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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2
범인 눈에 이 많은 것이, 이 깊은 것이 다 들어와 담길까? 싶은 수많은 당우와 그 속에 담긴 역사와 유물들, 부처님의 가피에 오히려 혼미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어느 거 하나 허수룩한 것, 가벼운 것이 없다. 역사와 불력의 서기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사찰, 범어사 2차로 정리한다.
1. 사찰대강
명칭 ; 범어사
위치 : 부산 금정구 범어사로 250
입장료 :
방문일 : 202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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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本寺)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국(東國)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서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의 거암(巨岩)이 있고, 그 바위 한가운데 샘이 있으며 그 물빛은 금색(金色)에다 물 속에 범천(梵天)의 고기가 놀았다. 그래서 산명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梵魚寺)라 한다.”고 하였다.
범어사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으로는 1700년(숙종 26)에 동계(東溪)가 편찬, 간행한 목판본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이 현존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문종 태화(太和) 19년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당시 왜인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으므로 대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의상(義湘)을 청하여 화엄신중기도를 할 것을 권하였다.
신인은 “태백산 속에서 의상이 3,0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華嚴義持法門)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들이 항상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또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왕이 의상을 청하여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대로 하였더니 왜선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의상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적기의 창건연대인 흥덕왕 때는 826년에서 835년까지이므로 이미 702년에 죽은 의상의 창건이라고 한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신라화엄십찰(新羅華嚴十刹)의 하나인 범어사의 창건은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670년(문무왕 10) 이후일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678년에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상이 창건하고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이 주석했던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또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하나로서 중요한 가람이 되었다.
신라 당시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 및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모셨던 2층의 미륵전(彌勒殿)을 중심으로 서쪽에 3칸의 비로전(毘盧殿)을 세우고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칸의 대장전(大藏殿)을 세우고 대장경과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 및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이 밖에도 천왕신전(天王神殿)·유성전(流星殿)·종루(鐘樓)·강전(講殿)·식당(食堂)·목욕원(沐浴院) 및 33천(天)을 조성한 철당(鐵堂), 중료(衆寮) 360방사가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結)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 있었다고 한다. 사적에는 이러한 사찰의 규모가 창건 당시에 다 갖추어진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된 규모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하였으나 곧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묘전(妙全)·현감(玄鑑)·계환(戒環)·법인(法仁)·천원(天元)·덕균(德均) 등이 법당 및 요사채,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집기들을 갖추어서 중창하였다.
그 뒤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원의 규모를 넓혔으며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이름 아래 현재 경상남도 3대사찰로 발전하였다. 이 절과 인연이 깊은 고승으로는 창건주인 의상과 신라십성(新羅十聖) 중의 한 사람인 표훈, 일생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낙안(樂安), 구렁이가 된 스승을 제도한 영원(靈源), 근대의 고승 경허(鏡虛), 한용운(韓龍雲), 동산(東山) 등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보다 7∼8m 높은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에는 관음전이 있으며,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爐殿僧)의 거처인 일로향각(一爐香閣)이 위치한다.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고 그 뒤쪽에는 서향각(西香閣)과 크고 작은 요사채가 있으며, 그들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비켜서 팔상전(捌相殿)·독성각(獨聖閣)·나한전(羅漢殿)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산령각(山靈閣)이 있음도 특색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체로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상단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배치, 중간부분인 보제루 주위의 당우들, 하단의 건물인 보제루 아래쪽의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중심으로 하는 건물들이다. 이와 같이 건물이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은 산지가람의 지형에 따르는 배치방법이다.
현존하는 당우를 보면, 절 입구의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이룩된 3칸 건물로서 건물의 기둥은 아랫부분 3분의 2 정도까지 석주로써 조성하였고, 그 위에 다포(多包)의 맞배지붕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의 우측에는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 좌측에 ‘金井山梵魚寺(금정산범어사)’, 중앙에는 작은 글씨로 ‘曹溪門(조계문)’이라는 현판이 있다.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천왕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벽에는 신장의 벽화를 그려 천왕문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문의 내부 좌우에는 사천왕의 탱화를 안치하였다. 불이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범어사로 통하는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의 기둥에는 근대의 고승 동산(東山)이 쓴 주련이 있다. 보제루는 모든 법요식(法要式)이 행해지는 곳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서 범어사의 가장 큰 건물이다.
