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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무상으로 치료받는 나라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cko>는 쿠바 의료 체계가 국내에 널리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식코>는 경제력 세계 1위, 의료 보장 수준 35위 국가 미국의 현실을 실제 사례와 함께 낱낱이 고발한다. 가난한 국민의 건강 보장에는 관심 없는 정부, 이익이 최우선인 민간 의료보험사 때문에 미국인은 손가락을 포기하기도 하고 목숨을 포기하기도 한다. 9·11 테러 발생 후 자원봉사를 하던 미국인이 봉사 과정에서 병을 얻었지만 병원은 증빙 서류를 요청하며 치료를 거부했다. 이에 제작진은 환자를 쿠바로 데려갔고, 그는 그곳에서 치료받을 수 있었다. 외국 연수단이 쿠바에 방문하면 연수의 목적과 관계없이 꼭 방문하는 곳이 병원이다. 그만큼 쿠바는 자국의 의료 체계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소수가 아닌 만인을 위한 의료 체계
쿠바는 1923년 세계 최초로 천연두를 근절하고, 1950년 소아마비 백신 접종을 제도화한 나라다. 이러한 훌륭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1959년 혁명 이전 의료서비스는 일부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는 국민은 8%에 불과했다. 보건의료조합이 설립되어 의료 서비스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조합원은 전체 국민의 20% 정도였다. 특히 농촌과 도시 간의 격차가 심각했는데, 1955년 기준 농촌에 설치된 병원은 단 한 곳이었다.
몬카다 병영 공격(1953년)에 실패하고 재판을 받던 피델 카스트로의 최후변론을 보면 당시 쿠바 국민의 생활상과 의료 서비스 실태를 엿볼 수 있다.
“농촌 학교의 취학 연령 아동의 절반이 맨발이고, 절반은 헐벗은 채 영양실조 상태에 있으며 … 농촌 어린이 90%가 맨발을 통해 전염된 기생충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 그들은 곱사등이가 되든지 서른이 될 때까지 성한 이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 항상 만원인 공립병원은 막강한 정치가들이 추천하는 일부 환자만 수용합니다.”
혁명 정부는 초기부터 헌법 50조에 ‘모든 국민은 건강할 권리와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의료 정책 개선을 위해 노력했는데, 특히 농촌 의료를 중시했다. 2년간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면서 농촌 지역 주민들이 교육과 의료 서비스에서 배제되고 빈곤에 시달리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혁명군은 전투 중에도 농민들에게 무상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혁명 정부는 정부 수립 한 달 뒤인 1959년 2월 ‘농민 기술·의료·문화 지원국’을 창설했다.
1960년대에는 농촌사회 의료 서비스 제도를 고안해 농촌진료소를 설립하고 의사들을 파견했다. 당시 의대 졸업생은 졸업과 동시에 먼저 농촌에서 일하도록 했다. 1961년에는 기존의 건강복지부를 보건부로 변경하고 민간 병원과 민간 제약회사를 모두 국유화한 뒤 의료비를 무료로 하고 의약품 가격을 내렸다. 이러한 조치는 거센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수많은 의사가 쿠바를 떠난 것이다. 당시 6,000명이던 쿠바 의사 중 4,000명 가량이 미국으로 떠났고, 250명이던 아바나 의과대학 교수가 1963년에는 단 12명만 남았다. 정부는 의료 인력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멕시코나 다른 라틴아메리카 의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의사 양성을 위해 의대를 증설해 무료로 교육하고 대학병원을 설립해나갔다.
진료소는 치료뿐 아니라 역병 감시, 백신 접종, 건강 진단, 위생 교육까지 종합적으로 관리했다. 이런 일은 의사만으로는 불가능해 혁명수호위원회CDR와 쿠바여성연맹FMC 등의 주민 조직, 사회복지사와 협력해야 했다.
지역 차원의 다양한 보건의료 활동을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64년부터 시·군·구에 폴리클리니코Policlinico라 부르는 종합진료소를 설립해나갔다. 하지만 1차 의료기관의 기능을 해야 하는 종합진료소가 부족해 환자들이 빠른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 응급실로 직행하는 등 체계적 관리가 되지 않았다. 또한 예방이 중요함에도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는 데 그치는 한계를 나타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밀리 닥터’ 제도이다.
