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적돌길 415
문화재 지정 [숭의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0호(1988.08.30 지정)
아래 현판은 숭의사에 걸려 있는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현판 액자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에 자리한 숭의사는 소주 가씨(蘇州賈氏)의 시조인 가유약, 가상, 가침 등의 삼대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사당이 건립된 연유를 살펴보면, 소주 가씨의 중시조인 가유약은 중국의 이름난 장군으로 임진왜란때 원군으로 들어와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는 가상, 가침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왜군과 싸우다가 부산에서 가유약과 가상은 전사하였다. 그 후 가침의 아들 4형제는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륙과 가까운 태안으로 왔다가 배편이 여의치 못하여 돌아 가지 못하고 그대로 태안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후손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조선 철종 2년(1851)에 숭의사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뜻깊은 건립배경으로 인하여 숭의사는 1988년 8월 30일 문화재자료 제300호로 지정되었다.
소주 가씨는 중국의 성씨로 본래 주나라 문왕의 자손인 당숙우(唐叔虞)의 아들 공명(公明)이 가백(賈伯)[낙양, 소주 일대를 통치하던 제후]에 봉해짐으로써 성을 가씨라 하였고 소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가씨 족보에도 본관을 소주로 하면서 입국 시조인 가유약(賈維鑰)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가유약은 명나라 신종 때 병부 상서를 지내다가 임진왜란(1592년) 때 계요안찰사(薊遼按察使)로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가 안주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귀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들어왔는데, 이때 아들인 유격장군 가상(賈祥)과 손자인 병부 종사관 가침(賈琛)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남원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시켰으나, 부산 동래에 이르러 가상은 전사하였고 아들을 구하려던 가유약도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가침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경상남도 울산시 서생진 도독동에 묘를 조성했다. 그 후 명군이 귀국할 때 묘를 두고 떠날 수 없다 하여 가침은 그대로 조선에 귀화했다. 얼마 후 가침의 아들인 가성(賈晟)이 중국에 돌아가기 위하여 태안반도 안흥항에 왔지만 귀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정착하게 되었다.(가침의 아들 4형제 가성,가호,가병,가수)
소주가씨 문중의 주요 인물로는 가행건(賈行健)이 있다. 가행건은 19세기 헌종 때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을 지냈고 철종 때에는 충청도 안흥량진 수군 병마첨절제사(安興梁鎭水軍兵馬僉節制使)를 역임했다. 가행건은 주민들이 추운 겨울에도 전복과 해삼을 공물로 내고 있음을 보고 조정에 탄원하여 이를 철폐시킨 일도 있었다. 이에 백성들은 고역을 덜어 준 가행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2충1효는 가유약 장군과 아들 가상 유격장군이 전쟁터에서 나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어 2충이 됐고, 그의 손자 가침은 조·부의 시신을 거두고 지켜 1효가 됐다.
이에 숙종 임금은 3대의 충효정신을 우암 송시열로 하여금 작성토록 한 현판액자를 하사했고, 철종 임금은 3대가 보여준 2충1효 정신을 영원히 기리고자 숭의사를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