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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흥김씨 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자
“서흥인의 자긍심 갖고 한훤당 선생 위업 후세에 전해야”
희용熙勇 대종회장에 듣는다
*대종회 창립20주년 신년특집*
2013년 10월16일 수요일. 희용(熙勇) 회장은 주중 한창 바쁜 오전 시간에 종로5가 대종회사무실까지 나오시어 인터뷰에 응해 주셨다. 대종회는 이제 20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신년호 종보에 20주년 신년특집을 마련, 희용 회장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것들을 묻고 답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희용 회장은 이날 특별대담에서 대종회를 창립하고 초대 대종회장을 지낸 故 탁동[鐸東 字 인득(仁得) 24世 영남 장파] 선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사 전반에 대해서는 대종회장을 맡은 게 희근(熙瑾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동생의 권유 때문이라면서 말을 아꼈지만 동양물산 설립배경과 회사경영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셨다. 익산 공장 등에 내려가 정기사원교육 강좌를 직접 맡으며 인재양성에 1년 내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며 서흥인의 뿌리체험교육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랬다.
희용 회장은 문중의 젊은 청장년 종원들에 바라고 싶은 게 있다면 대종회 모임 등 종사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라며 종사 참여를 누차 강조했다. 특히 서흥김씨에 대해서는 동방오현의 수현을 선조로 모시고 있는 문중임을 자각해 항상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후세들에 조선조 학문의 기초를 닦은 한훤당선생의 위업을 반드시 전해주어야 한다고 몇 번씩 강조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며 한문을 배우고 중국어를 익히라는 당부 또한 잊지 않았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 기업경영 등 과중한 업무에도 종사에 참여하면서 늘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희용 회장에게 건강관리 비결을 물으니 대답은 너무나 간결했다. 건강관리를 안하는 게 건강유지라며 난관에 부딪히거나 시련을 겪을 때 마음을 비우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며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 한번 그대로 받아들여 보라고 대담자에게 권유도 했다. 대담은 대표질문자 기후 종보 편집주간 외에 병국 사무총장, 카페운영자겸 편집위원 성용 이사가 참석해 오전9시40분 부터 12시15분까지 2시간35분동안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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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은 대종회가 창립20주년을 맞는 해다. 대종회 창립 까지 문중 발전을 위해 뜻을 모으고
불철주야 애쓰신 분들이 계시다. 그 분들 중에 우뚝 서 계셨던 분이 바로 벽산그룹 창업주
인득 회장님이셨다. 희용 회장은 선친(先親)이야기부터 말머리를 끄냈다.
선친께서는 1915년 8월 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외갓집은 칠서면과 이웃한 칠원면으로 칠원윤씨(漆原尹氏)의 관향이자 세거지였다. 서흥김씨가 양반중의 양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칠원윤씨 외할아버지께서 맏딸을 그때는 깡촌이었던 서흥김씨집안에 시집 보냈는데 선자친(先慈親)께서는 선친(先親)보다 한 살 위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칠원면의 외갓집으로 모이면서 피난 온 가족들로 붐볐고 당시 외할어버지 무릎에 앉아 족보교육을 다부지게 받으며 나의 뿌리와 한훤당 선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선친께서는 함안에서 마산까지 40리를 걸어 학교를 다녔다. 하체가 아주 튼튼했고 축구와 배구 탁구 씨름 등 교내 체육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34년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했는데 한번은 시험을 보러가는 길에 길가에서 미더덕찜으로 허기를 채우다 그만 시험시간을 놓쳐 버려 졸업도 늦어지셨다.
서울 환도 전까지 마산과 진주 부산 등지를 오가며 금융조합과 상공회의소 등에서 일하면서 해방 후 무역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당시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여가문화가 척박했다. 대중문화사업을 찾는 중에 외국영화를 수입하게 되면서 1951년 부산에서 벽산그룹의 모태가 된 동양물산을 창업하게 되었다. ‘남과 같이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신조는 이때부터 평생 선친의 몸에 밴 경영철학이 되었다.
선친께서는 47세이던 62년, 영화사업에서 제조업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같은 해 한국스레트공업을 인수, 지붕개량에 온힘을 쏟았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아버지를 만난 건 바로 이때였다. 박대통령이 포천지역 농가마을을 지나다 낡은 지붕을 개량해 말쑥한 새마을로 단장되고 있는 농가를 보고 차를 멈춰 세웠고... 박대통령은 현장을 지휘하던 선친을 만나 막걸리를 한잔하며 지붕개량사업에 관심을 보였는데 새마을사업의 실마리가 태동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다. 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농어촌근대화사업의 뒤에는 아버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건설사업과 함께 1972년 안양 박달동에 농기구 공장을 발족시켰다. 당시 산업현장 곳곳에서 젊은이들의 일손이 부족했었다. 농기계를 만들어 농사일을 돕게 해주면 농촌의 젊은이들을 산업현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
어 산업과 농촌을 다 도와줄 수 있는 일거양득희 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게 선친의 철학이었다. 뿐만아니라 돈을 묶어두는 부동산이나 돈놀이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이 고이면 썩듯이 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셨다. 오로지 벽재와 천장재, 페인트 등 상호 연관된 분야의 산업을 일구며 한국건업을 통해 건설사업을 일으켰다.
