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ㆍ남은 삶을 공동체를 위해 투자한 세 남자 의 ‘살맛 나는 70’
빈곤과 질병, 외로움. 우리 사회에서 은퇴와 노후에 뒤따르는 언어란 이런 것들이다. ‘노 후설계’가 자산설계와 동의어인 한국 사회에 서, 남은 삶을 공동체를 위해 쓰기로 한 70대 의 세 남자, 전도웅씨, 배순호씨, 전양수씨를 만났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게 이들이 은퇴 후 새로 갖게 된 신념이다. 꿈을 위해 끊임없 이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일을 벌이는 이 들에겐 노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건강 관리에 골몰하는 동년배들과 달리, 이 들은 아픈 데가 없다. 나 혼자가 아니라, 남과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한 이들의 노후 이야기를 들어봤다.
ㆍ대학원장 출신 전도웅씨, 태국에서 대안학 교·협동조합 설립해 주민 자립 도와
평생 대학 강단에 섰던 70대 노인이 손수 삽 을 쥐고 구덩이를 팠다. 두 달 만에 근육이 생 기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였다. 닭 한 마리 길러본 적 없는 그는 태국 고산지대에 돼지 우리를 만들고, 3년간 돼지 100여마리를 길 러냈다.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를 지내고 대학원장을 역임한 뒤 2006년 은퇴한 전도웅씨(74)는 태국 소수 민족들이 사는 북부 치앙라이의 매쑤어이 지역에 2010년 둥지를 틀었다. 이 곳에는 라후족, 카렌족 등 태국 소수 민족들 이 마을 24개를 이루고 있다. 태국 타이족과 문화가 다르고 땅이 없는 이들은 산속으로 밀려나 화전을 일궈 먹고산다. 가파른 산지 에서 농산물을 수확해 봤자 종자와 비료 비 용을 대고 나면 남는 건 빚뿐이다. 마약 조직 의 온상인 골든 트라이앵글 안에 속한 이 지 역 사람들 대다수는 마약에 중독됐거나 관련 범죄에 얽혀 있다.
■ 자연 양돈 보급하고 신용은행 문 열어
태국 매쑤어이 사람들을 옥죄는 사채와 마 약, 무지의 악순환을 끊는 일로 전씨는 은퇴 후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12년 전 ‘평화재 단’이 이 지역에 ‘매쑤어이 평화센터’를 세웠 다. 매쑤어이를 몇 번 방문했던 전씨는 이곳 에서 비밀 통로로 마약을 운반하다 경찰에게 들켜 감옥에 들어간 엄마를 둔 초등학생, 아 편에 찌든 소수 민족 마을 남자들을 봤다. 전 씨는 “마음이 자꾸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매쑤어이 평화센터의 주 목적은 현지 청소년 교육과 마을 자립이다. 현재 소수 민족 학생 70~80여명이 매쑤어이 센터 기숙사에 살면 서 6년제 대안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3년 전부터는 구호와 원조 대신 마을 주민들을 자립시키자는 목적으로 시작된 ‘평화마을 자 립개발 10개년 계획’이 진행 중이다. 전씨는 컨설턴트로서 자립개발 프로젝트를 이끌고, 마을 지도자를 훈련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 은 2006년 은퇴하기 전까지 전씨의 삶에 없 던 것들이다. 대부분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 내거나 귀농한 동년배 지인들과 전씨의 노후 는 많이 다르다.
2010년 매쑤어이에 온 전씨가 가장 먼저 했 던 일은 자연 양돈·양계 보급이었다. 성장 촉 진제, 화학 사료와 학대 없이 자연 속에서 가 축을 길렀다.
전씨는 2006년 은퇴한 뒤 충북 괴산에서 친 환경 자연농 교육을 받았다. 자연 양돈을 시 작한 지 4년째, 매쑤어이 센터 돼지는 100마 리로 늘어나 센터 대안학교와 기숙사를 운영 하는 자금으로 쓰인다. 자연 양돈은 매쑤어 이 각 마을이 협동조합으로 자립하는 방편으 로도 쓰일 예정이다.
