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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지는 애정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오늘 저녁은 이웃 마을에서 콩쿨대회를 하는 날이다. 일종의 노래자랑 대회 성격인데 마을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자신의 노래실력을 뽐내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영우네도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범수아저씨네 트럭을 타기 위해 마을 어귀로 나섰다. 트럭 적재함에는 이미 마을 사람들이 꽉 차게 타고 있었다. 정아 씨도
미리 와서 적재함에 앉아 있었다. 마을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에 은정 씨와
이중사님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중사님과 병휘오빠가 경례를 하고 은정 씨
와 영우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범수아저씨 배려로 영우하고 은정 씨는 앞자리에 탔고 다른 사람들은 뒤쪽 화물칸에 탔다.
마을사람들을 태운 트럭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렸고 저녁노을을 감상하는 사이에
어느덧 이웃마을에 도착했다. 무대는 마을 중심가 넓은 공터에 설치되어 있었고
만국기도 허공에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제법 그럴듯하게 준비를 한 모양인데
도시에서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를 많이 보아온 영우의 눈에 조금은 촌스러워 보였다. 무대 위에 악기는 전자올갠과 드럼이 전부다. 간혹 기타를 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준비한 기타를 치면서 노래실력을 뽐낼 수 있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일정금액의 돈을 내고 무대에 오를 수 있는데, 노래를 부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보니 경쟁이 치열하다.
여기 마을은 횡계보다는 가구수도 많고 주민도 제법 많이 사는 큰 마을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공터에 모인 사람은 이곳 마을 주민보다 외지사람이 훨씬 많아 보였다. 영우가 팔짱을 끼고 묵묵히 옆에 서있는 식료품가게 범수아저씨한테 물어보았다.
“아저씨! 저분들은 전부 이 마을 사람들인가요?”
“전부는 아니고 콩쿠르대회를 한다고 하면 멀리서도 오는데,,, 인근 마을에서도
오고 우리들처럼 횡계에서도 오고 대관령 너머 강릉에서도 오고 그래,,, 고향 떠나서 도시에 가 있던 청년들도 오늘은 많이들 와서 놀다가,,,”
영우가 궁금증을 물어보는 사이에 콩쿠르대회가 시작되었다. 저마다의 노래와 춤
실력을 발휘하는데 노래솜씨보다는 분위기가 더 흥겨웠다. 언제나 발랄하고 적극적인 은정 씨도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무대에 올라섰지만 최고의 인기스타는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환한 미소의 마을의 꽃 정아 씨다. 정아 씨는 뭐든지 잘한다. 정아 씨
가 부럽다.
무대에 집중하던 그때 한쪽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마을청년회에서 뜯어말려서 더
이상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영우는 많이 놀라서 범수 아저씨 뒤에 숨어서 눈치만 살폈다. 범수아저씨는 해마다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면서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닌 거 같았다. 이번 싸움은 이곳 출신 청년들과 강릉에서 넘어온 사람들의
세력 다툼이라고 말씀하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웬만한 싸움판은 범수아저씨가 나서면 해결이 됐지만, 지금은 범수아저씨도 기운이 달려서 잘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병휘도 무대에서 노래 한곡 부르려던 생각이 있었지만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접었다.
병휘와 영우 두 사람은 콩쿠르대회가 진행되는 중간에 집 방향으로 지나는 차량을 빌려 타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범수아저씨는 혹시 모를 불상사가 걱정이 되어 끝까지 있기로 했다.
여름의 끝자락이 지나고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어느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한 병휘오빠가 어디서 빌려 왔는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영우가 신이 나서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병휘가 급하게 방석을 들고 나와서 깔아 줬다. 영우를 태운 병휘가 힘껏 페달을 밟았고 집 앞 골목을 벗어난
두 사람은 동네 어귀를 한 바퀴 돌아 평창으로 통하는 신작로 너머 개울가 뚝을
내달렸다. 오후의 햇볕은 따스했고 살갗에 내려앉은 햇살은 피부로 스며들어 온몸에 퍼졌다. 하늘은 맑고 높았으며 시원한 바람은 상쾌했다.
병휘의 어깨를 타고 넘어온 바람이 영우의 콧등을 간지럽게 만지며 뺨을 타고 넘어 영우의 검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자전거 바퀴에 놀란 개구리가 펄쩍 뛰어 달아났다.