지역의 폴리클리니코 산하에 콘술토리오Consultorio라는 소규모 진료소를 설립하고 그곳에 패밀리 닥터와 간호사를 배치했다. 이들은 관할 지역 주민의 건강을 일선에서 돌보는 역할을 한다. 패밀리 닥터는 폴리클리니코에서 일하는 전문의(안과, 소아과, 내과, 산부인과, 외과 등)와 사회복지사, 심리학자들과 협력하여 주민 건강을 책임진다. 1985년 시작된 콘술토리오는 산지와 농촌에 먼저 설치되었고, 이후 도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거미줄 안전망, 쿠바의 의료 체계
쿠바의 의료 서비스는 보편적Universal(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무료Garatis(무료로 제공하고), 접근 가능한Accesible(쉽게 전근할 수 있고), 지역적Regionalizado(모든 지역을 포괄하고), 통합적Intergral(생물학적 질병뿐만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건강과 가족의 특성까지 파악하는) 의료 서비스를 지향한다.
현재 쿠바의 의료 체계는 1차, 2차, 3차로 체계화되어 있다. 쿠바의료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패밀리 닥터가 상주하면서 주민 건강을 관리하는 콘술토리오이다. 콘술토리오에서는 가정의와 간호사, 오페라리오 세 명이 한 팀이 되어 일한다. 하나의 콘술라리오는 약7개 구역을 관할하며 1,000~1,500명의 주민을 관리한다. 패밀리 닥터 제도를 도입할 당시 정부 계획은 패밀리 닥터와 간호사가 주민 700~800명을 돌보는 것이었고 한동안은 계획대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2016년 인터뷰 및 외국 연수단을 위한 정부 자료에 따르면 당초 계획보다 더 많은 주민을 관리하고 있다. 쿠바 통계청 자료(2015년 기준)에 따르면 콘술토리오는 쿠바 전역에 총 1만 782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쿠바 인구가 1,121만 64명이니 콘술토리오당 평균 1,040명가량을 관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많은 의사가 해외 미션을 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콘술토리오가 있는 건물에 의사와 간호사가 거주하면서 상시로 지역 주민을 돌보고 있다고 소개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의사 가족과 간호사 가족을 위한 주거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 의사나 간호사가 진료소와 떨어진 자기 집에 살면서 출퇴근하기도 한다.
폴리클리니코는 콘술토리오처럼 1차 의료기관이다. 폴리클리니코에는 관할 지역 내 콘술토리오의 패밀리 닥터가 소속되어 있고, 그 외 전문의와 치료사, 사회복지사 등이 배치되어 있다. 폴리클리니코에 소속된 소아과, 산부인과, 내과의는 콘술토리오에 파견 나가 패밀리 닥터와 협진한다. 보다 전문적 치료가 핖요하다고 판단되면 패밀리 닥터는 폴리클리니코에 환자를 의뢰한다. 하지만 패밀리 닥터의 소견서 없이도 직접 폴리클리니코에 가서 진료받을 수 있다.
폴리클리니코에는 내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안과, 피부과, 족부과(발 치료 전문), 외과, 산부인과 등의 전문 진료과가 있고 그 외에 재활치료실, 천연치료실, 초음파실, 언어치료실, 전기치료실, 응급실 등이 있다.
2차 의료기관은 전문병원(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혹은 종합병원)으로 쿠바 전역에 151개소가 있다. 3차 의료기관은 의학 관련 연구기관으로 12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그 외 치과 110개소, 혈액은행 28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쿠바인의 건강에 대한 접근성은 모두 같다
인터뷰 중 패밀리 닥터는 “쿠바인의 건강에 대한 접근성은 모두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쿠바에도 계층이 나뉘고 빈부 격차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곧 건강 격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일까? 체류 기간 알게 된 쿠바 의료 체계의 특징은 이러하다.
먼저 의료비가 정말로 무료이다. 물론 외국인은 예외이다. 외국인 치료가 허가된 병원에서만 치료받을 수 있고, 상당히 비싼 의료비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쿠바인들은 어떤 치료를 받건 무료이다.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받아야 하는 치료 외에 낙태 수술, 셩헝 수술도 무료이다. 의사가 처방해주면 약국에 가서 약을 구입하는데, 비싸지는 않지만 약값은 유료이다.