소수 민족들의 마을에 협동조합, 마을기업 방식을 적용해 자립시키자는 발상은 전씨가 제안했다. 그는 현지 마을들에 상·하수도, 포 장도로 등 기본 인프라를 세울 자금을 지원 받기 위해 각종 국제원조기구 포럼 등에 참 여했다가 ‘물붓기식’ 원조가 아닌 원주민 자 립의 필요성을 배웠다.
자립의 방식을 고민하던 전씨는 지난해 자비 로 협동조합을 꾸렸다. 협동조합 설립 이전 에 하루 이자가 2~3%까지도 달하는 고금리 사채를 갚느라 자립이 불가능한 현지인들을 위해 올해 매쑤어이 센터에는 소액신용은행 이 문을 열었다.
■ 나이 들수록 ‘세상과 내가 하나’ 절감
전씨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무담보·무이자 소 액신용은행 ‘더불어사는사람들’과 평화재단 이 지원한 종잣돈 200만원으로 대출이 시작 됐다. 마을마다 종잣돈이 생기면 각기 은행 을 설립하고, 마을 단위의 협동조합과 또 24 개 마을이 연대한 협동조합연합회를 통해 농 ·축산물 공동 생산·판매를 시작한다는 청사 진이다.
전씨는 한국에서도 생태농업과 지역공동체 를 연계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전씨는 도시의 유기성 폐기물을 친환경 사료, 비료 로 만드는 생태순환도시농업 협동조합 ‘소금 나루’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동애등에협회 추진위원장이다. 동애등에는 잔반, 축산물 가공 중 부산물 등을 다 먹어 치우는 익충으 로 전씨는 이를 친환경 농·산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제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전씨는 나이가 들수록 ‘세상과 내가 하나’라는 걸 배 웠다고 한다. “어디까지가 나인가, 하는 생각 이 자의식이라면 살면서 그 범위가 커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확대된 나고 세상은 확대 된 우리니까, 나 혼자 행복한 게 아니라 사회 에 참여하는 게 그저 당연하지요.”
ㆍ외국계 은행서 일했던 배순호씨, 키르기스 스탄에서 ‘가난한 이들의 은행’ 운동
30여년간 외국계 은행에서 일하던 가장이 정 년퇴직 3년을 남기고 사표를 썼다. 당시 아들 둘은 대학생, 막내는 재수생이었다. 자식들 에게 “경제적으로 자립하라”는 말을 남기고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으로 떠난 아버지 는 그곳에서 중증 장애아 대안학교를 세우 고, 50달러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사 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을 만들었다. 아들 셋은 20년간 자력으로 대학을 마치고 결혼했다.
배순호씨(73)는 27년간 체이스맨하탄은행, 파리국립은행 등 외국계 은행 한국지점에서 일했다. 정년을 3년 앞둔 1995년 당시 아랍 은행 부은행장이던 배씨는 키르기스스탄 여 행을 떠났다가 뭔가 다른 삶을 꿈꾸게 됐다.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들이 쓰레기통을 뒤 지면서 사과 껍질, 계란 껍데기 따위를 건져 내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저런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저들을 위해 여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 죠.”
■ 신협 키워 ‘졸도시’은행으로 전환
귀국한 뒤 배씨는 한 달간 가슴에 사표를 품 고 다니다 결단을 내렸다. 퇴직 뒤 아내와 함 께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 신학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배씨는 1999년 3월 키르기스스 탄 수도 비슈케크에 들어가 10년을 살았다.
