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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그러자 마침 좋은 기회가 왔다. 때는 대명 성화 28년이었다. 북방 오랑캐들이 강성해져서 자주 변방에 쳐들어오고 그 세력은 점점 커져 이제는 더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대하여 이쪽에서도 준비를 하지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계속해 온 때문으로 군사에 대하여 거의 등한히 해 왔다. 풍년은 계속되고, 외적의 침략은 없어서 정치는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잘 되었다. 백성들에게 풍년이 오고 먹을 것이 족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정치는 있으나마나 하다라는 진리를 새삼스럽게 깨달을 정도였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인재가 없고, 장군이 없었다. 적어도 이때의 조정 제신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대개가 늙고 젊은 의욕 있는 일꾼들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젊고도 씩씩한 장재를 뽑아서 적의 침공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인재 등용론은 해마다 제때가 되면 한 번씩 있게 마련인 법이나, 이때는 더구나 그러한 주장이 시기에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오랑캐의 침범을 당하고 있는 변방에서 쉴 새 없이 급한 장계가 날아들곤 하기 때문이었다. 태평세의 편안한 생활에 수염만 연신 쓰다듬어 내리던 조정의 명예로운 제신들은 이러한 장계를 피할 도리가 없고 자신들의 생활의 타성을 계속시키기 위해서도 신명을 아끼지 않는 젊은이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제신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이제 조정에 출전함직한 장수는 없사오니 마땅히 과거를 시행하와 인재를 등용하심이 좋을까 하나이다.”
하고 아뢰었을 때, 천자는 이 말을 옳게 생각하시고 즉시 예부에 하조하여 설과하라고 분부하시었다.
과거를 본다는 기별은 곧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갔다. 남쪽 땅의 양산백 집에도 그 소식이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혼 생활의 행복에 젖어 있는 산백은 그 행복에다 금상첨화를 하려는 욕심에서 아버지가 권하기도 전에 자진해서 나섰다. 원래가 벼슬을 숭상하고 있는 양현 내외는 아들의 이러한 태도를 환영하였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를 정도였다. 양현은 아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구나 본인이 싫다고 하더라도 강요하였을 것이었다. 그의 젊은 아내도 기뻐해 주었다.
“군자가 어찌 아녀자를 위하여 이런 말씀을 입 밖에 내시나이까. 남자가 출어세상하매 입신양명하여 비현부모하고 명소죽백하옴이 장부의 마땅한 일이거늘 어찌 구구히 권녁하사 공명을 취지 아니하시리이까. 바라건대 낭군은 빨리 계화를 겪으사 국가의 근심은 덜으시고 도탄 중에 든 백성을 건지소서.”
하고 말 내기를 가장 어려워하던 남편의 말에 추양대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양산백은 감격해서 과구를 수습하여 행장에 꾸려 넣고 즉시 부모와 아내에게 하직하고 경성으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속속 모여든 야심 많은 재사들의 틈에 끼어 객점에 주인을 정하고 과일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이 만만한 듯하였다. 원래가 가인으로 태어난 그는 운향사에서의 공부로 문장 시서에는 견줄 사람이 없었고 무예에도 천품이 있어서 누구에게나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번 과거 시행의 목적이 무인에게 있었던만큼 그는 그 점도 십분 자신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아버지와 아내의 도움이 컸다. 특히 추양대의 협조는 그의 성공의 커다란 계기가 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과시에 응한 양산백은 다른 어떠한 야심가도 제쳐놓고 문무 양시에 영예로운 장원을 하였다. 천자가 놀라시고 온 천하가 놀란 것은 더 말한 나위도 없었다. 문과만이 아니라 무과에까지 동시에 장원을 한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전임 상서 양현의 아들이라는 데 천자는 미신적인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며, 충신의 아들은 충신이라는 원리를 새삼스럽게 깨닫기까지 하신 모양이었다. 이 때문에 양산백의 지난 명예로운 기적마저 천자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천자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양산백을 하늘이 내리신 충신이라고 감탄하시며 격찬을 마지않으셨다.
“이번 장원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남양 땅의 그 공자라지요? 그렇다면 될 분이 된 것이 아니로소이까. 옥제가 사랑하옵시는 그러한 환생 인간의 천재를 누가 감히 당하겠나이까!”
