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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문헌
고문진보(古文眞寶)
송나라 말기의 학자 황견이 편찬한 시문선집
송나라 말기의 학자 황견(黃堅)이 편찬한 시문선집. 20권 10책. 이 책은 전국시대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시문을 전집·후집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전집은 〈권학문 勸學文〉을 비롯하여 소박하고 고아한 고시를 주로 수록하였고, 후집은 산문인 17체의 명문을 실었다.
전집 10권은 권1·2에 오언고풍단편, 권3에 오언고풍장편, 권4·5에 칠언고풍단편, 권6에 칠언고풍장편, 권7에 장단구, 권8에 가류(歌類), 권9에 행류(行類), 권10에 음(吟)·인(引)·곡류(曲類)로 구성되었다.
후집 10권은 권1에 사(辭)·부류(賦類), 권2에 설(說)·해류(解類), 권3에 서류(序類), 권4에 기류(記類), 권5에 잠(箴)·명류(銘類), 권6에 송(頌)·전류(傳類), 권7에 비(碑)·변류(辨類), 권8에 표류(表類), 권9에 원(原)·논류(論類), 권10에 서류(書類)로 이루어져 있다.
≪고문진보≫가 우리 나라에 유입된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 말엽의 문신 전녹생(田祿生)이 중국에서 ≪고문진보≫를 사가지고 와서 산증(刪增)을 가하여 처음으로 합포(合浦)에서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야은일고 野隱逸稿≫에 있다. 이것을 근거로 추정하면, 이미 14세기에 ≪고문진보≫가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문진보≫는 1420년(세종 2)에 ≪선본대자제유전해 善本大字諸儒箋解≫라는 명칭으로 옥천에서 간행되었다. 1452년(문종 2)에는 ≪상설고문진보대전 詳說古文眞寶大全≫이라는 명칭으로 동활자인 경오자로 간행되었다. 그 뒤로 복간을 거듭하여 이 대본이 널리 유포되고 사용되었다. 그리고 언해본·현토본이 간행되어 현재까지 전한다.
≪고문진보≫는 고려말에 수입된 이래 조선시대 서당에서 고문의 연변(演變)과 체법(體法)을 익히기 위한 아동용교과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어우야담≫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의 배움은 대개 ≪십구사략≫·≪고문진보≫를 익히는 것으로 학문에 들어서는 문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었다. ≪성소부부고≫ 〈성옹식소록하〉에서는 “국초의 제공이 모두 ≪고문진보≫ 전후집을 읽어 문장을 지었으므로, 지금의 인사들이 처음 배울 때 이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언급하였다.
김륭(金隆)의 ≪물암집 勿巖集≫에 보이는 〈고문진보전후집강록 古文眞寶前後集講錄〉, 정자신(鄭子信)의 ≪매창집 梅窓集≫에 보이는 〈고문진보전후집주석정오 古文眞寶前後集註釋正誤〉 등의 자료는 ≪고문진보≫가 중요한 교과서였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나 유몽인(柳夢寅)이 윗 글에 이어 “내가 세 번이나 중국에 갔으나, 이른바 ≪고문진보≫·≪십팔사략≫은 중국에서 매우 드물었다.”라는 기록과 과 허균(許筠)의 “그러나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모아놓은 것이라서 그 취사가 확실하지 않으니 읽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비판적 견해가 있다.
조계찬은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중국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이 중국과 대등하게 됨을 꺼려하였다. 그래서 ≪십팔사략≫과 ≪고문진보≫ 두 책을 지어 우리 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이 책이 온 뒤에 우리 나라의 문장이 누추해져서 옛 것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오산설림 五山說林≫에서도 이백(李白)이 한형주(韓荊州)에게 올린 글의 ‘청평(靑萍)’·‘결록(結綠)’에 대한 ≪고문진보≫의 주가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고문진보≫에 대한 비판은 조선 후기에 일반화된 현상인 것 같다.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권필(權韠)과 이안눌(李安訥)은 ≪고문진보≫를 읽지 않았지만 그 시는 좋다”고 하여, 문장학습서로서의 ≪고문진보≫가 지닌 효용성에 대하여 인정하고 있다.
