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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가를 말하다 - 공화국을 위한 열세 가지 질문
박명림, 김상봉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11.
민족·국가·공동체: 전체를 생각한다는 것
“국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를 책임져주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입니다.” _김상봉
“국가는 하루빨리 참된 국가 이성과 공공성을 회복해 국민의 개별적 삶들을 보듬고 안정시키려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 없이는 국가의 안정도 발전도 어렵습니다.” _박명림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국가와 민족,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 주제를 다루려니 언젠가 경향신문에 실린 조갑제 씨의 인터뷰 기사가 떠오르는군요. 그 인터뷰에서 그는 “국가 중심으로 국익 중심으로, 국민 전체의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국민”이라고 하더군요.
기자가 용산참사의 희생자들과 관련해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은 삶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인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국가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국가가 자선 기관은 아니죠.” 하면서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깡패들이 설치는 것을 막는 것이 국가가 할 일이라 하더군요. 삶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에게 대한민국이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한보다 나을 것이 없고, 어차피 여기는 용역 깡패와 경찰이 한통속인 나라인데, 국가가 공산당 반대하고 깡패들 막아주니 국가 중심, 국익 중심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되라니, 이것은 시장 상인들더러 다른 깡패들로부터 보호해줄 테니 우리 말 들으라며 등쳐먹는 조폭의 논리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런 식의 국가 지상주의가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 바탕에는 전체가 개인보다 더 소중하다는 이데올로기가 똬리 틀고 있지요. 자기를 내세우면 이기적인 사람이고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라는 모호한 도덕률은 단지 파시즘적 도덕 교육 때문이 아니라도 식민 통치와 전쟁의 경험으로부터 한국인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데, 제대로 된 나라를 위해서는 이 전체주의 도덕을 해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해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그 근거를 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에 까닭 없이 생긴 일은 없으니 우리가 흔히 애국심이라 부르는 국가주의적 정념 역시 나름의 근거가 있는 까닭에, 그 근거를 비판하고 허물지 못한다면 해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앞의 편지에서도 밝힌 바 있는, 저의 동료 철학자인 장은주 교수가 진보적 애국주의를 들고 나와 잠시 논란이 벌어진 것에서도 보듯이 국가주의적 정서란 그냥 무시하거나 비난만 하고 덮어버리기엔 너무도 뿌리 깊은 현실인 것입니다.
“시민적 주체성이 국가와 민족의식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이나 국가가 개인에게 무언가 강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까닭은 국가 또는 민족이 또 다른 자기 또는 더 큰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또는 자아라고 하면 단순히 자기의 몸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옳다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먹고 사는 향유의 주체가 아니라 만나고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입니다. 만약 수동적 감각이 문제라면 몸이 나의 전부이겠지만, 나의 활동이 문제라면 나의 자아는 나의 활동이 확장되는 만큼 확장됩니다. 그리고 그 활동을 통해 형성된 것들은 모두 자기의 일부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업가에게는 기업이 자기의 분신이며, 예술가에게는 작품이 자기의 분신이고, 학자에게는 책이 자기의 분신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국가를 더불어 형성하는 시민들에게 국가 역시 확장된 자기의 분신이라 말한다 해서 크게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민족 또는 겨레란 그런 국가를 같이 형성하는 동료들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유럽에서 근대적인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프랑스에서 시민 혁명을 통해 굳건히 정착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근대 초기 유럽 땅 여기저기서 봉건적 지배 체제가 붕괴되고 왕권 국가들이 들어서지만, 그대까지만 하더라도 민족주의란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절대왕정 시대엔 프랑스 루이 14세처럼 왕들이 ‘짐이 곧 국가’라고 떠들고 있었으니, 유럽인들에겐 여전히 국가란 왕의 나라이지 내 나라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인들의 경우에도 학자들에 따라서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유명한 백년 전쟁이나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의 형성기에 민족주의가 싹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설령 그런 사정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남의 물건이 아무리 좋아도 부러워하긴 해도 애착을 느끼지는 않듯이, 혁명 이전 프랑스 국민들에겐 아직 자기 나라라기보다는 왕의 나라인 프랑스에 대해 오늘 우리가 말하는 국가에 대한 애착으로서의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적 열정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이 성공하면서부터 상황이 급변하게 됩니다. 혁명은 프랑스 국민을 왕의 신하가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프랑스인들은 왕국이 아닌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국가를 스스로 만들어나갈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피 끓는 열정으로 목숨을 건 혁명을 거쳐 나라를 그의 나라에서 바로 나의 나라, 우리의 나라로 만든 시민들이, 마치 기업가가 자기의 기업을 그리고 예술가가 자기의 작품을 분신처럼 소중히 여기듯, 자기의 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애착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이 1차로 성공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안팎의 적들이 다시 그들을 과거의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프랑스 시민들이 공화국을 지키는 것을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서는 최고의 가치로 놓았으리라는 것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공화국을 지킨다는 것은 남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가끔 듣는 경쾌한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에즈’는 내부의 압제자들과 혁명을 파괴하려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서 전쟁터로 나아가는 마르세이유 출신 시민 병사들이 부른 일종의 혁명 군가로서 바로 이런 시민적 국가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혁명을 통해 나타난 민족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시민적 주체성의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민들이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활동과 능동적인 형성의 과제요 그 성과이기도 한 국가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고 그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누구든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의 감정으로서 긍지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면 시민이 자기가 더불어 형성한 나라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로서, 비난한다고 근절될 것도 아닙니다.