경성의 거리거리에서 그런 얘기가 또다시 발을 돋쳐 달리기 시작하였다. 장원의 영예로운 삼일유가를 할 때에 장안 백성들의 환희와 감격과 찬미를 말할 도리가 없을 정도였다. 장원이라는 영예보다도 문무에 동시에 장원을 하였다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그가 한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그 때문에 죽고 또 살았다는 그 감명 깊은 이야기가 그들의 흥미를 더욱 끄는 모양이었다.
문무겸전한 이 영예로운 천재에게 천자는 전례를 깨쳐서 한림학사 겸 표기장군을 내리시고 게다가 특별히 대완마 한 필을 하사하시었다. 이쯤 되고 보니 그의 금의환향을 누가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것인가.
양산백은 장원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선 일봉 서찰을 닦아서 창두에게 주어 달려가게 하였다. 아내와 부모에게 먼저 그 기쁨을 알려두자는 것이었다.
이럴 때에 북방 오랑캐들은 점점 그 침략의 기세를 높였다. 변방의 미미한 고장에 들어오던 그들은 이제는 제법 대담해져서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군세도 경시할 수 없게끔 되었다.
그러자 우북평이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극히 위험한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 비보는 천자를 물론 대소 제신과 경성의 상하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우북평에 들어온 적세는 예상외로 큰 것이었고, 뿐만아니라 그러한 병력으로 적병이 우북평에 들어와 있다면 경성조차 위험하고 명나라의 운명이 또한 풍전등화와 같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변방의 비보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비쳐 놓았다.
천자는 군신들을 모아 놓고 이에 대하여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시었다. 그 결과 병부상서 왕균이란 자가 대원수가 되고, 전 장군 위홍이란 자가 보원수가 되어 명나라에서는 정병 10만과 용장 1천 명을 즉시 우북평으로 보냈다.
그러나 우북평에 들어와 장차 명나라의 정복을 꿈꾸고 있는 가달국의 적병들은 예상보다는 훨씬 강성하였다. 왕균의 10만병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풍이 살을 찌르는 사막을 내 집으로 삼고 침략을 생업으로 하는 그들의 용감한 기마대들은 바람같이 날래고 천신같이 불사조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전 세계를 고향으로 삼고 거기에 내 생활의 편리와 자유를 찾으려는 이 언어에 절한 강포한 사나이들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어떠한 권위도 법률도 국경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담무쌍한 야망의 정열에 불붙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성난 범이었고, 성난 사자였고, 성난 곰과 같았다. 그들은 자기네의 생활과 자유를 위해서 싸웠다.
인류 사회의 어떠한 문명도 제도도 그들 앞에서는 무와 같았다. 짐승 앞에 국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이 대자연의 광활한 토지에 말뚝을 박아 놓고 이것이 내 신성한 영토다. 이 안에는 아무도 무단히 들어올 수 없으며 일단 들어오는 날이면 내 절대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라는 식의 간악한 폭군이니 국경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로서는 이러한 국경의 울안에 갇혀서 한 사람의 절대 군주에게 노예의 복종을 맹세하고 평신저두하며 그 속에서 평생의 비루한 생활을 마치는 인간들이 한 사람의 약한 목동에게 끌려가는 양떼처럼 불쌍하고 비굴하게만 생각될 정도였다. 그들은 이러한 인간의 지배와 피지배를 철저하게 파헤치고 거대한 대자연을 인류의 공동 무대로 삼아 거기에 실력을 다투고 누구나 먹고 살아갈 자유가 있다는 인간의 근본 권리를 세워 보고 싶었다.
따라서 그들의 정신은 투철하였고 용감한 전투력은 명나라군이 당할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파괴에 철저하였고 욕망에 불을 뿜었다. 무기력한 명나라 백성들을 침을 뱉어 멸시하고, 천자와 그 벼슬아치들을 불구대천(불구대천)의 원수로 삼아 이 인류의 대무대에 말뚝을 박아 놓고 새끼를 둘러쳐서 지배와 권위를 부리려는 얌체족들을 증오하여 적개심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우북평에 들어와 집을 파괴하고 재물과 계집을 겁탈하고 짐승이 그 희생자를 잔인하게 희생해 버리듯이 그들도 잔인하게 희생시켰다. 짐승의 정열과 탐욕을 가지고 그들은 자기네의 욕망과 갈증을 만족시켰다.
