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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정/KBS 아나운서: 오늘도 변함없이 역사저널 그날을 찾아주신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그리고 근로자 여러분, 한 주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설 연휴에 만나는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설기획으로 국경을 넘어 해외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좋은 놈 나쁜놈 이상한 놈--------말 달리는 영화의 한 장면—---------
사내1: 만주 같기도 하고, 러시아말 있는 것보면 연해주 쪽 어디인 것 같기도 하고---
------------1920년 1월 4일/만주 용정---철도부설자금 15만원을 실은 일본은행의 현금 수송단이 괴한에 습격당한다. 수송단을 호위하던 일본순사가 총에 맞아 사망하고 괴한들은 15만원을 탈취해 갔다. 일본 현금수송단을 습격한 괴한은 총6명, 임국정 최봉설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북간도 지역의 청년들이자 무장독립단체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이었다.
최원정: 역사와 영화의 만남!
류근/시인: 영화 그 놈놈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합쳐진 속편이 하나 나왔네요.
이윤석/방송인: 어디 까지가 영화인지 구분을 잘 못하겠어요. 어쨌거나 반가운 장면은 정우성씨의 말 타고 가면서 장총을 말 위에서 자꾸 돌려요 이게 진짜 멋있는 장면이거든요.
류근: 그 영화 보니까 조선의 풍운아 셋이서 보물을 제대로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액션이잖아요. 그 이후에 이어진 거 보니까 비숫한 장면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뭘 뺏던데?
이윤석: 그러고 보니까 영화가 놈놈놈 하고 그 일본의 현금 수송단을 습격한 사건하고 살짝 섞여있는거 같은데~
심용환/역사 작가: 현금 수송단을 습격한 사건인데 정식 명칭을 이야기 하자면 철혈 광복단 15만원 탈취사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고 이게 놈놈놈이란 유명한 영화의 모티브가 됐던 것입니다.
최원정: 그래서 이걸 같이 보여주셨구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잖아요. 철혈광복단, 철혈이라는 단어가 좀 어감이 긴장하고 뭔가 전투적이고~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그렇죠, 쇠철자 鐵 피혈자 血, 냉정함, 이런 이미지가 있잖아요. 간도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운동가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일본군과 싸움을 시작하는건데 무장독립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역시 돈이 필요하죠. 독립자금이 필요한데 이 자금을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일본의 돈을 강탈하는 거예요. 그러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는 거 잖아요.
최원정: 일제의 돈을 털어라! 굉장히 스릴만점이지 않아요.
박환/수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철혈광복단은 1920년 1월 4일날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조선은행지점에서 용정으로 돈15만원을 옮기게 돼요. 거기서 미리 돈이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철혈광복단들이 매복해서 탈취하는 사건이 되는데요. 1월달이니까 좀 깜깜한 때에 총격을 가해서 일본순사 한 사람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류근: 정말 웬지 통쾌한게 마치 중학교때 서울역 앞에서 불량배들한테 뺏긴 돈을 돌려받은 기분이에요.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탈취일지 모르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쟁취 아닙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15만원 탈취사건이라고 부르지말고, 우리끼리라도 철혈광복단 15만원 챙취의거! 라고 부르는게 마땅할 것 같애요.
심용환: 그 당시 총 한자루가 30원이었다고 합니다. 30원데 15만원이면 총을 5000자루를 살 수 있죠. 요즘 돈으로 150억 정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윤석: 그런데, 오늘 주제가 移民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15만원 쟁취의거에서 시작한 의도가 무엇입니까?
심용환: 지도를 보면 우리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데 15만원 의거가 벌어진 지역이 회령에서 용정으로 가는길 30km, 명동촌 근처인데 의거를 일으켰던 철혈광복단의 다수가 바로 명동촌 출신이라는 거죠.
최원정: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 중구의 명동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류근: 그런데 있잖아요. 그 명동촌에 제가 아는 詩人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면 다 아는 시인이예요.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이윤석: 大윤동주 시인~
류근: 그 大윤동주 시인께서 나고 자란 곳이 바로 명동촌이예요. 그 시 있잖아요. 별 헤는 밤~ 윤동주~소학교 때 책상을 나란히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내(중략) 이거 우리가 다 알고, 시 속에 등장한 학교가 바로 명동학교~
최원정: 명동촌에 윤동주 시인의 비석이 있다면서요~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생가 中國朝鮮族愛國詩人 尹東柱 故居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면서요.
박환: 지금 현재~
류근: 윤동주를 뺏어가려고 하는데 말도 안되는 이야기야~, 그런데 저도 솔직히 지명 ‘명동촌’은 알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죄송하지만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윤동주의 아버지도 그때 같이 이주를 한거군요.
심용환: 그렇죠, 네 가문이 먼저 넘어가고 그 다음 해인 1900년에 윤동주의 할아버지셨던 윤하연을 중심으로 그 일가가 넘어가고 1917년에 시인 윤동주가 바로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생활하게 되는 거죠.
이윤석: 얘기를 듣다보니까 요즘 개념으로 치면은 국경을 넘어가는 건데 요즘에는 국경 한번 넘을려면 돈도 있어야되고 이민국 허가도 받아야되고 그런데 예전에는 어렵지 않았나 봐요.
류근: 정말 생계형 이주로군요.
