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니 소식 155호
스물두 번째 산지니 시인선을 공개합니다!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여름 반팔과 가을 재킷 그 어느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퇴근 무렵 빠르게 내려앉은 저녁 하늘 틈 사이로 노을 한 자락이 비치고 조금은 서늘해진 공기에 옷깃을 여미는 계절, 참으로 천천히 찾아온 가을입니다. 이런 계절이라면 아무렴 ‘시’ 아닐까요. 문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그 어떤 이유라 해도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겐 기쁜 일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께 시집을 소개합니다. 지역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시인을 만나기 위해 시작된 ‘산지니시인선’의 스물두 번째 시집입니다. 이 가을, 여러분께 소개하는 시인은 바로 ‘구체적인 삶에서 우러나오는 시를 쓰는’ 신진 시인입니다. 신진 시인은 1974년 <시문학>에서 이원섭, 김남조 시인의 추천을 받아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올해가 등단 50주년이 되는 해인 것입니다.
신진 교수님(시인은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이기도 합니다)은 출간 작업을 하며 이번 시집에 대한 애정을 많이 표현하셨어요. 지금까지 낸 시집 중에 ‘가장 퇴고를 많이 한’ 시집이라고 하시면서요. 아, 제목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신진 시인이 활동 50주년을 맞아 출간한 신작 시집의 제목은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입니다. 이번 시집에는 장시(長詩) 1편을 포함하여 49편의 시가 수록되었습니다.
표제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번 시집의 제목이 된 작품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는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읽으면 좋을 시입니다. 저는 요즘 ‘참 정신없이 산다.’라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합니다. 한 가지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곧바로 다음 할 일이 기다리고 있는 일상입니다. 내 감정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이 시를 읽으니 바쁘게 걸어가다가도 호흡을 고르며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걷지 못하고 나앉아 있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걷는 슬픔이여 너도 잠시 멈추었다 가라/너도 슬픔이고/못 걷는 슬픔이었지 않느냐?//
_<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중
그리고 누군가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슬픔 없는 사람’이 아니라 ‘슬픔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슬픔을 아는 자가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겠죠.
비 맞지 않는 자 어디 있더냐/슬픔이 슬픔을 잊지 않고 우산그늘 나눌 때/못 걷는 슬픔도 멈춤/그 다음 동작을 기억하려니//
_<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중
사실 제가 이번 시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이자, 작업 초반 표제시로 제안하기도 했던 작품은 바로 「시 쓰지 마라」입니다.(전 뭔가 이런 삐뚤어진 말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ㅎㅎ) 50년 동안 시를 쓰며 살아온 시인이 ‘시 쓰지 마라’라고 하니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해설(「경험시와 역설」)에서 ‘억지로 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시의 내용이 천지에 이미 시가 가득하며 시인은 이를 나타낼 뿐인 ‘선시론(先詩論)’을 계승한 것이라고 멋지게 풀이해주셨어요. 전 어쩐지 이 시를 이렇게 읽고 싶습니다. ‘책 만들려거든 책 만들지 마라. 책을 만들겠다면 책을 버려야 하고 책을 만나자면 책을 잊어야 한다.’ 시인이 평생 시를 써오면서 깨달은 이 달관의 태도를 제가 다 이해하기에는 아직 부족하겠지만, 온갖 거창한 것들로 마음이 무거워질 때 이 구절을 기억하면 마음도 생각도 가벼워질 것 같아요.
시 쓰지 마라/시를 구하려거든/시는 세상천지 이미 널려 있다//
_<시 쓰지 마라> 중
신진 시인이 오랜 시간 매만져서 내놓는 열한 번째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가 산지니소식 구독자 여러분께 멋진 가을 선물이 되길 기대합니다.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신진 지음 | 14,000원
등단 50년을 맞는 신진 시인이 5년 만에 출간한 신작 시집이다. 우리는 스쳐 사라지는 일들로 가득한, 경험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 또한 경험의 시가 줄어들고 수사와 상상력으로 채워진 언어로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신진 시인은 경험을 강조하는 시인이다. 일상의 순간을 구체적인 언어로 포착하고, 삶의 철학을 역설의 단어로 풀어낸 시를 통해 진솔한 깨우침을 독자에게 전한다.
<산지니 출판사의 책소개입니다.>
첫댓글 시집은 출판사의 호의로 발간하되 지원금은 받지 않고
출판사의 홍보에 협조하되 무료 증정은 금하고 있습니다.
양해와 협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