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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를 담은 포트폴리오
-강남주 시의 한 특성-
김지숙
하지 않음의 가치 규명
강남주 시인은 ‘시는 세상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첫 시집『海底의 숲』(1973) 이후 『흐르지 못하는 강』(1997)까지 총 7권의 시집에 수록된 420여 편에 이르는 시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이들 시 가운데 84편을 가려 실은 시선집『등불을 앞세우고』에는 30년 이상의 탄탄한 시력을 갖춘 강 시인의 문학적 깊이와 시각을 ‘세상에 대한 해석’의 관점에서 잘 이해할 수 있게 압축되어 있다. 이들 작품을 자료로 그의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의 옛 선비들은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는 세상을 살면서 공명을 의식하지 않고, 소유의 집착도 없이 순수한 마음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가장 높은 가치라 여겼다. 이는 노자가 말하는 세계관의 핵심이 되는 ‘하지 않음(無爲)’의 참 가치를 터득한데서 얻어지는 세계관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으나 주관과 객관이 적절히 융합된 행위를 도외시하지 않는 것도 이 ‘무위’에는 포함된다.
이런 동양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강 시인의 시를 살펴보면, 그의 시에는 진정한 삶을 성실히 자각하는 깨달음이 ‘무위’를 지향하는 시로 표현되고 있다. 이 깨달음의 본질은 현실의 삶이 갖는 존재의 모순성을 자각한데서 비롯된다. 여기서 우리는 강남주 시인의 문학적 방향성을 읽을 수 있다.
본질과 형상의 일원성
그의 시는 대체로 크게 네 가지 의미망으로 짜여져 있다. 그들 중 처음은 본질과 형상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다루고 있는 점이다. 진작 발표된 시이긴 하지만, 아래에서 인용하는 「이름 때문에」라는 시는 본질과 비 본질의 이원적 가치에 대하여 충분히 깊이 사유하는 적절한 시의 예가 된다.
이름 없을 때는
자유로운 꿈이었다.
이름이 붙고 난 뒤에는
고객을 바라보는 눈이 되었다.
상표는 커튼이 되어
존재의 불빛을 가리고
이름은 무거운 짐
부자유의 무게일 뿐이다. -「이름 때문에」전문-
노자는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다운 실재의 이름이 아니다(제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인간 사유의 대상물로 전락하기 이전에는 제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상태를 유지하는 통일체이지만, 일단 인간 사유로 인해 이름이 붙고 나면 이미 제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상태는 사라지고 만다는 의미이다.
시 「이름 때문에」는 이름이 붙고 난 후의 존재는 참다운 실재로서의 본질적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더 이상 이전의 자연 상태로 존재할 수 없기에 이름 지어진다는 것은 진아(眞我)가 될 수 없고 그것과는 점점 멀어진다. 그렇다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한다는 것이다. 대상이 본질에서 비켜나는 것은 짐스럽다. 이처럼 본질과 형상의 ‘같지 않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시가 바로 이 시라 하겠다.
물론 ‘이름’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화자는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없음의 자유를 궁극적인 실재와 더 가깝게 느낀다. 이 시에서 화자는 이름 없음의 깨달음이 고독감이나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 성정에 어긋나지 않는 자기존재를 찾아가는 작업임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無名’에 대한 자각은 시 「무명의 들풀」에서도 나타난다. ‘누가 알아주랴,/ 그의 이름을./ <략> 이름은 없어도 신선한 등불’이라 하여 이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신선하다고 말한다. 이름이 없음으로 오히려 생명의 등불은 켜진다는 점을 통해 화자는 들풀의 ‘無名’이 지닌 자유와 신선함이 말해주는 진정한 가치를 깊이 터득한다.
