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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편을 택하라 / 창 18:1-11, 눅 10:38-42
애틀랜타, 올림픽 100주년 기념공원 폭발물 테러, 200여명 사망. 철원 부근 군 막사, 산사태로 20여명 사망. 부산에서 기차와 트레일러 충돌.
이제 7월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현대는 4S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이번 달에도 4S에 관한 사건들이 있었다. 4S는 Sex, Sports, Screen, Speed를 말하다. 서울에서 고교생이 학교에서 쓰러져 벼우언으로 실려가서 애기를 낳았으며, 충북에서는 학교 수업 중 양수가 터져 구급차를 타고가다 애기를 낳은 일이 있다. 그래서 성교육을 어릴 때부터 시켜야 한다는 등 말이 많다. 또한 30-40대 가정주부들이 결혼상담소를 통하여 남자들을 소개받아 여관을 드나든 사건도 있었다. 심각한 사회문제 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26회 애틀란타 올림픽이 열렸는데 온 국민의 눈이 스포츠 시청을 위해 스크린(영화) 곧 TV 화면에 집중해 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민족에 대한 동질감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Speed는 자동차를 빨리 모는 경향이 있다. 고속도로에서 차간 거리를 유지하지 못해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틀 전에도 중부고속도로에서 여러 대가 한꺼번에 충돌을 하였다. 진안에서 전주를 다니는 차들을 봐도 구정속도인 60Km를 달리는 차들이 없다. 초보운전자들도 몇 명만 규정대로 달릴 뿐이다. 하긴 저도 80Km로 달린다. 승용차는 더 빨리 달린다. 그러니 사고가 나면 대형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은 4S를 조심해야 하다. 이는 마약과 같아서 중독이 되면 고치기가 힘들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 귀중한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빌려서 이 땅을 살다가 땅위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다. 이 전세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후회없이 미련없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전도를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베다니에 들리셨는데, 이때에 마르다는 기쁜 마음으로 자기 집에 모셨다. 예수님을 즐겁게 영접하고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생각하여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준비하기에 매우 바빴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일행과 같이 그의 곁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르다는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분주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하였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보시고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셨다. 이 말씀은 결코 마르다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부드럽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리고 조용하게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마르다도 자기 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게 되었다. ‘내 주여, 내 동생, 나혼자, 나를’ 나라는 표현을 거듭 사용한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명령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 앞에서는 겸손해야 할 마르다가 사소한 음식 만드는 일로 자신을 과시하며 주님을 대하게 된 것이다. 서로 봉사하면서 명령하는 식은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든다. 봉사할 때는 섬기는 종의 입장에서 겸손히 해야 더 은혜스러운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구역예배나 각 가정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린다.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대접하려고 분주하다. 예배를 마치고 해도 충분한데 설교만 끝나면 준비하느라 부스럭 거린다. 대잡하겠다는 정성은 고맙지만 조용하게 마리아처럼 끝날 때까지 앉아있어야 한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겠다.
1.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편을 택하였다.
여러분께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겠지만 가장 좋은 편을 택한 사람은 주님과 함께 앉는 자일 것이다. 성도의 최상의 축복은 주님과 함께 하는 축복이다. 주님은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신앙의 형태를 구분한다면 마리아는 주님을 차지하는 자이고, 마르다는 주님의 것을 차지하려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결혼한 신랑 신부의 참다운 사랑의 관계는 서로의 마음, 서로의 인격이 소중하고 그 외의 것으 다 부수적이다. 우리의 신앙의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따르는 단계, 다음에는 믿는 단계, 다음으로 사랑하는 단계가 오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단계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단계이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은 ᅟᅮᆼ우와 함게 앉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자신과 인격적인 사귐을 기뻐하신다. 주님의 손에 있는 것을 바라고 있는 자는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캠피스에게 꿈에 하나님이 음성이 들렸다. ‘아캠피스야, 내가 너에게 무어을 줄까?’ ‘저는 주님 사랑받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니다. 너의 충성됨을 보아서 주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 ‘주님, 저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세번씩이나 똑같은 대답을 한 아캠피스에게 다음에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너는 참으로 좋은 것을 가졌느니라’ 였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제자 선택의 이유를 막 3:14절에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하심에서 볼 수 있다. 제자의 제일되는 원리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무엇을 가져오기 전에, 그리고 헌신과 봉사 이전에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원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서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려는 생각을 겸손히 뒤로 하고, 먼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받아들이는 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한다. 복음은 무엇을 굉장히 해보자가 아니라 굉장하게 이루어 놓은 것을 받으들이는 것이다. 마르다는 자기 솜씨, 자기 정성, 자기 노력을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더 원하시는 것이 있다. 예수님 자신을 모시라는 것이다. 예수를 필요로 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일은 그 다음이다. 율법이 무엇을 하기 위해서라면 은혜는 이루어 놓은 일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하나님은 엿새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인간을 만드시고 안식하시면서 사람과 함께 앉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앉히신다는 사실이다. 엡 2:4-6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교회에는 마르다 형의 성도가 있고 마리아 형의 성도가 있다. 모두 필요한 신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제자요, 주님이 더 기뻐하신다.