심용환: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면서 상황이 바뀌니까 쉽게 말하면 독립군운동을 위한 정치적 기지를 만들겠다는 독립의지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생겨요. 숫자도 많이 늘어나는데 통계를 보면 1910년에서 20년 무단통치기간에 이주한 사람이 227,970명 정도, 그리고 1936년도 되면 만주에 사는 한국인이 무려 80여만명,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다 보니까 성격도 바뀌어요. 그래서 명동촌 같은 경우도 초기 이주민은 유교유학자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이 우리 민족을 위해서 뭐하지 하고 교육운동을 꿈꾸다가 우리가 여기서 3천개의 교회와 3천개의 학교를 세워서 민족의 독립을 이끌자 면서 성격자체가 위대하게 하나하나 변화해 가는 역동적인 모습입니다.
류근: 그런데 조금전에 22만 7970명 이라고 구체적인 숫자를 말씀하셨잖아요. 그 시대에 무슨 전입신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 근거가 뭐예요?
최원정: 70명이라고 10단위까지 냈다는게 이게,
류근: 혹시 박환 선생님 근거아세요?
박환: 조선총독부 통계년보라든가 기타 여러가지 통계를 그 당시 기반으로 많이 사용이 되었거든요. 1936년에는 한 80만명인데 해방이 되기 직전에는 만주지역에 한 200만 정도가 살았다 할 정도로 만주지역에 우리 동포들이 굉장히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최원정: 당시 조선의 인구가 1500만에서 2000만명 사이로 알고 있는데 지금 만주에 우리 동포가 뭐 80만명, 200만명이라고하니 굉장한 숫자인데요. 규모가 컸다고 짐작케하는데 한인들은 어떻게 생활을 했을까요?
박환: 대체로 농업을 하게 되는데 이제껏 우리 한인들에 대해서 중국사람들이 부른 별명이 있었어요.
최원정: 당시 중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망국노亡國奴 나라 잃은 노예라고 불렀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심용환: 고려 사람들을 ‘까오리 빵즈’ 라고 불렀죠 (까오리 빵즈-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하던 용어, ‘까오리’는 고려, ‘빵즈’는 놈이라는 뜻).
박환: 비하해서, 네, 그런 표현도 있었고요,
류근: 저는 웬지 이분들이 정말 먹고 살기 힘들어서 넘어가신 분들이잖아요. 막연히 독종! 악바리! 라고 부르잖아요?
박환: 조선 사람들을 메기라고 했다고 그래요. 그게 좀 의아하게 왜 메기라고 했을까~
이윤석: 아하! 김매기~밭매기~ 농사의 달인이라서~
박환: 그것도 일면 맞네요. 그런데 여기서 상징적으로 농사는 일반적으로 수경이잖아요. 물이 필요하잖아요. 거기서 모내기하고 그러니까 조선 사람들은 만주에 오면은 습지라든가 물이 있는 곳만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런데 만주에 살고 있는 중국 사람들은 밭농사를 하거든요. 중국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가는 걸 꺼려하고 밭농사를 하기 때문에 특별히 물 속에 들어갈 일이 없죠. 그런데 조선사람들은 습지만 찾아다니고 물이 있는 곳만 찾아다니니까 그래서 별명을 물고기 메기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익주: 그게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예요. 만주 간도지역에 논을 처음 만든게 한국사람들입니다.
류근: 제가 한때 농사를 좀 지어 봐서 아는데요. 지금도 농기계로 지어도 농사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하물며 낯 설고 물 설고 이런 데 가서 황무지를 개간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메기라고 했겠죠. 메기란 별명이 붙을 때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겠습니까?
최원정: 커리큘럼이 알차다
류근: 저는 설마 수학 영어가 없겠거니 안심했는데 지금보니까 법학 체조도~
박환: 체조는 그 당시 군사훈련의 기초이기 때문에, 중요한 과목이었어요.
류근: 이쯤되면 스카이 캐슬쯤이야 되는데~
심용환: 우리가 지금 보기에는 스카이 캐슬이 나올 정도로 조금 부담이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땐 정말 민족혼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잖아요. 그런데 이 노력의 결실이 나타납니다. 몇몇 인물을 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데, 첫째는 아까 얘기했었던 시인 윤동주, 두번째는 영화 아리랑 아시죠 한국영화의 획을 그은 아리랑의 제작 감독 연출 주연까지 다 했다고 하는 나운규가 명동촌 출신입니다 (나운규(1902~1937)-대한민국 영화계를 이끈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 영화 <아리랑> 제작 감독), 그리고 영화 때문에 갑자기 재발견된 송몽규, 당시 마을 사람들 한테는 우리 동네에 가장 잘난 수재, 18세 이른 나이에 시에 데뷰하고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던 송몽규도 그렇구요 또 우리 역사에 민주화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문익환, 문동환 목사 형제도 명동촌 출신입니다.
최원정: (4명의 고교학생) 이 사진은~?
심용환: 가운데가 문익환, 오른쪽이 윤동주,
최원정: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가 친구였다구요~
이윤석: 명동촌에서 명동이 한반도를 밝힌다고 하셨는데 그 말 그대로 진짜 한반도를 빛낸 인물들이네요. 동창회 하면 동네가 훤 해지겠네요.