“굴절된 민족주의는 맹목적인 애착과 국가주의의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근대적 민족주의의 역사는 그 이후 이미 유럽 아니 프랑스 자체 내에서부터 왜곡과 굴절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의 유산에 기대어 한편에서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혁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혁명을 외부로 수출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했을 때,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국가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시민들이 자기 나라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이 아니라 여전히 절대군주의 봉건적인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이 자기의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매여 있지만 친숙한 땅과 문화 또는 종교에 대해 느끼는 애착으로서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프랑스의 이웃나라인 독일에서 잘 볼 수 있는데 젊은 시절 시절 그리도 고상한 세계 시민주의자였던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가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서《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책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이나, 비슷한 시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문학을 통해 독일의 땅과 언어와 역사에 몰입한 것,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독일에서 다시 하이데거가 철학자답게 자못 심오한 방식으로 독일민족주의를 선동한 것 등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경우에도 여전히 차르의 절대 권력 아래서 농노 상태에 있던 러시아인들이 나폴레옹의 침략을 계기로 열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에 빠져든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나폴레옹이 러시아인들을 농노 상태에서 해방시켜주겠노라고 아무리 선전을 해도 러시아인들은 침략자의 앞잡이가 되는 것보다 그들에 맞서서 차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되려 했습니다.
그 이후 민족주의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제국주의적 침략의 역사와 겹쳐 있습니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도 민족의식도 없었던 아랍에서도, 층층시하 카스트 제도가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 따위는 전혀 없던 인도에서도, 그리고 다시 넓은 의미의 유교 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베트남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한국에서도, 민족주의는 어김없이 침략해오는 타자에게 부정당하는 경험으로부터 다시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기를 긍정하려는 욕망으로 화산처럼 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처음에 시민적 주체성의 표현으로 생겨난 국가 및 민족의식은 오로지 자신이 속한 땅과 문화 그리고 과거 역사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과 국가를 중심으로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른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건강한 민족의식이 어떻게 사악한 국가주의의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지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는 사례를 찾는다면, ‘독립선언서’와 박정희가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독립선언서는 오래전의 한자 말투 글이라 읽기 편하지도 않지만 그 내용을 보면 지금 읽어도 명문입니다. 아마도 근현대 한국 독립 운동과 해방 후 반독재투쟁의 역사 속에 무수히 많은 선언문이 있었지만 독립선언서야말로 그 꼭대기에 놓아 마땅한 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비단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문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식민 통치 아래서 그토록 적절한 압제 아래 있었으면서도 압제자에 대한 거친 분노 대신 고상하고 위엄 있는 어조로 일제에게는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고 조선인들에게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살기위해 끝까지 저항할 것도 감동을 주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 문서엔 한구석도 옹졸하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정서가 배어 있지 않은 것이 놀랍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드문 고귀한 정신의 표현인가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라 마르세에즈에 넘쳐흐르는 적에 대한 증오심과 대비해보면 너무도 분명해집니다.
