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를 배우라
2024. 7. 28(주일낮예배) 야고보서 1:2-4
쌍거풀과 눈주름의 차이를 아는가? 쌍거풀은 돈주고 만드는 것이고, 눈주름은 돈주고 펴는 것이다. 그러면 터널과 동굴의 차이를 아는가? 터널은 계속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만,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캄캄하다. 그러므로 터널은 계속가야 하고, 동굴은 돌아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터널 안인가? 동굴 안인가? 지난 주 새벽기도 시간에 이기현 목사님이 유퀴즈에 나온 이야기를 하였다. 그 내용이 너무 감동이라 저도 그 자료를 찾아보았다. 유퀴즈에서 조세호가 죽기 전에 딱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라는 질문을 한다. 그 질문에 출연자가 대답하지 못하자 조세호는 그 질문을 유재석에게 한다. 그때 유재석은 가족을 포함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서 식사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이 다 돌아간 후에 유재석은 혼자 남아서 담배 한개피를 피겠다고 한다. 유재석은 담배를 끊었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그 담배를 깊이 마시겠다고 한다.
왜 유재석은 마지막 순간에 담배를 피우겠다고 하겠는가? 유재석은 무한도전에서 무한도전 종영 2주년 특집으로 텐트토크를 하였다. 그 토크에서 하하는 유재석은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그 말에 유재석은 나이가 들면서 체력도 떨어지고, 또 추격전을 할 때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앞사람을 잡기 위하여 아슬아슬하게 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또 담배도 끊었다고 이야기 한다. 유재석은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그렇게 피우고 싶은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다. 그랬던 유재석은 마지막 순간에 혼자 남았을 때 그렇게 피우고 싶었던 담배를 한개피 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유재석이 유재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터널을 지날 때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지만 참고 견디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인내하는 삶을 사는가?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순교를 앞두고 있는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10절을 말한다. 먼저 그 부분을 읽기 바란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데마는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골로새서를 쓸 때에 바울과 함께하였던 동역자이다. 바울이 감옥에 갇혔으니 데마도 감옥에 갇힐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데마는 아량곳하지 않고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돕고, 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를 쓰면서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골 4:14) 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데마는 로마감옥에 갇혀서 순교를 앞두고 있는 바울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데마의 떠남을 바울은 또 다른 사명이 있어서 라고 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한다.
왜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겠는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데살로니가가 데마의 ①고향이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바울과 함께 하였던 데마는 피곤하고 지쳐서 고향을 돌아갔을 것이다는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지역에 있는 ②미항이고, 또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를 가지고 있는 ③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항구에서 각종 진귀한 물건들이 데살로니가 항구를 통하여 들어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진귀한 물건을 사고, 또 팔기 위하여 몰려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돈을 벌수 있고, 또 그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데살로니가였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는 사람이 놀기에도 가장 좋았던 곳이었다. 데마는 그렇게 놀리 가장 좋은 곳인 데살로니가로 갔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간 데마의 삶이 안타깝지 않는가? 지난 주에 저에게 한 통의 카톡이 왔다. 그 중의 내용 일부만 읽어 드리고 싶다.
요즘 잘 지내시죠? 저는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책도 읽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 목사님이 저에게 해 주신 말들이 힘들 때마다 버팀이 됩니다. 특히 쉬운 길 말고 바른 길을 걸으라는 말씀을 매번 상기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유혹이나 힘든 일이 있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시간이 조금 걸려도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게 기도 많이 해 주세요. 목사님이 해 주신 주옥같은 말들 한마디 덕에 버틸 수 있는 것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저에게 카톡을 보낸 이 친구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쉽고 편한 길에 대한 유혹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쉬운 길 말고 바른 길을 걸으라는 제가 한 말을 기억하여서 힘들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멋있지 않는가? 그런데 바울과 함께하였던 데마는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쉬운 길을 선택한 데마를 향하여 세상은 잘했다 뭐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해! 하고 위로해 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쉬운 길을 택한 데마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가진다.