전깃줄에는 제비가 빽빽이 앉아서 날개를 다듬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난
여름 이곳에 터전을 잡고 새끼를 키워낸 제비들이 종족번식의 본능적 역할을 다했으니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내년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이곳의 경치와 바람에 섞여있는 냄새를 익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비는 정들었던
이곳에서의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강남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돌아오리라. 어쩌면 다시 못 올 수 도 있을 테고 ‘부천 우리 집 제비도 떠날 채비를
하겠구나, 올해는 내가 여기와 있는 바람에 새끼제비 날아다니는 것도 못 봤네,,,’
병휘오빠의 다리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고 자전거 바퀴는 힘차게 돌아갔다. 하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고추잠자리가 허공을 붉게 물들이며 눈앞을 어지러이 날았다. 한 마리의 잠자리가 허공을 맴돌다 병휘오빠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영우가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잠자리 날개에 콧등을 살며시 대 보았다. 잠자리는 영우의 접촉이 싫지 않은지 날개를 한번 접었다가 다시 펼치고 그대로 있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잠자리는 돌부리에 걸린 자전거가 덜컹하는 충격에 놀라
하늘로 날아갔다.
뚝 길가에 외로이 서 있는 느티나무는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주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대자연의 경치는 영우의 마음에 벅찬 감동과 행복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나뭇가지 끝에 가까스로 매달리며 버티고 있던 나뭇잎이 가벼이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힘없이 떨어졌다. 느티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잎사귀는 이제 몇 잎 남아있지 않았다. 떨어진 나뭇잎이 여름내 내린 비로 불어난 냇물에 목적지도 모른 채 정처 없이 외롭게 떠내려가고 있다. 분신과도 같았던 잎사귀를
느티나무는 체념한 듯 바라만 보고 있다. 더위에 지친 농부들이 한여름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잠시 더위를 식히며 휴식을 취할 수 있게 그늘을 만들어 주던 느티나무는 이제 역할을 다한 듯 고요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감성에 젖은 영우가 병휘의 등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순간 병휘오빠는 가장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오빠 사랑해”
어쩌면 처음 해보는 표현인 듯했다.
“뭐라고”
바람결에 잘 듣지 못했는지 병휘가 다시 물었다. 어쩌면 정확하게 들었는데 또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빠 사랑 한다고”
영우가 아까보다는 좀 더 크게 소리쳤다.
“나도 영우 사랑해 아주 많이”
영우가 듣고 싶은 대답을 병휘도 해 주었다. 지금 그녀는 세상의 모든 현상이 오직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라고 믿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의 감정과 행복은 누구나 이럴 거라고 영우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특별할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영우는 행복한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한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이 저녁밥을 먹고 한가로이 누워서 티브이를 보다가 갑자기 병휘가 몸을 일으키며 텃밭에 시금치를 심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당연히 영우도 찬성을 하고 당장 내일 심기로 했다.
다음날 병휘가 퇴근하면서 목장갑을 들고 왔다. 담벽 뒤 텃밭에 가을 시금치를
심는다고 한다. 당연히 감독은 아주머니, 조수는 영우 몫이다. 두 사람은 아주머니의 지시에 따라 고랑을 만들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다. 추운겨울을 무사히
넘기려면 보온이 필요 했는데, 아주머니께서 구해 온 볏짚을 덮어주는 걸로 마무리를 했다. 안 해본 밭일을 하려니 어설프기도 할 뿐만 아니라,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오늘 뿌린 시금치가 싹을 틔우고 잘 자라서 내년 봄에 누군가에 밥상에 맛있는
반찬이 돼서 올라오면 좋겠다.”
병휘가 혼잣말처럼 입속에서 우물거린다.
밭일에 지친 두 사람은 저녁을 먹자마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래도 않해 보던 밭일을 해서 그런지 고단했던 모양이라 금새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영우가 이곳에 온 지 벌써 한 달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준비도 없이 오직 병휘오빠가 있는 곳이라 믿고 의지할 마음으로 따라 나선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갈 줄은 몰랐다. 처음 며칠은 병휘가 출근하면 주인아주머니와 이야기하고 동네 한 바퀴 돌고 낮잠도 자고 이웃들과 정담을 나누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함없는 일상에 지루함도 있었지만 병휘오빠의 사랑과 배려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사이 정아 씨나 범수아저씨처럼 좋은 인연도 만들었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문화 시설이나 유흥을 즐길 거리가 전무한 시골생활에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영우에게는 적응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도시생활만 하던 영우로서는 도시의 거리가 그리워지고 밤이면 반짝이는 네온사인도 보고 싶어졌다. 부모님도 보고 싶고 친구들도 그리워졌다. 그래서 집에 가고 싶어졌다. 더욱 심각한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에 봉착한 사실이다. 그녀까지 하숙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하숙비를 추가로 내야 했기에 얼마 안 되는 병휘오빠 군인월급으로 시골부모님한테
보내고 적금 붓고 하면 여윳돈이 전혀 없었다. 그동안 그녀가 집에서 나올 때 들고 온 돈으로 부족하지 않게 생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세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혼자 있을 병휘오빠가 걱정이 됐다. ‘어떡하지? 어찌하면 좋지? 내가 없으면 병휘오빠는 외로워서 어떡해,,, 정아 씨에게는 뭐라고 말을 꺼내지?’