≪고문진보≫는 새로 간행되는 과정에서 산증이 가해져서 부피와 체재면에서 약간의 변모가 일어났다. 첫째, 부피는 중국이나 일본에 많이 알려진 병오본(1366)은 시 217수, 문 67편이고, 홍치본(弘治本, 1502)은 시 245수, 문 67편이다. 우리 나라의 ≪상설고문진보≫는 시 240수, 문 131편이다.
둘째, 체재는 후집에 국한된 것이지만, 지정·홍치본은 공히 문형별로 편찬되었고 ≪상설고문진보≫는 역대순으로 편집되었다.
이상의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면 우리 나라는 시보다는 산문을, 문체보다는 역대로 연변한 문장의 품격을 독자에게 개괄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이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문장을 주축으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책의 성격에 있어서는 ≪당송팔가문≫과 달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당송팔가문≫에서는 이른바 ‘고문체’만을 수록하였는데, ≪고문진보≫에서는 고문체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북산이문 北山移文〉과 〈등왕각서 滕王閣序〉와 같은 변려문을 수록하였고, 〈이소경 離騷經〉과 같은 초사도 실었다.
그리고 전집에서는 시가를 고문이라는 표제 아래에 실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 책의 책명에 보이는 ‘고문’은 문체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고대의 글’이라는 뜻이 강하다.
≪고문진보≫는 중국인에 의하여 중국인의 글을 모은 것이라는 한계성으로 인하여 비판적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변문을 억제하고 고문을 숭상하던 기조에 편승하여 초학들에게 널리 익힌 도서의 하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맞게 산증되었다는 점과 이 책에 대한 각종 주석, 그리고 언해본·현토본 등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조선시대 문장학의 학습용도서로서 폭넓게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野隱逸稿
<<참고문헌>>於于野譚
<<참고문헌>>惺所覆瓿藁
<<참고문헌>>五山說林
고봉법장가집(高峰法藏歌集)
고려 말의 승려 법장이 1423년(세종 5)∼1426년 선에 대한 체험을 노래한 것을 모아 엮은 책.
고려 말의 승려 법장(法藏)이 1423년(세종 5)∼1426년 선(禪)에 대한 체험을 노래한 것을 모아 엮은 책. 나옹삼가(懶翁三歌)인 〈완주가 玩珠歌〉·〈고골가 枯骨歌〉·〈백납가 百衲歌〉에 글귀마다 찬송을 붙인 계송(繼頌)과 잡영(雜詠) 100여수가 수록되었다.
법장은 1423년 여름 경주 원원사(遠願寺)에 있을 때 나옹삼가에 계송을 지었으며, 1426년 여름 3종가의 계송과 잡영 100여수를 편집하여 제자에게 발간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나옹삼가의 계송과 임종게(臨終偈)만이 전하며, 이들은 1435년 순천 송광사에서 간행한 동국대학교 소장본과 1940년 이종욱(李鍾郁)이 편집하여 월정사에서 간행한 ≪나옹집≫에 첨부되어 있다.
그리고 삼가의 각 제목에 대해서 게송(偈頌)으로 풀이하였는데, 〈영주가 靈珠歌〉 76구(句)에 각 구절마다 3구 또는 4구의 게송을 붙였으며, 〈백납가〉와 〈고골가〉에는 각 3구씩 게송을 붙였다.
<<참고문헌>>懶翁集
고봉집(高峰集)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기대승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기대승(奇大升)의 시문집. 14권 11책(본집 3권 3책, 속집 2권 2책, 양선생왕복서 3권 3책, 성리왕복서 2권 1책, 논사록 2권 1책, 부록 2권 1책). 목판본.
