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 상세
3. 명단
3.1. 33인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인물
3.2. 민족대표 48인?
4. 비판
5. 기타
1. 개요
1919년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33명의 사람들.
이들의 첫 움직임은 1월 20일경부터 손병희·오세창·최린·권동진 등의 천도교측 중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월중 2차례의 모임에서 처음에는 손병희의 발의에 의해 일본정부에 건의서를 내기로 했고, 2번째 모임에서는 독립청원서와 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2월 상순경에 천도교측은 대한제국의 거물관료였던 윤용구·한규설·윤치호·김윤식 등과 접촉하여 그들을 독립청원의 대표로 내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부했고, 김윤식은 청원서만 내는 것을 고집하고 독립선언서의 발표에는 찬성하지 않음으로써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2월 중순경에 최린은 최남선의 주선으로 기독교측과 연락이 닿아 기독교측의 대표격인 함태영(咸台永)과 만났는데 그가 청원서만 내겠다고 하여 천도교와 기독교측의 회동이 결렬될 뻔 했으나, 결국 선언서 발표에 동의하게 되었다. 또한 한용운(韓龍雲)을 통해 불교측과의 제휴도 이루어져 독립선언서가 작성·발표되었다.
이때 독립선언서의 작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최린이었는데, 그는 "청원서나 건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으므로 대내적으로 전국민을 분기시키고 대외적으로 전세계를 향하여 독립해야 하는 이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는 중대한 선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최린은 이미 2월 상순에 선언서·의견서·청원서 등 운동관계 서류의 초안을 최남선에게 기초하도록 부탁했는데, 손병희 등과 합의한, 첫째, 평화적이고 온건(穩健)하여 감정에 흐르지 말 것, 둘째,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절대 필요함을 강조할 것, 셋째,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이 전통정신에 입각한 정의와 인도의 운동임을 강조할 것을 기본내용으로 삼게 했다.
삼일독립선언서의 전체정신은 첫째, 한민족의 독립정신 및 그 유래를 철두철미 민족 고유의 양심과 기능에서 발동하도록 하고, 둘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결코 배타심 특히 단순한 배일정신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발전상 당연한 지위를 요구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셋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한국인 독자의 이기적인 동기에서가 아니고 동양 전체의 평화 및 세계 역사의 추세에 비추어 불가분한 것으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며, 넷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고, 그 목적을 완수하기까지 어디까지나 지속할 성질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것 등이었다.
더욱이 이 선언서의 내용은 근대의 서구사상인 자유·평등·인권·도의 사상을 반영하여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문화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결하여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민족의 자유·독립·평등을 요구한 것이었다. 나아가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고, 세계개조의 대기운과 도의시대를 강조한 것은 외세에 의지하거나 타력에 의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뜻이 아니고 세계정세도 바야흐로 유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비폭력을 주장한 것은 일제와의 타협이나 청원적인 내용이 아니고 오히려 비폭력을 호소하면서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요구인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정정당당하게 끝까지 투쟁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삼일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 불교측 2명 등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후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에서 2만 1,000매가 인쇄되어 2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되었다.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는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이 선언문의 낭독 없이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설명 후 축배를 들고 일본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민족대표에 의해 민중 앞에서 낭독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삼일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포와 전달은 운동의 조직과 준비를 함께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각지의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했다.
2. 상세[편집]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한규설, 윤용구[1], 박영효, 윤치호[2], 이완용과도 접촉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개신교, 불교, 가톨릭, 유교 등의 종교계 인물들과 접촉하여 민족대표를 꾸리게 되었다. 이 때 가톨릭과 유교는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두 명만이 참가했다. 반면 개신교는 개신교 내의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올라있던 상황이라 천도교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결국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단이 결성되었다. 원래는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으로 30인을 구성하려 했으나 개신교 종파인 감리회와 장로회가 숫자를 놓고 다투다가 각각 8명을 내세우고 16명으로 개신교 대표를 늘리는 대신, 불교 2인도 포함시키면서 현재의 33인으로 구성되었다.
의외로 민족종교인 대종교 인사들은 여기에 관계하지 않았다. 당시 대종교 교단은 분리되어서 반일세력은 만주로 거점을 옮겼고 당시 국내에 남아있던 단군교는 일제 식민체제에 협력했기 때문이다.