‘無名’의 가치를 깨닫는 일은 언어 표상에 의존하지 않는 대상의 참 가치를 깨닫는 일이다. 이는 모든 존재 속에 ‘無名’이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는 일이 된다. 화자는 이름에 집착하지 않고 사물을 대할 수 있기에, 욕망마저 초월할 수 있는 ‘無名’은 사물의 본질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들은 無名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장을 열고 있다. 따라서 ‘無名’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깨닫는 일은 상식을 벗어나서 비로소 가능하며, 이는 곧 자기 존재의 인식작업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잡초」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무어라고 불러줘야 할/ 이름은 없는가.//이렇게 맑은 하늘 아래서는/ 투명한 이름이/ 있어야만 하는데’ 라면서 ‘잡초’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화자는 이름에 대해 깊이 인식한다. 표면적으로는 무엇인가 다정하게 이름 짓고 불러주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이 보이지만 이는 역설이다. 오히려 투명한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것은 때 묻은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일이다. 그것이 참 가치를 더하는 일이라는 점을 화자는 알고 있다. 투명한 이름이 없다는 것은 잡초에게는 더 많은 인욕의 절정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여기서 잡초의 사라진다는 의미는 무엇이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얽혀 있어 때가 이르면 이 얽혀 있는 것들과 함께 사라지기에, 만물은 고정불변으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無名’으로 인해 관계의 고통이 인욕의 절정을 요구한다면 이는 역설이다. ‘無名’ 보다 더한 아픔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오히려 ‘無名’이 더 홀가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결과 인욕은 진정한 생명력을 향한 약동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이름 있는 풀은 이름 없는 풀보다 더 존재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시에서도 역시 화자는 이름이 없음으로 진정한 자기 존재의 확인하고 있다.
또한 「떠도는 자의 일기」에서도 화자는 ‘無名’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화자는 ‘그대’ 곁에 떠도는 ‘無名’으로 남고 싶어 한다. 흔들리며, 떠돌며, 나부끼며, 맴돌며 오랜 세월 흔적 없이 머물고 싶어 한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굳이 내세울 필요도, 내세우고 싶어 하지도 않는 화자는 ‘無名’으로 ‘그대’ 곁에 존재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화자 자신의 본질적인 가치가 변질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방법이며, 또한 화자가 바라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無名’으로나마 '그대'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
결국 이 시들에서 ‘無名’이란 인간이 사유의 대상물로 전락하기 이전,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는 자연 상태를 유지하려는 자아가 통일체로서의 면모를 지닌다하겠다. 또한 온 몸으로 체험한 자기 존재를 깨닫고 자연 속에 스스로를 귀속 시키는 참된 삶을 향해 열려 있는 자기 인식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수용과 반응의 간극 메우기
앞서 언급한 바, 그의 시에는 노장사상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시는 언어로 표현된 예술작품이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無言’의 가치와 배치된다. 하지만 언어가 ‘無言’의 예술작품으로 되기 위해서는 ‘말’의 군더더기를 과감히 생략하고 ‘無言’의 깊이와 질량을 통해 무위자연의 세계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백을 통한 화자와 청자의 교류, 생산자와 수용자의 교감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의 시의 두 번째 특징이다.
시는 시인의 상상력을 토대로 해서 인간 체험을 언어로 전달하는 구조적 특성을 가진다. 하지만 인간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매체 외에도 표정, 억양, 음성의 고저장단, 손짓 발짓 등을 통해서 의사를 표현한다. 이 때 이미 정제된 언어의 사용이 아닌 ‘無言’의 의사 전달 기능도 큰 몫을 차지한다. 부려 쓰는 언어보다 갈무리된 언어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경우 해결해야 할 난제는 시인이 의도한 바가 수용자에게 바르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도 분명 장단이 있다.
왜냐하면 언어는 관념성을 지닌다. 그래서 원관념에 대한 입력의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부려 쓰는 말은 상상과 이해에서 차이가 생기고 서로 다른 환경 속의 시인과 독자 사이에는 의미 파악에서 부정확한 전달의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난다. 의도적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더구나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無言’은 비언어적 매체인 암시, 은유, 패러디 등에 의해 숨겨진 뜻을 읽어내는 것으로, 이는 시인이 숨겨둔 의미를 찾고, 시인의 의사를 감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오히려 그 비밀스러움을 찾기에 묘미가 더해지고 시의 효과는 높아진다. 혹자들에게는 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고, 혹자에겐 시인의 의도가 채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독자에게 곧바로 읽혀진 시들은 사고의 방향, 현실감각, 생활수준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되어 독자에게 ‘無言’의 의미를 전달하게 되므로, 시인의 의미는 독자에게 읽혀지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이야기는 없다.
이 조용한 정물 속에서
나는 한 그루
가로수가 되는 걸로
만족하다.
잊었던 옛적의 친구에게
오랜만에 엽서를 받아 들듯이
손을 가만히 펴들고 있으면
손바닥에 내려앉는
다정한 소식.