막상 집에 가려고 마음먹으니 별의별 고민이 다 생겨났다. 그녀는 평생 이렇게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 생활을 계속 이어가기엔 걸림돌도 많고 부족한 것도 많고 걱정거리는 점점 쌓여만 가고 있었다.
저녁에 병휘오빠와 마주 앉은 영우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있잖아!”
병휘가 말을 끊었다.
“내일 집에 가.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병휘는 며칠 전부터 영우를 보내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다만 헤어지기 싫었던 감정과 현실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다.
깊어가는 산골마을의 가을밤 두 사람은 오늘이 가면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오늘따라 서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얼까? 평소에 조용하던 풀벌레들도 오늘은 유난히 시끄럽게 울어 대고 있다. 두 사람의 아린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
다음날 아침 병휘는 출근을 하고 영우는 자신의 짐을 챙겼다. 짐이라야 집 나올
때 들고 온 옷가지 몇 벌과 간단한 화장품이 전부라 단촐 했다. 얼마 전 병휘가
훈련 나갔다가 그곳 시장에서 사 가지고 온 작은 곰인형 하나와 강릉 갔을 때 사온 속옷 몇 가지 더해진 것이 전부다. 짐을 챙기다 책상 밑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콘돔이다. 다른 사람이 볼까 봐 창피해서 버리지도 못하고 모아 두었던 콘돔을 불에 태우기로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외출한 틈을 타서 안방아궁이에 마른 솔잎을 넣고 불을 붙였다. 한 달 넘게 사용한 양이라 많기도 했지만 물이 담겨 있어서 태우는데 애를 먹었다. 기분이 야릇했다.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서는데 병휘오빠가 왔다. 부대에서 잠시 외출을 나왔다고 한다. 버스터미널까지 함께 걸었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며칠 전 냇가 뚝 길에서 병휘오빠와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보았던 그 코스모스와
같은 색 같은 모양이지만 느낌은 달랐다. 이 길은 평소에도 자주 지나던 길이었는데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지 오늘 처음 보는 느낌이다. 코스모스도 영우가 떠나는 걸 아는지 가을바람에 살랑이며 인사를 한다. 영우도 작은 소리로 작별을 건넸다. ‘그동안 내가 너에게 무심했던 거 같구나, 미안해! 언제 또 올지 모르지만
어쩌면 너의 모습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네’
집에서부터 버스 출발시간에 맞춰서 나왔기 때문에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바로
탈 수가 있었다. 영우가 가판대에서 잡지책을 사는 동안 병휘가 버스승차권을 사 왔다. 두 사람은 작별인사를 했다.
“조심히 잘 가”
“응 오빠 잘 지내 아프지 말고,,,”
영우가 버스에 발을 올리며 의미 있는 말을 한마디 더 했다.
“어쩌면 다시 올지도 몰라,,,”
영우는 확신 없는 약속의 말을 남기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서서히 움직였고
뒤돌아 몇 걸음 걷던 병휘가 몸을 돌려 손을 흔들었다. 영우도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코너를 돌아서자 병휘의 모습이 영우의 눈에서 사라졌다. 그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북받쳐 올라오는 서러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버스 안에서 영우는 울었다. 아마 병휘오빠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거라 짐작이 간다.
버스는 한참을 달렸고 눈물을 닦으며 부모님 생각을 했다. 야단맞을 걱정보다 어떻게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려야 할지가 걱정이다. 시골에 사시는 친구 외할머니
집에서 며칠만 놀다 온다고 해놓고 한 달도 훨씬 지나고 이제야 돌아왔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중간에 편지라도 보내서 안심을 시켜드려서 다행이긴 하지만
죄스런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첫댓글 바람난 소녀의 이야기가
어찌그리 아릅답게 전개되는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