그리고 보제루 북쪽에는 사방 3칸의 종루(鐘樓)가 있다. 범종과 대북 등의 의식용구가 갖추어진 2층 누각건물이다. 미륵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한 목조불상을, 전면과 좌우에는 영탱(影幀)을 봉안하였다. 비로전의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의 초석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66년 보물로 지정된 부산 범어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602년에 중건, 1613년에 중수한 맞배집으로서 다포식 건물이다. 대웅전 왼쪽의 명부전은 전면과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주존불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 지장보살의 주위에는 판관(判官)·녹사(錄使) 등의 상을 배치하고 있다. 관음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과 불경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이 거처하는 일로향각이 있으며, 명부전 뒤쪽에는 서향각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동향하고 있다. 이 건물 내부에는 부처님의 탱화가 있고 그 곁에는 동래 정희조 내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옆 칠층석탑의 건립 등 범어사의 대시주였다.
서향각 뒤쪽에는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의 건물이 한 채로 연이어 있다. 팔상전 안에는 삼존상과 팔상탱화를 봉안했고, 독성전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 그리고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삼존과 십육나한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1칸의 길다란 건물이다. 이 밖에도 조그마한 산령각과 해행당(解行堂) 등 수십 칸의 요사채가 있고 종무소가 현존하고 있다.
이 절의 석조물로는 보제루 앞 뜰에 신라시대 석탑인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이 있고, 대웅전의 남쪽에는 거대한 칠층석탑이 있다. 이 칠층석탑은 근세 인도승이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탑으로서 전통적인 신라 석탑 형식에 다소 변화를 주어 새로 건립한 것이다. 삼층석탑에서 약 20m 남쪽에 위치한 곳에 범어사 유일의 석등(石燈)이 있는데 건립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괘불(卦佛)을 시설하는 석조괘불대가 있고, 일주문 밖에 소형 석조폐탑(石造廢塔) 등이 있으며, 일주문 옆 숲속에는 수많은 비석이 있고, 그 비석 아래쪽에 고승 동산의 석조부도(石造浮屠)가 있다. 이 부도는 최근의 작품이지만 고려 이래의 전통적 석조부도의 형태에 각종 장엄을 가미함으로써 매우 아름다운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밖에도 사중보물(寺中寶物)로는 전의상대사옥인(傳義湘大師玉印)과 구룡병풍(九龍屛風)·삼층석탑·옥와(玉瓦)·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금강저(金剛杵)·목조미륵불(木造彌勒佛)·범종(梵鐘)·어병(御屛)·오동향로(烏銅香爐) 등이 있다.
이 중 옥인은 원효의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산내암자인 원효암(元曉庵) 우물 보수중 발견한 것이며, 널리 화엄의 그물을 펴서 인간과 천상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지닌 ‘張大敎網鹿人天之魚(장대교망녹인천지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아래 설명 부분도 동일 자료)
비로전 내부
미륵전
1) 미륵전
용화전 또는 자씨전으로 불리는 곳
석가모니 다음에 올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곳이다. 법당에 모셔진 불상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던 미륵전을 파 보니 미륵불상이 동쪽을 등지고 앉아 있어서 그대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미륵전 내부 미륵불
종루
2) 삼층 석탑
보물 제250호
통일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3층 석탑으로 탑의 층급받침이나 기단에 새겨진 코끼리 눈 모양의 조각 등으로 보아 9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이나 탑신의 면석에 조각이 장식되는 신라 하대 석탑의 특색을 보여 준다. 이 탑은 제일 아래쪽에 한단의 석재를 첨가하고, 그 위에 탑의 몸체를 세웠기 때문에 우뚝 솟아 보이며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이번엔 부산, 전재, 이하 동일)
3) 석등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 문화재 제16호
신라의 의상 대사가 문무왕 18년(678년)에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지나 양식상으로 볼 때는 9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통일 신라 시대 석등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양식에 속하는 이 석등은 원래는 미륵전 앞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지장전
5) 지장전
지장보살을 모시는 곳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 세계의 부처님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큰 맹세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하여,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시왕(十王)이 함께 모셔져 있다.