1614년(광해군 6) 〈양선생왕복서 兩先生往復書〉를 아들 효증(孝曾)이 간행했고, 1629년(인조 7) 문집과 〈논사록〉을 선산부사 조찬한(趙纘韓)이 합간하였다. 문집은 권두에 장유(張維)의 서(序)와 장현광(張顯光)의 지(志)가 있고, 권말에 조찬한·기영환(奇永桓)의 발문이 있다.
〈양선생왕복서〉는 권말에 기효증과 김익(金熤)의 발이 있고, 〈논사록〉은 권말에 조찬한·기세훈(奇世勳)의 발이 있으며, 〈이기왕복서 理氣往復書〉는 권말에 기형섭(奇亨燮)·기우흥(奇宇興)의 발이 있고, 별집은 권말에 기동준(奇東準)의 발이 있다.
권1에 연보와 시 336수, 권2에 표(表) 13편, 의(議) 2편, 설 2편, 전(箋) 1편, 소 4편, 장(狀) 8편, 차(箚) 1편, 논 2편, 기 8편, 문 11편, 권3에 묘갈명 6편, 묘기 11편, 서(書) 7편, 행장 3편, 서(序)·발 2편이 수록되어 있고, 속집은 권1에 시 340수, 권2에 서(書) 6편, 잡저 4편, 서 (序)1편, 발 1편, 문 1편 부록으로 행장 1편, 시장(諡狀) 1편이 수록되어 있다.
〈논사록〉은 상하 2편, 〈양선생왕복서〉는 권1∼3에 서 133편, 〈성리왕복서〉는 상하 32편, 부록의 권1·2에 제문 20편, 만장 57편, 실기 10편, 소 2편, 문 2편, 서술 1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장시·배율 등 거운(巨韻)이 많고, 차운(次韻)은 친지들과 주고받은 것이 많다. 조찬한은 문집의 발문에서, 기대승의 시문은 우아하고 건실하여 그의 장시(長詩)는 한유(韓愈)의 풍에 가깝고, 단편은 도잠(陶潛)과 비슷하며, 변론은 구양수(歐陽修)와 흡사하다고 평하였다.
〈논사록〉은 선조의 명으로 당시의 검열 허봉(許篈)이 경연에서 기대승의 각론 가운데 중요한 대목을 초록한 것인데, 그의 정치적 이념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임금이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사항이 일곱 가지로 설명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나라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다. 어진 재상을 얻으려면 먼저 임금의 덕이 성취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경연의 강학을 독실히 해야 한다.
둘째로, 언로(言路)가 열리면 나라가 태평하고 언로가 막히면 위태롭다. 임금은 국민의 여론을 대간(臺諫)을 통하여 듣게 되므로 언제나 언로를 훤히 열어놓아야 된다. 셋째로, 시비(是非)가 명확해야 인심이 복종하고 정령(政令)이 바로잡힌다.
넷째로, 임금은 먼저 수신에 힘쓰고 어진 선비들을 잘 등용해야 한다. 다섯째로, 조광조(趙光祖)에게 증직(贈職)을 내리면 의를 밝히고 성학(聖學)을 권장하며 임금의 덕을 빛내는 일이 될 것이다.
여섯째로, 임금은 재용을 절약해야 하며 가렴하는 관리를 제거해, 그 재용의 혜택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일곱째로, 예의를 숭상하여 선치(善治)의 근본을 견고히 해야 한다.