비슈케크에서 배씨 부부는 가장 먼저 장애인 대안학교를 만들었다. 구소련 핵실험의 여파 로 중증 장애아들이 많았지만 당시 국민소득 270달러이던 키르키스스탄 정부에는 관련 복지정책이 전무했다. 장애아동들은 집 안에 방치됐다. 배울 기회도 없었다. 배씨는 현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장애아 40명을 가르치 는 학교를 세우고 10년간 대표를 맡았다. 학 교는 전액 무료였다. 키르키스스탄 정부 지 원은 없었고, 한국 교회와 지인들의 지원금 으로 꾸려갔다.
평생 금융인으로 살았던 배씨에게는 열악한 현지 금융 사정이 곧 눈에 띄었다. 시중 은행 대출 이율이 28%에 달했고, 가난한 나라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항상 빚에 시달렸다.
배씨는 50여가구를 모아 8000달러 규모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3년 뒤 미국인 선 교사 한 명이 8만달러를 투자해 신협을 마이 크로크레딧인 ‘졸도시’ 은행으로 전환했다. 2006년 자신이 다녔던 한국의 교회에서도 졸도시 은행에 6억원을 지원했다. 졸도시 은 행에서는 민족, 국적과 상관없이 소상공인, 중소기업 위주로 50~5000달러까지 대출을 해준다. 신협 조합장이나 은행장 등 관리자 는 모두 현지인들을 채용했고, 배씨는 감사 역할을 했다.
배씨는 “대출받은 이들이 사업을 시작해 자 립하고, 그들이 한 명씩만 고용해도 일자리 가 꽤 늘어난다”며 “대출해주기 전에는 2주 간 꼭 자립정신과 납세의 의무, 성실한 가정 생활 등 전반적인 생활과 상업에 대한 교육 을 받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은 기능 과 경험의 두 축으로 운영된다. 나처럼 금융 기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저개발국에서 소 액 신용대출을 통해 봉사할 여지가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 2008년 귀국해 이주노동자 도우미로
배씨는 2008년 아내의 건강 문제로 귀국했 지만 사는 방식은 키르기스스탄에서 하던 그 대로다. 경기 포천에 자리잡은 배씨는 부근 공단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네팔 등 동남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 알코올에 중독돼 임 금체불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근처 교회 에 ‘아시아외국인근로센터’를 만들었다. 배 씨는 소장으로서 5년째 이곳을 찾아오는 이 주노동자들의 필요에 따라 병원을 소개해주 거나, 임금을 주지 않는 사장을 함께 찾아가 는 등 각종 상담을 해주고 있다. 매주 이주노 동자 30~40여명이 이곳을 찾는다.
저소득층을 위한 마이크로크레딧 활동도 지 속하고 있다. 배씨는 2011년 시작된 ‘무이자· 무담보·무신용’의 실험적인 소액신용대출단 체 ‘더불어사는사람들’ 창립 멤버다. 키르기 스스탄 졸도시 은행의 감사 역할도 온라인을 통해 하고 있다.
노후에 대한 불안은 없을까.
“젊은 시절에는 결혼, 자녀 교육, 노후 자금 마련 등 걱정이 훨씬 많았죠. 지금은 집 한 채 외엔 아무것도 없지만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 다. 저는 은퇴한 게 아니라 계속 일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될 거예요.”
ㆍ신협서 은퇴한 전양수씨, 전문 지식 살려 대안적 금융 협동조합 활동
40년 넘게 몸담은 직장에서 은퇴한 뒤 ‘내가 평생 했던 일이 다 실패했구나’라고 깨달았 다. 평생 신용협동조합 중앙회에서 일해온 전양수씨(73)는 퇴직 후에야 신협이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된 뒤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 고 있다는 게 보였다고 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평생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해온 그였 다. 전씨는 “반성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정부 주도가 아닌 대안적 형태의 금융을 고 민한 끝에 전씨는 현재 신용불량자에게도 무 이자·무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실험적인 마이 크로크레디트를 운영 중이다. 전씨는 1962 년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합류해 대학 졸업 뒤 신협 연합회(현재 신협 중앙회)에 입사해 2004년 퇴직했다. 공제 관련 일을 맡아 신협 중앙회와 각 단위조합, 미국의 신협 국제본 부에서 일했다.
