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머니 열 시간 / 양선례
“이번에 시각 장애 협회장에 도전합니다. 응원, 부탁합니다.” 동생이 말했다. 사는 지역도 다르고, 회원이 아니어서 투표권도 없는데 무엇으로 돕지? 예순을 코앞에 두었지만 결혼하지 않았기에 함께 선거 운동할 아내조차 없는 동생이 딱해서 금일봉을 보냈다. “사람을 만나려면 밥도 사고, 술도 사야 할 것 아니여? 보태서 써.” 도울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한 달 후에 200명이 조금 넘는 회원들이 체육관에 모여서 직접 선거로 치른다고 했다. 간혹 전화하면 시끌벅적하게 돌아가는 주변 이야기가 들려 자세한 내용을 묻기도 조심스러웠다.
내 바로 아래 남동생은 시각 장애인이다.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우리 집에서 그는 엄마의 왕자님이었다. 딸 셋은 아무도 옆 도시의 명문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 납부금보다 더 무서운 통학 버스비도 우리 집 형편에는 부담이었다. 그런데도 딸인 내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건 공부 잘하는 제자를 아끼던 선생님의 덕이 컸다. 남동생은 고등학교도 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타지역으로 다녔다.
내가 대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동생도 내가 머물고 있던 도시의 대학에 입학했다. 엄마는 내가 머문 3년 동안 한 번도 와 본 적 없던 도시에 비로소 자취방을 얻어 주었다. 엄마의 차별이 서운하면서도 또 이해가 되어서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친구 집을 전전하며 더부살이하다가 처음으로 내 방이 생긴 기쁨이 훨씬 컸다. 내가 졸업하자 동생은 기숙사로, 그조차 안 되자 하숙까지 했다.
그가 졸업장만 받으면 우리 집이 좀 필 줄 알았다. 88 올림픽이 끝나고 바야흐로 경제 성장의 시대였다. 80년대 고도 성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디피(GDP) 성장률이 6~7% 수준으로 비교적 높은 성장세를 유지하였다. 즉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대기업이든 공사든 쉽게 들어갈 수 있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는 선택의 폭이 넓은 공대생이었다. 그런데 그가 국방의 의무까지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병마가 찾아왔다. 그것도 눈에 치명적으로.
나빠져만 가는 눈으로는 책을 읽고 문서를 보거나, 운전면허증을 딸 수도 없었다. 대학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녔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병의 진행 과정을 알아갈수록 절망만이 쌓였다. 투병 생활이 10년 가까이 되면서 더 이상 나빠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질 희망도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방안퉁수’가 되었다. 컴퓨터 한 대만이 그의 친구였다. 가까운 몇을 제외하고는 만나지도 않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미래가 없는 그의 절망이 안타까웠지만 해 줄 수 있는 일은 적었다. 언젠가 장애인 등록이라도 하면 통신비나 전기세라도 감면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을 꺼냈다가 “누나는 동생을 그렇게 장애인을 만들고 싶은가?”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권할 수도 없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 세월이 또 10년을 넘어가자, 그 끝없는 무기력에 질식할 것 같았다.
드디어 동생이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장애인으로 등록하고 그곳에서 소개해 준 일자리를 잡아 제 밥벌이를 했다. 무엇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생기니 생기가 돌았다. 형제간 모임을 정하려면 일정을 동생에게 먼저 물어야 할 정도로 그는 바빴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별걸 다했다. 어떤 해는 사이클 선수였고, 또 이듬해는 볼링 선수가 돼 있기도 했다. 지금은 당구 선수로 활동한다. 그것도 시 대표 장애인 선수로. 치료 덕인지 실명 직전에서 병의 진행이 멈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쉰이 넘어가면서 가시처럼 마른 몸에 살집이 붙어 후덕해졌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자신감이 넘쳤다. 무얼 하든 밝고 환해서 보기에도 좋았다. 까칠한 성격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런 그가 이번에 시각 장애인 협회 회장이 되었다. 상대 후보를 두 배 차이로 눌렀다고 했다. 몇 년 동안 사무국장 일을 하면서 회원들에게 점수를 딴 모양이다. 체육관에서 벌어진 성대한 취임식에 나와 막냇동생은 참석하지 못했다.
재작년까지 동료로 근무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양◯◯ 회장님의 당선을 축하드려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다. 자신의 엄마가 시각 장애인으로 센터에 규칙적으로 다니기에 오래 전부터 동생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따뜻하게 맞아 주고, 행여 손이 빠진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잘 챙겨서 이번에 동생이 될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엄마가 맘을 많이 졸이더라고 그녀가 말했다.
1월 말, 엄마와 취임식에 다녀온 그녀가 제주도에 있는 내게 다시 전화했다. “완전 닮았어요. 키 크고 잘생긴 ‘리틀 양선례’던걸요. 깜짝 놀랐어요. 동생과 닮았다는 말, 많이 들었지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칭찬일까, 욕일까. 그래도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은 걸 보면 칭찬이 분명하다. 역경을 이겨 내고 도전하여 성취한 동생이 자랑스럽다. 시내 곳곳에 동생의 당선을 축하한다는 펼침막이 걸렸다. 왕자님이 비상하는 걸 보지 못하고 먼길 떠난 엄마가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
며칠이 지나 남동생이,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기부 팻말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보내 왔다. 지회장 동생을 둔 것도 아닌데 100만 원이나 기부금을 냈군. 그럼 나는 얼마를 내야 하지? 4년 임기인 지회장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호주머니 열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