왕균의 10만 군사는 우북평 이쪽의 10리 전방에다 진을 치고 싸웠으나, 지옥의 염라대왕을 모아 놓은 것 같은 이들의 적이 될 수는 없었다. 대원수 왕균과 보원수 위홍은 서로 지혜를 짜 예에 제갈량과 같은 비계를 무수히 써 보았으나, 그것은 황하의 홍수를 모래로 막으려는 이들 문화 민족의 얕은 수작에 지나지 않았다.
사막의 무적인 야만인들은 황하의 홍수가 되어 그들의 비계든 잔꾀든 온통 밀어 버리듯이 싹 쓸어 버렸다. 너무나 거창한 홍수가 되어 그들이 지나간 뒤에는 다만 무인지경의 허허한 모래사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 그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파괴의 완성 같은 것이었다.
이 홍수의 무서운 파괴에서 다만 하나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슬기로운 부원수 위홍이었다. 왕균은 적장에게 사로잡혀 간 곳조차 알 수 없었다.
겨우 혼자의 목숨을 건진 위홍은 그 길로 경성으로 달려오다가 천자에게 이 전패의 사실을 눈물로써 주달하였다. 그 눈물이 이기심에서 나온 것은 뻔하였으나, 그러나 너무도 의외의 결과에 놀란 천자나 제신들은 그를 벌 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적병의 세력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는 너무나 강하였다.
이것을 무슨 재주로 막는단 말인가. 천자와 제신들은 이 엄연한 사태에 압도되어 고개를 뚝 떨어뜨리고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무지 엄두도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우승상 황보숭이라는 자가 출반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이제 가달이 병정 양족하고 70여 성을 쳐서 항복을 받았으니 그 형세 호대하여 졸연히 파하기 어려운지라. 왕균과 위홍의 재주가 등한하지 아니하되 출정하와 일석지간에 10만 정병과 1천여 명 맹장을 잃어버리고 원수 왕균은 적진에 싸여 가고 위홍이 겨우 일명을 도망하여 왔사오니 일로 볼진대 그것을 경적하지 못함을 가히 알지라. 이제 조정 문무 중에 가히 보낼 사람이 없사오매 신의 우견에는 한림학사 양산백이 문무 겸전하올 뿐 아니라 지용이 과인하오니 차인으로써 대장을 삼아 보내시면 도적을 가히 토멸하올 것이요, 성상이 베개를 평안히 하시리이다.”
양산백이라는 말에 전부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언젠가 본 위대한 영웅인 것 같은 인상이 그들의 기억을 달려 지났다. 이 친근한 이름을 그들은 웬일인지 얼른 생각하지 못하였다.
천자의 기쁨도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용기를 얻은 천자는 어진 재상 황보숭의 의견을 만족히 여기시고 즉시 양산백을 천하 병마 대장군을 봉하시고 그에게 형양 제도의 백만 대군을 총독하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이 칙명을 받들도록 사신을 남양으로 급히 내려보내어 명조하시었다. 거기에 어느 누구의 이의도 있을 수가 없었다.
천자는 또 우북평의 싸움에서 10만 군사를 전몰시키고 혼자서 겨우 도망쳐 온 위홍을 불러 양산백을 도우라고 하교하시며 그에게 무장의 직함을 내리시었다. 벌을 주는 대신 관대하게 등용하여 더 한층 신명을 아끼지 말고 헌신하라는 뜻에서였다. 이런 자는 위에서 이러한 관대한 마음을 보인다면 감지덕지해서 눈물을 쥐어짜며 충성의 맹세를 해 보이는 법이다.
위홍이가 바로 그런 자여서 그는 자기가 살아온 죄과를 통절하게 뉘우치며 진실로 헌신 봉사해야 하리라고 자기 마음에 깊이 새겨 넣었다. 그는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어전을 물러났다.
몇 달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간 한림학사 양산백은 이른바 금의환향의 영예로운 맛을 십분 맛보았다. 아내와 부모의 기뻐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고 원근 백성들과 친척 노복들 그리고 근처 각 도 각현의 벼슬아치들이 저마다 예물을 가지고 구름처럼 모여들어 일일이 인사를 받기가 바쁠 정도였다.
이럴 때 벼슬아치들의 아첨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상대방의 벼슬과 천자의 신임을 적당히 고려하여 그 결과에 따라 허리를 구부리는 도수를 신축하고, 예물의 무게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양산백으로 말하면 그들의 아첨은 최대한도로 요구하는 한사람이었다. 문무 양과에 자원을 한 데다가 천자는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내려서 한림학사 겸 표기장군을 봉하신 데다가 값비싼 대완마까지 내리시었다.
