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상)
분황사 모전석탑
경주 분황사는 울산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이어지는 7번국도에 연접해 있다.
낭산의 구황동쪽에서 7번 국도를 건너 서편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황룡사터와 연결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신라시대 궁성이었던 월성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황룡사와 담장을 하나 두었을 거리에 규모가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분황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이 향을 피우며 불심을 키우는 목탁소리가 이어지는 도반으로 남아 있다.
분황사는 황룡사와 쌍벽을 이루는 신라시대 유명사찰이었다.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거처하며 불법을 펼쳤던 도량으로 흔적이 산재해 있지만 복원의 손길은 요원하다.
경주에는 워낙 많은 역사문화유적이 남아 있어 하나하나 제대로 복원하는데 많은 예산과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여 역사가는 물론 후인들의 안타까움이 크다.
신라왕경 정비복원사업이 한창 진행되면서 연접한 황룡사에 대한 복원사업은 이제 진행되고 있지만 분황사에 대한 정비복원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고 있다.
원효대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호국사찰 분황사를 찾아가는 역사기행을 시작한다.
남쪽 감실에 세워진 돌부처
◆신라백성 위한 분황사
경주 분황사에 들어서면 사찰터 가운데 특이한 모형의 석탑이 일반적인 주택의 형상으로 우뚝 서 있다.
신라시대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아 올린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국보 제3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 634년에 건립된 신라시대 명찰 중의 명찰로 전해지고 있다.
전불시대 7가람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기도 하다.
신라시대 선승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다.
선덕여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전쟁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했다.
이러한 고심 끝에 불력으로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분황사를 건립하고 이어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기도 했던 것이다.
분황사는 지금도 특유한 구조로 주목받고 있는 모전석탑이 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약사여래입상은 보광전에 모셔져 있다.
솔거가 그려 기도의 효험이 많았다는 관음보살 그림과 설총이 아버지 원효의 뼈로 만든 원효의 소상(塑像)은 사라지고 없지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호국룡이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석조우물은 지금도 석탑 북쪽에 옛 모습을 가지고 남아 있다.
황룡사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분황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 화쟁국사비 등등의 유물들이 역사기행의 구미를 자극한다.
강고내말이 구리 30만6천700근으로 조성했다던 약사여래상이 있었다는 기록은 전하지만 그 불상은 없다.
모전석탑은 분황사가 건립될 당시 중국에 9층탑의 원형이 남아 있었던 것을 미루어 자장율사가 당에 유학할 때의 견문을 바탕으로 석탑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모전석탑은 국보 제30호로 지정돼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의 우물 속에서 20여구의 불상들이 출토됐다.
대부분 목이 달아난 채 몸체만 남은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남쪽 담벼락 옥외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다.
분황사와 관련된 전설들은 여러 가닥으로 전해지고 있다.
호국룡 이야기는 석정과 함께 다음에 소개하고 간단한 두 가지만 전한다.
신라시대 원효대사로부터 도를 배운 엄장이 죽자 그의 친구인 광덕이 엄장 부인의 미모에 혹했다.
광덕이 엄장부인에게 잠자리를 함께할 욕심을 전하자 엄장부인이 사람의 도리에 대해 엄하게 전달해 광덕이 부끄럽게 여기고 불도에 전념하게 됐다.
광덕은 나중에 그의 처와 함께 크게 깨달았다.
광덕을 깨우쳐준 광덕의 처는 관음보살의 응신으로 분황사의 노비였다고 전한다.
또 희망녀는 경덕왕 때 사람으로 한기리에 살았는데 아들이 다섯 살에 갑자기 눈이 멀어버렸다.
백약이 무효라 희망녀는 아이를 데리고 분황사 천수관음 앞에서 몇날 며칠을 노래를 부르며 기도를 올렸다.
그 효험인지 아이가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단다.
이 때 부른 노래가 향가로 전해졌다.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어 낸 원효대사
분황사의 원효대사 영정
분황사에서 화엄경을 설파한 원효는 617년 지금의 경산지방에서 6두품 신분으로 태어났다.
원효의 아버지는 중하위직 관리였다.
원효대사는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해 스승 없이 혼자 학문에 몰두하기도 했다.
일찍이 출가해 중이 되어 진골 출신인 8살 아래 의상과 10여년을 함께 수학하다 당나라로 유학길에 나섰다.
당나라 유학길 도중에 원효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신라로 되돌아 와 150여권의 저서를 지으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유명한 그의 저서다.
