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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만들기
2016. 7. 17(주일낮예배) 마가복음 6:34
세계로병원의 원목인 이은성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어느 강사의 조크를 기록해 주었다. 한번 들어보기 바란다.
남의 머리에 자기 생각과 지식을 넣어주는 사람은 선생님이고,
남의 돈을 자기 주머니로 옮기는 사람은 사장님이고,
이 둘을 한꺼번에 하는 사람이 마누라이다.
선생님을 거부하는 것은 배우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사장님을 거부하는 것은 돈을 거부하는 것이고,
마누라를 거부하는 것은 죽기를 결심한 것이다.
거부한다는 것은 삶의 한 영역을 포기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거절과 거부를 당하여서 삶의 한부분을 포기하고 살 때가 있다.
여러분은 삶에서 거절과 거부를 당하고 살지 않는가?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영희교수(1952-2009년)는 평생 목발을 짚고 살아야 했다. 이렇게 1급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장영희교수는 아버지가 서울대학교교수였기 때문에 고등학교까지는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은 장애를 가진 장영희교수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자신을 거절했던 서강대학교에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학교교수가 된 장영희교수가 된 장영희교수에게 장애는 여전히 아픔이었다. 한번은 목발을 짚고 동생을 만나기 위하여 옷가게앞에 서 있었는데, 가게 주인이 나와서 퉁명한 목소리로 저리가세요. 당신 때문에 손님이 않오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때 장영희교수님이 깨달은 것은 다른 사람들은 나를 킹콩으로 보고 있구나 였다. 킹콩은 여주인공과 사랑의 교감을 나누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킹콩을 위험한 존재로 여기고 공격하였다. 마찬가지로 장영희교수는 사랑의 교감을 나누고 싶은데 세상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이방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영희교수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세상 속에서 거절과 거부를 당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못배웠다고, 또 못가졌다고 거절과 거부를 하여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또 세계적으로 보면 언어를 못한다고 거부를 당하고, 피부색깔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고 거부를 당할 때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대사회는 목자, 어부, 세리는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천대받는 사람들이었다. 목자가 키운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또 어부가 잡은 고기로 자신들의 식량으로 삼지만, 유대인들은 목자와 어부를 무시하고 거절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세리는 매국노라는 죄목을 한가지 더 붙였다. 그래서 세리와는 아무도 상종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제일 먼저 예수님께 와서 경배한 사람들은 목자였다. 천사가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메시야의 탄생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목자가 제일 먼저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제자들의 주 직업은 어부였고, 또 당시 예수님의 친구는 세리와 죄인들이었다.
왜 예수님이 목자, 어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겠는가? 예수님이 사역하던 때는 유대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유대백성들은 자기의 땅을 빼앗기고, 또 노동력을 착취당하였다. 그러한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로마와 손을 잡고 오히려 자신들의 필요를 더 많이 챙기며 살았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다. 그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일일노동자가 되어서 새벽시장에 나와 자신의 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힘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세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세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유대사회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을 대하는 모습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은 누구의 모습을 따라 살고 있는가? 인터넷에서 잔소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고 공손하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한 신혼부부가 잔소리의 기준을 이렇게 정리해 주었다.
1. 같은 소리 여러번 한다.
2. 듣는 사람이 기분이 나빠진다.
3. 굳이 안해도 되는 이야기를 한다. 즉 아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잔소리이다.
잔소리는 내가 아는 내용을 듣고, 또 들어서 그 말을 들을 때면 짜증이 먼저 올라오는 것이다고 신혼부부는 정의해 주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엄마가 아들에게 잔소리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알게 되었다는 글을 읽게 되었다.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다보니 잔소리가 자꾸만 늘어갔다. 그래서 아이가 엄마 잔소리 좀 그만하라 고 응수하고, 그런 아이에게 잔소리가 뭐야?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듣기 싫으면 잔소리예요!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이 잔소리이다. 같은 소리를 여러번 반복해도 용돈줄게. 치킨 사줄께 하는 소리를 잔소리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런 잔소리의 가장 큰 특징은 상처를 줄 수 있지만, 변화는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행동이 잔소리와 같지 않는가? 우리가 어린 시절에 눈물흘리며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프란다스의 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라라 라라라라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 라라
먼동이 터오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맞닿은 이 길을
벨기에의 여성작가 위다(본명:마리 루이즈 드라 라메이)가 쓴 소설을 각색하여 방영한 프란다스의 개의 출연진은 네로와 할아버지와 프란다스의 개, 그리고 네로의 여자친구 아로아와 코제츠씨이다. 할아버지와 둘이 살던 네로는 시장에서 버림받은 파트라슈를 데리고 와서 키웠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파트라슈는 네로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건강이 회복되고, 그 이후 네로에게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파트라슈는 네로가 우유배달할 때 동역자가 되어 주었고, 또 푸른 초지에서 함께 뛰며 노는 친구가 되었다. 이렇게 네로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는데,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하였다. 아로아의 아버지 코제츠씨의 방해로 네로는 우유배달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또 코제츠씨의 방앗간화재 사건에 방화범으로 몰려서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네로는 코제츠씨가 잃어버린 돈주머니를 우연히 주워서 그것을 돌려주며 아로아의 집에 파트라슈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이 꼭 보고 싶었던 성화를 보기 위하여 성당으로 갔다.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성당에 도착한 네로는 평생토록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루벤스의 성화였다. 양편에 예수의 십자가 올림과 예수의 십자가 내림이 있고, 천장에는 성모 승천까지 네로는 그 그림을 보면서 와 하고 쓰러진다. 그때 아로아의 집에 맡겨진 파트라슈가 주인 네로를 찾아 달려와서 네로를 감싸안는다. 그래서 둘은 그 날 밤에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동사하고 만다.