2.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듣는 편이었다.
마르다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다. 마리아는 주의 말씀을 듣는데 마음을 같이 했다. 마리아는 발아래 여인이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 발아래 엎드려 죽은 오라버니를 위해 예수께 간구했다. 또 예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또 본문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있었다는 것은 주깨 대한 겸손한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 것이다. 롬 10장애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봉사도 필요하고 사업도 필요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만저 선행되어야 한다. 마리아가 적고 마르다처럼 설치고 다니는 성도가 많은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이다. 초대교회 때에도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았을 때는 시람이 들었다. 한때 열심을 내는 사람, 헌금을 많이 하고 주의 사업에 힘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제단 앞에 앉아 말씀듣는 사람이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기름을 예수님께 부으므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것이다. 마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들으면 좋은 일을 하고 좋은 편을 안다.
3. 마리아는 주님 한분만 모신 편이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일로 분요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이 나누이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한마음을 원하신다. 신앙은 하나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한분이다. 오직 한분으로 모셔야 한다. 좋은 성도에게는 한 주님, 한 교회, 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 한 주님, 한 교회, 한 가정을 잘 섬긴 자가 하늘의 상급을 얻을 것이요, 자기의 교회를 충성되이 받드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할 것이다. 역사에 성공한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로 일관한 사람들이다. 슈바이쳐 박사는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의 길을 한마음으로 시종일관하여야 성공한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한마음으로 앉아있는 성도가 있고, 두마음으로 서있는 성도가 있다. 한마음의 성도는 예수의 인격을 원하고, 서있는 성도는 예수의 것을 탐하는 성도이다. 예수의 것이나 탐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성도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이 정함이 없다. 한마음의 성도는 신령한 성도요, 서있는 성도는 육신에 속한 성도이다. 가정생활을 보면 즐거움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아내가 있다. 그러나 여보라고 부르면서도 즐거움만 누리며 남자에게서 돈이나 얻으면서 알랑거리는 여인이 있다. 이를 첩이라 한다. 妾은 한자로 설立자 밑에 계집女자를 쓴다. 첩은 서있는 여자라는 뜻으로 남자에게 한마음을 주지 못하고 두마음으로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이들을 영어로 세컨드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세컨드 성도가 많다. 예수의 것이나 탐하고, 예수님도 좋고 세상도 좋고 왔다 갔다 하는 성도, 주일만 교인이고 평일은 세상사람과 똑같은 자는 세컨드 성도이다. 첩은 남편의 호적에 이름이 오르지 못한다. 세컨드 성도도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빠져있다. 하늘나라 생명록에 자기 이름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비참하 일인가? 오래 믿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루를 믿어도 정식으로 믿어야 한다. 한마음으로 믿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믿어야 한다. 교회 마당이나 밟고 왔다 갔다 하는 교인되지 마라.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셨다면 서있는 성도 되지 말고 앉아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조용히 묻는다. 여러분은 마음이 하나가 되었나? 여러분은 한 남편만 사랑하나? 한 교회만을 사랑하나? 하나를 사랑하는 자, 이는 전체를 사랑하는 자이다.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4. 마리아는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편을 택한 자이다.
마르다는 빼앗기는 세상 편에 있다면 마리아는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주님의 말씀 편에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없어질 것이나 빼앗길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마르다의 것은 아무리 준비해도 썩어질 것들이다. 배설물이 되어 없어질 것들이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빼앗기지 않을 것이 무엇인가? 요일 2: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벧전 1:24-25절상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빼앗길 수 없는 주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더욱 좋은 편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 모두를 다 빼앗길 날이 온다. 권세도 명예도 재산도 지위도 건강도 정열도 생명도 다 빼앗길 날이 온다.
그러나 영원히 빼앗길 수 없는 그리스도를 택한 자는 참으로 잘한 자이다. 이 생명은 아무리 연장을 해도 빼앗길 것이지만, 영생을 소유한 자는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참생명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비교되어질 대상이 아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빼앗길 수 없는 대상이다. 사도 바울은 롬 8: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시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에서 빼앗길 수 없는 분이다. 이런 고백만이 자기 생을 보람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마리아는 빼앗기지 않을 대상을 바로 알았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그녀의 생의 전부로 알았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마리아는 에수님에게 그녀의 전부를 바친 것이다. 이와 같은 마리아의 전적 헌신은 그후 수난 주간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요 12:1-3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오늘 이 제단에 철저한 헌신의 사람을 요구한다. 교회 역사상 위대하 발자취를 남긴 많은 전도자들의 생애를 살펴볼 때 모두가 철저한 헌신의 사람들이었다. 우선 사도 바울을 보다라도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쉬지 않고 예수를 전한 헌신의 일생이었다.고후 5:13-14절상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도들처럼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전적인 헌신을 바쳤던 사람들을 통하여 위대한 일이 성취된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가 필요로 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헌신의 사람인 것이다.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해 보고 싶지 않나? 마리아처럼 더 좋은 편의 사람이 되고 싶지 않나? 막 14:9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마리아는 언제나 교회 신앙의 표본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마리아처럼 언제나 주님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