유교는 학파별로 참가 여부를 놓고 갈등이 심했는데 호남의 거물 유림인 간재 전우는 '"머리 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은 유림으로써 상종할 일이 되지 못한다."'라고 거부했지만, 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들은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참가를 결정했다. 결국 영남 지역 등 일부 학파에서 김창숙을 비롯해서 유림대표 2인을 파견했는데, 모친의 와병으로 인해 사정이 생겨서 늦게 도착하여 서명할 기회를 놓쳤다.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들의 이름이 없는 것을 안 유림 대표들은 막대한 죄를 지었다며 길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이놈아, 통곡은 왜 하느냐. 나라를 망칠 때는 너희 놈들이 온갖 죄악은 다 지어놓고[3] 오늘날 민족적 독립운동에는 한 놈도 끼지 아니하였으니. 이놈아, 이러고도 다시 유림이라 오만하게 자부하려느냐?"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면박을 주자, 이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김창숙 등은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이 수치를 씻자고 제의하기에 이른다. 3.1운동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진 유림 세력의 최후의 함성이 면우 곽종석을 중심으로 시작된 1919년의 파리 장서 사건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국내 유림의 편지를 보내 독립을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간재 전우를 비롯해서 외적을 데려와 외적을 물리치는 일이나 머리깎은 자들의 복국 운동이나 유림으로서 할짓이 못된다고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다고 기뻐하며 참여한 유림이 더 많았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곽종석 등 여러 유림들이 투옥되었다가 순국했다. 유림 세력들이 천한 상놈들의 모임이라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용운이 변절 또는 한용운을 제외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거나 민족대표 33인은 만세운동이 항일운동의 전부라는 주장도 있는데, 근거없는 루머에 불과하다. 확실하게 식민지 체제에 협력한 사람은 박희도, 정춘수, 최린의 3명(최남선을 포함하면 4명)밖에 안 되며[4], 나머지 대표들은 3.1 운동 직후 또는 이후로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옥사하거나, 살아남았더라도 일제를 피해 중국과 미국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이끈 민족대표 대부분 변절했다고?"
3. 명단[편집]
민족대표 33인 명단
손병희: 천도교 측 수장. 1922년 사망.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방정환의 아내.
이승훈: 개신교 측 수장이자 교육자.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음. 1930년 작고. 33인 중 가장 늦게 풀려남.
한용운: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말년에는 중풍에 시달리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
권동진: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신간회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참여. 증손 권혁방은 33인 유족회 회장 재임.
권병덕: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3년 타계.
길선주: 한국 최초의 목사. 3.1 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5]
김병조: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에서 임시정부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 되다가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김완규: 경술국치 후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도사직을 맡고, 민중 계몽운동 전개. 1949년 타계.
김창준: 개신교 측 대표. 함경북도 만세운동 주도. 광복 후 공산주의 개신교 운동 전개.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북한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6.25 전쟁은 대한민국이 북침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왜곡을 주장하는 활동을 하였다.
나용환: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나인협: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박동완: 개신교 측으로 3.1 운동 경기 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1923년 하와이로 망명. 1941년 병사.
백용성: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 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틈틈이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으며, 윤봉길을 불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입적.
박준승: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27년 병사.
신석구: 개신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회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
신홍식: 개신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가.[6]신사 참배 거부. 1939년 사망.
양전백: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여. 목회 사업에 전념. 105인 사건에 연루.
양한묵: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19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오세창: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매일신보,서울신문사장. 1953년 사망.
오화영: 감리회 목사.6.25 전쟁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19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유여대: 목사로 3.1 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 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1937년 사망.
이갑성: 개신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3.1 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변절했다는 주장, 이에 더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05년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 취재한 결과 1930년대까지는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언급했다가 정정 기사를 냈다.#매일신문은 역사 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그러나 40년대까지 변절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는 상태.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로, 광복을 넘어 5공시절인 1981년에 서거하였다.
이명룡: 개신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3.1 운동 후 물산장려운동참가, 언론 활동. 1956년 병사.
이종일: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925년 작고.
이종훈: 천도교 대표. 1931년 만주에서 병사.
이필주: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 1942년 작고.
임예환: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7]
최성모: 감리회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 황해도시위 주도.
홍기조:홍경래의 직계후손[8]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 1938년 병사.