독립선언서는 단순한 민족생존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관되게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일본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식민 지배를 끝내야 한다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립선언서는 편협한 민족 지상주의적 입장이 아니라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식민 지배가 조선 민족은 물론이요 중국 민족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 민족 자신을 위해서도 나쁜 일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맹목적인 자기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모든 인류의 공존공영의 이상을 지킨 것이야말로 이 문서의 고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가 철학자 박종홍 등을 시켜 만든 국민교육헌장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첫 마디에서부터 우리는 민족이라는 기호가 어떻게 무지몽매한 미신적 광기와 결합하게 되는지의 가장 천박한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명이란 아무나 입에 올릴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아무 때나 입에 올릴 수 있는 말도 아닙니다. 제 말씀은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경우에 입에 올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명은 오직 각자가 자기 스스로 찾아야 할 과제이지 민족이나 구가를 빙자해서 남이 내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명이란 자기의 존재 이유입니다. 존재는 그 자체로서 전체이니, 자기의 사명이란 우리 각자가 전체 속에서 자기의 존재하는 까닭을 스스로 깨달을 때 비로소 내 속에서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민족은 내가 속한 전체 존재는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전체 세계 또는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가족에서 태어났다 해서 내 가족이 잘 되는 것이 내 삶의 궁극적 목표일 수 없듯이, 내가 어떤 민족의 구성원으로 났다 해서 민족 중흥이 나의 역사적 사명일 수도 없습니다. 사명이란 언제나 궁극적 존재와 맞닿을 때 번개처럼 자기를 계시하는 것이니 그것은 함석헌이 말했듯이 민족이나 국가처럼 전체가 아니라 한낱 단체에 불과한 공동체가 감히 참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민족이나 국가의 가치가 그것들이 얼마나 전체의 입장에서 존재 가치가 있느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것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민족이나 국가가 선과 악의 궁극적 척도일 수 없으며, 나의 나라와 민족이 전체의 관점에서 악과 불의를 저지른다면 감연히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참된 자유인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교육헌장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둥,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이”라는 둥, 주제넘은 설교를 늘어놓다가, 결국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으로까지 퇴행한 뒤에야 끝이 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나라가 정말로 내 나라라면 누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인 줄 모르겠으며, 그것을 남이 설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대한민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주인이요 주체인 국가라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시민들은 국가 건설에 참여할 것입니다. 더러는 자기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시비를 걸면서 억압적으로 성실한 참여를 강요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 절박한 5⋅18 민중항쟁 당시에도 누구도 다른 시민에게 같이 총을 들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도 모자라 유신 시절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라는 것을 따로 만들어 외우게 했는데,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가 종교의 주문呪文을 듣고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고 많다. 열심히 해라.”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광기에는 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박정희 식으로 반복해서 과도한 방식으로 애국 애족을 강요해야만 했다는 것은 그 나라가 박정희 개인의 나라일 뿐 우리 모두의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을 거꾸로 증명해주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에 전형적으로 표현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란 국가를 사사로이 점유한 폭력배들이 민중을 일사불란하게 동원하고 지배하기 위해 부르짖는 구호로서 어김없이 독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한국 역사에서 식민 통치와 전쟁의 경험이 우리의 의식 속에 우리를 깨우치는 교훈이 되기보다는 지극히 퇴행적인 집착으로 침전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야말로 시궁창 바닥에 가라앉은 오니처럼 우리의 정신을 부패시키는 독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나쁜 민족주의와 좋은 민족주의를 구별하기도 하지만, 부질없는 일입니다. 좋은 의미의 민족주의든 나쁜 의미의 민족주의든 거기 공통된 위험은 타자에 대한 배타성입니다. 이는 좋은 민족주의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철학적으로 고찰하자면, 주체가 자기를 긍정한다는 것과 타자를 부정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있는 것이어서 자기 나라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남의 나라에 대한 배타적 부정은 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다’라는 자기 긍정은 ‘나는 아닌−나非我가 아니다’라는 타자 부정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리 좋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라 할지라도 그것이 강렬해지면 국가나 민족을 자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 안과 바깥의 다른 자들을 생각하지 못하는 맹목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또는 애국심이란 내버려둔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일종의 자연적 이기심이므로 애써 고취할 필요까지는 없는 정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세계 시민주의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넘어가려 합니다.
“나를 책임지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민이 국가의 참된 주인이 되지 못하고 억압적인 통치 아래 있는 나라에서 조갑제 씨처럼 국가 중심, 국익 중심, 국민 전체 중심으로 생각하라고 남에게 강요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꾸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당신들의 천국이니, 당신이나 그렇게 사쇼.”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도 개인이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가치한 일이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국가는 단체일 뿐 전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한 인간에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개인 역시 국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국가는 끊임없이 개인에게 (가짜) 전체를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하면서, 희생당하는 개인이 그럼 국가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느냐고 물으면, 뻔뻔스럽게도 국가는 자선 기관이 아니라고 발뺌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좋은 국가를 만들기 원한다면 국가에 관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국가에 대한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시민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나를 책임져주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국가에 얽힌 불행은 바로 이 명백한 이치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용산참사에서 보듯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문제가 국가가 시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은 외면하면서 도리어 개인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국가 권력의 문제만도 아니어서 한국 사회에서 크든 작든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공통적인 질병인 듯합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지난 2008년 강릉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3학년 학생회장이 2학년 학생 하나를 아침 조회에 불참했다 하여 때려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고, 단체나 집단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면 무슨 짓이든지 정당화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살인을 부른 것입니다. 그런즉 언젠가 이 부패한 국가를 허물고 참된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리의 한계를 엄밀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짧은 편지에서 그 과제를 끝낼 수는 없겠지만, 시작을 위해 세 가지 근본 원칙을 제시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로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에게 어떤 행위를 하라고 강제할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것이지만 국가의 존재 이유는 그것을 통해 오직 개인의 자유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강요는 자유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병역의 의무나 교육의 의무가 그런 것인데, 국가는 총을 들지 않겠다는 시민에게 총을 들라고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학교 가지 않겠다는 학생에게 학교 가라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하게 하고 싶으면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고 자유로이 계약을 맺으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어떤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며,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국민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이승만이나 박정희 또는 전두환 같은 내부의 독재자와 싸우는 것이 아무리 절박한 일이라 할지라도 시민에게 강요된 의무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특히 부끄럼 없이 식민지 개발론을 입에 올리고 박정희 덕분에 경제가 발전했으니 독재인들 어떠냐는 우익 인사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병역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기괴한 일입니다. 일본이 우리를 근대화시켜주었다면 미국이나 중국이 이제 우리를 현대화시켜줄 것이니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킬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박정희의 독재는 괜찮고 김일성의 독재는 나쁘다는 말은 사리에도 맞지 않거니와, 공산당이 통치하는 베트남의 경우에서 보듯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습니다.