기대승의 철학적 사상은 〈이심법설 移心法說〉에 잘 정리되어 있다. 곧 “사람의 마음은 몸의 주인〔主〕이 되어서 물(物)에 명하는 것이니, 고요하면 성(性)이 되고 피어나면 정(情)이 되는 것이다. 바깥이 둥글고 속이 뚫린 것은 마음의 체(體)요, 신명(神明)하여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용(用)이 되어서, 기(氣)를 타고 동하면 하늘에 날 수도 있고 연못에 잠길 수도 있으며, 차게 되어 얼음 같을 수도 있고 모아져서 불같을 수도 있어서 그 변화가 한결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공경으로써 운용하여 마음을 옮겨 성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고 하여, 마음을 언제나 공경으로써 조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양선생왕복서〉인데, 이것은 기대승이 이황(李滉)과 8년여의 긴 세월에 걸쳐서 성리(性理)의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변한 왕복서간 문집이다. 사단칠정 논쟁은 퇴고사칠논변(退高四七論辯) 해석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황은 정지운(鄭之雲)이 “사단은 이(理)에서 발(發)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다.”고 한 것을 “사단은 이의 발이요 칠정을 기의 발이다.”고 수정했는데, 기대승은 여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단과 칠정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사단은 칠정에 포함되어 있는 정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일원론적 토대 위에서,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비시키고 이·기를 둘로 나누어서 사단과 칠정에 분속시키는 이황의 이원적 입장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기대승의 반론에 따라 이황은 자신의 이론을 몇 차례에 걸쳐 수정하게 되었고, 그 뒤의 성리학자들은 이황과 기대승이 논변한 심성(心性)의 문제를 성리학 연구의 핵심으로 삼게 되었다.
1976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영인 복간한 ≪고봉전집≫에는 기대승이 ≪주자대전≫에서 초록해 공부한 ≪주자문록 朱子文錄≫ 상·중·하·속집의 4권이 첨부되어 있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참고문헌>>高峰集解題(尹絲淳, 1976)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
중국 송나라의 고승 고봉의 법문을 모아 엮은 책
중국 송나라의 고승 고봉의 법문을 모아 엮은 책. 1권. 선(禪)수행의 요령을 간추려서 설명한 책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 전문강원의 중등과정인 사집과(四集科)의 세번째 과목이다.
이 책은 고봉의 시자 지정(持正)이 기록하고 홍교조(洪喬祖)가 편록하여 ≪선요≫라 이름을 붙였으며, 책머리에 홍교조의 서문과 주영원(朱潁遠)의 발문이 있다. 총 29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가 큰 뜻을 분발하여 조사(祖師)의 현관(玄關)을 뚫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개당보설(開堂普說) 1편, 시중(示衆) 14편, 결제시중(結制示衆) 2편, 해제시중(解制示衆) 3편, 입양시중(立陽示衆) 1편, 제야소참(除夜少參) 2편, 만참(晩參) 1편, 직옹(直翁)과 신옹(信翁)과 이통(理通)에게 내린 법어 3편, 통앙산화상의사서(通仰山和尙疑嗣書) 1편, 실중삼관(室中三關)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고봉의 첫 법문인 개당보설에서는 방거사(龐居士)의 〈시방동취회 十方同聚會〉 법문을 들어서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를 볼 것과, 자기의 경험을 예로 들어 의정(疑情:의심)을 크게 가져서 도를 깨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제7장 시중에서는 마음을 밝히려면 일체의 선악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제26장 시중에서는 참선할 때 밝고 밝지 않음을 논하지 말고 대분발심과 큰 의심으로 일관해서 수행하여야 함을 밝혔으며, 제13장 결제시중에서는 삼현(三玄)의 요지를 밝히고 있다.
또, 제29장 실중삼관은 고봉의 3대가풍을 소개한 것으로서, ① 밝은 해가 허공에 있어 비추지 않음이 없거늘 무엇으로 인하여 조각구름의 가리움을 입는가? ② 사람마다 그림자가 있어서 촌보(寸步)도 떠나지 않는데, 무엇으로 인하여 밟아도 밟히지 않는가? ③ 온 대지가 한 개의 불구덩이라, 어떤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을 수 있는가?를 들었다.