왜 우리는 안타까워 하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니 예수님은 누가복음 21장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절)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말세에 지진과 기근의 고통이 있고, 또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는 낙심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돌아서라고 말씀하지 않고, 인내하라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쉬운 길을 택하라고 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인내로 내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고 말한다. 여기서 시험은 나를 넘어뜨리기 위한 유혹(temptation)인지? 나의 신앙의 성숙을 위한 테스트(test)인지, 또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고통인 시련(trial)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는가? 아침을 먹기 위하여 마지막 남은 빵에 잼을 바르다가 빵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빵이 하필이면 잼을 바르던 면이 바닥으로 떨어져서 빵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굶고 출근하는데 그 날따라 신호마다 다 걸려서 결국 회사에 지각을 하였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 앉아서 어제 하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되면서 모든 자료가 다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오전 중으로 제출해야 하는 기안이 펑크나 버렸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야고보가 말하는 여러가지 시험은 이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살 수 없어 그들은 흩어졌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지역으로 이사를 하여 배고픔의 고통을 가져야 했다. 그런데 지금 배고픈 것도 고통이지만, 타지역에서 취업을 할 수 없었기에 언제까지 이렇게 배고픈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배고픔에 늘 울던 아들이 갑자기 몸이 아픈 것이다. 온 몸이 불덩이와 같이 뜨거운데 그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또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어서 밤새 울었다. 그런데 기뻐하라는 것이다.
왜 기뻐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야고보의 설명을 함께 읽기 바란다.
(약 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는 이 모든 시험을 믿음의 시련이다고 말한다. 시련(도키미온)은 칼을 만들 때 풀무불 속에 넣었다가 또 망치로 쳐서 강한 철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아니 대장장이가 금을 불 속에 넣어서 단련시켜 정금을 만들어 가는 것이 시련이다.
무슨 말인가? 이러한 시련을 통하여 철은 더 철다워지고, 금은 더 온전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시련이다.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시험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시련을 통하여 더욱 온전하여져 간다는 것이다.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이 더 온전해 지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인내가 있는가? 소통전문가 김창옥교수가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서 이런 말을 한다. 남편들에게 어떤 아내가 제일 싫은가? 하고 물어 보았다. 그때 남편들은 요리를 못하는 아내, 돈을 못버는 아내이다고 대답하지 않고,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아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김창옥 교수는 아내들이 많이 보인 곳에서 왜 남편에게 기분 나쁘게 말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아내들은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성격 자체가 한번 아닌 것은 아닌 사람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가 성격대로 바른 말을 다 한 결과는 무엇인가? 인내라는 단어에는 참는다는 의미와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만약 아내가 인내를 배웠다면 남편에게 자기 성격대로 말하지 않고 참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편이 자기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게 인내할 수 있는 여인을 잠언기자는 현숙한 여인이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내로서 현숙함을 나타내고 있는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최종원 교수의 인생교훈이 있다. 여러분은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는지 대답해 보기 바란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마라
줄까 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마라
갈까 말까 할 때는 안가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최중원 교수는 가라고 한다.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는 것이 훨씬 더 결정하기가 쉽다. 그런데 최종원 교수는 먹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최종원 교수는 어려운 것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왜 최종원 교수는 어려운 것을 선택하라고 하였겠는가? 요즘 우리 세대는 쉬운 길, 편안할 길을 찾다가 인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신앙생활도 쉬운 길만 선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편안하고 즐거운 신앙생활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생활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더 온전해져가고 있는가? 우리가 주님을 다시 만날 때 내어 드릴 믿음이 더 순전하고, 온전해야 하는데 편안함을 추구하는 우리의 신앙은 결국 단련되지 못한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저와 여러분은 어렵고 힘든 길을 인내하며 걸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터널을 지나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