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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곡성군당위원장이던 시절, 입면으로 보급투쟁을 나갔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민중의 실체를 보았다고, 언젠가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스스로 곳간을 열어 먹을 것을 주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숨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쎄 틀레묵은 것이제.”
늙은 아버지는 알았지만 젊은 아버지는 몰랐다. 그래서,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살기 위해서, 아버지와 그의 동지들은 입면 어느 마을을 샅샅이 뒤졌다. 사회주의에 등을 돌린 민중들 또한 자신들이 살기 위해 악착같이 식량을 숨겼으므로 몇시간을 뒤졌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쌀 한 줌과 동지의 목숨을 맞바꿔야 하는 보급투쟁이었다. 창호지 틈으로 부연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 집 안방을 나서려던 아버지는 혹시나 싶어 병풍 뒤를 살폈고, 숨겨진 다락을 발견했다. 다락문을 연 순간 겁에 질린 새까만 눈동자가 아버지를 맞았다. 스물을 갓 넘긴 순경이었다. 아버지도 그때 고작 스물셋의 청년에 불과했다. 순경에게는 영원과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딱 죽은 줄 알았그마요. 근디 참말 이상하지라. 맴을 내려놔붕게 암시랑토 않습디다. 밥숟가락 놓듯이 내 목심이 딱 내려놔쳐붑디다.”
그런데 아버지가 경찰의 귀에 속삭였다.
“순갱을 그만둔다고 하먼 살레줄라요.”
그는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민할 새도 없이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버지가 걸음을 옮기며 소리쳤다.
“퇴각!”(175-176)
그가 되물었다. 나도 묻고 싶었다.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은혜를 갚을라는 것은 신념이 아닝가요?”
나는 이 대목에서부터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다 지난 일, 한여름 땡볕에 두 시간을 걸어와서 왜 은혜를 갚지 못하게 했냐고 따져 묻는 그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요. 그것은 신념이 아니요. 사람의 도리제. 그짝은 순겡을 그만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했소. 금먼 된 것이오. 긍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자개 앞가림이나 함시로 잘 사씨요.”179-180
그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자꾸만 아버지의 영정을 곁눈질했다. 나도 아버지를 보았다. 고등학생 때 따라가지 못 했던 두 사람의 대화를 쉰 가까운 지금도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아버지의 영정을 응시하던 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흰자위가 붉었다. 나의 눈도 그러할 터였다. 작은 상욱이, 김상욱씨가 가만히 눈물을 훔쳤다.181
내 부모가 은혜를 갚기란 진작에 튼 터, 자칫하면 은혜 갚기가 내 몫으로 오롯이 남을 판이었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천형에 가난까지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빨치산이 입은 세상의 온갖 은혜까지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여 분명 몇 번이고 들었을 소선생의 장남 이름을 기어코 기억에 남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봤자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늘 그는 방명록에 이름을 남길 것이고, 나는 간혹 그 이름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내 아버지가 입은 은혜를 나날이 뼛속 깊이 각인시킬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었다.187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들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193
“나는이, 상욱이 성만 보먼 성이 나드라고. 감옥에 가고 고생은 했겄제만 그래도 지는 살아 있응게. 살아서 겔혼도 허고 새끼도 보고 희컨 머리도 남시로 늙어강게. 나는 우리 성 늙어가는 것도 못 봤는디, 지는 자꼬 내 앞에서 늙어강게…….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삶이 부러워 미웁기도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짐작은 할 것 같았다.196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197
시속 180킬로로 고속도로를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시체처럼 창백했다. 몇시간 전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하디편안한 모습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 근육이든 긴장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198
그날, 나는 나를 향해 걸어오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몸에는 러닝셔츠 자국이 선명했다. 알몸인데도 러닝셔츠를 입은 것 같았다. 러닝셔츠 입었던 상체 부위의 바지에 가려 있던 하체는 하얗고, 가려지지 않은 부위는 새까맸다. 그게 우스워 깔깔거리던 내 눈에 낯선 무엇인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의 다리 사이에서 나에겐 없는 것이 달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싶어 나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아버지가 게처럼 옆걸음으로 속도를 높여 후다닥 옷을 입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인생 최초의 깊은 슬픔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결여를 느꼈다.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다음 날부터 나는 아버지처럼 서서 오줌을 눴다. 그런다고 나에게 없는 것이 생기지는 않았다. 