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엄마 올레길/박응렬
지난 초여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것은 어머니에게 가는 길이었다. 비록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내 마음 속 고향에는 늘 어머니가 계신다. 이번에 내려가면 장성 외가에서 영광 집까지 어머니가 걸으셨던 길을 걸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어머니가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걸었던 그 길, 형편이 조금 나은 외가에 가서 새끼들 주린 배를 달래 주시겠다고 얻어 온 한 자루 쌀이었다. 자식들 위하는 희생이 그렇게도 혹독해야 했던가? 나는 금세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밀려와 눈이 흐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무지했던 사람, 그러나 진정으로 강했던 사람, 울 엄마! 울 엄마가 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자식을 기르고 육십이 넘은 나이가 된 지금, 나는 어머니처럼 순박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이 조금이나마 있는지 되돌아본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어느 날, 어머니와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다투었다기 보다는 어머니를 일방적으로 쏘아붙인 나 혼자만의 투정이었다. 외가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나에게 320원을 쥐어 주셨다. 젖은 지폐와 물기가 미끈한 동전, 어머니의 땀이 배인 돈이었다. 과학 자습서를 사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투덜거렸던 며칠 후의 일이어서 마음에 걸렸다. “무슨 돈이야”하고 물어보니, 외할아버지 제사에 다녀오시던 길에 외가댁에서 차비하라고 준 돈인데 자습서 살 돈을 주기 위해서 걸어오셨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고마움보다는 어머니의 무지몽매함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책가방과 돈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엄마는 왜 그렇게 멍청하고 답답하게 살아. 돈 몇 푼 아끼려고 그 먼 길을 걸어오는 멍청한 사람이 엄마 말고 또 누가 있어. 엄마가 그렇게 답답하게 살 거면 나 학교 안 다닐 거야!”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않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꼭 껴안고 엉엉 울었다.
나를 워낙 늦둥이로 낳다보니 그 때 어머니는 회갑인 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잦은 병치레를 하시던 분이 돈 몇 푼 때문에 80리 길을 걸어서 오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난 이성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계산도 할 줄 모르고, 이해타산을 따질 줄도 모르고, 세상물정 아무 것도 모르셨다. 오직 자식만 생각하시는 그런 분이셨다. 그렇게 사는 걸 당연히 여기셨고, 자식들을 위해 좀 더 많은 것을 베풀지 못하는 것을 항상 미안해하시며 죄스럽게 생각하는 분이셨고, 당신의 삶 전부를 자식들만을 위해 쏟으셨던 그런 분이셨다.
어머니가 가신 지 어느 새 24년이 되어 간다. 아직도 어머니가 정화수 떠놓고 촛불을 밝혀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언제 부턴가 어머니의 기도는 생활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동네 앞에 우물이 있었을 때에는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셔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깨끗한 물을 떠놓고 기도하셨고, 지하수 관정을 이용한 이후에는 바로 끌어올린 물만을 사용하셨다. 부정 타지 않은 깨끗한 물만을 사용해야 효험이 있다며 자식들을 위한 기도에 지극 정성을 들이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나 결혼하고 난 이후 돌아가시던 그 날까지 저녁 늦은 시간과 이른 새벽에 늘 같은 모습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를 올리셨다.
기도하면서 중얼거리시는 걸 들어보면 졸업하고 시험 준비할 때에는 꼭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고 어머님 뜻대로 합격하였다. 합격 후에는 좋은 색시 만나 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결혼 후에는 아들 딸 잘 낳아 복 많이 받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딸만 둘 낳으니 이번에는 아들 낳게 해달라고 기도하셨고 원대로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어머님이 기도한 것은 모두 이루어졌다. 그리고는 막내 손자가 태어난 후 3주 후에 어머님은 먼 길을 떠나셨다. 곁에서 기도를 듣고 있던 형수들은 다른 아들들을 위해서도 기도 좀 해달라고 투정을 부릴 정도였다. 늦은 나이에 미숙아나 다름없이 태어난 막내에 대한 애정이 너무 과하기도 하셨던 것 같다.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의 ‘지극정성이 하늘에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 집도 무척 어려웠다. 어머니는 집에 양식이 떨어지면 살림이 좀 여유로운 외가에 가서 쌀이나 곡식을 얻어서 머리에 이고 80리길을 걸어서 오시곤 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친정집에 다니실 때 어머니의 마음은 과연 어떠하셨을까? 얼마나 힘들고 서러우셨을까? 나는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 그 자그마한 체구에 어떻게 쌀을 한 말이나 이고 그 먼 길을 걸어서 올 수 있었을까? 굽이굽이 굽어진 깃재 고갯길을 어떻게 넘으셨을까?