이것이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이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또 버림받은 파트라슈를 거두어서 친구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착한 심성을 가진 네로였다. 그런 네로를 가난한 고아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거절당했을 때 결국 프란다스의 개는 sad ending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에 네로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코제츠씨가 네로가 아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좋게 여겨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 네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주어서 그리기 대회에서 1들을 한다. 그리고, 금화 한닙을 주고 네로와 함께 성당에 있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며 감동하는 모습이 나왔다면 프란다스의 개는 해피 엔딩이 되는 것이다. 결국 sad ending과 happy ending의 차이는 거절하였느냐? 용납하였느냐? 의 차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happy ending이 될 수 있겠는가? 마가복음 6장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리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모습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먼저 그 부분을 읽어보기 바란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이 말씀으로 설교하면서 예수님께서 큰 무리를 왜 불쌍히 여겼는가? 라는 질문을 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폭정과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로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힘겹게 살았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정치인, 군인, 세리와 창기를 엄하게 책망하였다. 그때 꼼짝도 하지 않을 것같았던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며 백성들은 희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애굽에서 400년동안 고통받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구원하셨던 것처럼 말라기 이후 400년동안 암흑기를 보낸 우리에게 세례요한을 보내어서 이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헤롯에 의하여 참수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 세상은 이렇게 바뀌지 않아! 가난하고 약한 우리가 아무리 발부둥쳐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이렇게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막 6:34)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심과 같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광야에 있는 남자 장정만 5천명이 되는 그 사람들에게 12광주리가 남을 만큼 배부르게 먹이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은 목자없는 양같은 이 사람들에게 한끼의 배부름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은 만나는 안식일 전날을 제외하고 매일 그날의 양을 거두어서 먹어야 했다. 만약 내일 먹을 만나를 거두어서 남겨 놓으면, 그 만나는 썩어서 먹을 수가 없도록 하였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나를 썩도록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에 소망을 두지 말고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끼의 식량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들은 아마 내일아침이 되면 다시 배고픔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떡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라는 것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에 소망을 두는 자는 한끼의 식량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happy ending으로 끝날 수 있는 방법이다. 행복한 세상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이 행복해지려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예수님께서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한걸음 나아가게 될 때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happy ending의 삶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1급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던 장영희교수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무시와 거절을 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장영희교수는 유방암에 걸려서 2번이나 수술해서 완치되었다. 그런데 그 암세포가 척추로 전이되어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장영희교수는 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교훈가 감동을 주었다. 그 중에 하나가 내가 살아보니까 이다.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정말이지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더라.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명품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무얼 넣고 다니는지 내용물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자꾸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스스로 깎아 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더라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더라.
예쁘고 잘생긴 사람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보면 되고,
나는 내 실속을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더라.
평생 공부해서 실력 쌓고, 진지하게 놀아서 경험쌓고,
진심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아 놓는 것이 정말 내 실속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고 손해나는 일이 없더라.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장영희교수가 살면서 깨달은 첫 번째는 사람은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러워서, 또는 불쌍해서 보던지 간에 그것은 호기심과 구경차원에 불과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장영희교수가 세상을 살아보면서 알게 된 중요한 것은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결코 손해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또 남의 마음 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다는 것이다.
장영희교수가 삶에서 배운 것이 저와 여러분에게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결코 손해보지 않는 친절과 사랑을 베풀고, 사람의 마음에 좋은 기억을 남기는 보장된 투자를 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김준태라는 시인이 쓴 감꽃이라는 시가 있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저와 여러분은 어린 시절 무엇을 헤아리며 살았는가? 김준태시인은 감꽃을 헤아렸다고 하는데 저는 어린 시절 하늘의 별을 헤아렸던 기억이 있다. 그랬던 제가 지금 헤아리는 것은 김준태씨와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먼 훗날엔 제가 헤아리는 헤아림이 다른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주님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헤아리고, 또 그들에게 베풀 사랑을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 헤아림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헤아리고 있는가? 나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헤아리는 자가 아니라, 소외된 자를 헤아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죄악으로 썩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되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