번번이 팬티와 바지를 적셔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었을 뿐이다. 그 기억이 안개에 잠긴 섬진강처럼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보자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네 살 때의 아버지는 나에게 나와 같은 존재였다. 일심동체. 아버지의 알몸을 본 섬진강에서 나는 이미 아버지와 분리되었다. 그러니까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것은 이데올로기나 국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다. 아버지와 다름을 깨닫고 아버지를 닮고자 서서 오줌을 눌 만큼 아버지는 나의 전부였다. 그 아버지를 이데올로기가, 국가가 빼앗아 간 것이다.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차가운 철제 침대에 누워 수의에 싸이고 있는 저 시신과 내가 적어도 한때는 한 몸이나 같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199-201
고삼 여름방학이었다. 연좌제라는 것을 알고 난 뒤 공부를 작파했고, 당연히 성적은 바닥을 치는 중이었고, 대학에 갈 계획도 없었다. 계획이 있었다 한들 그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삼 담임선생이 나를 끔찍하게 아꼈다. 부반장 어머니가 학교에 한번 찾아오지도 않는다고, 그러니까 촌지도 안 준다고 아이들 앞에서 내 뺨을 후려친 선생들도 있었지만, 가난해서 혹은 빨갱이의 딸이라서 나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져준 선생들도 더러는 있었다. 고삼 담임이 그러했다. 그런다고 해서 나에게 찍힌 빨갱이의 낙인이 사라질 리도 없는 터, 게다가 그 무렵의 나는 호의가 악의보다 더 비참하고 자존심 상하는 못난이었다.202
참고로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싸움에 제법 재주가 있다. 그래봤자 평생 세 번 싸웠지만, 어쨌든 그 세명의 상대는 처참하게 KO패 당했다. 아버지는 분노한 사람에게 진정을 하라고 다독이지만 나는 분노한 사람의 분노를 끌어올린다. 제 분에 못 이겨 울음을 터트리거나 발광을 할 때까지. 나는 그 울음을, 발광을, 참으로 침착하게 평소보다 더 평온한 상태로 응시할 뿐이다. 그 차분한 응시가 보태지면 상대들은 대응할 힘을 잃는다. 그날의 아버지가 나에게 참패한 세명 중 한명이었다.205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아, 작은아버지도 나처럼 이 길을 따라 떠나고 싶었구나. 떠나려고 이 길을 걸어와봤구나. 그런데 왜 떠나지 못했냐고 나는 묻지 못했다.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가자 못 간다 실랑이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집 사립문 밖에 자전거를 세우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쉰내 풀풀 나는 작은아버지의 등에서 떨어지는 게 시원섭섭했다. 이 쉰내 같은 게 혈육인가 싶었다. 나를 데리러 오가는라 밴 그 쉰내가 정겨운 듯도 역겨운 듯도 했다.209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 섬진강이 보이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에 올라타며 작은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혼잣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날 작은아버지는 나를 뒤따라오며 내 등에 얹힌 두 짐을 보았던 것이다. 자기 등에도 평생 얹혀 있었을 두 짐을. 그 짐이 버거워 작은아버지는 떠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술에 취해 한평생을 흘려보낸 것일까? 아버지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를 위해 나는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기왕 취해 보낸 일평생, 하루쯤 더 보탠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것도 그 원흉이 간 자리인데.210
평생 군인으로 교련 선생으로, 그리고 조선일보 애독자로 살아온 박선생 같은 이와 빨치산 동료들은 아버지 외의 어떤 접점도 없었다. 아니, 그 시절에 서로 총을 겨눈 사이였다. 아버지와 오래 마음을 주고받으며 지낸 사람들 사이에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축소판을 보는 기분이기도 했다. 다만 아버지의 지인들은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와는 달리 언성을 높여 성토하는 대신 서로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들 방식대로 아버지를 추도하는 중이었다. 묘하게 평화로웠다. 어쩌면 죽음으로써야 비로소 가능한 평화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적당히 분주하고 평화로웠다.212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 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217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그런 나를, 생판 남인 주제에 친자식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가 아버지처럼 무심한 눈으로,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224-225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은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
갑자기 밝아진 불빛에 화들짝 놀란 여자가 푹 고개를 숙였다. 절을 하고 일어선 여자의 오른쪽 뺨과 목덜미에 오래 되지 않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몇몇 이주민 여성들의 불행한 가정사가 이 여인에게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이긴 위대한 민족의 서글픈 현주소였다.234-235
“늘 이런 일이 있는 건 아닌데…… 본래는 좋은 사람인데……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네요.”
“좋은 사램은 무신! 맨날 때리먼 죽일 놈이고 일년에 한번 때리면 좋은 놈이대? 할배가 그랬잖애. 여자헌티 손대는 놈은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
아이에게는 내 아버지 말이 자본론이거나 성경인 모양이었다.
“누구한테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
살아 돌아온 아버지가 말하는 줄 착각할 뻔했다.
“할배나 엄마나 입만 열면 그놈의 사정! 에에에!”