심용환: 사실 제가 작년에 뭔 일 때문에 여기 이분들이 뛰어놀던 데를 다 갔다 왔어요. 갔다왔는데 현재 공식적으로 우리가 얘기한게 있는데 문동환 목사님은 살아계세요. 98세인데 거기가면 선바위라고 김학영 선생의 묘에서 살짝 들어가면 뒤는 엄청난 절벽이고 아래는 물이 흐르고 넘어서 두만강 회령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목사님한테 물어보니까 그 냇가에서 우리 동주랑 익환이 형이랑 뛰어놀고 선바위 위에서~ 이런 얘기를 말하는데~ 제가 거기서 눈물이 나더라고~,
박환: 학생들이 거기 소풍가서 선바위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은데 선바위에서 멀리 바라보면 오랑캐 고개가 보이고요. 바로 그 넘어가 바로 한반도 조선땅, 그러니까 조선땅에 대한 애환, 그리움, 이런 것들을 강하게 선바위 올라가서 많이 느낀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고개만 넘으면 조선 땅 고향을 그리워한 한인들),
최원정: 비록 만주, 간도 지역 외에도 한인들이 두만강 건너서 간도와 연해주로 가고요. 일본으로도 가고 그리고 정말 멀리 간게 있어요. 이것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공식적인 이민인데 놀랍게도 1902년에 하와이로 간 겁니다.
심용환: 얼마전에 괌을 다녀왔는데~
이윤석: 괌은 제가 좀 어렵고~ 하와이는 가능합니다. ~하와이언으로 변신~Welcome to Hawaii~ (최원정 아나에게) 꽃 화환을 씌워주다~머리에 꽃모자까지~ 울라~울라~
최원정: 그런데 이건 뭐예요? 지금 나눠주신거~
이윤석: 그건 제가 하와이 이민 알선자! 데슐러, 여러분, 한국에선 취직도 어렵고 날씨도 춥고 미세먼지도 많고 한반도에서 살기 힘들다는 분들이 있을거예요. 그분들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이 온화한 기후~그리고 푸른 야자수와 달콤한 사탕수수가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지상의 낙원, 웰컴 투 하와이~~
류근: 웬지 불법 과대광고 같애요.
최원정: 조금은 과대 느낌은 있다.
이윤석: 노우 노우 어쨌든 불법은 아녜요. 정부에서 정식 허가를 받은 모집입니다. 혹자는 이런 얘기를 하지요. 하와이는 나무에도 돈이 열린다. 트루~트루~ 머니 트리! 돈나무 노우, 사탕수수 슬렁슬렁 베면은 돈이 차곡차곡 쌓여요. 오케이! 사탕수수 쓱~돈 우수수, 오케이~ 교육도 공짜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그리고 국제시대에는 영어 아니겠습니까? 영어가 안되면 하와이로 이민! 그리고 무엇보다도 쾌적한 노동환경, 사장님 나빠요 이런게 없어요~ 사장님 아파요 병원비 공짜요 지상의 낙원 웰컴 투 하와이!!
최원정: 이렇게 해서 많이 가겠네 장난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광고예요?
이윤석: 제가 지금 하는 콩트는 팩트에 기반을 한 철저한 공트예요.
박환: 1902년에 대한제국에 이민국(수민원)이 생기거든요. 그 당시 수민원이라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정부에서 여권을 그 당시는 집조라고 했는데 그 여권을 발급을 해서 하와이 이민을 집중적으로 했습니다. (1903년 발행 하와이 이민자의 여권), 오른쪽에는 영어로 되어있고요 왼쪽에는 국-한문으로 되어있는데 1903년도에 발행했던 대한제국 최초 여권이었죠.
최원정: 처음 여권의 모습이예요.
이익주: 그 당시에 하와이가 미국령이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선진국에서 자본, 기술을 대고 이주민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서 대규모 농장을 경작하는 플란테이션이라고 하잖아요 (플란테이션-선진국의 기술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원주민과 이주 노동자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이루어지는 대규모 농업), 이게 막 시작이 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커피 카카오 천연고무 이런 것들을 제배하는데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도 마찬가지였어요. 값싼 노동력을 수입하는데 1902년부터 하와이에 공식이민을 하게 된 거예요.
류근: 그렇죠, 생각지도 못하게 예상보다 참 많은 인원이 나간 거예요.
-----------------------영화-애니깽 HENEQUEN--------------------
루나: 일해! 어서! 일하란 말이야 모자를 써! 이 바보 녀석들아 여기선 게으름 피우는 걸 절대용서 안해 타 죽기 싫으면 빨리 모자를 써!
노동자: 일하다가 졸도하다
루나: 일어나지 못해!
1902년 처음 시작된 노동자 이민 하와이, 멕시코, 미국 본토 등으로 활발히 진행됐다. 하지만 이주 한인들에게 농장의 환경은 견디기 힘들만큼 열악했다. 쉼없이 이어지는 노동과 차별대우, 나무에서도 돈이 열린다는 그곳은 지옥과도 같았다.
최원정: 애니깽이란 영화를 보여드렸는데 사실 하와이가 배경이 아니라 멕시코 죠. 멕시코 열대 선인장 농장에 한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실제 영상도 봤지만 노동환경이 참 가혹하죠?
류근: 멕시코에 이주 한인을 애니깽이라고 그러는데 이게 애니켄이란 선인장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해요. (애네켄-잎이 두껍고 양 옆으로 날카로운 단단한 가시들이 무수히 솟아 있는 선인장과 식물). 에네켄 이란 선인장이 선박용 밧줄의 원료가 되는 아주 지독한 선인장이라고 합니다. 요즘 알뜰 신작으로 유명해졌는데 소설가 김영하씨의 소설 ‘검은꽃’에 보면 거의 모든 노동자가 채찍 세례를 받았다. 채찍문화가 없는 조선인에게 그것은 굴욕이기 이전에 놀라움이었다. 마소에게나 필요한 채찍을 사람에게 휘두를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채찍은 사람에게 휘두르는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걸 맞는 거예요. 40도가 넘는 태양열 아래서 마소 처럼 채찍을 맞아가면서 가시도친 선인장 잎을 따내는 애니깽들의 삶이 얼마나 지독하게 괴롭겠어요.