시골 마을에서 백성들을 몰아치며 군림하고 있는 각 읍의 수령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자 그의 장래를 평가하고 예물의 무게와 허리를 구부리는 도수와 인사하는 말을 어떤 식으로 써야 할 것인가, 예방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할 것인가, 다른 고을의 수령은 어떤 정도로 인사를 차릴 것인가, 거기에 뒤떨어져서 되겠는가 아니 되겠는가, 이러한 가지가지 번잡한 절차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생각하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예물은 어느 집 누구의 것을 뺏어 오는 것이 좋겠다라는 것까지 결정을 지어 버렸다. 거기에 따라 그의 며칠 동안의 집무의 방향은 결정되었다.
양산백은 그들의 존경을 최고로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령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백성들의 것을 많이 빼앗아가지고 많이 예물을 만들어서 아전들을 뒤에 이끌고 그의 집에까지 예방하기로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양한림의 집에서 일일이 인사를 받기가 귀찮아 아예 삼일잔치를 열어 버렸다. 그러나 양현 내외는 명문대가의 전통과 위엄을 지키기 위하여 이들 벼슬아치들만은 특별히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겸허하게, 그러나 무게 있게 그들의 인사를 받아 두었다. 양현은 점점 이러한 고상한 취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삼일잔치가 끝났을 때 사신이 별안간 달려들어 그들은 놀랐다. 각 도 각 읍의 수령 방백들은 또 다시 존경을 표시해 왔다. 이번에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언제나 정해 놓고 있는 아첨의 저울이 혼란해 버려서 그것을 최고로 할 것인가, 특별로 할 것인가 매우 난처하였으나 어찌 되었든 자기의 마음에 긴급 명령을 내려 이번에는 백성들마저 동원해 갔다.
일하던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가게문을 닫고 밥 먹던 사람들은 그것을 내버려 두고 사신이 천하병마 대장군이 본가를 나와 경성으로 향하는 길을 사람으로 메우기 위하여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명나라 백성들은 이런 명령에는 매우 순량하여 거역할 줄을 몰랐다. 하기야 아니 나간다면 뒤에 생활에 커다란 피해를 입는다는 것도 있었으나 아무튼 이 때문에 양산백의 집은 또다시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사방에서 감격이 물끓듯하였다. 양현 내외는 기쁘고 국은이 망극해서 견딜 수 없었고, 착하고 아름다운 추양대는 남편을 맞이한 지 며칠도 아니 되나 역시 정중하게 이성을 지켰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남편이 제 아무리 위험한 전장에 나가더라도 승리는 하고 올망정 결코 죽을 리는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은 그 여자의 섭섭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양산백은 이러한 사랑스러운 아내와 부모와 많은 사람들을 하직하고, 천사와 함께 용기백배해서 경성으로 향하여 올라갔다. 수령방백들은 10리 밖까지 따라 나와 그에게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였다. 그들의 고분고분한 허리에는 장래 운명이 거기에 걸린 듯하였다.
경성으로 올라와 즉시 예궐한 양산백은 천자와 제신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천자는 그에게 일국의 운명을 맡기노라는 감명 깊은 교훈을 내리시고 이미 정한 천하병마 대장군의 중임을 봉하시었다. 그리고 방장검을 주시며 군령을 짐과 마찬가지로 엄히 하라고 하교하시고, 또 어주마저 내려 그를 위로해 주시었다.
양산백은 백만의 대군을 이끌고 지체없이 적병이 머물러 있는 우북평으로 직행하였다. 그 군세는 참으로 대 명나라의 위엄을 과시할 정도였다. 포악한 적병이 쳐들어온다고 하여 벌써부터 벌벌 떨고 있던 경성의 백성들과 노변의 백성들은 이제야 희망을 얻은 듯이 기뻐하고 반가워하였다.