혼야에 새 살결 감촉하듯이
산길을 돌아오는 나의 촉각에
사뿐히 말없이
내려지는 말씀
이제 내가 해야 될 이야기는 없다. -「눈길」전문-
언어는 사물의 공통적 특성에 따라 붙여진 약속이지만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사물의 공통적 특성을 들어 자의적으로 이름을 붙이고 이해를 돕기 위해 서로 약속한 기호에 불과하다. 하지만 통상 언어표현으로 개인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기란 어렵다. 그래서 시는 언어가 지니는 구상성과 추상성을 극복하고 개인의 감정을 고스란히 창의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했느냐에 따라 그 시가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문학적 진실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다.
독자는 시인이 만들어 놓은 창의적인 세계를 시인의 의도와는 달리 받아들이므로 시에서 의사소통은 일반적인 대화에서 나타나는 그것의 구조와 그 상황이 다르게 해석된다. 그래서 흔히 문학성은 시인이 자신의 언어로 작품을 구체화하고, 독자에게 읽혀지는 과정에서 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현실을 읽어가면서 비로소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이 경우, 한정된 언어보다 여백을 넉넉히 가진 초언어일수록 더 깊은 사고의 폭을 필요로 하게 된다.
위의 시 「눈길」에서 화자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 눈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그루의 가로수 이상의 그 어떤 존재도 아님을 깨달은 화자는 눈길 위에서 할 말을 모두 잃어버린다. 자연의 한 점에 불과한 존재 인식과 눈이 내린 정황과 상황 속에서 구차한 언어적 표현에 스스로 절망감에 빠져든다.
이는 화자가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망각한 상황 속에 들여놓음으로써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연과 절대의 자유 속에 놓이긴 했지만 연약한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자연과 자신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미미함을 확인하는 매개로 ‘눈길’이 표현되며, 이는 근원적으로 자연의 섭리에 공감함으로써 자연 속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인간의 자연화’라는 미적 체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화자가 ‘無言’을 말하지만 이 ‘無言’은 의미상으로는 오히려 시시비비를 떠난 인간 ‘無爲’의 체득과정에 오히려 가깝다. 이는 화자가 자연을 선한 모습으로 인식하는 시야로,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 이상적 터전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가령, 화자가 눈길에 서서 할 말을 다 한다면 청자의 상상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바로 여기서 언어의 절제가 필요하게 된다. 절제된 시어를 통해 화자는 자신의 마음속 말을 다하지 않아도 청자인 독자가 알아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러한 무언의 의사소통, 즉 이심전심의 장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에는 의사소통의 장을 극복한 ‘無言’의 문학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無言’의 의사소통의 가치는 「홍도 돌멩이」「내장산」「해변의 묘지」에서도 가치를 발휘한다. 동양적 자연관에서 보면 자연 안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그 어느 것이나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유기체적 존재로 살다 간다. 그래서 자연은 동식물의 안식처가 된다고들 말한다. 「홍도 돌멩이」에서 화자는 ‘쪼개진 살 속/ 몇 번일까 부딪치며 후벼내는/ 빛과 소리의 신음/ 감당하기 어려운 희비로/ 사위어 가는 색신 고운 몸뚱아리’라 하여 돌멩이를 화자 자신과 결부 짓고, 자연에 동화된 존재로 그려 놓고 있다. 자연스럽고 천진스럽게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아픔들은 말을 잃어버린 채 오히려 색신 고운 빛깔로 사위어 간다. 이 돌멩이를 바라보는 화자 자신은 또 다른 몸뚱이를 지닌 화자 자신이며, 그것은 화자가 바라는 바, 자연 속에서 자신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연의 순리에 거역함이 없이 철저히 살아가는 외에는 어떤 말들도 필요 없는 생명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변의 묘지」에서는 은둔이나 피세가 아닌 ‘봉분’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 더 이상 말없는 죽은 자에 대한 자연 사랑이 나타난다. ‘삶이 끝나면 봉곳한 집 한 채만 남는 것./ 별이 내려와 넓어서 쓸쓸한/ 어두워서 다정한 하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에서는 ‘有無相生’(노자)처럼 삶과 죽음은 서로의 존재와 부재를 공유하면서 발전하는 우주 생성의 원리를 담고 있다. 이런 경우 언어의 절제는 생산자와 수용자의 간극을 메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
자타불이(自他不二) 사상의 접목
그의 시는 불교 사상의 중요한 개념을 이루는 자타불이 사상에 접목되어 있다. 이것이 그의 시의 세 번째 특징이다.