이익주: 맥시코는 대한제국과 아무런 국교가 없었어요. 전혀 보호받을 길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을 감내해야 됐던 거죠.
류근: 그러니까 분노도 못했던 거죠.
심용환: 보호해줄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더 그랬던 거 같은데요.
최원정: 검은꽃 이 소설은 멕시코를 묵서가 墨西哥, 라고 했잖아요. 멕시코가 배경인데 하와이는 아까 말씀하신대로 지상낙원이었나요?
박환: 멕시코에서 겪은 이상으로 사실은 하와이 지역에서도 많은 동포들이 고생을 상당히 많이 하셨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화씨 100도나 되는 무더운 태양 아래서 허리를 구부리며 호미와 괭이로 온종일 작업을 했고 또 억센 수숫대를 칼로 잘라야 했다. 허리가 아파 잠시 서서 허리를 펴면, ‘루나’ 라고 하는 말 탄 기마 감독이 뒤에서 가죽 채찍으로 내려치곤 했다. (하와이 이민자 원준상 회고中).
일동: 똑같네,
이윤석: 그래서 채찍이라는 게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잖아요. 짐승만을 때리던 건데~, 게다가 화씨 100도면 섭씨 38도가 되잖아요. 체온보다도 높은 온도인데, 수숫대가 엄청 길 잖아요. 거기 서 있으면 바람도 안통하고 답답한데 그 뙤약볕 밑에서 저는 그냥 서있으라고 해도 못 서 있을 것 같애요. 일사병 걸려서 쓰러질 것 같은데~ 허리도 못펴고 계속 농사를 지어야 되는 거 잖아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박환: 그래서 기록들에 따르면 사람으로서 대우를 못받았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지 않고 옷에 죄수복 처럼 번호판을 달게해서 이름 대신 번호를 불렀다고 얘기하니까 사실은 인격모독과 인격살인인 거죠. 그러니까 우리 조선 사람들을 완전히 짐승으로 대우한 거죠.
류근: (이윤석을 향해 먹살을 잡고 연기) 아까 하와이가 지상낙원이라더니~~
최원정: 어디로 끌고 가는 거예요. 화난다 진짜~
이윤석: 데슐러, 어디갔어~ 데슐러~ 난 윤석이 형이야~
심용환: 우리 하와이 이주 노동자 한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노동시간표를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하와이 이주민 생활 시간표
04:30-06:00 기상 및 준비
06:00-1200 노동
12:00-12:30 점심(30분)
12:30-16:30 노동
류근: 이게 뭐예요 쉬는 시간이 딱 30분, 이게 말이 됩니까?
최원정: 정말 시간도 짧지만 음식이라도 제대로 나왔겠어요? 음식이 뭐 입에 맞았겠어요 아유!!
이윤석: 30분이면 물을 마셔도 그냥 지나가는 시간이고, 원래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는 낮잠 자는 시간도 주고 그러는데~날이 더우니까 꼭 두 새벽~ 4시 반에 깨웠네요.
류근: 요즘 우리 여름이 40도쯤 되잖아요. 그 온도에 저 정도 노동했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구요.이게 30분 줘서 되겠습니까?
심영환: 그렇게 해서 하루에 받는 품삯이 50~80센트, 그래서 월급이 17달러, 이게 뭐냐면 예상을 하셨겠지만 월급이 적었다 라는 거죠.
류근: 거기서 마저도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분명히 일은 더 많이 했을 것 같애요.
최원정: 또 우리 민족이 굉장히 부지런하잖아요. 얼마나 일을 열심히 했겠어요. 지금 같으면 일이고 뭐고 때려 치우고 돌아갔을텐데 그때만 해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돌아올 수가 없는 거예요.
이익주: 돌아오지 못하는 사유가 또 있어요. 한국에서 거기로 갈 때 여비 다음에 미리 돈을 낸게 있어요. 이런 게 빚으로 남아있어서 이걸 갚지 못하면 오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붙잡혀서 강제노동을 하게 되는 상황이 됐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이분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을 한 것입니다. 이 대목이 정말 감동스러운데요. 교민 한 명당 연간 5달러~10달러를 모금을 해서 독립자금으로 내놓습니다.
심용환: 한달에 월급이 17달러인데 연 5에서 10 달러를 냈다는 건 거의 십일조를 모으듯이 한 격이네요.
박환: 이건 의무모금이구요. 기타 독립군 자금 이라든가 광복군 자금이라든가 여러 특별 기부금이 또 있습니다.
최원정: 또 여유가 생기면 더 내시고~ 겨우 입에 풀칠할 형편이실텐데~ 독립자금이라니~와~
이윤석: 우리가 흔히 피 같은 돈~ 피 같은 돈~ 이거야 말로 피 같은 돈이네요.
이익주: 실제로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보면은 하와이에서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온 독립자금 1000달러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실제로 사용되었다 라고 돼있습니다.
이윤석: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사용했던 폭탄의 성분은 하와이 이민자들의 피, 땀, 눈물의 성분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될 것 같은데요.
최원정: 독립을 염원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도 우리가 잊지말아야될 분들의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1909년 2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독립투사가 모여 왼쪽 손가락 첫번째를 잘라 독립운동을 결의했고, 그리고 태극기 앞면에 피로 써내려간 네 글자 大韓獨立, 이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세번 외치고 하늘과 땅에 맹세를 한다. 이날 결의의 주인공은 동의단지회, 활동무대는 러시아 연해주 연추였다----------------
이윤석: 손가락 잘린걸 보니까 또 가슴이 ~뭉쿨한데~그런데, 안중근 의사 혼자 손가락을 자른게 아니고 지금 보니까 열한분이나 더 계신데요.
