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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빛의 광채 때문에... / その光の輝きのために… (2022년 7월 24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22:6~11
행 22:6 ○"가다가, 정오 때쯤에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땅바닥에 엎어졌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8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나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이다' 하셨습니다.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 빛은 보았으나,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그 때에 내가 '주님, 어떻게 하라 하십니까?' 하고 말하였더니,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는 네가 해야 할 모든 일을 누가 말해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빛의 광채 때문에 눈이 멀어서, 함께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6. 「旅を続けてダマスコに近づいたときのこと、真昼ごろ、突然、天から強い光がわたしの周りを照らしました。7. わたしは地面に倒れ、『サウル、サウル、なぜ、わたしを迫害するのか』と言う声を聞いたのです。8. 『主よ、あなたはどなたですか』と尋ねると、『わたしは、あなたが迫害しているナザレのイエスである』と答えがありました。9. 一緒にいた人々は、その光は見たのですが、わたしに話しかけた方の声は聞きませんでした。10. 『主よ、どうしたらよいでしょうか』と申しますと、主は、『立ち上がってダマスコへ行け。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すべてそこで知らされる』と言われました。11. わたしは、その光の輝きのために目が見えなくなっていましたので、一緒にいた人たちに手を引かれて、ダマスコに入りました。」
본격적인 더위로 지치기 쉬운 날들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육신이 피로하고 지치면 마음도 함께 연약해 지는 것이 사람이란 존재가 가진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약한 한계까지도 모두 품어 주시고, 나와 함께 모든 것을 공감하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나의 문제를 단지 나의 문제가 아닌 당신의 문제로 여기시고 친히 그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또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과 그 가운데 충만하게 배어들어 있는 약속을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강하고 흔들림이 없는 성령의 응답을 들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붙들어다가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하려고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에 있었던 경험담입니다.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열심을 다하던 사울이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과 대면하는 순간을 고백하는데요. 실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은 행 9장에도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고백을 하고 기록하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9장에서의 기록은 사도행전의 필자인 ‘누가’가 자신이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던 것을 기록하였던 것인데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내용을 누가가 받아 적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내용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인지가 일어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성경은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 그런 사소한 오차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의 표현과 사도 바울의 표현에는 구체적으로는 사소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내용으로서 통일성을 갖고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행 22:7-8)
행 9장을 본문으로 설교를 전할 때에도 이 구절에 초점을 맞춰서 메시지를 함께 나누었는데요. 오늘 또 다시 반복되는 이 구절을 통해 성령님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꼭 기억하라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믿어지는데요.
본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다메섹(다마스쿠스)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해서 처벌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밝은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하시는 데요... 사실 그대로 “왜 나를 믿는 자를 괴롭히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행동을 팩트만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팩트를 통해 알 수 있는 진실에 근거하여 그 행동을 평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보시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사실과 속에 감춰진 진실을 함께 보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물론 사람은 한 번에 진실까지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추측하기도 하고, ‘객관적’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사실만 가지고 가치를 매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고백한 것처럼 그것이 인간인 우리가 가진 나약함이며 또한 한계입니다. 우리는 사실에만, 그리고 세속적인 수치로 나타난 값어치에만 치중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계 때문에 여전히 죄와 허물에 매여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지요.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실만이 아니라, 진실까지 꿰뚫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산처럼 많은 문제와 고난에 대해서도 그저 방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독교인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사울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되물으시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사실과 진실의 장애와 문제,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을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문제요, 당신의 고통으로, 당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수시로 권면하며, 주님과 함께 24시간 동행하자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도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어렵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의 시선을 나를 지켜 주시는 시선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를 감시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예수 동행 운동을 하시는 유기성 목사님이 지방회의 목사님들과 함께 여행을 가셨다고 합니다. 다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데 사회를 맡으신 목사님이 여행을 통해 기대하는 바를 서로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 때 유 목사님 차례가 되었을 때 당연히 이번 여행이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는 경건한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답니다. 그 때 순간 뒤쪽에서 얕은 한숨이 들리며... “모처럼 홀가분하게 여행가는데... 숨 좀 쉽시다.. 숨 좀...”하며 탄식하듯 말씀하신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숨을 지으며 쓴소리를 하신 목사님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마치 모시기 어려운 어른과 함께 다니는 것처럼 여기셨던 모양입니다.
단지 예화에 등장하는 목사님만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과 행복한 동행을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감동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주님을 믿기보다는 주님을 믿는 영역과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을 굳이 분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종교적이고 사무적인 관계로만 묶어 두고,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주님께서 관심을 거두어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일상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께서 올포원이라는 설교 방송에서 돌발질문에 답하신 것을 글로 정리한 것을 보았습니다.