이 책은 고봉이 겪은 갖가지 경험을 토대로 하였고,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 간절함과 뛰어난 지혜의 섬광이 곳곳에 나타나 있어 방황하는 수도인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고려 이후 우리 나라 선종 승려의 필독의 서적으로 채택되었다.
정확한 전래연대는 알 수 없으나 1358년에 최초로 간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고승 지엄(智嚴)이 이 책을 매우 중시하여, 수행인은 반드시 이 책을 읽고 장애를 없앨 것을 강조하였다.
그 뒤 청허(淸虛)의 4세 법손(法孫) 설제(雪霽)가 사집과에 이 책을 편입시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불교강원의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의 주석서로는 조선 후기의 고승 유일(有一)이 지은 ≪선요사기 禪要私記≫ 1권과 긍선(亘璇)이 지은 ≪선요기≫ 1권이 있다.
또, 이 책에 관한 판본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1399년 8월 지리산 덕기사(德奇寺) 개판본과 1501년 가야산 봉서사(鳳棲寺) 개판본, 1565년 논산 쌍계사(雙溪寺) 개판본, 1604년 하동 쌍계사 개판본, 1608년 조계산 송광사 개판본, 1633년 안변 석왕사(釋王寺) 개판본, 1634년 장흥 천관사(天冠寺) 개판본, 1635년 정읍 용장사(龍藏寺) 개판본, 1681년 울산 운흥사(雲興寺) 개판본, 1686년 승주 징광사(澄光寺) 개판본 등이 전한다.
<<참고문헌>>韓國佛敎所依經典硏究(李智冠, 寶蓮閣, 1969)
<<참고문헌>>四集譯解(韓定燮 譯, 前卍商會, 1976)
<<참고문헌>>팔만대장경해설(李慧惺, 普成文化社, 1978)
고사실기(孤査實紀)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문덕수의 실기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문덕수(文德粹)의 실기. 2권 1책. 목활자본. 1914년 그의 11세 손 용(鏞)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곽도(郭鋾)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조명서(曺明恕)·장석영(張錫英)·이긍현(李亘鉉)·하겸진(河謙鎭)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3수, 서 1편, 제문 1편, 부록시(附錄詩) 3수, 권2에 부록으로 제문 1편, 유사 1편, 행록 3편, 묘갈명 1편, 묘지명 1편, 통문(通文) 1편, 기 1편, 제(題) 19편, 문(文) 4편, 정려기(旌閭記) 1편, 찬(讚) 1편, 명 3편, 시 8수, 서(序)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는 그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면서 자신의 효심이 미흡함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지극한 효성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서(書)는 1591년(선조 24) 나라일을 건의하다가 문제가 되어 대구감영에 갇혀 있는 아들에게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이 비장하고 또한 충성에 가득차 있다.
제문은 그의 친구인 오건(吳健)에 대한 것으로, 그들 간의 깊었던 우정과 친구를 잃은 슬픔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부록의 제·정려기·찬·시 등에는 모두 그의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충절이 기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산문집(孤山文集)
조선 후기의 학자 이유장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유장(李惟樟)의 시문집. 10권 5책. 필사본. 손자 재기(載基) 등이 편집해놓은 것을 1775년(영조 51) 현손 홍진(弘辰)·상진(象辰)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상정(李象靖)·정범식(丁範植)의 서문이 있다.
권1∼3에 시 493수, 권4·5에 서(書) 78편, 잡저 4편, 서(序) 2편, 기 4편, 권6∼8에 발 9편, 제문·축문 23편, 명 2편, 행장 5편, 묘지명 19편, 묘갈명 12편, 권9·10은 부록으로 행장·역책기사(易策記事)·묘갈명·묘지명 각 1편, 제문 17편, 만사 13수, 봉안문·상량문 각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품격이 청고하고 중후하나, 사실적인 면에서도 날카로운 지감을 보인다. 〈과선성 過宣聖〉·〈방수락대 訪水落臺〉 등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잘 묘사하여 오랫만에 만나는 친구들의 기쁜 얼굴에 비유시켰다.
