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염불의 융합
2)선정쌍수
선정쌍수(禪淨雙修)라는 것은 선(禪)과 정토(淨土) 신앙을 함께 닦는 것으로 각각의 특징이 일체가 되어서로 미비한 부분이 보완될 수 있다. 수행에만 전념하는 선수행자는 왕생이라는 인연의 염불을 쌍수함으로써 내면의 자비심을 증장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선정쌍수로 인하여 정력(定力)을 증장시키고, 산란심이 사라지며 도력이 충만한 염불행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선과 염불의 피상적인 융합보다 교학과 사상적인 내면의 통찰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중국 당대에 정토종이 성행하며 선종에서도 염불을 수행 방편으로 겸수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한 선두주자가 바로 자민혜일(慈愍慧日)이며, 본격적인 선정쌍수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의정(義淨, 635~713)의 인도 순례에 감화되어, 702년에 스물셋의 나이로 해로를 따라 인도로 구법행을 떠난다. 그 후 열여덟 해 동안 약 일흔 나라를 순례하고 719년 육로로 장안에 돌아와, 현종에게 불상과 범본 경전을 진상하고 자민삼장(慈愍三藏)의 시호를 받았다.
헤원이나 선도가 중국에서 정토를 배우고 수행했던 것에 비해 혜일은 오래도록 인도를 순례하며 선진 불교를 배워 교리에 해박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선과 염불을 함께 닦고 종합수행을 지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저서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고 약간의 단편만 인용되고 있다.
만약 능히 회향하여 정토에 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서방정토를 향하여 아미타불로 마음을 묶어 두라. 염염상속하여 명호를 부르며 행주좌와에 항상 칭념하라. 겸하여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관무량수경과 아미타경을 매일 한 편씩 독 송하라. 술‧고기‧오신채를 죽음으로 기약하여 끊고 먹지 말고, 약이라 해도 허용하지 말라. 재계(齋戒)를 받들어 지녀 삼업을 청정히 하고 염불과 송경(誦經)하며 회향하여, 상품상생을 서원한다면 목숨을 마칠 때에 결정코 정토에 왕생하리라.
혜일의 법문은 자상하면서도 단호하기 그지없다. 인도에서 오래 수행한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철저히 재계(齋戒)하고 점차적으로 수행해 가는 면모를 알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서방정토 아미타불의 칭명염불을 설한다. 둘째, 관세음보살도 칭명하며 정토 경전의 독송을 병행한다. 셋째,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다. 넷째, 내세에 상품상생을 서원하는 것이다.
이 책의 다른 제목이 『자비집(慈悲集)』이며,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 우러나는 법문이다. 『반주찬(般舟讚)』이라는 게송도 있는데, 반주삼매의 견불(見佛)을 권장한 것으로 보인다. 또 염불과 독경의 일체 정토행이 선(禪)이라 하여 선정일치를 주장하였고, 선(禪)‧교(敎)‧율(律)의 제행겸수(諸行兼修)도 설함으로써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 당말 이후에는 선종이 융성하였으나, 칭명염불도 섭수하며 선정융합의 경향으로 가게 되었다. 이는 정토 신앙과 선종의 수행이 겸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혜일의 사상을 이어받아 선정쌍수의 전통을 확립한 것은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이다. 연수는 선종오가인 법안종의 제삼조사로, 『종경록』 100권과 『만선동귀집』 3권의 저술로 유명하다. 전자가 제종융합(諸宗融合)의 성격이라면, 후자는 제행겸수를 설한 저술이다. 연수가 호남성 영명현에서 수행할 때는 1700명의 제자가 따랐으며, 항상 대중에게 보살계를 주며 공덕을 회향하여 자씨하생(慈氏下生)으로 불렸다. 고려에도 그의 명성이 전해졌으므로 광종(재위, 949~975)이 연수를 흠모하여 사신을 보내 예배토록 하였으며, 젊은 수행자 36명을 보내 불법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처럼 연수는 고려 불교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 전체에도 그 사상의 편린이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연수의 사상이 제행겸수‧선정일치의 수행이었으므로, 한국불교의 전통 역시 통불교적인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북송대 운문종의 천의의회(天衣義懷, 993~1064), 임제종의 사심오신(死心悟新, 1044~1115), 조동종의 진헐청료(眞歇淸了, 1088~1151)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 선종과 천태종 등의 교의와 정토신앙 간의 융합으로 유심정토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 중심인물이 연수이며, "유심정토라는 것은 마음을 깨우쳐야 비로소 왕생할 수 있다. 경[『여래부사의경계경』]에 이르길, '삼세의 제불이 있는 곳이 없으니, 오직 자기 마음에 의지하라'."라고 하였다. 연수는 『만선동귀집』에서 아래와 같이 설 한다.
성교(聖敎)에서 설한 바른 선정이란 마음을 한 곳에 두고, 염염상속하여 혼침과 도거를 여의고 평등하게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만약 졸음이 몰려와 장애가 되면 곧, 마땅히 경책하여 염불 송경하고 예배행도(禮拜行道)하며, 강경설법(講經說法)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등, 만행(萬行)을 폐하지 말고 닦은바 행업(行業)을 회향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해야 한다.