나는 연휴를 이용해 어머니가 걸었던 그 길을 한번 걸어보기로 했다. 당시의 도로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고, 가파른 고개도 없어졌지만 어머니가 걸었던 그 길을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어머니처럼 무거운 짐은 아니지만 조그마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오직 자식만을 생각하며 힘겹게 걸으셨을 그 길을 걸으며 어머니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었다.
출발은 초여름, 6월이라 그런지 무척 더운 날씨라 늦은 시간에 걷기로 했다. 오후에 광주를 출발해 장성에 있는 외가까지 가는데 길이 많이 바뀌어 도착까지 한참이 걸렸다. 어릴 적 뛰어놀던 외가는 홀로 계시던 외숙모마저 돌아가셔서 빈집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을 설치한다고 주변 땅이 모두 수용되었는데, 매실나무골 외가는 비껴갔고, 외사촌들과 놀러 다니던 맞은편 관동리 마을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렸을 때 그곳에서의 감회를 안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후 다섯 시, 나는 외가 마을 장성 황룡면 맥호리 매실 마을을 출발하였다. 실타래처럼 줄줄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태 자리, 영광 대장동 마을로 향했다. 뙤약볕을 안고 걷기 시작한 오솔길! 한참을 걸어 조그만 언덕을 하나 넘으니 ‘수양저수지’란 곳이 나왔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길옆의 산과 들, 진한 초록의 소나무, 전나무 등 상록수에서 연둣빛 새잎으로 치장한 참나무, 오리나무 등 활엽수까지 온 천지가 푸르러 생명의 힘이 용틀임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끝물에 와 있는 연분홍빛 철쭉이 어우러져 더욱 환상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봄철 일년 농사를 짓기 위한 농부들의 손놀림이 바빴고, 특히 들판에서 밭을 일구고 계신 어느 꼬부랑 할머니의 버거운 모습은 마치 울 엄마 뒷모습과 같아 발걸음이 무거워 한참이나 눈시울을 적셔야만 했다.
동화면 발산리라는 마을을 지나 두어 시간 걸으니 사창이라는 면소재지가 나오고, 오랜 전통의 사창초교 정문에 서있는 소나무와 향나무가 무척이나 운치 있어 보였다. 한참을 걸어서인지 배가 출출하여 식당에 들러 국밥이나 먹을까 하는데 문득 울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이때 쯤 어떻게 하셨을까? 차비 한 푼이 아까워 걸어오셨던 그 분! 그 분은 정녕 이 식당 앞을 지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오로지 자식을 위한 일념 하나로 지치고 허기진 몸을 추스르시며 이 앞을 지나가셨을 바보 같은 울 엄마! 지금 난 어머니의 머리 위 쌀 대신 작은 배낭을 메고, 헐렁한 고무신 대신 듬직한 등산화를 신고 그 길을 걸으면서도 지치고 힘들어하는 나약함에 나 자신이 슬퍼졌다. 식당에 들어가 뭘 사먹는다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질 않아 물과 빵 하나만 사들고 깃재 쪽으로 향했다.
영광으로 가자면 마치재와 깃재, 둘 중 하나는 넘어야 한다. 마치재는 질러갈 수 있으나 험한 산길이어서 어머니는 좀 멀지만 깃재로 가셨을 게다. 여덟시가 가까워지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큰 길만 따라가야 한다. 상무대 정문까지는 길이 넓은데 그 이후는 옛길 그대로이고 다니는 차도 별로 없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 주변에서 어미가 그리워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 소리에 귀가 멍했다. 마침 전화를 해 준 친구에게 들려줬더니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고향의 소리라며 어린애마냥 좋아했다.