〈답유졸재서 答柳拙齋書〉·〈답김군중담서 答金君重儋書〉등의 서에서는 ≪심경≫·≪근사록≫ 등에서 추출된 성리학에 대한 논변, ≪가례≫에 미진한 예설의 심층해석, 인물성동이에 대한 견해 등 광범위한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
〈선생유사 先生遺事〉는 이황(李滉)의 유사 가운데 ≪계산기선록 溪山記善錄≫에서 누락된 부분, 일상생활에서 특이한 점, 가동(街童)들의 전언에서 보충하여 학자들의 귀감을 삼게 하였다.
〈이선생예설 二先生禮說〉은 주희(朱熹)와 이황의 예설에서 중요부분을 초록, 정리하고, 두 분의 학덕을 추모하고 행동을 모방하였다.
그 밖에 예안이씨(禮安李氏)의 가계를 밝히고 문중의 인사들을 칭찬한 〈예안이씨족보서 禮安李氏族譜序〉, 향양재(向陽齋)의 연역과 주위 경관을 설명한 〈향양재기 向陽齋記〉가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고산문집(鼓山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임헌회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임헌회(任憲晦)의 시문집. 27권 16책(원집 10책, 속집 4권 3책, 부록 3권 3책). 목활자본. 1883년(고종 20) 문인 전우(田愚) 등이 편집, 간행했으며, 부록은 그 뒤 1932년 김종학(金鍾學)이 간행하였다.
또한 1937년 이인구(李仁矩)가 ≪전재문집 全齋文集≫이라는 제목으로 석판본 20권 10책을 간행했는데, 내용은 ≪고산문집≫과 대동소이하며, 다만 편차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1985년 아세아문화사에서 ≪고산문집≫을 대본으로 각종 부록과 아울러 영인, 간행한 ≪임헌회전집≫ 5책이 있다. 이 문집에는 서문과 발문이 없다.
원집의 권1에 부(賦) 3편, 사(詞) 1편, 시 206수, 시여(詩餘) 4편, 권2에 소(疏) 17편, 계(啓) 21편, 의(議) 5편, 권3∼7에 서(書) 362편, 권8에 잡저 22편, 권9에 서(序) 15편, 기(記) 11편, 제발(題跋) 26편, 명(銘) 8편, 찬(贊) 6편, 권10에 혼서(昏書) 2편, 상량문 2편, 고축(告祝) 24편, 제문 19편, 권11∼15에 신도비명 2편, 비 5편, 묘갈명 22편, 묘지명 38편, 묘표 4편, 시장(諡狀) 1편, 권16∼18에 행장 26편, 권19에 유사 6편, 어록 3편, 권20에 전(傳) 15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속집의 권1에 시 16수, 소 1편, 서(書) 38편, 잡저 25편, 서(序) 6편, 기 12편, 제발 19편, 잠 3편, 명 10편, 찬 2편, 혼서 1편, 상량문 1편, 고축 2편, 제문 4편, 권2∼4에 신도비 1편, 묘갈명 30편, 묘지명 20편, 묘표 3편, 시장 1편, 행장 9편, 전 3편, 부록으로 권1∼3은 연보·가장(家狀)·행장·신도비명·묘지명·사제문·제문·어록·집촉록(執燭錄)·제가기술(諸家記述)·유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사·시 등은 서정적인 작품보다 학구 생활과 관련된 소재가 많다.
부의 〈화귀거래사 和歸去來辭〉는 1840년(헌종 6)에 지은 작품으로 중국 도잠(陶潛)의 〈귀거래사〉 체제를 그대로 본받아 저자 자신의 출처에 관한 뜻을 담은 명문이다.
소는 〈사이조참판겸진소회소 辭吏曹參判兼陳所懷疏〉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사직소이지만, 격동기에 유자(儒者)로서 시국관이 어떠하였는지 살필 수 있다.