양친께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선친께서는 승동교회 장로시절 일요일도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해 단성사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동양물산에서는 기독실업인연합회 즉 CBMC(Christian Business Men's Committee)를 처음 만들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직장예배의 효시였다. 어머니 윤현의(尹賢義) 권사의 내조가 컸다. 선자친께서는 교회활동이외에도 YWCA연합회 후원과 극동방송 이사로 활동하면서 방송선교에 힘을 쏟았다. 김장환 목사는 북방선교를 돕는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극동방송의 건물이름을 『현의기념관』으로 명명했다.
종사에 대한 소회는...
종사에 대한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좋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되고...
문중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칠원 윤씨 집안의 외할아버지 때부터 나의 조상 나의 뿌리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선친께서 경현록을 만들 때 한훤당 선생이 대단한 학자였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당시 미국의 흑인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가 베스트셀러였는데,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미국에 정착한 흑인들마저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어 하는데 조선의 최고 학자 집안에서 모르고 있다면 말이 되겠는가?
한문이 짧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동방오현(五賢: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의 수현 문중이라는 사실에 뿌듯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 선친께서 한 때 경순왕의 넷째 아들 보국대안군 평장사(輔國大安君平章事) 김은열(金殷說) 공의 5세손 후손인 서흥문중이 주축이 되어 신라김씨후손들을 하나의 종중으로 통합하려는 일을 시작하려다 당시 정치적인 운동으로 잘못 비쳐저 고초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한훤당 선생을 배출한 우리 문중이야말로 조선 수현의 명문가임을 항상 가슴에 새겨 한훤당 선생의 뜻을 펼 수 있는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
종사에 대한 지금 생각은...
대종회장 맡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맡고나서 종친들의 격려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대종회장 직분을 맡고 있는 동안 그 때까진 최선을 다하겠다.
다만 대종회에 젊은 사람들이 나오면 좋겠다. 기회가 되면 한훤당 선생을 주제로 출판물을 간행하든지
서원 마케팅을 통해 선생의 사상과 학문이 조선조에 끼친 영향을 파헤쳐 보고 싶다. 조선의 수현을 세상에
알리는 일 등을 가까운 지인 작가를 통해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의 수현(首賢)을 살리려면 우리 문중이 오현 중의 나머지 사현(四賢)을 띄울 필요가 있다.
그래야 수현이 살지 않겠는가... 또 서흥인의 정체성을 되찾아 줄 수 있는 뿌리교육만큼은 교육대상을 바꿔가면서 해마다 열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우리 문중이 조선조를 거치면서 오랜 기간 침체기가 있었지만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속담이 있듯 장기발전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품어 나가면 되지 않겠는가...
대종회의 향후 발전방향에 대해...
대종회가 발전하고 활성화 되려면 우선 모임부터 활성화 되어야 한다.
우선 모여야 무엇을 하지... 모이지 않고 참여도 안하는데 무슨 일을 하겠는가?
5월 정기총회 참석률도 중요하지만 먼저 대종회 임원회의 같은 모임에 임원들이 많이들 참석해
종사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대종회의 모임도 가념사업회, 서흥회, 삼목회 등 여러 모임이 있는데 대종회가 중심이 되어
조직을 단순하게 하면서 피라미드조직을 구축해야 한다. 대종회발전계획에 종보편집실을 갖춘 자료실을
만들고 장학사업과 회관건립을 목표로 모금사업도 좋지만 대종회 발전계획의 우선순위는 청장년모임을
활성화해서 청장년을 끌어들이는 것이 먼저다. 그래서 종사를 맡을 청장년 종원들이 대종회에 모여야 한다.
대종회에 자료실과 종보편집실을 만들어 운영하려면 전문인력이 필요한데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알맹이가 빠졌다고 본다.
대종회 주관하에 기념사업회를 운영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옳다. 유림과 유학자들은 기념사업회가 추진하는 학술회의 등 제반 사업을 자문하고 조언하는 그런 역할을 맡으면 될 것이다.
동양물산은 동남아, 미주, 유럽뿐만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까지 글로벌시장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현재 중국과 미국, 인도 등 7개국에 현지법인이 설립되어 있고
2020년 매출 1조, 수출 5억불, 영업이익 10% 달성의 글로벌경영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국내 최대의 농기계메이커 동양물산은 이제 글로벌종합기계메이커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매출액은 2011년 3,278억원, 2012년 3,590억원, 2013년 3,646억원이다.