원효가 말하기를 ‘道란 온 세상에 고루 퍼져 마침내는 일심의 근원에 돌아온다’고 하여 자기 철학의 최고 범주로 일심설(一心說)을 설파했다. 一心이란 세계에서 자연과 인류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어떤 신비적이고 초인간적인 절대정신이다. 이 정신은 도가 아무리 사물에 깃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마음의 근원에 되돌아온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모든 현상은 단지 ‘一心’이 스스로 운동하고 스스로 발전해 나감에 따라 드러나는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사상(四相, 참고:四相=生老病死 生往移滅)이며, 모두 마음에서 빚어낸 것으로 一心에서 벗어나서는 어느 것도 따로 자체를 갖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起信論疏, 序)
다음 인용 시는 원효의 일심설에 접맥하고 있다.
더욱 낮게 살기를 바란다.
이 세상 잔재미를 하나씩 거두어 가고
내가 가진 욕심을 하나씩 거두어 가고
덤덤하게
무심하게
조용해지기를 바란다.
어제는 막히고
오늘은 부딪치고
내일은 주장해야 되는
볼륨 높은 삶의 찌꺼기를 걷어내
아무데나 자유롭게 흐르는
목숨이기를 바란다.
이제는 그만 잘났으면 좋겠다.
아무리 들어도
너무 높은 목소리
가열된 생활에서 돌아와
잔잔하고 다정한
내 목소리를 갖고 싶다.
욕심 없이
작은 사람으로 사는 하루하루이기를 바란다. -「無所畏의 하루」전문-
「무소외의 하루」에서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구성들이 자신이 바라는 바와는 다른 것을 알고 있다. 화자는 그것이 자신이 바라던 상황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것들이 조용하길 바라고, 자유롭게 흐르는 목숨이길 바란다. 또한 화자는 잔잔하고 다정한 자기 목소리를 갖고 싶어 하며, 작지만 자기만의 목소리를 지닌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바란다. 즉, 세상 만물이 화자 자신의 마음에 귀일하고, 화자 자신의 마음으로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온 우주가 조용하기를 바란다.
이 시는 시의 형식을 빌려 절대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선시적(禪詩的) 성향을 띤다.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스스로 깨우친 인생의 깊이를 불완전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깨우침에 이르는 정신상태를 상징적으로 평면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일상사 속에서 내보이는 시화의 과정에서 낯설지 않은 사물들을 새롭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 통상적인 언어 논리의 틀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있다. 거대하고 화려한 외양을 떠나 오히려 더 낮아지고 작아지면서 삶의 진수를 찾겠다는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의 특징이다. 결국 큰 것을 떠나 작고 작은 마음에 귀의하고자 하는 일심설과 그 맥을 같이 한 시이다.
화자는 세속적 재미도, 욕심도 없이 무덤덤하게 살고자 한다. 달빛이 수면에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화자의 마음자리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살다 가기를 바란다. 또한 화자는 인간의 삶을 자신과 분리된 대상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객관적으로 차분히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는, 그러면서도 억지로 인간의 삶에 同化하지 않으려는 순수한 삶의 주체성을 보인다.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궁극적으로 하나이기에 여기서는 ‘나’와 ‘너’가 결국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거미줄에 걸려서」에서 화자는 ‘쓸데없는 일에 온몸이 묶여/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로/ 바둥거리며 사는 세상./ 벗어날 수 없는 일들이/ 몸을 감고 든다.’고 말하고 있다. 자연의 모든 이치를 통해 인간사에 고개 끄덕일 수 있는 이치를 깨닫는 일이 한 두 가지 아니지만, 거미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잠자리의 모습을 통해 직관적으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요컨대 이 시 역시 언어와 사물의 구분을 넘어서고 있으며, 자연과 화자의 구별도 갖지 않아 주객일체, 무위의 깨달음을 나타내는 시이다.