<질문은... 매일 죄에 무너지는 연약한 제 자신이 너무 미워요...입니다. 그 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무너지는 게 맞아요. 죄에 지는 게 당연해요. 그리고 주님이 그걸 아셔요. 예수님께서는 아시니까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했고, 말씀을 좇지 못하고 기도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시고 화내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는 전부 아셔요. 그렇다면 연약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아 내가 그런 존재입니다’인정하는 거예요. 목사가 되든, 장로가 되든, 성도가 되든, 어떤 존재가 되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제가 그런 존재입니다. 고백하는 것이 자기부인의 또 다른 측면이에요. 나를 주장하고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완전히 개방하여 ‘내가 그런 존재입니다’ 드러낼 때 그분께서 만지시는 겁니다. >
저는 이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허물이 너무도 많습니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매일 죄와 허물과 유혹과 격정에 넘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아실뿐만 아니라, 그 때의 그 내면을 오롯이 함께 느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시며 책임을 져 주신 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그런 죄와 허물을 회개하며,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삶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또 돌이켜야 합니다. 그럼 용서를 받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태산 같은 죄도 용서받은 죄는 먼지보다 더 가볍고, 털끝 같은 죄도 용서받지 못한 죄는 태산보다 더 무겁다.”
그렇습니다. 나의 문제와 나의 죄를 당신의 문제와 당신이 책임을 져 주실 일로 여기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문제와 고통을 당신의 문제와 고통으로 여기시는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내가 억지로 몸부림 쳐가며 주님을 모시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일상이라는 현실에 동참하고 계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믿고, 그 말씀을 읽고 듣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한계가 있고, 연약하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 육신의 최소한 노력과 순종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순종과 이런 노력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히 6:10)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일을 주님의 일이라고 여기신다는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을 회복시키시고, 바울을 사용하셔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적지인 다마스쿠스 근처에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비취는 큰 빛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지요.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과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주님의 명령을 따라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갈 때 주위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때 “그 빛의 광채”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여기서 광채라는 말을 원어인 그리스어 성경은 “doxa 독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기이한 큰 빛이 아닌, 영광스러운 빛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빛의 광채, 즉 영광 때문에 그의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영광을 보게 되자 눈이 멀게 되었다는 이 표현이 참으로 감동적이며 은혜롭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 하나님의 영광과 제대로 맞닥뜨린 사람은 결코 이 세상의 사실적이고 수치적인 값어치에 대한 시각이 둔해지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눈이 안보이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 사실적인 경험을 통해 그는 진실과 진리에 눈을 뜨게 되므로 말미암아 육신의 가치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복음에 눈을 뜨면 육신의 이기심이나 사리사욕에 대한 안목의 정욕이 힘을 잃게 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눈이 민감해짐으로 육신의 눈이 둔감하여 진다는 뜻으로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 자신의 내면세계가 겪은 혁명과도 같은 경험 이후의 삶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제가 인용하는 성구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 반복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구절이 많지 않기 때문일 수 있지만, 반면에 저와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구절이기에 반복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과 감동이 점차 늘어나야 풍성한 것이 아닙니다. 명확한 진리와 진실에 대해서 뚜렷하고 또렷하게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구조를 해야 할 구조선에 아무리 줄이 많이 있어도, 모두 썩은 동아줄이라면 단 한사람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개의 동아줄이라도 튼튼한 줄이라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사는 삶은 다른 육신의 영화로움이나 자랑거리에 대해서는 둔감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진정한 보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바울의 눈이 멀었다는 표현은 육신의 한계를 경험하면 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강력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노출되어 세속의 욕심이라는 가치관의 눈은 멀게 되고, 이 땅의 부귀영화에 더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노출되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해 분별하기 위한 시신경은 마비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결정하고 계획한 다마스쿠스를 향한 길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는 이렇게 세속의 가치관의 시신경이 마비된 바울이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진실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밝히 열리기를 갈망합니다. 물론 육신적인 현실에 맞서는 일들은 만만치 않고, 인생길의 구비마다 놓인 문제의 벽들은 높기만 합니다. 그러나 나의 문제와 죄와 허물을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나의 문제와 죄와 허물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문제로 여겨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 복음과 진리 가운데 사는 것이 곧 예수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삶인 것을 믿습니다. 주님과 동행할 때 비로소 내 눈을 가로막던 모든 벽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영광만을 체감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만났던 주님께서 우리와 여전히 동행하시며, 나의 일을 주님을 일로 여겨 주시고, 그 영광을 우리의 현실에 채우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현실의 모든 이기적인 문제로 인한 죄를 회개함으로 하늘의 영광에 거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그 영광 가운데 지금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주님과 함께 손잡고 당당히 걸어가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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