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계 선비족 연(燕)나라 모미추(慕味鄒)의 신라정복
서기
283년, 선비(鮮卑) 소속의 모용부에서 모용외(慕容휺)가 수령으로 떠오르더니 선비족 안의 강력한 세력인 단(段)족과 우문(宇文)족을 제압하고
제일의 세력집단이 되었다,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국호를 연(燕)이라 하고 왕위에 올랐을 때가 서기 337년으로
중국의
5호 16국 (중국북방의 다섯북방유목민족들이 지금의 북중국 일대를 차지)시대였다. 이렇게 모용씨 왕조(王朝)를 탄생시킨 모용황은 본격적으로 중원
쟁탈전에 뛰어들기 전에 부여족이 이끌고 있는 가우리(고구려)를 제압하고 제후국으로 복종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가우리(高句麗)는
부여족 중에서도 가장 용맹성이 뛰어난 맥족(貊族)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강국이었다. 몇 번씩이나 협상을 해보았지만 가우리가 신생 연(燕)나라에
무릎을 꿇을 리가 없었다. 결국 최후의 결전밖에 다른 대안이 없게 되었다.
서기 342년 8월, 고국원왕(斯由太王)은 모용황의
침입이 있을 것을 감지하고 가우리를 전시체제로 정비하고 그의 수도를 펴라[平壤-현재의 요양]로부터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겼다. 환도성은 전쟁을
위하여 세워 놓은 천연의 방어요새였다. 태왕의 명령을 받은 가우리의 정예병사들이 무려 6만명이나 환도성에 집결하여 모용황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서기
342년 11월, 모용황은 대군을 몰아 침략을 시작했다. 침공군은 총 5만 5천명이었다. 가우리보다 적은 군대로 큰 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이
정도의 군세라면 환도성에서 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침략군을 맞아 결전을 벌였어야 했다. 그러나 사유태왕(斯由太王, 故國原太王)은
모용황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었다.
모용황은 침공군 5만 5천명 중에서 1만 5천명의 빠른 기병군을 선발하여 선봉군으로 삼았다. 이
병력을 다시 두 대로 나누어 장사(長史)와 왕우(王寓)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고 가우리의 북로(北路)를 따라 북도(北都) 신성(新城)을 향해
출동시켰다.
이때 가우리[高句麗]에는 3개의 서울이 있었는데 북경은 신성이고, 남경은 펴라[平羅, 平壤-지금의 요양], 그리고
중경(中京)은 환도(丸都)였다. 국경에 파견되어 있던 정탐꾼들은 곧 장사(長史)와 왕우(王寓)가 이끄는 침략군이 신성(新城)으로 향했음을
보고했다.
신성을 격파한 침략군은 멀리 북로(北路)를 타고 환도성(丸都城)으로 향했다. 한편 태왕의 아우 고무(高武)를 대장군으로
하는 가우리군은 어림군 1만 병력을 뒤에 남겨 태왕을 호위하도록 하고, 주력군 5만의 대병력이 출동하였다.
이윽고
침략군과 충돌한 가우리군은 일전에 침략군을 풍지박살 내며 승리하였다. 그러나 빠른 말(馬)로 무장한 침략군은 더 이상 가우리의 보기군단과 싸우려
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여 환도성으로 가려했다. 이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가우리군은 이들을 포위 섬멸하기 위하여 추격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꼼짝도 않고 대기하던 모용황의 주력군 4만은 가우리의 주력군이 선발대의 뒤를 쫓아 환도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갑자기 전속력을 다하여 환도성으로 달려들었다. 모용황의 작전에 가우리군은 완전히 농락당했던 것이다. 왕성을 수비하던
1만명의 가우리군은 질풍같이 달려드는 모용황의 침략군 본진과 마주치게 되었다.
전투는 삽시간에 끝났고 겁에 질린 사유태왕은 소수의 어림군만 데리고 단웅곡(斷熊谷)이란 깊은 산골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침략군의 선봉장
모여니(慕輿쵹)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태황의 모친 주씨와 왕비 그리고 백성 5만명을 포로로 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가우리의 주력군을 유인하며 멀리 환도성을 돌아 모용황의 본군과 합세하려던 침략군의 선발대는, 가우리 전국에서 뒤늦게 달려온 토벌군들에게
쫓기면서도 지금쯤 가우리의 환도성에 입성해 있을 모용황에게 가기 위하여 함경도의 험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가우리군의 강한 반격으로
모용황의 주력군은 벌써 본국으로 쫓겨가 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이미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된 선발군은 되돌아가기엔 너무나도 가우리 영토 깊숙이
들어와 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분산하여 모국으로 돌아가려 하다가는 가우리의 토벌대에게 각개격파 당하며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위기에 빠진 이들은 할 수 없이 추격군을
피하여 본국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점점 더 멀리 동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한편, 침략군을 추격하던 가우리군은 사유태왕(斯由太王)의
명령에 따라 황성 복구작업에 나서게 되고 또 다른 군사들은 모두 국경지대에 재배치 되었다. 어차피 침략군의 선발대가 제 나라로 돌아가려면
국경지대를 통과해야 하므로 국경만 철통같이 봉쇄해 놓으면 선발대는 가우리 국내에서 토벌 당하게 될 독 안에 든 쥐의
신세였다.