동양물산의 또 다른 주력 생산품은 담배필터다. 첫 수출품이 바로 이집트에 수출한 담배필터였다.
세계시장에서 가장 좋은 제품으로 명성이 높고 생산품 27종의 종류도 다양하다.
매출액도 2012년 682억원(2013년 통계)으로 전체의 19%를 차지한다.
1973년 상장된 동양물산의 종업원 수는 국내 715명, 중국 360명, 미국 28명 등
모두 1,103명에 이른다. 동양물산기업 경영 전반에 대해...
1987년 동양물산기업(주) 대표이사 사장을 맡았을 때 당시 회사는 적자였다. 선친께서 챙겨보라며 회사경영을 맡기셨다. 당시 오기가 발동했다. 생산현장에 기거하면서 한눈 하나 팔지 않고 기술과 돌아가는 공정을 몸으로 때우며 체득했다. 근30년을 동양물산에 몸담으며 장인정신하나로 숟가락 젓가락에서부터 공장장에
이르기까지 최고제품을 만들고 최고권위자를 양성해왔다. 최신 공작기계 등을 갖춘 생산설비라인도 확장해 농기계 사업뿐만 아니라 플랜트수출(농기계 조립공장 및 생산설비)을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동양물산기업(주) 익산공장은 내수 부문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건설기계(굴삭기, 운반 차 등)와 다양한 작업기를 농촌에 공급하기 위해 연구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국내 최초의 150마력 트랙터 'TX1500'는 중앙기술연구소의 연구개발 성과다. 묵직해 보이는 농기계를 유선형의 빨간색 디자인모델로 바꿔놓았다. 해외시장 반응도 좋았다. 성적매력(sex appeal)을 가미한 이 같은 디자인은 미국 인디애나주 상업미술대학에서 공부한 경험을 살려 직접 디자인 한 것이다.
인재양성은 어떤 식으로...
동양물산은 인재 양성을 위해 사내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한 달에 두 번씩 공장에 내려가 사내교육을 직접 맡고 있다.
교육대상도 일반사원, 중견사원, 임원을 대상으로 1년내내 지속적으로 반복 운영하고 있다.
북한지역에 농기계도 수출하는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를 통해 남한의 대북자금을 이용 2004년부터 북한의 김일성트랙터 공장에
농기구를 5~6차례 공급했으나 지금은 전기와 기름이 없어 공장 문을 닫았다. 그래서 정부 허가를 받아
평양부근의 청산리에 금성동양트랙터공장을 만들어 기술투자를 했으나 시작 1년만에 중단된 상태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직을 맡고 최근 『중견련』 활동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계신데
『중견련』 이 하고 있는 일은...
중경련(한국중견기업연합회)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사이에서 산업의 허리역할을 맡고 있는 경제단체다.
중견기업육성법,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 등 관련법을 제정하고 개선하여
중견기업의 고용효과와 수출기여도를 높이고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건실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맡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국제관계부위원장,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맡고 계신데...
선친의 뜻에 따라 상공회의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상공회의소는 관할구역의 상공업계를 대표하여 회원의 권익을 대변하고 기업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을 돕고자 1884년에 설립된 오랜 역사를 가진 종합경제단체다.
희용 회장은 불가리아 명예총영사에 불가리아 대통령 제1훈장(Madarski Kommik)과 불가리아
외무부 명예훈장도 받았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는 한-불가리아 경제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불가리아와의 친분관계가 어떻게 맺어졌는지...
불가리아는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가 열린 2년뒤 1990년 3월 한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한국주재 불가리아대사와 점심을 함께 했는데 대사가 외무부 관료들과 만나야 했는데 오랫동안
미수교국으로 지내다보니 외무부에 지인도 없고 만나주지 않는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당시 의전실장을 맡고 있던 고교동창 소개로 장관, 국회의장까지 만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희용회장은 불가리아 이야기가 나오자 불가리아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예로 들면서
한민족과의 관계에 대해 숨겨진 이야기를 오래 들려주었다.
학창시절 회고를...
1960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행정학과를 다니다 학보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미국 인디아나주립대학 경영학과를 다녔는데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친의 반대에도 불구, 동 대학에서 상업미술을 배웠다. 당시 집에서 학비도 보내주지 않아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고학을 하면서 상업미술학위를 받았다.
취미 활동에 대해...
희용회장은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려면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 다음기회에 듣기로 했다.
희용 회장의 취미생활은 독서에서부터 미술, 음악, 운동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었다. 취미생활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독서다. 신혼여행 때 한 밤중 불 켜놓고 책을 볼 정도의 독서매니아다.