가달국의 침략군은 아직도 우북평에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마음껏 즐기며 이제는 명나라의 경성에 쳐들어가 천자를 사로잡으리라고 저마다 호언하였다. 그래서 더구나, 양산백의 백만 대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한없이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말에 올라 명나라 군이 진을 치기 시작한 성밖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대오를 짓는 그들은, 전투의 천재들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가달왕은 이것을 선두에서 지휘하고 용맹한 장군들은 그를 호위해서 좌우로 늘어섰다. 뒤늦게 계집 하나를 안고 집에서 나오던 군사 한 놈은 이것을 보자 그 계집을 내던지고 말에 뛰어올라 대오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해서 성문을 나오기 시작한 적병은 그 수 몇 10만이 되는 듯하였다. 양산백은 이들과 대진하여 10여 일을 싸웠다. 그러나 적은 예상외로 강력하고 용감해서 냉큼 결과가 나지 않았다. 황은에 감격해서 흥분하고 있는 위홍은 다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웠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양산백은 계교를 써 보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적장을 유인하여 겨우 하나를 잡았다. 그러나 다음은 그들도 이러한 꾀를 간파하고 그물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맹렬하게 정공을 해 올 뿐이었다. 기병대인 그들은 북방의 대사막을 가로질러 질풍처럼 달리듯이 이러한 일제 돌격에는 명나라의 백만 대군도 당할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양산백은 오히려 그들의 공격을 받고 얼마간의 군사를 잃었다. 화가 벌컥 치밀어 오른 양산백은 말에 채찍질하여 혼자서 적진으로 향하여 갔다. 가달왕과 싸워 최후의 결판을 내려는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르랴 적진에서도 대단한 덩치의 가달왕이 성난 사자처럼 달려 나왔다. 갑옷투구로 전신을 무장한 무서운 가달왕은 칼끝 하나 들어갈 곳이 없는 듯하고, 게다가 얼굴은 온통 털이 뿌옇게 솟아서 입이 어디에 있는지 눈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털 속에서 그는 마치 허기진 범이 사람을 보고 입을 벌리듯 입을 떡 벌리고 이렇게 호령하였다. 그 소리 또한 천지를 진동할 것 같았다.
“너 이놈! 아직도 털을 벗지 못한 어린놈이 어디라고 감히 대적하려는고. 빨리 앞에서 내려 항복하라! 그렇지 못하는 날에는 네 몸의 잔뼈를 한입에 삼켜서 그림자도 없게 할 테다.”
“흥! 무지막지한 짐승놈! 네가 너희의 강성만을 믿고 천의를 거스르니 그 죄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리라.”
양산백도 소리를 높여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내가 천의를 거슬렸다니! 이놈! 듣거라, 하늘은 너희에게도 있는지 모르나 우리에게도 있다. 이 하늘 아래 너희만이 말뚝을 박고 새끼를 둘러서 이것은 우리의 땅이니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라고 헛소리를 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하늘 아래에 그러한 국경이 언제부터 있다는 이야기인가. 너희는 너희의 강도를 행한 선조의 덕분으로 그 국경의 울안에 들어서 그것이 마치 하늘이 정해 준 신성한 영토인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 대자연에는 모래밭과 산과 강과 들밖에 없다. 이러한 대지에서 발을 붙이고 있는 자는 누구라고 살 권리가 있고, 어디에 가서든 살 자유가 있다. 하늘은 누구에게도 이 권리를 똑같이 주고 있다. 그렇거든 유독 너희 천자만이 이 인류의 근본 권리를 혼자서 차지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짐은 분명히 너 천자의 졸개에게 선언한다. 너희 천자의 선조가 우리의 생활 무대인 대자연의 한 귀퉁이를 강도질해서 영원히 독점하려고 한 것처럼 나 역시 너희 천자를 잡아서 북해의 깊은 바다에 던져 버리고 이 땅을 차지할 테다! 그렇게 될 경우에 너는 듣거라! 너희 우매한 졸개와 어리석은 백성들은 짐이 얼마든지 모욕을 줄 테지만 그러나 어떠한 모욕에서도 은인자중하여 봉사해 오는 자는 부려먹을 터이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내게 용감하게 대결해 오던지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죽어야 할 것이다. 너희 비겁한 자들은 어서 빨리 굴복해서 내 더러운 발이 그 위를 지나가도록 인간의 방석을 만들어라. 짐은 너희에게 침을 뱉고 밟아 줄 테다!”
“오랑캐놈에게 예의가 있고 도덕이 있을 수 있겠느냐! 나는 너 짐승을 잡아서 우리 천자에게 바치려니와 능지처참으로 극형하리라는 것을 알라!”
