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창 4:3-10, 막 5:21-43
세상에는 종종 예사스러운 일들 가운데 비범한 역사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모습을 세심하게 바라보다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스티븐은 끓는 물로 인해 주전자 뚜껑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근대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게 했다. 또한 콜럼버스는 인도를 가기 위해서 항해하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장을 펼쳤다. 구약성서를 보면 사울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헤매다가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되었고, 뜻하지 않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다가 동생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생을 전환시켰다. 사람이 한 생을 우연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종종 느낀다. 따라서 단 하루라도 헛되게 보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성서는 ‘시간을 아끼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 가시는 도중에 길가에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을 만나 그녀의 병을 고쳐주셨다. 길을 가시다가도 하나님의 크신 뜻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이셨다. 열두 해를 고생하던 이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은 이들 군중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으셨지만,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이 여인에 대해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엄청난 축복을 하셨다. 이 시간에는 이 여인의 상황을 알아보고, 예수님 주위에 있었던 군중들과 비교해 보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어서 예수님의 능력을 놀랍게 체험할 수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여인의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이다.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았다. 열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찼음을 의미하는 숫자였다. 열두 지파, 열두 제자, 열두 문, 열두 돌 따위가 그런 상징이다. 열두 해를 병으로 앓았다는 것은 이 여자의 절망이 극에 달했음을 나타낸다. 본문에 언급된 혈루증은 예수님 당시만 해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다. 혈루증은 고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병일 뿐만 아니라 수치스런 병이었다. 이 병을 앓는 사람들은 부정한 사람들로 취급되어 사람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당했다. 피는 생명과 같은데 그 피를 흘리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여자는 많은 의사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가지고 있던 것도 다 허비했다. 그런데 도리어 병은 더 심각해지기만 했다.
이 당시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병이 두가지가 있다. 나병과 혈루증이다. 레 15장에는 혈루증이 유출병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병자나 유출병자는 그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생활할 수가 없었다. 상밖으로 쫓겨나 그들끼리 모여 살았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회당에 나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일반사회와 신앙공동체에서조차 소외당한 한 여자의 고통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 이런 병은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이혼당했을 수도 있다. 사회에서 쫓겨나고 교회와 단절 되고 가정에서 바림받은 삶이 얼마나 비참할까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여자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혈루증이라는 병보다도 따돌림(소외) 받는데서 오는 고독었엇을지도 모른다.
2. 구경하러 모인 군중과 분명한 목적으로 찾아온 여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모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먹을 것을 얻기도 하고,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말씀을 듣기도 하였다. 물론 나름대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 왔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분명하지 않았다. 어떤 무리들은 군중심리에 이끌려 찾아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은 남이 구경가니까 덩달아 따라온 것이 아니다. 해결해야 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을 믿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절한 소원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군중들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예수님 곁에 있을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었다. 요 6장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설교가 길어지자 예수님 곁을 떠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몇 안되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하셨다. 너희도 가고 싶으면 가라는 말씀이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끌려서 덩달아서 온 것 같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다르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라고 기록되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다. 더욱이 피를 흘리는 혈루증을 앓았다. 유명한 의사는 다 찾아가 보았지만 병이 고쳐지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있는 재산까지 다 날렸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오늘도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곁에 모였던 군중들처럼 의미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지나 않은가? 단순히 주일이기 때문에 예배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자리에 앉아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이 여인처럼 진지한 태도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우리는 이 여인처럼 간절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예수님 옷단이라도 만져야 되겠다는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럴 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 이러한 예배를 의롭게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한 여인의 병을 고쳤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능력을 주실 것이다.
3. 많은 길과 오직 한 길을 대조할 수 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들이 갈 수 있는 많은 길 중에 하나였다. 그들은 얼마든지 다른 길로 갈 수 있었고, 이해관계에 의해서 예수님 곁에 붙어 있을 수도 떠날 수도 있었다. 가룟 유다는 돈과 예수님 사이를 왕래하다가 결국 은 30전을 벌기 위해서 예수님을 저버리고 말았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을 통분히 여기면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라고 나무란 적이 있다. 이 여인은 자기 앞에 펼쳐진 여러 길 중에 하나로써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 만이 자기 인생의 유일한 길임을 생각하고 예수님에게만 자기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시대에 살고 있다. 과학은 여러 길 중에, 여러 방법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그래서 무엇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험과 시행착오를 거친다. 미사일 하나를 발사하기 위해서도 아마 수백 수천번은 실험을 했을 것이다. 우주선 하나를 완성한 후 과학자들은 99.999%의 정확률을 장담한다. 우주선이 실패할 가능성은 10만 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주선 중에 성공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세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몇차례 실험을 통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듯이 단번에 말씀 한마디 한마디 떨어질 때마다 창조의 역사가 일어났다. 인간은 여러 방법을 시도하여 그 중에 한 방법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여러 방법이 아니라 단 한 방법으로서 해결점을 찾으셨다. 군중들은 그들이 갈 수 있는 어려 길 중에 하나로서 예수를 찾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 삶의 유일한 길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은 것이다
지금도 교회를 찾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이외에도 얼마든지 살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돈으로도 명에로도 지위로도 잘 살 수 있는데 그중에 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교를 믿든 유교를 믿든 이슬람교를 믿든 어느 것을 믿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그 중에 하나로써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다르다. 에수님 만이 자신의 유일한 구세주인 것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임한다. 형식적인 신앙에는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은 예수 밖에 없다. 행 4: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2차대전 때의 일이다. 영국과 미국을 왕래하는 큰 여객선이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호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객선이다. 전쟁의 와중에 있었기 때문에 항해상의 위험도 따랐다. 대서양 가운데서 혹시 적국인 독일의 함정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배가 영국에서 출항할 때 해운당국에서는 항로가 표시된 지도를 주면서 꼭 이 항로대로 가야한다고 당부했다. 적이 밀어닥치고, 태풍이 불어와도 이 항로에서 벗어나면 안되고, 꼭 지정된 항로대로 가야함을 지시 받았다. 배가 대서양 중간쯤 왔을 때 독일 함대가 나타났다. 선장과 선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언제 어느때 대포가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본국에다 긴급전보를 보냈다. 곧바로 전문이 날라왔다. ‘그래도 똑바로 가라. 항로대로 똑바로 가라’는 내용이었다. 이 배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 항로대로 뉴욕을 향해 달려갔다. 한참 가다보니 독일함대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뉴욕 항구에 들어왔을 때 물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있었다. 영국 해군 잠수함이었다. 이 배가 출항할 때부터 영국 정부에서는 해군 잠수함으로 하여금 이 배를 호위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항로대로 가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항로대로 가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신다. 예수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변화받은 사람은 한사람이었다.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은 사람은 한사람 뿐이었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나? 아무 믿음도 없이 그저 습관으로 교회에 나온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던 호기심 많은 군중들에 지나지 않는다. 주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믿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다. 예수게 관심을 갖고 있으나 주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분을 믿을 때, 우리의 삶과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음성을 듣는 갈보리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