내부 지장보살
청룡암시석(梵魚寺靑龍巖詩石). 산령각 앞에 나한전과 지장전 사이에 있다. 거대한 바위 위에는 이안눌의 시가 새겨져 있다.
청룡암에 새겨져 있는 이안눌[1571~1637]의 시는 2수이다. 「청룡암 시(靑龍巖詩)」와 「범어사 증도원산인(梵魚寺贈道元山人)」으로 알려져 있으나, 『동악집(東岳集)』에 실려 있는 제목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청룡암 시」로 불리는 시는 ‘혜정 장로가 시 한 수를 지어 돌 위에 새겨 놓고 후일에 볼거리로 삼자고 청하므로 문득 이렇게 써서 보여 드리다’라는 뜻의 「혜정장로 청부일시 참제석상 이위후일지람 첩서차이시(惠晶長老 請賦一詩 劖諸石上 以爲後日之覽 輒書此以示)」라는 다소 긴 제목이다. 그리고 「범어사 증도원산인」으로 알려진 시는 『동악집』에 「범어사 증도원상인(梵魚寺贈道元上人)」으로 되어 있다.
이안눌은 1609년 5월 중순 범어사에 머물면서 여러 스님을 위해 시를 지었는데, 도원 스님에게 지어 준 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들 시의 제목은 혜정 스님을 ‘장로’라고 칭한 것 외에는 모두 ‘범어사 증◯◯상인’의 형식이다. 이때 이안눌이 시를 지어 준 스님들은 혜정 장로(惠晶長老), 묘전 상인(妙全上人), 지안 상인(智安上人), 도원 상인(道元上人) 등이다. 이 중 이안눌이 혜정 스님에게 준 시를 목판에 새긴 이안눌 청룡암 시 목판(李安訥靑龍巖詩木版)은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홍주 목사로 있던 이안눌이 동래 부사가 되어 임지에 도착한 것은 1608년(선조 41) 2월 15일이다. 홍주를 출발한 것이 1월 29일이니 보름이 걸린 셈이다. 1609년(광해군 1) 5월 초에 병으로 파직되었으나 후임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동래의 관사에 머물러 있다가 6월 초순이 지난 뒤에는 더위를 피해 범어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이안눌이 머무른 곳이 혜정 스님의 처소이다.
이안눌은 범어사를 오가기도 하고 거처를 옮겨 40여 일을 머물기도 하면서 26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혜정 스님에게 지어 준 시가 5수이다. 이른바 「청룡암 시」도 그 중 하나이다. 이렇듯이 「청룡암 시」는 지어질 때부터 혜정 스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안눌은 혜정 스님이 당귀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하여 시를 짓기도 하고, 밥을 차려 준다고 시로써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으며, 전별 후에 신발을 보내 준 것에 감사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부산역사문화대전 전재)
산령각
산령각(산신각) 내부
나한전 내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셨다. 탱화는 16나한도.
독성전 내부
팔상전
서향각 뒤쪽에는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의 건물이 한 채로 연이어 있다. 팔상전 안에는 삼존상과 팔상탱화를 봉안했고, 독성전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 그리고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삼존과 십육나한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1칸의 길다란 건물이다. 이 밖에도 조그마한 산령각과 해행당(解行堂) 등 수십 칸의 요사채가 있고 종무소가 현존하고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약사전
약사여래
3. 관람후
2003년 개관한 성보박물관이 경내에 있다가 2021년 아랫마을로 이전하였다. 삼국유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 전시를 하고 있어 관련된 자료는 별도로 올린다. 봐도봐도 끝없는 사찰이 범어사다. 영남 3대사찰의 위상에 걸맞는 유물과 유적이 엄청나다. 우선 눈으로 보는 위 자료 사진만으로도 역사의 축적에 멀미가 날 정도다. 이 사찰로 부산의 성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갈 듯하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 우선 차분히 보고 성보박물관은 또 천천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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