스’에서 나온 파생어인데, 1미크론은 1mm의 1/1000로 엄청나게 작은 단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런 작은 자에게도 수호천사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수호천사라고 직접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으셨지만, 문맥상 수호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회는 수호천사라는 명칭을 너무나도 사용하기를 꺼려하고, 도리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조차도 애써 외면하려는 속 좁은 개신교회영성을 아직까지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개신교회는 가톨릭영성과 관련된 깊은 영성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혹시 처절한 신구교회(新舊敎會)간의 종교전쟁으로 비롯한 앙금이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이후에도 암묵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담으로 필자가 언젠가 개인적으로 겪은 경험인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방문 전에 가톨릭을 비판한 글을 어느 종교카페에 썼다가 천주교신자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고, 한동안 그곳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논쟁의 핵심은 로마교회(교황청)의 초기선교당시에 교황청이 제사를 우상숭배로 금하는 교칙을 내린 결과로 수많은 신자들이 죽임(순교)을 당했던 점과, 동시에 2차 바티칸 공회의(1965-1967)에서는 그 제사를 허용하는 등, 그런 신앙적 행태에 대하여 방문하시기 전에 사과부터 하는 것이 맞고, 또 가톨릭신부신자들과 개신교인과 목회자들 상호 간에 불편한 시선으로 반목(反目)하는 이유에 대한 취지의 글과, 더불어서 교황도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언급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필자는 그런 전력을 보더라도, 결코 로마교회를 무작정 옹호하고자 가톨릭영성을 운운(云云)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로마교회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개신교가 놓치고 있는 영성을 개신교크리스천이 잊지 않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써내려 갑니다.
그렇다고 로마교회의 모든 신앙적인 규범을 개신교회에서 찾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호천사의 영성을 비롯해서, 본받아야 할 너무나 많은 가톨릭영성을 그냥 개신교회에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염려하고 반성해 보면서, 가톨릭영성이 교황청 것만이 아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영성적 요소를 찾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로마교회와 가톨릭영성은 구별해야 합니다.
따라서 전체교회가 그렇다고 예단할 수는 없지만, 수호천사의 영성은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가 나타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한국개신교회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고, 그저 ‘마니또’놀이로 대치해서 교회학교에서 행사의 프로그램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영성적인 문제가 비단 수호천사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찾아야 할 가톨릭적인 영성이 더 많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예배예식에 있어서 좀 더 경건함을 회복할 수 있는 가톨릭영성이 나름의 형식과 내용의 그릇으로 존재한다고 봅니다. 더욱이 이제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정당하고 정상적인 교회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복과 평상복을 구별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소박한 이유는 옷을 구별되게 입혀 놓으면 외형적인 경건성이라도 기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귀 있는 자는 이 말을 잘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추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기독교TV방송에 나오는 목사들의 옷차림이 어떨 때에는 신부인지 목사인지 구별을 못할 정도인데, 문제는 통일성이 없고 제멋대로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계 전체적으로 통일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교파교단에서 평상복(근무복)과 예복을 구별해서 개신교성직자임을 구별하는 복장을 착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물론 이 의미가 다시 종교개혁 이전으로 도돌이표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같아서는 종교개혁을 왜 했는가? 반문하게 되는 심정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교파교단의 목회자임을 의복을 통해 교회안팎으로 표시하는 방법을 강구함이 삯꾼과 이단방지 등에 효과적인 도구역할을 할 수도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자들이 자신의 언행을 스스로 더 조심하게 되고, 그나마 겉에서부터 반성적이고 겸손한 모습을 갖도록 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또한 정적(靜的)인 가톨릭예배음악 요소를 적극도입해서 신자에게 깊은 영성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국개신교회가 더욱 열린 영성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이외에 참 많이 있지만, 거두절미하고 개신교계 관련연구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심도 있는 논의를 해보면 어떨까 제언을 해보지만, 이 역시도 거시기? 되겠지요?!
적용해 보면 어느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설교방송에서 지식이 많은 믿음보다도 단순한 믿음을 강조하시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씀입니다만. 곱씹어보고 생각해 보면 그런 단순한 믿음이, 그냥 거저 갖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많은 고민과 좌절의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정말 “아하!?,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는 내적체험의 탄성이 나올 때, “주님,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놀랍습니다!”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대한 확신의 고백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조심스럽지만 결과적인 기대로 그런 단순한 고백의 믿음 ‘오직예수’를 향해 가기 위한 영성적 방편으로 과거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에서 누려오던 바람직한 가톨릭영성을 종교개혁 이후에 목욕물이 더럽다고 목욕통 안에 아기까지 함께 버렸던 우(愚)가, 오랫동안 잊고 잃어버리고 놓친 개신교회가 아닌지를, 다시금 되돌아보는 넉넉한 실천생활영성이 요청되고 그 지혜를 구해봅니다.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시옵소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