심용환: 안중근 의사의 손가락 사건은 너무 유명하고 12명이 함께 단지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많이 모르시는 것 같애요. 지금 연해주 연추에 가면 단지동맹기념비가 있어요. 그곳에 12명의 이름이 있는데 안중근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주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안중근 의사 혼자 한게 아니라 함께였기에 안중근 의사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거~
박환: 제가 여기서 한마디 하고 싶은게 있는데요. 여기서는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이런 분들은 저희가 역사에서 팩트 체크가 될 수 있는 그런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가 가능하면 동지들이 체포되거나 구금되거나 일제 감시망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 동지들의 실명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여러분들 가운데는 3분의 2 정도는 실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을 전혀 학계에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동지들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보호 애정 이런 것들을, 안중근 의사의 그런 측면을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안중근 의사를 제외한 11명 동지들의 실명은 아직까지도 우리가 끊임없이 밝혀내야할 과제다 라고 말씀드립니다.
최원정: 교수님, 꼭 좀 밝혀 주세요~
류근: 연해주 연추라고 하셨잖아요? 거기서 12명이나 되는 한인이 단지동맹을 맺었다면 거기에도 한인들이 많이 이주해 있었다는 뜻인가요?
박환: 네, 그렇습니다. 두만강을 경계로 해서 북한지역하고 접경지대구요 그 다음에 우리 한인들이 많이 가서 살았던 지역이고 도시지요. 그건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이 되겠구요. 저쪽은 1870년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서 살게 되었는데요. 191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한인촌을 건설했다고 해서 신한촌에 우리 한인들이 많이 산 대표적인 도시지요. 1925년 경에는 한 25만명 정도가 살았다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익주: 여기서도 역시 땅을 개간해서 농업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논을 만들지는 못했구요. 주로 밭농사, 황무지를 개간해서 밭을 만드는데 수수 보리 이런 식량하고 오이 호박 배추 같은 야채를 재배를 합니다. 그런데 원래 러시아 사람들이 비타민 섭취량이 적었어요. 고기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 피부병이 잦았고 그랬는데 한국 사람들이 정착해서 오이 배추 같은 채소 재배를 했잖아요. 그리고 또 고사리를 캐서 먹으며 전파하니까 러시아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좋아졌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원정: 한국인들이 러시아인들 체질개선까지 책임졌다~
이윤석: 농사의 신이예요. 이주 한인들이 주로 굶주려서 가거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망명을 하거나요즘말로 하면 경제적 정치적 난민 상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류근: 지금 난민이란 얘기 들으니까 요즘에도 내전을 피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예맨 난민들, 우리나라에서 지금 받아들여야 하느냐 논란이 많잖아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봅시다. 이때 우리 동포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든 조국독립을 위해서든 나라를 떠났는 데 막상 거기에서 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그때 얼마나 끔찍하고 막막했을까 지금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익주: 이건 한마디로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예요. 우리는 어떤 면에서 아주 어려운 시절에 난민을 통해서 다시 힘을 모우고 나라를 되찾은 경우예요.
심용환: 노동자와 난민들이 힘을 합쳐서 독립운동을 한 거네요.
류근: 노동자와 난민은 다르지 않잖아요.
최원정: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우리는 이런 아픈 역사를 꼭 기억을 해야 될 것 같아요. 당시 러시아는 이런 이주 한인에 대해서 어떻게 대접을 했나요?
심용환: 누가 연해주를 관리하느냐, 러시아 총독에 따라서 확실히 확확 바뀝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1905년에 하필 얄굽게도, 1905년이 을사늑약체결이예요, 1905년에 운테르베르게르 라는 사람이 총독인데 이 사람이 한인은 해로운 존재다 고로 한인을 받아들일 수 없고 토지 절대로 줄 수 없다. 아예 천명을 해버립니다. 정책이 바뀌게 된 거죠.
이윤석: 해로운 존재? 어감이 되게 안좋네요. 병충해 취급하는 것처럼 안좋은데~ 해로운 존재라고 우리 한인들이 무슨 나쁜 일이라도 저지른 건가요?
류근: 그래서 류근의 카더라 통신입니다. 운테르베르게르가 한인을 사실은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운테르베르게르 뿐만 아니라 많은 러시아인들이 한인을 두려워했다는 카더라가 있습니다.
최원정: 아니, 나라 잃은 힘없는 민족일뿐인데 뭐가 무서울 것 까지 있나요,
류근: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러시아인의 눈으로 본 이주 한인~이나씨, 안녕하십니까?
이익주: 카더라가 진화했네~
----------------안녕하세요? 러시아에서 온 마스로바 이나라고 합니다. 저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수도 하바롭스크 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는데요. 96년에 아빠가 한국에 발령나가지고 오라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왔다가 눈깜박할 사이에 지금 22년 동안 살고 있습니다.
류근: 이나씨, 환영합니다. 러시아인이 한인을 무서워했다는데 맞죠?
이나: 일단 저는 개인적으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한국 사람이예요. 그런데 오늘의 주제를 듣고 사실 관심을 엄청 많이 가졌어요. 왜냐하면 어렸을 때 무서워했다는 것을 좀 들었다는 것도 있고 그 다음에, 인터넷도 검색했고 지인들한테 물어봤는데 사실은 그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한국 사람 보호하면서 두려움이 있었어요.
최원정: 우리가 체구도 훨씬 작고 러시아는 당시 열강이었는데 우리가 왜 무서운 거지?