아이가 제 귀를 연신 두드리며 안 듣겠다는 시늉을 했다. 그 또한 아버지 앞에서 내가 간혹 하던 행동이었다. 아이처럼 귀엽게 귀를 두드리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말에 토를 다는 걸 보니 헤어나지 못할 추종자는 아닌 듯 했다. 다행이었다. 가고 없는 아버지를 벗어나기가 조금은 가벼울 테니.237-238
손해사정인인 학수도 그 귀한 보상금에 크게 일조했을 터였다. 세상은 이렇게나 좁고, 돌고 돌아 만난다. 학수는 아이 얼굴을 보고서도 자기가 도움을 준 할머니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 작은 세상에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이 실재하는 양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났다.238-239
“아이고 뉘집 딸내민고, 가시내가 담배를 다 태우네이.”
나는 옆에서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나에게 건강 운운했던 것은 여자가 어디, 이런 말을 했다가는 당장 아버지와 나로부터 비난이 쏟아질 것을 예상한 위선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따위 개나 주라지, 뉴스 외에 본 적 없는 아버지가 이번에도 신문을 보다 끼어들었다.
“뉘 집 딸은 뉘 집 딸이여, 자네 딸이제.”
어머니는 누가 들을세라 사방을 살피고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야는 진작에 끊었어라. 아니, 끊기는 멋을 끊어. 호기심에 한번 태워본 것이제 야기 무신 담배를 태운다고 그러요? 누가 들을까 무섭소.”
어머니가 몇 번이고 부정했으나 아버지는 콧방귀만 뀌었다. 애연가였으니 끊기 어려운 속내를 알았겠지. 어머니가 당신 딸은 절대 담배 태우고 그런 애가 아니라고 계속 항변하자 참다못한 아버지가 엄숙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넘의 딸이 담배 피우먼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먼 호기심이여? 그거이 바로 소시민성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램이 무신 핵명을 하겄다는 것이여!”
그때 어머니 나이 환갑을 넘었다.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를 떴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오직 담배를 태우기 위해 나는 동네 사람이 절대 다니지 않을 산중턱까지 올랐다. 담배 세대를 연달아 태우는 동안 바라본 우리 집은 성냥갑 같았다. 성냥갑 같은 집에서 성냥에 묻은 인보다 작게 보일 어머니가 소시민을 탈피하지 못한 자신의 과오를 자기비판하고 있을 터였다. 우습고 쓸쓸한 상상이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나만 보면 담배 끊으라고 닦달이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담배 운운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데 아버지가 불쑥 들어왔다.
“담배 한까치 도라.”
아버지는 내가 건넨 담배에 불을 붙였고 나는 뒤로 숨겼던 담배를 꺼내 나란히 지리산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아버지와 그날 함께 태운 담배가 담배 경력을 통틀어 가장 맛났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가부장제를 극복한,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였다. 영혼이라는 게 있어 설령 이 장면을 목격한다 해도 아버지는 담배 한 까치 도라, 그럴 것이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더 청해 불을 붙인 뒤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담배가 저 혼자 타들어갔다. 저 연기가 아버지에게 닿기를……243-245
“아이, 쫌 대줄 것을 그랬어야.”
한참 만에야 대준다는 의미를 이해했다. 남사스러운 말을 뱉어놓고 어머니는 태연하게 눈물을 훔쳤다.
“나가 노상 아팠잖애. 내 몸 하나도 워치케 못하겄는디 자꼬 건드려싼게, 나가 하로는 그랬어야. 차라리 딴 디 가서 허고 오씨요.”
아버지는 벽력같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참말로 가?”
“가랑게요.”
아버지는 깊은 밤중, 씩씩거리며 문을 쾅 닫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소리에 내가 자지러지게 울었단다.
“오랜만에 달게 잤어야. 안 건드링게 그리 펜헐 수가 없드란 말다.”
“아빠는? 진짜 딴 데 갔대?”
“통금 있던 시절인디 벵보석으로 나온 냥반이 그 밤중에 워디 갈 수나 있간디?”
아버지는 바로 아래 큰 집에서 그때는 살아 있던 큰아버지와 밤새 술을 마셨다. 날이 훤히 밝아서야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를 노려보며 근엄하게 외쳤다.
“또 한번 그런 소리 해보소. 참말로 가불랑게!”
“그때는 그 말도 서운허드라. 아파죽는 나 생각은 안 해주는가 싶응게. 무신 헥멩가가 고것 하나 못 참는가 싶고이. 남자들은 그거이 고로코롬 조으까? 그래도 후제로는 나가 아프다면 소주 한 컵 묵고는 자불드라. 긍게 나가 살았제. 안 그랬으면 내 멩에 못 죽었을랑가도 몰라야.”24-248
오십년 가까이 살아온 어머니도 아버지의 사정을, 남자의 사정을, 이제야 이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하자고 졸랐다는 아버지의 젊은 어느 날 밤이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그런 남자가 내 아버지였다. 누구나의 아버지가 그러할 터이듯.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248-249
“할배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 아줌마 궁뎅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도 제 입으로 까는 데 선수다.
그것도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