원효가 깨달은 바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의 필요를 느끼고, 당시 왕권을 장악하고 있던 무열왕 김춘추는 유교와 불교의 정치이념 정리에 대한 강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터에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통해 하나의 뜻을 이루었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염두에 두고 ‘자루 빠진 도끼에 대한 노래’를 퍼뜨리자 이에 대한 뜻을 알아차린 무열왕이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는 요석공주의 거처 요석궁으로 원효를 불러들여 설총을 낳게 했다는 해석이다.
요석공주는 무열왕 김춘추의 여동생이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통한 재정적 지원을 얻어 불법을 백성들에게 펼치고, 무열왕은 원효의 불법을 통한 절대적인 왕권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이념이 필요했던 마음이 통했던 것이다.
원효대사는 그가 요석공주를 얻기 위해 지어 부르게 했던 ‘누가 나에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어내리라’ 노랫말을 설총을 낳아 실현했다.
원효대사는 파계하면서 설총을 낳고 환속해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일반신분의 백성들과 어울리고 기생과의 만남도 가지면서 서민 속에서 불법을 전파했다.
원효대사의 흔적은 전국 방방곡곡에 남아 있다.
지금은 경주 덕동댐으로 수몰된 지역 고선사에서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밀양의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때 원효가 수도하면서 지은 ‘죽림사’를 개명한 사찰이다.
진평왕 때에는 포항의 오어사에서 수학하며 남긴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공주 소요산과 설악산 등등 그의 행적을 제대로 알아보려면 책으로 써도 모자랄 정도라 하겠다.
특히 분황사에서 그가 남긴 ‘화엄경소’는 불경을 쉽게 해석해 풀어 쓴 책으로 화엄경을 창출한 스님으로 이름을 남기게 했다.
원효대사가 신문왕 6년 686년 칠십의 일기로 혈사(穴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원효가 죽자 설총은 부친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으로 진용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며 예불을 올렸다.
설총이 예불을 올릴 때 원효의 소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원효의 소상을 고상(顧像)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고려 충렬왕 때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다.
◆화쟁국사비
분황사의 모전석탑 바로 옆에 비석은 없고 비석을 세웠던 대좌가 남아 있다.
고려 숙종은 원효대사는 동방의 성인인데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아 애석하다면서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우게 했다.
추사 김정희가 비석을 받쳤던 비대를 절 근처에서 발견하고 이를 확인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대석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는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비대석은 직육면체로 낮게 조성돼 있다.
윗부분에는 비석을 세웠던 홈이 깊게 분명하게 패여 있다.
화쟁국사 비석좌대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모전석탑은 자장율사가 귀국해 건립했다는 설이 있다.
또 선덕여왕이 절을 창건할 때 함께 건립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탑은 안산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아 올렸다.
첨성대를 세운 아찬 석오원의 감독으로 건립되었다.
이 탑은 양식이 특이하다.
높이 1m 정도의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탑신을 쌓아 올렸다.
한 변의 길이가 약 6.6m에 높이 약 4m의 제1탑신이 있고 2층과 3층이 있다.
9층탑이었다고 하지만 탑 전체의 균형과 현존하는 3층까지의 체감율로 미루어 9층탑이었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인왕상
현대 탑은 일제시대에 수리를 하면서 원형을 보존하지 못한 채 마무리해 당시 남은 석재들과 돌벽돌을 방치해 지금도 불전 옆에 쌓아두고 있다.
넓은 기단의 네 귀퉁이에 돌로 만든 사자와 물개를 배치했다.
내륙쪽으로는 사자를 앉히고 동해를 향한 동남쪽은 물개조각상을 앉힌 것도 특이하다.
1층 탑신 네면에는 감실이 있고 돌문을 달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설치했다.
감실에 안치된 불상은 후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각 감실 좌우에 화강암으로 조각된 인왕상이 2구씩 세워져 있다.
이 인왕상들은 삼국시대 조각을 대표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일제시대에 탑을 수리하면서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장치로 보이는 석함이 나왔다.
석함에는 부인들의 소지품인 가위와 금과 은으로 만든 바늘, 실패꾸리, 금으로 만든 방울, 향목 등이 나왔다.
이를 선덕여왕의 소지품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또 고려시대 통용되었던 숭녕통보와 상평오수 등이 출토돼 고려시대에 크게 수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아올린 석탑으로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9층석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지배적인 학계의 정설이다.
우람한 사자상, 호신석으로 물개상을 앉힌 것이 특이하며 탑의 몸돌에 감실을 두어 부처를 안치해 석문을 달고 또 입구에서 금강역사가 이를 지키게 배치한 형태가 특이하다.
역사를 기행하는 이들의 눈을 자꾸 번뜩이게 한다
첫댓글 아 옛날이여......
150여 권의 책을 썼지만 한 권 쓸데없느니....
다시 책 속에 파묻혀야 하나........... 사는게 갈등 속이로다.............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