이나: 일단은, 1904년에 러일전쟁이 있었잖아요. 그때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동양국가를 덜 개발된 국가, 그리고 발전시켜야 될 국가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러일전쟁에서 일본한테 졌기 때문에 충격이 아무래도 컸어요. 그래서 아마도 그때부터 그런 충격으로 한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또 한가지 있는데요. 1900년에,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에 블라고베센스크 라는 도시가 있어요. 그 도시에서 불교와 도교를 믿는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들과 외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그때 대포로 쏘고 살인사건도 일어나고 러시안들도 살해를 많이 당했어요. 이건 역사적인 이야기니까 일단 중국인들에게 겁을 먹은 러시아인들이 두려움을 없애자며 중국인 수천명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이윤석: 지금까지 중국인, 일본인 얘기는 나왔는데, 한인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러시아인들이 왜 한인들을 두려워 했는지 모르겠어요.
류근: 우리는 해치지 않아요.
최원정: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어요!
이나: 사실 러시아 사람 입장에서는 동양인을 보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 하기가 어려운 데다가 그 당시에는 극동에서 일본이랑도 사이가 안좋았잖아요. 그러면 한국사람이 일본인척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일본인이 한국사람인척 할 수도 있고, 그래서 외모만 봐서는 어느라 사람인지 구별이 안가서 그랬던거 같애요. 반대로 한국인이 서양인을 보면 다 똑같이 생겼다고 착각하지 않을까요?
류근: 그래서 카더라 통신~ 결론적으로 러시아인은 황인종을 무서워했다. 이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최원정: 그런데 지금은 한국사람에 대한 두려움 이런 건 남아있지 않나요?
이나: 지금 러시아에서도 요즘은 한국 케이팝이라고 하면 유명하잖아요. 러시아에서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와! 완전 멋있는 남자들 많은 나라, 드라마를 많이 보잖아요. 아무튼 이제 한국에서 화장품, 케이팝, 발전된 기술로 엄청 다들 좋게 생각하기 때문에 잘 대해줘요. 만약에 여러분 러시아에 가게되면 한국에서 왔다고 어필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려도 될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사실 러시아에서 고려인들이 많이 와서 힘들게 시베리아 열차도 건설하고 땀을 흘리면서 힘들게 일한 시간이 어마어마했을 거예요. 힘들게 시작을 했지만 지금은 러시아에서는 고려인으로는 보지않아요. 러시아는 한국계-러시아인으로 같은 나라 사람으로 보는데 오히려 한국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이 좀 심해서 오히려 한국이 뒤로 간게 아닌가 하는 기우로 말씀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쉽습니다. 요즘은 글로벌화된데 시대인데 우리 서로 한가족 한민족 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최원정: 이나씨, 정말 멋진 말씀해줬어요.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카더라 통신 한 건 했어요.
류근: 어떨결에 카더라 통신했는데 소문은 맞췄습니다.
최원정: 한국 남자에 대한 인식이 좋다고 얘기했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건 왜 하세요. 현빈은 아니지만 한국남자~ 다들 심취(?) 하셔서 굉장히 웃겼습니다.
이익주: 우리는 거기 가면 안되겠어요.
최원정: 환상이 깨져~
이익주: 안가는게 애국입니다.
최원정: 자, 한인을 두려워하고 해로운 존재로 당시 러시아 사람들이 봤다면 연해주에서의 삶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네요.
심용환: 그렇죠, 분명한 차별대우가 구조적으로 있었던 것 같구요. 약간 전제가 있는데 귀화를 안하면 재판이 없어도 30일 까지 감금할 수 있었구요. 언제든지 추방도 가능한 상태였고 누가 봐도 취약한 존재니까 러시아 부호들이 중간착취를 합니다. 땅을 갖고 나쁜 짓을 하는데 예를 들면 국유지를 1헥타르당 3~6 루블 정도로 임대를 해요 그렇게 싼값에 임대를 한 다음에 한인들에게 20루블에 재임대를 하는 거죠. 광산 노동자 임금 기준으로 따졌을 땐 러시아인 임금의 30% 차이는 너무 심하죠.
이윤석: 차별에 착취에 갈등에 정말 고단했던 삶인데 사실 더 마음이 아픈 건 그래도 그런 삶이 조선에서의 삶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그쪽으로 간 거 잖아요. 사실은, 그게 제일 마음이 아파요.
최원정: 정말 당시에는 말 그대로 Hell 조선~ 이었을 텐데 누구를 원망했을까요?
이익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간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거기서도 합니다. 이게 정말 놀라운 일이죠. 1908년에 연추 지역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단체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한테 익숙한 이름이 있어요. 이범진, 을시조약 직전까지 주러시아 공사를 지내고 있었던 이범진이 헤이그 특사로 보내졌던 이위종을 1만 루블을 주고 이위종을 보내서 이걸 지원하도록 갑니다. (이범진(1852~1911)-주러시아 공사,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 한국강제병합 이후 순국 자결로 생을 마감),
박환: 그때 이위종이 혼자 간게 아니라 이위종의 장인어른과 함께 극동지역으로 가게되는 것이죠.
이윤석: 헤이그 특사때 잠시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애국심만큼 뜨거웠던 이위종의 사랑, 러시아 남작의 딸과 사랑에 빠져가지고 국제결혼을 했잖아요. 그때 그 장인 남작 그분하고 지금 같이 가는 건가요?