2011년 10월 도동서원 추향제 참례길에 희용 회장은 네시간 남짓 자동차안에서 무협지 두 권을
독파했다. 읽는 속도를 재보니 1쪽에 20초 정도로 빨랐다.
미국 유학시절 많은 책들을 읽어야 했고 배운 것들을 따라잡으려면 속독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혼자 있을 때 책을 읽는다. 신혼여행 때 한 밤중 불을 켜놓고 책을 읽었더니
신부가 책과 결혼했느냐며 따지는 바람에 난감했던 경우도 있있다.
한국만화가협회 명예회장도 맡고 계신데...
미국 유학시절 상업미술을 배웠다.
만화가 좋아 한국 만화 주인공들을 주제로 여덟 폭 짜리 병풍도 만들었다.
틈이 나면 지인들에게 캐리커쳐도 그려 준다.
벽산그룹의 산을 주제로 한 로고타입 또한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좋아하는 운동은...
골프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나간다. 볼링이 좋아 대한체육회산하 볼링협회장도 맡은 적이 있다.
당구도 즐기고 육상 수영 같은 기록종목은 좋아하지만 축구 야구는 별로다.
경마 경륜같은 프로스포츠는 Game이 아니라 Gamble 이다.
팝송을 즐겨 부른다고 들었는데...
팝송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가수가 특히 좋았다.
평소 건강관리는...
건강관리를 하지 않는 게 건강유지다.
살다보면 난관에 부딪히거나 시련을 겪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하고, 또 바쁘게 시간을 보내려고 일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대담자에게 권유도 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땐 한번 그대로 받아들여보세요...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놔둬 보세요...”
승동교회 장로를 맡고 계신데...
선친께서도 승동교회 장로이셨다. 지금 장로직을 맡으며 탑골공원 노인사랑전도활동을 하며 불우노인들의 구제사업을 돕고 있다. 공원을 배회하던 노인 120여명이 지금 예배를 보러 교회에 온다. 지금까지 300여명의 노인들에 세례를 주었다. 한번은 공원에서 배회하던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을 데려와 전도활동 끝에 교회에서 세례를 준적이 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들이 교회를 찾아왔는데 자식은 벤츠를 몰고 왔더라...
벽산그룹 창업주로 초대 대종회장을 맡아 서흥문중을 일으킨 고 인득 회장은 3남2녀를 두셨다.
희용 회장은 창업주의 차남이다. 부인 박설자 여사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고 박상희씨의
딸이다. 가족관계와 벽산그룹 근황에 대해...
부인과는 중매로 결혼했다. 박대통령과 김종필 처가와의 관계를 당시에 전혀 몰랐었다. 선친의 뒤를 이어 대종회장을 역임한 형 희철 벽산건설 회장은 경기고 3학년이던 16세 때 미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미국 퍼듀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경영학 석사·MIT대와 퍼듀대에서 각각 원자력공학 석·박사학위를 땄다. 1971년 건축자재 생산업체였던 ㈜벽산의 전신인 제일스레트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벽산 경영에 참여했고, 1982년 그룹 부회장으로 오른 뒤 1991년 벽산그룹의 경영권을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동생 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은 196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0년 미국마이애미주립대학에서 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1985년까지 12년 동안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배운 기술과 경험이 오늘의 동생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희근 회장은 2010년 벽산문화재단 설립,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이사장,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2011 메세나인' 수상 등 문화예술분야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고 있다.
시계가 어느새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대담이 두 시간을 훨씬 넘기고 있어 서둘러 마쳐야 했다.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
다음 질문이 있어 짧은 답변을 듣고 싶었는데 느낌이 금새 전달 됐나보다.
“젊은이들이 책을 읽어야 해요... 한문도 배우고 중국어도 배워 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들과 문중 종친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물었더니 대뜸
빨리 임기가 끝나기 바란다며 대종회장을 맡게 된 건 동생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문중의 젊은 청장년 종원들이 종사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서흥김씨문중이 동방오현의 수현을 선조로 모시고 있는 문중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항상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후세들에 조선조 학문의 기초를 닦은 한훤당선생의 위업을
반드시 전해주어야 합니다...
희용 회장은 지난주(10.10-12)에 박대통령의 경제사절단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고 귀국했다. 지난 5월과 6월에는 미국과 중국을 잇따라 수행 방문하였다. 이밖에도 일본, 유럽과 미주지역 방문 등 빼곡한 해외일정과 국내 일정에도 불구 희용 회장은 20주년 특집대담을 위해 두시간 반동안 시간을 내주셨다.
희용 회장은 한훤당선생의 정신을 반드시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말을 누차 강조한 뒤 인터뷰를 끝냈다. 그리고 분당에 모임이 있다며 서둘러 대종회사무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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