계는 주로 별유후서계(別諭後書啓)이다. 의의 〈당저사위후중궁전진호위대비전의 當宁嗣位後中宮殿進號爲大妃殿議〉·〈대왕대비왕대비복제의 大王大妃王大妃服制議〉 등은 국가의례에 관한 자문에 답한 내용이다.
서(書)는 그의 스승인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을 위시하여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 및 사우(士友) 조병덕(趙秉悳)·신응조(申應朝)·홍일순(洪一純)·김평묵(金平默)·이응진(李應辰)·소휘면(蘇輝冕), 그리고 문인 전우·서정순(徐政淳)·윤치중(尹致中) 등과 주고받은 것으로, 주로 경전·예설 (禮說)·성리설·태극·심성(心性)·이기(理氣) 등에 관한 논술이 많다.
특히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김평묵과 왕래한 서한은 ‘명덕(明德)’에 대한 기본적 견해가 명덕주기설(明德主氣說)과 명덕주리설(明德主理說)로 차이를 나타내면서 새로운 학파적 논변으로 발전되었다.
그가 명덕을 심(心)으로 파악한 점은 화서학파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그는 “명덕이 중리(衆理)를 갖추고 있으며 만사(萬事)에 응한다.”는 점을 심(心)의 체(體)와 용(用)으로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명덕은 비록 형이하(形而下)이지만, 갖추어져 있는 바의 이(理)는 곧 형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심(心)은 형이하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갖추어져 있는 바 소이연(所以然)으로 말한다면 형이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명덕주리·주기의 분별은 명덕의 유위(有爲)·무위(無爲)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알 수 있는데, 이(理)가 정의(情意)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관찰하여보면, 명덕은 정의가 있고 지각(知覺)이 있는 물사(物事)이며, 이(理)는 단지 정의와 지각이 없는 물사이다. 따라서, 명덕은 주기적인 입장에서 파악해야 되는데, 주기적인 입장이 이(理)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심(心)을 이(理)로 파악하는 김평묵 등의 논의는 기(氣) 위에 나아가 이(理)를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명덕에 갖추어져 있는 이(理)와 명덕의 허령불매(虛靈不昧 : 마음이 거울같이 맑고, 靈妙하여 무엇이나 뚜렷이 비추워 일체의 대상을 明察함)한 상태를 함께 이(理)로 파악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조병덕에게 답한 서한에서는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 즉 “생한 것을 성(性)이라고 이른다는 말은 대체로 생하기 전에는 성을 말할 수 없으며, 생이 있는 후에야 비로소 성이라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잡저 가운데 〈이계 二誡〉는 부모의 상례(喪禮)를 성경(誠敬)으로 하고, 내외(內外)를 엄하게 해서 가도(家道)를 바르게 하라는 가법을 전하고 있다.
〈예의쇄록 禮儀瑣錄〉은 당시 시행되고 있던 상제례(喪祭禮)의 불합리한 점을 논한 것이며, 〈제찬도설 祭饌圖說〉·〈거상의 居喪議〉·〈조주체봉의 祧主遞奉儀〉·〈조주매안의 祧主埋安儀〉 등에서는 상제의식(喪祭儀式)에 관한 해설과 도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간서잡록 看書雜錄〉·〈경의쇄록 經義瑣錄〉은 경전상의 난해한 어구에 대하여 제현의 설을 인용하고 고증, 분석하였다. 〈매산선생어록 梅山先生語錄〉은 홍직필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평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전 가운데 〈화망건선생전 畫網巾先生傳〉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 춘추대의를 지켜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망건선생의 일화를 기록한 글로, 조선 후기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의 대명관(對明觀)을 알 수 있는 글이며, 또한 저자 자신이 대명유민(大明遺民)으로 자처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문집은 임헌회의 사상과 시국관·출처관 등, 19세기 당시 기호유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