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고통 / 김석수
새벽녘에 ‘카카오톡 앱’으로 차를 불렀다. 곧바로 도착한다는 응답이 빠르게 왔다. 서둘러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집 앞에 비상등을 켠 택시가 기다리고 있다. 기사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그는 문을 여는 내게 “역으로 가시는 것 맞지요?”라고 반갑게 인사한다. 시험 보려고 서울 간다고 했더니 그는 룸 미러로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무슨 시험이냐고 묻는다. “심리 치료하는 ‘전문상담사’ 자격증 시험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르신이 그런 자격증을 따려고 하는 것이 멋있네요. 나도 정신 건강 관리에 관심이 많은데 그 자격증은 어떻게 따는 것인가요?”라고 계속 질문한다.
이른 아침이라 말을 걸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호기심을 채워 주려고 준비 과정을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자격증입니다. 먼저, 심리학 관련 대학원을 졸업하고 3년 이상 심리상담 센터에서 수련받아야 해요. 그리고 여섯 개 과목의 필기시험에 합격한 뒤 면접을 통과하면 됩니다.” 그는 “대단하시네요. 꽤 연세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런 시험에 도전하시다니.”라고 놀란 듯이 말했다. 그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 받다 보니 어느새 역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삽상한 바람이 볼을 스친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성큼 찾아온 느낌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사 2층으로 올라가니 전광판에 용산역으로 출발하는 케이티엑스(KTX)는 30분 뒤 도착한다는 안내 문자가 눈에 띈다. 책을 보려고 대합실 후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내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가 열심히 책을 보고 있다. 곁눈질했더니 ‘심리 검사’ 관련 책을 보고 있다. 그녀도 나처럼 자격시험을 치러 가는 모양이다. 책을 보려고 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1번 플랫폼으로 가서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기차는 어느덧 푸른 들판 가운데를 달리고 있다. 창문으로 따가운 햇살이 비껴 들어온다. 지난여름 내내 시험공부를 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아침에 수영장에 다녀온 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봤다. 점심은 인근 식당에서 사 먹고 저녁은 고구마로 때웠다. 때론 짜증이 났다. 책을 한두 시간 보면 눈이 침침해서 쉬어야 한다. 어제 외웠던 것이 오늘 보면 새롭다. 최신 심리학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는 이름조차 생소해서 누가 누군지 알기 어렵다. 옛 어른들이 “공부는 때가 있다.”라고 했던 말이 실감났다.
용산역에 도착해서 택시 정류장으로 갔다. 그랜저 승용차에 올랐다. 기사에게 무학여고로 가자고 했더니 학교에 근무하냐고 묻는다. 시험 치러 간다고 했더니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신가요?”라고 말하면서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를 알려 주었더니 동갑내기라면서 친근하게 대한다. 40여 년 서울에서 택시 운전을 했다고 한다. 내가 공부하면서 눈이 가끔 아파서 고생한다고 하니 '불가마 찜질'을 권한다. 시력이 떨어지고 목이 아파서 우연히 불가마가 있는 곳을 찾아서 숯불을 쬐었더니 몸이 좋아지고 쓰던 안경도 벗었다고 했다.
시험장에 도착하니 교문에 ‘한국 상담학회 주관 전문상담사 1급 필기 시험장’이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시험실을 확인하고 4층으로 올라갔다. 한 시험실에서 함께 보는 수험생은 25명이다. 대부분 젊은 여자고 남자는 나를 포함해서 두 명뿐이다. 머리카락이 하얀 사람은 나 혼자다. 여학교라 남자 화장실은 1층 한 곳만 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긴장을 풀려고 눈을 감고 있으니 감독관이 들어왔다.
매 교시 시간은 90분이다. 1교시 과목은 ‘상담철학과 윤리’, ‘고급 상담 이론과 실제’, ‘집단 상담 프로그램 개발’이고, 2교시는 ‘심리 평가와 진단’, ‘고급 상담 연구방법론’, ‘상담 슈퍼비전의 이론과 실제’이다. 총 여섯 과목이지만 사실은 ‘가족 상담’과 ‘진로 상담’이 포함돼서 여덟 과목이다. 첫 번째 시간은 ‘상담 이론’ 문제가 어려웠다.. 두 번째 시간은 ‘심리 평가와 진단’ 문제가 까다라웠다. 지문이 길어서 읽다가 눈물이 나온다. 네 시간을 앉아 있으니 허리가 아프다. 시간이 부족해서 허둥대기도 했다.
시험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냉면집에 갔더니 사람이 많아서 들어갈 수 없다. 골목으로 들어가서 갈비탕집으로 갔다. 시장이 반찬이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한 그릇을 비웠다. 전철역까지 철길 다리 아래로 20여 분 걸었다. 길가에 웃자란 풀이 아직은 기세가 등등하다. 그래도 가을로 접어들면 누구러질 것이다. 그러면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지겠지. 지금의 세상도 그럴 것이다.
일주일 뒤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수련 프로그램에 함께 참가하는 동료들이 축하해 주었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이제 끝이 보인다. 면접시험만 합격하면 길고 지루한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덥고 지루했다. 매일 도서관에서 내 자신과 싸우면서 고통스러웠다. 이제는 그 시간이 즐겁게 느껴지도 한다. 요즘 아침에 수영장으로 가는 길에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마음이 아주 상쾌하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면 서늘한 가을이 온다. 지난여름 즐거운 고통이 내게 활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