용매골이라는 곳을 지나 깃재 정상에 도착하니 9시 15분. 반달은 중천에 떠있고 가을에나 볼 수 있는 양떼구름 사이로 반짝이는 별들이 이곳을 지나쳤을 어머니 모습을 또다시 또렷하게 그려냈다. 어머니도 이쯤 지나실 땐 이제 반은 왔구나 하시며 위안을 받으셨겠지 생각하니 저 멀리 어머니가 마중 나와 반겨주시는 것 같았다.
영광 대마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원한 밤공기가 도시에서 찌든 때를 깨끗이 씻겨주는 느낌이었다. 대마 초교와 원흥 삼거리를 지나니 익숙한 옛길이 나타났다. 중·고등학교 때 수해가 나면 복구 작업을 나왔던 해룡천이 밤길에도 유유히 흐른다. 장동 마을과 북문재, 영광군청을 지나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 꼭 여덟 시간이 걸렸다. 아마 그 시절 어머니는 이보다 훨씬 더 걸리셨을 게다.
정말 힘든 여정이었다. 발바닥과 무릎, 허리까지 쑤셔왔다. 등산과 마라톤으로 걷고 뛰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무척 힘이 들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 먼 길을 그 무거운 쌀을 이고 넘어 오실 수 있었을까? 회갑이던 그 해, 단돈 320원을 아끼기 위해 그 먼 길을 어떻게 걸어서 오실 수 있었을까? 오로지 자식들 먹여 살려야겠다는 사랑 하나가 자그마한 우리 어머님을 그렇게 강하게 만드셨던 것일까? 어머니는 가시면서도 자식들 짐을 모두 가슴에 묻고 이승과 저승의 올레길을 가셨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세간의 평범한 이야기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를 가장 철저하게 실천하고 가신 분이 바로 울 엄마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엄마! 미안해. 그 때 화냈던 거. 정말 미안해. 그리고 또 올게.
힘든 일이 있거나 엄마가 생각 날 때, 기쁜 일이 있거나 엄마가 그리워질 때, 울 엄마 올레길 걸으러 또 올게. 엄마처럼 그렇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엄마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막내며느리와 손자, 손녀들에게 엄마 마음만은 전해 줄게. 울 엄마 사랑을 얘기하며, 손잡고 또 올게.”
첫댓글 아침에 일어나 이 글을 읽으며 눈가를 적시게 되었습니다. 감동적인 글이네요. 울 엄마 생각도 많이 났구요. 글을 읽는 동안 글쓴이의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카페에 자주 들어오지 못해 이제야 답글 올립니다.
늦게 올리는 바람에 오늘 수업에서는 다루지 못할 듯해서 간단히 독후감 남깁니다.
잘 썼어요. 관찰력도 있고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솜씨도 좋아요. 여기서 문장 다듬는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글 쓰겠어요.
그런데 어머니 얘기를 앞에서 다 하지 말고 걸으면서 떠올리는 방식으로 해야 더 감동적이지 않을까요? 감추면서 조금씩 드러내야 읽을 맛이 나거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글도 저번 수업에서처럼 수정할 부분 지적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박응렬 바로 앞에 있는 송수경 씨 글에 단 내 댓글의 첫 단락으로 내 대답 대신합니다.
"이 글도 오늘 수업하면서 같이 읽지 못합니다. 약속 시간 지키지 않으면 이렇게 홀대받으므로 다들 명심하세요."
감동입니다.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쓰는 글이 남에게도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배웁니다
체구는 작았으나 자식들 위하는 마음은 하늘보다 큰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어머니의 사랑 못지 않게 8시간의 야간 산행을 홀로 하신 분도
제게는 놀랍습니다.
멋지게 대미를 장식하는 문우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어머님의 대한 회한은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길은 지금까지 서너번 걸었는데 걸을 때마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이 술술 잘 읽히고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이 전해져 마음이 찡합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어머님에 대한 회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문우님, 고맙습니다.
저도 그 길을 걸어 보고 싶네요.
우리 엄마도 몇 푼 아끼려고 무거운 짐을 이고도 그러셨어요. 맨날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요. 그렇게 살다 가셨습니다. 우리 엄마들은 모두 다 그런가 봅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 길을 걸으셨다니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