그러나 선발대는 가우리 군지도부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침략군의 선발대를 이끌고 있던 장수는
모미추(慕味鄒)로 생각된다. 전쟁 초기의 선발대는 분명 장사(長史), 왕우(王寓) 등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 수행 도중 전사하였거나
혹은 먼저 본대로 합류하는데 성공하였을지도 모른다.
삼국사기는 '왕우 등은 북로에서 싸우다 모두 패하여 죽었다.(會王寓帶戰於北道,
皆敗沒)'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려 1만 5천명의 날쌘 기병들이 모두 전멸 당하여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선발대는 모용황 군대 중에서도 가장 날쌘 병사들로서 모두가 기병대(騎兵隊)로만 조직되어 가우리[高句麗]의 주력군을 유인하여 도성(都城)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특수임무를 띠고 있는 부대였다. 그런 부대가 전멸 당했다고 한 기록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쨌든
신라 국경에 근접한 지점까지 도착해온 이들 선발대의 장군은 모미추(慕味鄒)였다. 삼국사기는 미조(味照)라 했고 삼국유사는 미추(味鄒)라고 쓰고
일명 미조(未租)라고도 썼다. 또 다시 소리말을 뜻글로 기록하려는 모순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다.
모미추의 성씨가
모(慕)씨였을 이유는 그가 실제적으로 경주 김씨를 일으킨 최초의 인물이고 그의 후손인 법흥왕(法興王) 때에 이르러 모씨(慕氏)성을 김(金)씨로
바꾸었음이 최근 장한식씨의 연구 결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미추는 모용씨(慕容氏) 가문의 귀족(貴族)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이번
전쟁에도 장군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지금은 적어도 1만명이 넘는 선발대를 인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선발대가 실라[新羅] 국경에
도착하고 보니 때마침 실라는 이서고국(伊西高國: 淸道)의 침략을 받아 수도 금성(金城)을 방어하느라고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당시 실라는 훗날 백제를 멸망시킬 만큼의 강국이 아닌 작고 초라한 부족국가의 하나였다. 그 동안 가야연맹의 승인을 받아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지방의 보잘 것 없는 세력집단인 이서고국 정도의 침략에도 서울인 금성까지 쫓기며 허덕이고 있던 중이었다.
현지의 사정을
알게 된 모미추(慕味鄒) 장군은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먼저 금성 공격에 열중이던 이서고국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아직 재래식 군사장비로
일관하고 있던 실라나 이서고국 병사들은 북방 대륙의 현대적 병기로 무장한 개마무사단
(鎧馬武士團)의 위용에 기가 질려 단번에
압도당하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금성을 위기에서 구하고 성내의 환영을 받으며 당당하게 금성으로 입성한 모미추군은 실라 왕실의 허약한 모습을
간파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아예 왕족들을 축출하고 말았다.
이때 실라는 석씨왕조(昔氏王朝)가 이끌고 있었는데 왕은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이었다. 본 저자가 당시의 왕을 유례 이사금으로 보는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모미추군의 활약상
때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전하기를 '실라 제14대 유례 이사금 14년에 이서고국(伊西高國)이
쳐들어 와 수도 금성을 에워쌌다. 아군이 이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곤경에 처해있을 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적군들을 격파하였다.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군사들이 모두 댓잎을 머리에 꽂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댓잎 수만 개가 죽장릉(竹長陵: 味鄒王陵)에 쌓여 있더라.'라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그들 이상한 군대가 바로 모미추왕의 군대였음이 확실하게 증명된 셈이다.
삼국사기는
계속하여 '유례 이사금 15년 2월에 서울에 크게 안개가 끼어서 옆 사람도 분간할 수가 없었는데, 5일 만에야 날이 개었다. 그리고 12월에
왕이 돌아가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확실한 사건기록이다. 이서고국군을 격파하고 금성을 구해냈던 모미추는 불과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다음해 2월, 실라왕실의 허약함을 알고 혁명군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서울 금성에서는 적군과 아군을 구별할 수 없는 대 혼란이 일어났고, 이
싸움에 패한 왕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때 왕권을 빼앗긴 석씨들은 대거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 우리는 그 동안 초기 실라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실라[新羅]는 처음부터 밝[朴]씨, 석(昔)씨, 그리고 (金)씨 등 3씨의 성씨를 가진 집단들이 서로 사이좋게 돌아가며 왕권을
주고받는 인류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환상적인 공화제를 이룩한 문명국가라 배웠다.