「浮屠 앞에서」도 같은 의미망에 놓인 시이다. 이 시에서의 화자는 ‘당신의 법문은 허망합니다./ 바람 앞에서 바람소리보다 허망합니다./ 흐르는 물결에서 물소리보다 허망합니다.’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오감각(五根)에 ‘意根’을 더해 六根이라고 하며 육근에서 六識이 생긴다고 했다. 이러한 인식대상과 대상에 대한 의식의 집합체를 五蘊이라 하는 데, 불교에서는 이를 ‘空’이라 한다. ‘空’은 대상과 대상에 대한 인식을 따로 구별하지 않는 무심의 상태가 바로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형상을 보는 것이 구별 없는 것으로 된다. 이는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는 自他不二상태이며, 주객합일의 상태를 말한다.
화자는 청각이 감지하는 바람소리, 물소리보다도 법문이 더 허망하다고 한다. 화자는 인간의 감각이 인식하는 오감에서 얻은 의식도 허망하고, 여기에 意根을 통해 얻어지는 법문조차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화자의 마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 같은 삶의 연속 그 자체가 ‘空’에 놓여 있으며, 대자(인식되는 대상)와 즉자(대립의식이 없는 주체)가 이미 구별되거나 인식되거나에 의미를 두지 않는 상태로서 깨우침의 견고함이 엿보인다.
「먼지로서」라는 시에서도 화자는 작은 먼지 되어, 없는 듯 있는 듯 떠돌고 싶어 한다. 결국 화자는 자기 존재는 그 유무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으며, 어느 곳에도 통하므로 무엇을 편애하거나 욕구하거나 집착하지 않기에 ‘먼지’로 떠돌고 싶어 하면서 진정한 무위의 속뜻을 헤아린다. 이는 단순히 자연을 미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달리 어떤 의도나 목적 없이 직관하는 태도, 순수한 상태에서 자연의 참 가치를 관조하게 되는 시정신이 그의 시에서 의식의 주류를 차지한다.
동양사상, 아니면 근본 회귀
강남주 시인은 서양의 시 이론에 매우 밝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막상 동양적 사상이 불교적 특성과 혼융된 의미망으로 탄탄히 잘 엮여져 있다. 시란 결국 동양시, 서양시의 구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정신의 탐구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작아짐, 허망, 죽음, 욕망의 부질없음과 같은 생각이 시에 반영되기까지에는 어느 정도의 연륜이 쌓여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상에 대한 인식, 또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분명 기쁨과 슬픔, 허망을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시인이다. 서양 논리에 시를 꿰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을 들여다보면서 시를 쓴다. 그 결과 동양적인 시, 무위를 다루는 생각의 시가 그의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연민까지
한 줌 흙으로 지우면
생애는 삭아서 바람이 된다.
날카롭게 마주섰던
그 서슬은 풀 죽고
애증은 우리들의 한갓 된 욕망
잔재주는 부리지 말자
잔재주는 부리지 말자
봉긋한 봉오리 한 개까지
남기지 않고
새로 자라는 풀잎끼리만
속삭이고 있다. -「平土葬」-
인생이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시에서 봉분조차 없는 무덤은 대자연으로 돌아간 인간이 자연과 동일한 생명성을 구현하는 공간이다. 시에 나타나는 자연의 질서는 서양의 낭만적 유기체론의 구현이 아니라 자연과의 합일을 시도하고 무질서했던 애증의 현실적 삶이 한갓 헛된 욕망의 도가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나아가 인간 자체의 성정만을 중시하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동양적 자연관 즉 인간과 자연이 상호 연관된 유기체적 의미의 그물망으로 그의 시들은 세상을 포착한다.
아직도 진행형인 無의 片鱗 찾기
그의 시에서 읽혀지는 주된 내용은 그가 세상사를 해석하는 시적 사유의 보편성과 자신의 시야로 세상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아름다운 ‘無’의 조각들로 비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분되어 ‘無名’ ‘無言’ ‘無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 ‘無’의 片鱗들은 결국 ‘無爲’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나아가 이들 ‘無爲’는 인위적인 것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갈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의 시는 화해를 중시여기는 인간의 감정을 넘어서고 있다. 따라서 강남주 시인의 시는 자기 존재의 확인을 위한 긴 여정의 포트폴리오로 보인다.
그러나 그 여정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에게 보여줄 포트폴리오에 대해서는 아직 속단이 어렵다. 언어를 뛰어 넘어 인간 사고의 깊이를 파 들어가고 있는 그의 시작업이 그 연륜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