보통 일곱 블록마다 콘술토리오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어 쉽게 방문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어려운 사람들은 의사가 직접 가정에 방문한다. 본인 관할 지역 내 주민을 네 개 그룹으로 분류하고 그룹에 따라 왕진 횟수를 달리한다. 임산부나 영아가 있는 가정은 방문 빈도가 훨씬 높다.
콘술토리오에 소속되어 일하는 오페라리오가 왕진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들은 각 가정의 위생 상태를 점검하고 모기 발생을 예방하는데, 매일 약 25개 가정을 방문한다. 그 과정에서 아픈 환자가 있는지, 혹 패밀리 닥터를 만나러 갈 수 없는 상황인지를 파악해 의사에게 보고한다.
쿠바 의사들은 단순히 환자의 병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패밀리 닥터 제도는 ‘환경이 건강을 좌우한다’고 보며 치료의 대상을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본다. 환자를 가족이나 지역 사회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사의 왕진, 의사와 지역 주민의 소통을 매우 중요시한다.
환자의 진료 기록은 환자의 것이다. 콘술토리오에 가면 매우 낡은 서류철 안에 오래된 서류들이 있다. 환자 개인별 기록인데, 가구별로 정리되어 있다. 병력뿐 아니라 가구원 수, 나이, 학력, 직업, 주택 상태, 가족 관계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왕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환자가 이사를 가면 환자에게 그 기록 파일을 전달해 이사 간 지역의 콘술토리오에 제출하도록 하거나 의료진이 직접 전달하기도 한다. 한 개인의 병력이 하나의 문서로 정리되어 있고, 그것을 환자가 직접 볼 수도 있으며, 지속적으로 관리된다는 사실이 매우 새롭게 다가왔다.
쿠바 의료의 또 다른 특징은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치료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혁명 후 초기에는 서양의학 모델로 발전해오다가 1980년대에 동양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1990년대 특별시기Periodo Especial 즈음 절대적 물자 부족이 낳은 궁즉통窮則通의 산물이 쿠바의 대체의학이다. 쿠바 병원에서는 침, 뜸, 오존요법, 마사지, 진흙요법, 지압치료가 이뤄진다. 물론 한국 병원에서도 가능한 치료이지만, 특이하게도 쿠바에서는 의대에 잔학하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동시에 배운다. 의대생이 침 치료, 응양오행설, 오장육부론, 진맥, 경락 등을 배우는 것이다. 쿠바의 정책과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통합적 접근’의 모델을 보는 듯했는데, 의학 교육과 의료 서비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연수 중 쿠바 의료기관을 수차례 방문했고, 한국 의학전문대학원 학생의 쿠바 병원 실습 현장도 참관했다. 또 몇 차례 의료 서비스를 직접 이용해보기도 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의 건강보험 제도가 부럽다고 했다는데, 나는 쿠바의 의료 보장 체계가 부럽다.
지역의 건강 문제는 의사와 주민이 함께 해결한다
쿠바의 패밀리 닥터는 환자 개개인의 건강을 책임지는 역할도 하지만 관할 지역의 건강 문제에 대한 총체적 진단과 해결에도 관여한다. 이에 대해 26년차 패밀리 닥터 다닐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매년 폴리클리니코 차원에서 작성한 연간 보고서는 시, 도, 중앙 단위까지 보고되어 보건 정책 결정에 활용된다. 콘술토리오 패밀리 닥터는 자신의 관할 지역에 대한 내용을 기반으로 지역 주민과 함께 지역의 건강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모임을 갖는다. 한 번에 실시하기도 하고, 구역을 나눠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기도 한다. 모임에서는 의사가 생각하는 건강과 관련한 주요 문제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주민이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서로 자유롭게 토의한다. 그런 뒤 문제 해결 방법을 찾고 실천 계획을 세운다. 사안에 따라 여러 기관이 함께 해결하는데, 이때 ‘건강 활동가Activista salud’의 역할이 크다. 모든 문제는 지역 주민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변화해야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려면 우선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 여기서 건강 활동가는 구전 교육자 역할을 하는데, 이웃과 소통하기 좋아하고 활동적인 사람들을 교육해 지역 주민에게 관련 내용을 전달하도록 한다. 건강 활동가는 가정주부가 하기도 하고 초등학생이 하기도 한다.(43~55)
[출처] 거꾸로 가는 쿠바는 행복하다 - 저성장 고복지, 쿠바 패러독스의 비밀을 찾다
배진희, 시대의창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