대개 우리의 인생에서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뿐입니다. 국가와 침대에 들 것도 아닌데 국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이 무슨 변태적 발상입니까? 하물며 그것이 어찌 의무로 강요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유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5⋅18 시민군처럼 자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유의 가치를 깨닫는 것과 나라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지,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강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둘째로 국가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가 아닌 한, 개인의 행위를 금지할 권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과연 무엇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중독성 마약을 제조, 판매하는 일이나 성을 사고파는 일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니, 시민적 토론과 합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어서는 안 될 것은 공적인 일에 대해 의견을 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시민의 침해될 수 없는 주권 행사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으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해온 국가,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글을 썼다고 인터넷 논객을 감옥에 가두는 국가 그리고 일제고사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고 교사들을 해고하는 국가는 자유 민주주의를 포기한 국가로서,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요, 마땅히 타도해야 할 국가입니다.
국가가 권력을 통해 금지해야 할 것은 개인의 주권 행사가 아니라 도리어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억압하는 모든 유사 권력들의 횡포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가 학생에게 야간 자율학습을 강요한다면, 국가는 그런 학교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하여 학생들을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만약 자본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가입할 권리를 침해하거나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중소기업을 착취한다면, 그런 때 역시 국가는 지체 없이 개입하여 그런 유사 권력에 대해 재갈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학교가 학생과 교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 교육의 자율성이고 자본이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시장의 자율성이라 강변하거나 국가가 일관되게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유사 권력의 편을 든다면, 이제 그런 국가는 허물고 새로 세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국가는 어떤 경우에도 국익을 빙자해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 역시 국가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의 수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지역에서 아무리 많은 주민이 찬성한다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에게 재개발 사업에 참여할 것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다수결의 원리는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공적인 일에 적용되는 한에서만 정당성을 가집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다수가 담합하여 소수를 약탈하는 범죄 행위일 뿐입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군 기지로 쓰겠다고 대추리 주민들에게 집과 땅을 버리고 떠나라고 강요하거나, 해군 기지를 만들겠다고 서귀포 강정리 주민들의 삶터를 빼앗을 권리는 국가에게 없습니다. 물론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양보가 필요한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국가는 협박과 술수 대신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고 협상해야 할 것입니다.
전체를 위하는 마음은 고귀하고 숭고하지만, 그 까닭은 전체가 무조건 개체보다 귀해서가 아니라 함석헌이 말했듯이 개인의 참된 자유가 오로지 전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요된 희생은 자유가 아니라 굴종일 뿐이니, 거기에 고귀하고 숭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칸트가 말했듯이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인 까닭에, 사람들은 제 편한 대로 전체를 입에 올리는데, 대개 가짜를 들고 진짜 전체라 우깁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하는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전체는 계량화된 숫자로 표현되거나, 더 나쁜 경우 사람들은 강자의 이익을 전체의 이익이라 강변합니다. 그리하여 단지 다수의 이익이 전체의 이익이 되고 강자를 위하는 것이 전체를 위하는 것으로 둔갑하는데, 그 결과 사람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고, 강자를 위해 약자를 수탈하면서도, 이것이 도리어 국가와 민족 전체를 위한 일이라 믿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지금 이 나라는 입법⋅사법⋅행정 그리고 경제⋅언론⋅교육을 가릴 것 없이 총체적으로 강자가 서로 담합하여 국가 권력을 도구로 삼아 약자를 수탈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고착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볼 때 단순히 정부가 아니라 국가를 통째로 바꾸어야 할 까닭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전체를 위한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전체 공동체 내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일 뿐입니다. 가장 약한 자에게 좋은 일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인류는 강자를 위해 약자를 희생시키면서 그것을 진보라 믿었습니다. 이제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약하고 느린 자와 같이 걷는 법을 배울 때입니다. 사랑의 진보만이 참된 진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선생님의 지혜를 청하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149-167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