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의 구분
공성을 기초로 하여 보리심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한다. 비록 샨띠데바가 BCA에서 보리심에 대한 종합적인 정의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고, 더욱이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장기판의 말과 같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사용하여 통일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장기판의 말을 움직이면서 의도하고 있는 전략, 즉 BCA의 저술 의도를 이해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다. '두 가지 진리설'을 통해 보았듯이, 그는 승의와 세속이 만나는 지점에서 보리심을 기술하고 있다. 모든 법의 무자성성을 표방하는 승의의 공성 사상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보리심 사상을 세우고, 그 보리심 사상을 자비에 의한 세속의 지평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 진리에 의지하는 이유는 지(知)를 초월한 승의적 진리로서의 공성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9장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소득(有所得)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나는 어떻게 공성을 가르칠 것인가. 세속에 의지하여 무소득(無所得)의 입장으로 복덕의 자량을 주의 깊게 [가르칠 것이다]."
샨띠데바는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으로 분별하여 집착하는 사람들, 즉 유소득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구제를 위하여 세속적 진리의 언설(vyavahāra)을 사용해서 어떤 것도 분별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소득의 자세로 지혜와 자비, 그리고 보리심에 대한 가르침을 편다. 그가 BCA라는 장기판에서 말을 움직이듯이 구사하는 보리심이라는 용어를 따라가면서, 보리심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보자.
1)두 종류의 보리심
샨띠데바는 BCA 전반에 걸쳐 보리심에 대해 기술하고 있지만, 보리심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내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다른 대승경전과 달리 보살의 계위(bhūmi), 즉 보살이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10지(十地) 사상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의 수행 계위를 설한 것이고, 통상적으로 발보리심에 의해서 제1지(환희지)에 들어가고 제10지(법운지)로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는 보살의 계위를 BCA 4장 게송11에서 단 한 차례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그 대신, 보리심을 두 종류로 분류하여 그 나름의 차이를 밝혀 보살의 단계를 구분 짓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요약하면, 이 보리심은 두 종류임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을 원하는 마음(願菩提心) 과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마음](行菩提心)이다."
이러한 구분은 이어지는 게송에 나타난 비유를 통해 보다 더 명확해진다.
"가려고 원하는 것(gantukāma)과 [실제로] 가는 것(gantu)의 구분이 인정되는 것처럼, 현자는 이 각각의 구분을 순차적으로 알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고자 원하는 원보리심(bodhi-praņidhi-citta)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붓다가 되고자 최초로 서원하는 형식의 마음이다." 이것은 최초의 발심(prathama-cittotpāda) 혹은 발보리심의 의미가 강하다. 그렇지만 비록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강한 열망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원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실행하지 않는 보리심이다. 반면에 행보리심(bodhi-prasthāna-citta)은 일체중생을 돕기 위해 깨달음을 얻고자 바라밀 수행으로 실제로 나아가는 보리심이다. 이러한 분류는 대승 문헌에 등장하는 āśaya(생각)와 prayoga(실행)의 관계와 유사하다. 깨달음과 해탈에 이르는 길로 대변되는 불교는 이 길을 실제로 걷는 수행자와 단순히 길을 걷고자 하는 생각에 머무는 수행자로 나뉜다. 그래서 타가미(田上)는 원보리심을 정적(靜的)·소극적 보리 심으로, 행보리심을 동적(動的)·적극적 보리심으로 구분한다. 그렇다면 두 종류의 보리심에는 어떤 결과의 차이가 생기는가? 샨띠데바는 깨달음을 원하는 것으로 그치는 원보리심의 경우도 그 나름의 과보가 있다고 말한다.
"깨달음을 원하는 마음만으로도 윤회계에서 우세한 과보를 [초래한다.]"
비록 실행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보리심이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공덕과 생긴다는 것이다. 샨띠데바는 Śs에서 Maitreyavimokṣa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남자여, 흠이 난 금강석일지라도 금강석으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금으로 된 장신구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것은 모든 결핍을 몰아낸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원하는 마음이 비록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성문과 독각의 황금과 같은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며 보리심이라는 이름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윤회의 고통을 막아준다."
하지만 샨띠데바는 원보리심의 과보는 행보리심에 미치지 못하고, 게다가 원보리심만으로는 중생을 온전히 구제할 수 없다는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실행에 들어가는 마음(행보리심)을 지니는 것과 같이 지속적인 복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샨띠데바는 마음으로만 깨달음을 원하는 것으로 그칠 경우를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만일 이와 같이 서원하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성취하지 않으면, 이 모두를 기만하는 것이니 나에게 무슨 길이 생길 것인가."
비록 원보리심만으로도 뛰어난 과보가 생길지라도 윤회의 길속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으로 보리행을 실천할 때에만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해방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BCA의 번역자 중의 하나인 샤르마(Sharma)는 서원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깨달음을 얻는 비밀은 실천의 측면에 있는 것이지 단순히 경건한 소망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샨띠데바는 보살의 계위에 대해서 그의 BCA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쁘라즈냐까라마띠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티벳의 논사들은 샨띠데바의 두 종류 보리심을 일종의 단계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하위의 단계와 상위의 단계로 구분 짓는다. 다르기야(Dargyay)는 티벳의 철학자들 가운데 겔룩빠에 속하는 쫑까빠와 닝마빠에 속하는 미팜(Mi pham, 1846∼1912년)을 선택하여 두 종류의 보리심과 수행의 계위를 연결시킨다.
쫑까빠는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의 두 보리심 사이에는 깨달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의 유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원보리심의 경우를 그는 첫 번째 단계의 보리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의 보리심은 '기원'(praņidhi)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에 두 번째 단계의 보리심인 행보리심은 원보리심과 동일한 정신적 태도를 보이지만, 기원을 성취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단계이다.
미팜은 두 종류의 보리심의 차이는 6바라밀의 실천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는 6바라밀의 성취 없이는 보리심의 발전도 없다고 단적으로 말한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마음을 일으켰을 때, 즉 원보리심의 단계에서는 수행자는 아직 6바라밀의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한 상태이다. 수행자는 다만 6바라밀의 실현을 열망하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팜은 원보리심의 상태를 하위의 단계로 이해한다. 수행자는 원 보리심과 행보리심의 상호연관을 깊이 숙고하면서 6바라밀을 하나씩 실천해야만 한다. 그때 비로소 행보리심의 단계로 접어들고, 마침내 불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행보리심과 6바라밀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데, 6바라밀에 대해서는 본고 7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입보리행론』의 보리심론 연구/ 이영석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