1960년대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경제적·사 회적 약자들을 위해 금융 안전망이 필요하다 는 인식에서 시작한 신협이지만, 이제는 정 작 도움이 절실한 이들은 신협 조합원이 될 자격조차 얻기 어렵게 됐다. 전씨는 “신협 안 에 있으면서는 타성에 젖어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나와서 심각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 “인생 실패” 자조하다 요즘은 삶이 즐거워
스스로 “내 인생은 실패했다”고 말하는 전씨 지만 그는 요즘 사는 게 즐겁다고 했다. 현재 전씨는 신용불량자도 가리지 않고 무이자·무 담보로 저소득층에게 돈을 빌려주는 단체 ‘더불어사는사람들’의 이사장이다. 1인당 대 출금은 최대 100만원으로 급한 병원비, 불어 난 사채 이자 등 수십만원이 없어 절망에 빠 진 이들에게 ‘금융쉼터’가 되어주자고 2011 년 창립했다.
정부 지원은 받지 않기로 했고, 후원회원 출 자로만 종잣돈을 만들었다. 돈을 빌려간 대 출자들도 소액 후원회원으로 가입시키는 선 순환 구조로, 2년여 만에 종잣돈 1억원을 돌 파했다. 전씨는 “우리가 주는 것은 돈이 아니 라 신뢰다. 기댈 데 없는 절박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줘서 다시 자립하게 하려는 게 목 적”이라고 말했다.
신협 운동에 푹 빠져 농어촌 각지를 다니며 주민들에게 신협 조직을 소개하던 대학생 때 처럼 전씨는 지금 갖가지 협동조합에 참여하 고 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그는 은평두레생협 이 사, 은평신협 감사이자 은평구 내 협동조합 들과 시민단체들 연합회인 은평상상 이사장 이다. 또 공정무역회사인 ‘두레APN라이프앤 드피스’ 이사를 맡았고, 유기농 농산물을 생 산하고 유통하는 식당 프랜차이즈까지 기획 중인 ‘도시의농부들협동조합’ 발기인으로 창 립을 준비 중이다.
■ 일하다 보니 운동 안 해도 아픈 적 없어
신협에서 상근직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생각 하지 못한 세계였다. 전씨는 “호화롭진 않아 도 연금으로 생활은 할 수 있다. 현재 내가 하 고자 하는 일에 충실하며 살아야지 미래 때 문에 지금 인색하게 사는 건 재미없을 것 같 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벌이다 보니 정신적으로 운동이 돼요. 대학 동기 모임 같은 데 가보면 저 말곤 다들 자랑 할 것도 많고 잘 놀고 잘사는 것 같은데, 나보 다 다 골골하더군요. 나는 특별히 운동 안 해 도 나이 먹었다고 병원 다니고 아픈 적 없어 요. 여러 사람을 가까이하면 웃음도, 재미있 는 이야기도 저절로 옵니다.”
전씨는 스무살 때 대학보다 열심히 다녔던 ‘협동조합연구원’을 다시 만들려고 계획 중 이다. 일회적 구호 성격의 긴급대출만이 아 니라 어릴 때부터 저축과 소비에 관한 체계 적인 금융교육을 받게 하고, 협동조합을 통 해 일터를 만들어주는 금융복지 시스템을 만 들기 위해서다.
연구원은 더불어사는사람들의 산하기관으로 구성하거나 전씨가 관여하고 있는 여러 협동 조합들이 공동출연해서 법인을 만드는 형태 를 검토하고 있다. 전씨는 “어릴 때부터 돈이 생기면 자기를 위해서만 쓴다. 남과 나누거 나 선물하거나 하는 습관을 들이는 교육이 필요하다”며 “교육은 은퇴자들이 자원봉사 로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