홍병기: 천도교 대표. 고려혁명위원회 조직.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1949년 작고.
3.1. 33인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인물[편집]
박희도
33인 중 최연소. 3.1 운동 후 잡지 『생활사』 창간.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 스타가 되었으며[9]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 잡지 『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1951년 사망.
최린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들어가 교세 확장에 힘썼다. 개신교 이승훈 목사에게 개신교의 3.1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여 한용운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완성하게 했고 3.1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다. 1934년 중추원 참의,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사장, 39년 임전 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으며, 이때 옆에서 "민족을 위해 친일하였다"고 진술하는 이광수에게 닥치라고 했다. 6.25 전쟁때 납북되었다.
정춘수
3.1 운동 당시 감리회목사[10]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지도했다. 1934년 흥업 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연행되었다가 전향서를 쓰고 풀려났다. 신사 참배 및 창씨개명, 그리고 '전도보국',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신도들에게 자원병 가담을 호소하고 교회 예배당을 헐어서 일본군 비행기 제작에 동원하는 등의 친일 행위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간주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되었으며 1951년에 사망했다. 청주시의 우암산에 조성된 삼일 공원에도 이 사람을 포함한 충청북도 출신의 민족 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에 시민들이 철거해서 지금은 5개다.
3.2. 민족대표 48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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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 최린 | 권동진 | 오세창 | 임예환 | 권병덕 | 이종일 | 나인협 |
홍기조 | 김완규 | 나용환 | 이종훈 | 홍병기 | 박준승 | 이승훈 | 박희도 |
최성모 | 신흥식 | 양전백 | 이명룡 | 길선주 | 이갑성 | 김창준 | 이필주 |
오화영 | 박동완 | 정춘수 | 신석구 | 한용운 | 백용성 | 안시환 | 임규 |
김지환 | 최남선 | 함태영 | 송진우 | 정노식 | 현상윤 | 이경섭 | 한병익 |
김홍규 | 김도래 | 박인호 | 노헌용 | 김세환 | 강기덕 | 김원벽 | 유여대 |
배경은 일본 법정에서 3.1운동 관련으로 재판을 받은 것이고, 이들의 사진이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서 알려지면서 48명이라는 숫자가 남았다. 이들은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31인[11]에 3.1운동 관련으로 잡혀서 같이 재판을 받은 17인을 더한 것이다. 물론 이 명단 자체는 인지도도 낮거니와, 김병조와 특히 옥고로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이유로 온갖 형태의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12]. 민족대표, 민족지도자, 3.1운동 지도자 등에 숫자도 48, 49, 50이 모두 존재한다.
4. 비판[편집]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운동 방식은 외교론적, 평화론적인 방법에 근거한 것으로서 지나치게 낙관론적이고 제국주의의 비인간성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있다. 경술국치 전의 헤이그 특사가 무시를 당했듯이, 아무리 명분이 차고 넘쳐흘러도 1차대전 승전국 일본에 한국의 독립을 압박해줄 세력은 없었다. 이 당시에도 이러한 이유로 민족대표 33인의 활동과 독립운동을 비판한 독립운동가가 몇몇 있었고 일부는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기도 했다3.1운동을 비판한 독립운동가 김산의 절규.
민족대표 33인은 그들이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인력거 대신 자동차를 요구하자, 일본 헌병들은 비웃었다고 한다. 아울러 재판을 받으면서 민족대표 33인은 ‘사의 천박한 학생과 군중이 모였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손병희)’ ‘무식한 자들이 불온한 일을 할 것 같아서 (박희도)’ 장소를 변경했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물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폭력사태가 있기는 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반발한 것이지 무턱대고 쳐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33인의 행동에 대해 지휘부로서 시위와 봉기를 주도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이어가지 않고 자수하는 어리석은 짓이라 평하는 사람도 있다. 조선민족이 일본에 독립을 청원하거나 협상을 청한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인데, 자수를 한 것 자체가 죄를 지었다 인정하는 행위로 비춰져 독립선언의 당위성 자체를 깎아내린다는 것. 민족대표 33인이 자수한 취지는 만세시위의 배후라 할 수 있는 자신들이 자수함으로써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지 않고 그들의 시위 또한 막지 말라는 취지였으나, 10년간의 혹독한 무단통치를 실시해 온 식민지 당국을 상대로는 순진무구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5.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