위와 같이 연수는 혜일의 법문을 인용하여 근본 선정의 원리를 설하고 있다. 즉, 마음을 한 곳에 두는 것은 심일경성(心一境性, cittaikâgratā)이며, 염염상속(念念相續, pratikṣaṇam-sa ṃtāna)하여 번뇌가 제거되는 평등심은 제4선의 사념(捨念, upekṣā-smṛti)에 해당한다. 또 제행겸수와 선정일치는 전불교의 통합에도 기여하며, 선정의 장애는 예배‧강경‧설법‧교화 등의 만행으로 회향하여 정토왕생을 서원한다. 그 역시 염불과 함께 제행의 구족함을 설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선(禪)은 상근기에 해당하고, 정토는 중‧하근기의 가르침이라 설한다. 『종경록』에서 연수는 "어떻게 가르침 가운데 다시 염불법을 세운다고 하는가? 답하되, 단지 자기 마음이 부처인줄 믿지 않고 밖을 향해 구한다. 만약 중‧하근기는 방편으로 불타의 색신을 관하게 하고, 거친 마음을 묶어 밖으로부터 안이 맑아져 점차로 자기 마음을 깨닫는다. 만약 상근기면 다만 실상(實相)의 몸을 관하게 하여 부처를 관함이 그러하다."라고 설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선사들의 기본적 시각이며, 그에 관한 한 연수도 예외는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인용문을 사종염불로 보면 칭명을 제외한 관상(觀像)과 실상(實相)염불에 해당한다. 중하근기를 칭명이 아닌 관법(觀法)에 배당한 것은 선(禪)의 우위에서 정토를 섭수한 것이다. 원래의 염(念)은 칭명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관하는 것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단지 차이를 말하자면 색신을 관하느냐, 실상을 관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편 연수는 선(禪)과 정토를 네 가지로 판별하여 「참선염불사요간(參禪念佛四料揀)」을 아래에 설하는데, 이것은 원‧명대에 융합 불교가 성행하는 데 중요한 전거가 된다.
첫째, 선(禪)은 있고 정토가 없으면 열 사람 중에 아홉은 잘못된다. 마장(魔障)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 잠깐 사이 휩쓸려 버린다.… 둘째, 선(禪)은 없고 정토가 있으면 만 사람이 닦아서 만 사람 모두 가니, 다만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어찌 깨치지 못할까 근심하리.… 셋째, 선(禪)도 있고 정토도 있으면 마치 뿔 달린 호랑이처럼, 현세에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미래에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다.… 넷째, 선(禪)도 없고 정토도 없으면 쇠침대에 구리 기둥 같으니, 만겁(萬劫)이 지나고 천생(千生)을 거치더라도 믿고 의지할 것이 없다.
위의 법문은 선(禪)과 정토를 함께 닦으면 최고의 공덕이 된다고 설한다. 이것은 선가(禪家)의 수행이 바르지 못한 면도 영향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선가에는 겉으로만 수행하고 마음을 깨닫지 못하며, 헛되게 스승 노릇하는 폐해에 대한 비판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요간(四料揀)의 첫째는 선(禪)만 있고 정토 염불이 없으면, 대부분 잘못된 경계에 현혹되어 마장에 떨어진다. 즉, 선정 가운데 무슨 경계가 나타나면 거기에 빠져 잘못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선(禪)은 없고 정토 염불만 있으면, 모든 사람이 닦아서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게 된다. 말하자면 왕생을 발원하여 불력(佛力)으로 속히 불퇴위에 오른다. 셋째는 선(禪)도 있고 정토 염불도 있으면, 호랑이가 뿔을 단 것처럼 현세에 스승이 되고 내세에 불조(佛祖)가 된다. 연수가 권장하는 선정쌍수의 공덕으로 많은 이익이 있음을 강조한다. 넷째는 선(禪)도 없고 정토 염불도 없으면, 쇠침대에 구리 기둥처럼 누구도 의지할 곳이 없다고 설한다. 또 불법의 이치도 밝히지 않고 왕생도 발원하지 않으니, 영겁토록 생사에 윤회하게 된다고 덧붙인다. 이 네 가지 판별은 잘못된 수행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대책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원대 중봉명본(中峰明本, 1263~1323), 명말 감산덕청(憨山德淸, 1546~1623)‧운서주굉‧영각원현(永覺元賢, 1578~1657)‧우익지욱(蕅益智旭, 1599~1655) 등이 선정쌍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선정(禪淨)의 이념적 통합은 송대 이후 일반적 경향으로 이어졌다.
또한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의 '약심관불(約心觀佛)' 사상도 마음으로 부처를 관함을 천태 교리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는 고려 후기 원묘요세(圓妙了世, 1163~1245)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관무량수경』의 '마음이 곧 부처'이므로 실상을 관하는 것이 된다. 즉, 밖에 있는 부처를 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부처를 관하는 실상관이다. 말하자면 마음과 관법이 융합된 수행으로 '즉심염불'이고 '관심염불'이라 할 수 있다.
<『금강심론』 수행론 연구/ 박기남(普圓)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