조금이라도 정권의 힘이 무엇인지 그 기초적인
상식만 가진 사람이라면 위와 같은 역사의 기록을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그 절대권력을 차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웠던가?.... 본서는 비록 이런 이야기들이 정사(正史)라고 인정받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그 기록이 함축하고 있는 사건의
본체를 파헤쳐 밝히고 정리하여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라의 역사는 사실상 3개의 전혀 다른
씨족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3개의 독립 왕조들을 "실라"라고 하는 큰 우산 속에 넣어 마치 하나의 나라가 장구한 역사를 장식하며 존재해 온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다.
실라 왕조의 제 1기는 밝혁거세[朴赫居世] 거서칸
왕조(王朝)이다. 이때의 국명은 서라불로서 초기엔 지금의 서울지구에 있었다가 주위의 압력에 밀려 차츰 남쪽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 때까지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등의 무인(巫人)들이 집단으로 이끌었는데, 결국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경주지역에 도착하여 선주 세력인 큰무라와 그들 일족의 운명을 걸고 벌인 알천전투(閼川戰鬪) 끝에
큰무라와 공존하기로 한 협상에 성공하고 경주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실라의 제 2기는
석씨왕조(昔氏王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석씨들은 큰무라(健牟羅)족들로서 경주지역을 선점하고 있었는데도 뒤늦게 도착한 밝씨 집단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차츰 일족의 단결을 도모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을 내세워 밝씨 아달라왕(阿達羅王)을
축출하고 석씨왕조를 일으켰다. 한 개의 왕조(王朝)라 하면 적어도 수대에 걸친 왕위의 계승과 더불어 수십 년 이상의 독점적인 정권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실라 제 3기로 김씨왕조(金氏王朝)를 들 수 있다. 이미 앞에서
간단히 들여다 본 것처럼 김씨들은 원래 선비(鮮卑)족에 속해있던 훈족(匈奴-風夷) 계열의 집단이다.
그들의 성씨는 모용(慕容)씨 혹은
모요(慕輿)씨 들인데 이들은 다같이 모씨를 지칭하는 것이다. 원래 두 자였던 성씨가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한 글자 성(姓)인 "모"씨가 되었는데
募, 慕, 毛, 牟 등은 모두가 모씨를 가리키고 있다.
모씨왕조는
법흥왕 때 이르러 왕의 성씨를 김(金)씨로 바꿨다. 삼국사기를 보면 왕의 성씨를 모씨(募氏) 이름을 태(泰)라고 분명히 밝힌 후, 왕의 휘(諱:
이름)는 원종(原宗)이라 했다.
한편 중국의 양서(梁書)에는 모진(募秦)으로, 남사(南史)에는 모태(募泰)로 적고 있고
통전(通典)에는 모진의 성씨를 募(모을 모)자로 쓰는 것은 틀렸고 慕(사모할 모)자로 써야 옳다고 주석까지 달고 있다. 이로써 실라 김씨들의
본래의 성씨들이 모용(慕容)씨의 모(慕)자임이 확실히 증명되었다.
이제 실라[新羅]라고 하는 왕국을 정복하고 왕권을 쟁취한
모씨(慕氏)들은 고향 땅인 선비(鮮卑)지역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실라의 왕조를 지키기로 결심한다. 이리하여 옛 성씨인 모(慕)씨를 버리고
새로운 金씨를 성씨로 택하게 된다. 이것이 신라 김씨의 탄생 배경이다.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한반도 남쪽으로 들어온 선비족 모용씨집단은 석씨왕조를 몰아내고 기존 박씨족등 서라벌(사로국)국의 기존세력을 포섭,융화하여 신라로
발전했다.
법흥왕때
율령을 반포하고, 북방유목민의 풍습인 순장을 금지하는등 국가체제를 정비하면서 모용씨,모씨 성(姓)을 같은 흉노계로서 한때 중원을 지배했던 흉노의
왕실성씨인 김씨(金氏)로 개성(改姓)을 했던것이다. 그리고 역사서에는 신라에 먼저 들어와 있던 같은 흉노계 김일제의 후손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자신들의 뿌리를 흉노왕실의 후예인 김일제의 후손-김알지계로 삼았다.
첫댓글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는 차가운 아침이네요?.
오늘도 많이 춥다 합니다..따뜻한 옷으로 챙겨 입으시고 외출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