“흥 명나라다운 사치스러운 이야기를 하는구나, 사람을 죽이는데도 너희같이 사치스러운 놈들은 없으리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에 문화니 도덕이니 법률이니 시서 음률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괴물들인가. 인간을 죽여도 격식은 차려서 번잡하게 죽이고 백성들을 괴롭혀도 번잡한 절차를 밟아서 오래 시간을 끌어 괴롭히자는 심사가 아닌가. 어리석은 놈들은 죽이는 데 있어서도 독약을 주어서 스스로 받아 마시도록 하는 것이 너희가 아닌가. 백성들의 물건을 강도질 하면서도 우선 명분부터 내거는 너희가 아닌가. 그러할진대 나는 너희의 도덕과 법률을 멸시하고, 차라리 오랑캐를 택하련다!”
“짐승이 제아무리 강포하더라도 사람에게 쫓긴다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 말이 네 간사한 종족의 최후라는 것을 알라!”
무서운 가달왕은 격분해서 그 말을 던지자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양산백은 재치 있게 옆으로 피하여 그들에게 반격해 들었다.
두 장군은 거의 한나절 가량이나 싸웠다. 그러나 결과는 없었고 양쪽 진영에서 대담한 장군이 몇몇 달려 나와 이들은 도우며 싸웠으나 결과는 없었다. 양산백은 최후로 그가 가장 자신을 갖는 활을 빼어 들었다. 그 화살은 가달왕의 날랜 말에 맞아 말은 거꾸러지고, 가달왕은 그의 부하들의 엄호를 받으며 본진으로 도망쳐 갔다. 이것이 이날의 양산백의 성과일 뿐이었다.
양산백은 할 수 없이 또 비계를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좌우 장군들에게 제각기 작전 명령을 내려놓고 적진으로 향해갔다. 적진에서 가달왕이 다른 말을 바꾸어 타고 달려 나왔다.
“이놈, 듣거라! 어제는 네놈이 간악하게도 화살로 내 말을 꺾었다마는, 오늘은 너 어린놈이 내 칼에 죽고 명나라가 내 발에 깔린다는 것을 알라!”
“버릇없는 오랑캐놈아! 천의를 거스르는 도적놈이 제가 갈 길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라!”
“이놈! 어린놈이 되지 못하게 작작 큰소리를 쳐라! 너희 천자는 무능하고 박덕한 놈이다. 하늘은 이러한 놈을 없애치우고 유덕하고 유능한 사람을 앉힌다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내 너희 놈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줄 테니 그 목을 곱게 늘여라!”
여기서 또 피를 토하는 격전이 벌어졌다. 가달왕은 어제의 분풀이를 하려는 마음으로 불덩어리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양산백은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가달왕은 너무나 흥분하고, 분노에 끌려 있어서 상대방의 꾀에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양산백은 그를 끌고 슬금슬금 자기 진영으로 움직여 갔다. 그리하여 최후로 본진에 들어서자 그를 철통처럼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하였다.
과연 용감한 가달왕이었다. 여의봉을 후려치며 변화무쌍한 손오공처럼 삼두육비의 비상한 힘을 발휘하여 전후좌우의 적을 일시에 막아내는데, 이를 당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앞을 보고 있으나 동시에 뒤를 보고 좌우를 보고 그야말로 현상을 초월한 심령을 가지고 싸우는 듯하였다. 무예에 달통한 신인이었다.
양산백은 내심 감탄해 마지않을 정도였다. 가달왕은 한 곳을 뚫고 절벽을 굴러 내리는 커다란 바위처럼 도망쳐 달아났다. 그러나 웬일이냐. 본진으로 갔을 때 자기의 진영은 완전히 궤멸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명나라군이 그곳을 차지하고 그에게 공격해 왔다.
가달왕이 또다시 36계 줄행랑을 쳐서 멀리 달아나 산 하나를 넘어서자, 거기에 자기의 패잔병이 모여 있었다. 그것은 불과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부장군 야출이란 놈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가달왕은 이들은 모아 놓고, 본국에 남아 있는 군사들을 죄다 몰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 급히 달려온 본국의 군사를 보니 불과 30만밖에 안 되었다. 적의 백만 대군에 비한다면 너무도 적은 수였다. 가달왕은 이들을 이끌고 이번에는 그들이 능수로 아는 일제의 돌격을 개시하였다.
장사진을 치고 이것을 기다리고 있던 명나라군은 뱀이 그의 희생자에 대하여 머리와 꼬리를 감아 완전히 포위해 버리듯이 그들 역시 좌우를 감아서 극히 자연스럽고 저항할 수 없게 가달국 30만 군을 삼켜 버렸다.