박환: 그때 그 장인이 토볼주의 총독이었거든요. 발레리안 놀켄 남작 그 분이 그 당시에는 시베리아 철도도 없었어요. 그런데 마차타고 한달 두달 그 당시 수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였거든요. 거기서 이역만리까지 국경지대 그것도 두만강 근처입니다. 바로 연추라고 하는 지역 거기까지 장인을 모시고 온 거지요. 그 당시 러시아 국경수비대 대원들이 뭐 그냥 넘어진 거죠. 이런 거물이 왔으니까 상당히 국권회복운동에 힘을 실어준 거지요.
이윤석: 이범진 이란 분이 참 대단한 혜안이 있는 것이 그냥 조용히 이위종 아들을 보내서 살짝 살짝 조용히 도울 수도 있지만 기왕이면 러시아 내에서 권력이 있는 장인을 같이 보내서 우리 한인 이주민들에게 어떤 힘을 주고 사기를 진작시키고 결집을 시키고 이런 효과까지 고려를 한 거예요.
이익주: 이때 이범진이 보낸 만 루블, 이게 동의회 결성에 실제로 사용이 됩니다. 동의회는 러시아 지역에서 한인의병 활동을 주도 했던 단체예요. (동의회-연해주에서 결성된 항일의병조직, 러시아 지역 항일 의병활동을 주도), 거기에서 이제 안중근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박환: 안중근 의사는 190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을 하시는데요. 연추라는 지역이 국경과 가깝다 보니까 의병투쟁의 본거지였다면 블라디보스토크는 계몽운동의 본거지였다 라고 말할 수 있고요. 1911년 이후에는 신한촌 이라는 데가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근거지가 됩니다.
심용환: 배우 율 브린너, 그는 영화 “왕과 나”에 출연하는데 그가 블라디보스토크 출신입니다. 그의 별명이 “코리안 썸머보이”입니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가 이권침탈을 하잖아요, 금광채굴권, 삼림채벌권, 그런데 율브린너의 할아버지가 실제 역사적으로 삼림채벌권을 획득한 사람이예요. 근거지는 블라디보스토크였고 별장은 함경도에 있었기 때문에 이권을 뜯어가다가 쉴 때가 되면 여름에 날씨 좋을 때 율브린너도 할아버지를 따라 함경도에서 쉬곤 했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을때 친구들에게 함경도에 가서 쉬다올께 하고 하곤해서 친구들이 그에게 ‘코리안 썸머 보이’ 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윤석: 우리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 11일에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앞서서 1919년 3월달에 신한촌(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3.1운동 이후에 가장 먼저 수립된 임시정부가 바로 여기에 대한국민의회예요.
이윤석: 신한촌이 처음에 얘기했던 철혈광복단이 15만원 현금을 가져온 곳이죠?
박환: 거기죠. 거기가 본거지니까 (항일운동의 중추기지였던 신한촌),
이윤석: 임시정부가 있는 중요한 곳이었군요. 오늘 말씀들 들어보니까 만주, 연해주, 하와이, 모두 멀리떨어져 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고 끈질기고 간절하게 독립을 위해서 힘을 써왔구나 이런게 느껴졌습니다.
류근: 오늘 주제가 이민인데 이민이라는게 사실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 나라에서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때 떠났던 분들은,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났던 분들이 처음부터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게 조국의 광복이었고 독립된 해방된 조국에서 살고 싶은 간절했던 열망과 염원과 진심들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이익주: 그래서 이렇게 세계 각지로 정말 디아스포라 했던 한국인들에게 마음을 하나로 합치게 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3.1운동이예요. 1919년 3월 1일날 한국에서 시작된 이 만세운동이 세계 각지에 퍼져 살던 한국인에게 모두 전해집니다. 그러면서 각지에서 하던 독립운동이 이제 하나로 합쳐지는 계기가 만들어집니다.
박환: 만주에서는 먼저 무오독립선언서 라고 해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가 됐었고요. 그 다음에 북간도 용정에서 3월 13일날 서전평에 의해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있었고요. 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3월 17일에 만세운동이 있었는데, 연추, 우수리스크, 바이칼호가 있는 이르쿠츠트에서도 대대적인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익주: 3.1운동 소식이 하와이에도 전해져요. 하와이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좀 특이한게 여성41명이 대한부인구제회 라는 걸 결성합니다. 그래서 역시 살림을 알뜰하게 해서 독립선언서 3천장을 인쇄해서 판매 합니다. 판매해서 무려 2천 달러를 모아요. 그 가운데 800달러는 가지고 있다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냅니다. 남은 1200 달러에다가 300달러를 더 보태서 1500 달러를 3.1운동 당시 사상당한 애국지사를 위한 구제금으로 또 보냅니다.
이윤석: 독립에 남녀가 어디 있겠습니까.
최원정: 오늘 설 기획으로 이민, 어떻게 보면 이민의 역사를 봤는데 굉장히 마음이 그러네요. 나를 품지 못한 조국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내가 민족의 등불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낸 동포들을 오늘 만났습니다. 제가 아까 시작할 때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고 했는데 근데 지금 다시 그 말 할려고 하니까 마음이 뭉쿨해져요.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그분들에게, 정말 경의를 표합니다.
이윤석: 올해(2019년)가 3.1운동 100주년 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만세를 불렀던 분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3.1운동 만세를 함께 외쳤던 해외 이주민들도 함께 꼭 기억을 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스포츠 운동할 때 파도 등원 많이 하잖아요. 3.1운동이야말로 지구 밖에서 보면 지구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파도응원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납니다.
류근: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삶이 당연한 것 같아도 당연하지 않은 그들의 모든 땀과 피와슬픔이 배어있는 그 오늘의 당연함이다 라는 걸 느끼게 되고 더 열심히 분발해 살아야 되겠다.