가달왕은 야출과 함께 겨우 도망쳐 달아났다. 그의 뒤를 따른 자는 불과 몇 만도 안 되었다. 우북평을 점령하고, 명나라 변방 70여 성을 뺏어 쥐었으며, 이제 명나라의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가달왕으로서는 너무나도 허망한 실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대지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분해 하였다.
옛날 그들의 오랜 선조인 흉노의 한 왕자는 토지를 위해서는 사랑하는 천리 준마도, 아름다운 아내도 적에게 바치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충비도 죽여 없앴다. 그러나 지금 실패에 울고 있는 이 사막의 대 야심가는 또 무엇을 줄 것이 있을 것인가. 그는 대지를 부둥켜 안 듯이 주저앉아 다만 우박 같은 눈물을 주룩주룩 쏟을 뿐이었다.
그러자 지혜로운 신하 하나가 유명한 자객 하나를 소개하였다. 신장이 9척 5촌이고 머리털이 빨갛고 얼굴이 시푸르뎅뎅하며 한번 소리를 지르면 천지가 뒤집힐 듯하고 게다가 힘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역발산의 대단한 근력을 소유한 자였다.
이 거인의 이름은 육힐이라 하였고 희주현에서 살고 있었다. 지혜로운 신하의 분명한 보장에 의한다면 그를 불러다가 천하를 양분할 약속을 하고 적진에 들어가 양산백을 죽여 없애는 날이면 명나라의 정복은 누워서 떡 먹기라는 이야기였다. 절망에 우는 대 정복자는 이 말을 듣자 별안간 용기를 얻어 벌떡 솟구쳐 일어섰다.
육힐은 대번에 불려왔다. 과연 대단한 거인이었다. 천하를 양분해 주겠다는 약속의 욕심만 없다면 그는 무사무욕한 대자연과도 같은 위인이었다. 바위처럼 욕망이 없어 보였다. 바위나 대자연이 무엇에 의하여 존재하고 질서를 잡고 있는지 알 수 없듯이 그의 원리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가달왕의 만족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보기보다는 매우 단순해서 육힐은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그는 가달왕의 툭툭 치는 어깨의 손과 천하 양분의 말 한마디를 명백한 계약 문서로 삼고 흔연히 미소를 짓고는 칼을 들고 적진으로 향해 갔다.
밤 삼경이라 그의 거창한 육체를 감추기에는 좋았다. 태산도 이런 밤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양산백은 불빛을 밝혀 놓고 병서를 보고 있었다. 육힐이 접근해 가도 전혀 모르는 듯하였다. 육힐은 대담하게 밀고 그의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양산백은 조용히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이토록 대담무쌍한 소년 장군을 육힐은 칼을 번쩍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 웬일인가. 태산 같은 거인은 두어 걸음발을 옮겨 떼었을 때 그만 땅바닥에 푹 빠지며 그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놈! 알겠는가! 네가 오랑캐의 자객이 되어 온 모양이나, 이쪽에서는 너를 곱게 모시기 위하여 오늘 하루 몇 사람이 땀을 흘렸단 말이다.”
좌우에 숨어 있던 힘센 장군들이 양산백의 이 말이 떨어지자, 육힐을 묶어 끌어올려서 목을 쳐 버렸다. 양산백은 벌써부터 패주한 가달왕을 감시하고 있었다.
가달왕은 자신만만하게 기다렸으나, 그의 눈앞에 바쳐진 것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육힐의 머리였다. 양산백은 이미 대기시켜 둔 그의 복병에 의하여 가달왕과 부장군 야출을 잡아 버렸다. 나머지 적병들도 죄다 잡아 버렸다.
가달왕과 야출을 원문 밖에 내어 참하게 하고 첩서를 천자에 올린 뒤 양산백은 회군하여 경성으로 올라갔다. 천자와 제신들은 그를 멀리 나와 환영하고 백성들은 감격에 넘쳐셔 어쩔 줄을 몰랐다. 찬자는 이 위대한 영웅을 치하하시며, 그에게 북평후를 봉하시고, 그의 아버지 양현에게는 초봉을 봉하시었다. 그리고 많은 상사를 하시고 이들 일가를 황성으로 올라오도록 특별히 분부하시었다. 이렇게 하여 양산백의 영귀는 완성된 것이나 그는 1녀를 두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팔순을 누려, 온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끝>
<재편집: 오솔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