이익주: 현실이 어려워도 우리의 긴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은 성공한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지금 처럼 높아 본 적이 없어요. 자, 성공을 했을 때 마땅히 해야 될 일은 성공하는 그 자신에서부터 진 빚을 갚아야 되는게 옳습니다. 우리가 이분들에게 지금 빚을 졌고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 준 사람들이 있어요. 이분들에게 빚을 졌고 또 한가지는 지금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현재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최원정: 다음 시간에는 항일무장투쟁, 비밀결사단 광복회 이야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6화, “이민”에서 인용).
① 1866년에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상선 셔면호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한다.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 때문이었다. 또 1880년초 의주에서 만주를 드나들며 인삼장사를 하던 서상윤과 서경조 형제는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로스와 매킨타이어를 만나서 개신교를 접하였고, 1882년 10월 한글성경을 들고 국내로 들어와서는, 황해도 장연으로 이주 소래교회를 세운다. 이게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다.
② 1882년 9월 구한말 이수정은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 일본의 농학 박사인 쯔다(크리스챤) 박사를 만나, 그의 산상수훈을 읽고 크게 감동, 그는 아스가와 도루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성경번역도 하여 한글 마가전을 만든다. 세례받은지 십일만에 일본 전국 기독교 신도대회에서 강연, 그리고 1883년 미국 교회들에게 조선에 선교사를 요청,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조선선교를 위해 일본에 체류중인 존 헤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조선문화와 언어를 가르쳤다,
③ 이수정, 고종에게 서양 의료선교사를 받아들여 결핵을 퇴치요청, 고종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 민영익을 단장으로 견미단 미국으로 파견, 견미단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수도인 워싱톤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인 볼티모어의 가우쳐 목사를 만난다. 그는 자기교회로 돌아가서 조선선교를 위해 엄청난 선교헌금을 모아 해외선교본부로 보낸다.
④ 1885년 4월 부활절 아침,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도착한다. 개신교가 공식적으로 이 땅에 들어온 지는 올해(2019년)로 135년째가 되는 해이다. 이는 알렌이 고종의 요청으로 1884.9.20. 제물포에 도착한 날을 기준으로 한 것, 19세기초 구한말 조선은 어둠이었다. 일제 때 평안도와 황해도 사람들에 의해 독립운동 단체가 많이 만들어진 원인은 20여년 전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와서 많은 민중들을 개화시켰기 때문이다.
⑤ 한인들의 해외이주는 1860년초 평안도와 함경도에 살던 한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인삼이나 약초를 캐다가 1870년초부터 본격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많이들 이주해 갔는데 처음엔 혼자 갔다가 나중엔 가족과 친척을 데리고 생계형 이주, 대한민국 최초 이민은, 1899년, 함경도에 살던, 문병규 남위언 김약연 김하규 네 가문이 서간도로 이주, 마을 이름 明東村이라고 지음,
⑥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 인천에서 한인 121명 실은 현해환호 출항, 이때부터 1905년까지 64회에 걸쳐서 약7400여명이 하와이로 갔다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콜로라도, 네브라스카, 멕시코 이민까지 추진, 일종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전세계로 흩어진 것처럼 한국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특별한 현상,
⑦ 하와이 이주민들, 열악한 환경, 하루 10시간씩 노동, 하루 품삯 50~80센트, 월급 17달러,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상태,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독립운동 자금모금, 교민 한 명당 연간 5~10달러 모금, 독립자금 연 5~10 달러 의무모금, 기타 독립군 자금, 광복군 자금, 특별 기부금, 김구 선생 백범일지 하와이에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1000달러 송금, 이 돈이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에 실제 사용,
⑧ 1905년 을사조약 후 통계, 1910년에서 20년 무단통치기간 만주 이주한 사람이 227,970명 정도, 1936년 정도 무려 80여만명, 명동촌은 이주민 민족을 위해 교육운동, 3천개 교회와 3천개 학교 건설 꿈꾸며 역동적인 변화, 명동촌 사람들 1908년 명동학교 건립, 신학문 가르치는데 교과목엔 역사 지리 수학 법학 교육학 농림학 광물학 외교 통역 작문 체조 창가 등,
⑨ 1908년에 연해주 연추 지역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단체가 만들어짐, 주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 아들 이위종에게 1만 루블 주어 동의회 지원, 1909년 2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독립투사 왼쪽 손가락 첫번째 잘라 독립운동 결의, 12명이 단지동맹, 연해주 연추에 단지동맹기념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암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
⑩ 이민은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 나라에서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났던 분들, 처음부터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게 조국의 광복이었고 독립된 조국, 간절한 열망과 염원과 진심들이 있었음, 디아스포라였던 한국인들 마음을 하나로 합치게 하는 사건, 바로 1919. 3. 1. 한국내에서의 만세운동, 세계 각지 한국인들에게 모두 전파,
⑪ 한국의 해외 이주민들은 사실 가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니라, 국내서 가난하고 못살고 고통받으니까 밀려나간 건데 역사라는 게 신비한 게 그렇게 소외당하고 가난했고 살아갈 때는 비주류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은 역사의 주인공이 됐고, 진짜 이 나라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⑫ 우리의 긴 역사를 보면 현실이 어려워도 대한민국은 성공한 나라다.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위상이 지금 처럼 높아 본 적도 없었다. 성공을 했을 때 마땅히 해야 될 일은 성공하는 그 자신에서부터 진 빚을 갚아야 되는 것,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 준 나라들이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나라가 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고,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우리가 어려운 때 우리를 도와준 나라를 우리는 도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