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평
이육사가 레닌주의자였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레닌의 탄생일을 기해 격문을 뿌렸고, 또 “레닌주의철학의 임무”라는 글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 글은 유실되었다.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뿐만 아니라, 이육사는 좌파계열의 독립운동에, 그중에서도 무력투쟁에 깊이 가담한 사람이었다. 순국하기 전 해에는 중국에서 무기를 들여올 계획까지 세웠었다. 그밖에도 동생 이원조는 월북하여서 고위간부로서 이른바 사회주의문화운동의 일선에 있었다. 후에는 박헌영과 얽혀서 숙청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원조의 비평은 선집이 출판되어 있는데, 읽어볼 생각이다.
이육사의 문학, 기호, 영혼, 전복과 관련한 글의 구현은 다음의 과제로 남긴다.
이육사 생애연보
다음 두 책의 연보를 보합하였다.
이육사,『원전주해 이육사 시전집』박헌수 엮음, 예은, 2008. 271~283쪽.
김학동, 『이육사評傳』, 새문사, 2012. 271~283쪽.
연보는 심원섭, 김회곤, 김용직 교수의 연보를 바탕으로,심문 조서나 소행조서,신문기사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이동영의 기록을 바탕으로 기타 새로운 내용일 경우 작 성자를 밝혔다. 신문기사의 인용은 현대표기로 통일하였다. 관련 내용이 있는 경우 출 처를 약칭으로 밝히기로 한다. 중요 참고 자료는 다음과 같다(나이는 만으로 계산하며, 연보의 연도 표기는 해방 이전까지는 기록 대조의 편의상 동양식 표기(간지)와 일본식 연호를 함께 사용한다).
이활1:「이활신문조서」, 경성京城본정本町 경찰서,1934.6.17.
이활2:「이활 신문 조서(제2회)」, 경성 본정 경찰서,1934.6,19.
소행:「이원록소행조서』,안동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1934.7. 20.
군관:「군관학교사건의 진상, 조선총독부 경무국,1934.12.
증인:「중인 이원록신문조서」, 경기도 경찰부, 1935.5,15.
사상:「사상에 관한정보⑻폭발물투기 및 협박문우송에 관한 진,1938.1.17.
박훈산: 박훈산,「항쟁의 시인-육사의 시와생애」,『조선일보,1956.5.25
신석초: 신석초,「이육사의 추억」,『현대문학I,1962,12.
김진화: 김진화,『일제하 대구의 언론 연구!,화다출판사,1978.
심원섭: 심원섭 편,『원본이육사 전집』,집문당, 1986.
이동영: 이동영,『한국독립유공지사열친,육우당기념회, 1992.
김회곤:『새로쓰는이육사평전』,지영사,2001.
김용직: 김용직 - 손병희 편저,『이육사전잡』,깊은샘,2001
1904(1세)
음력 4월 4일,경북 안동군(현 안동시) 도산掏山면 원천速川(村)리 881 번지에서 아은 이가호李家鎬와 범산 허형의 딸 허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이름은 원록源祿(또는源三)이고 자작하여 ‘활活’이라 하기도 했다. 자字는 태경台卿이고 아호는 ‘육사陸史’인데, 이것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에 수감번호 264에서 취음取音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육사戮史’도 있다 하지만, 주로 ‘육사陸史’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08(5세)
조부 치헌공痴軒公에게 한문을 배우다.
-1909-5세 기유/명치42년
조부 치헌痴軒 이중직李中植에게서 소학 배우다.(김희곤). 후일 평론가로 활약하는 아우 이원조(李源朝) 출생하다.
-1910-6세
경술/명차43년 조부가 경북 예안에 설립된 신교육기관 보문의숙의 초대 숙장에 추대됨으로써, 육사는 맏형과 함께 이 학교에 출입하였으나 정규학생 신분은 아니었음(대원섭).
1915(12세)
조부가 숙장垫長이었던 예안보문의숙18安寶文莪垫에 백형怕兄을 따라다니 면서 신학문에 눈뜨기 시작하다.
-1916-12세
조부 별세하다.
-1917—13세 장사/대정6년
안동군 녹전면 신평 리(속칭 듬벌이)로 이사히다.
1919(16세)
원촌에서 녹전면祿轉面 신평리新坪里(속칭듬벌이)로 이사하다. 이 무렵 예안 만세사건을 겪다.
1920(17세)
백형 원기源祺와 숙제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로 나오다. 두인斗人 원《또는源一》와 운거罢居 이명룡李命艏과 함께 석재石齋 서병오徐 丙五 선생에게 다니며 서화 공부를 하다.
1921(18세)
영천永川의 안용락安甜洛의 딸 안일양(安一陽)(본관顺興)과 결혼하다.
-1921-17세
영천군 화북면 오동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과 결혼하고,처가 인근의 사립학교인 백학학원(옛 백학서원)에서 수학하다.
-1922-18세 임술/대정 11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다(김회곤).
1922(19세)
영천에 있는 백학서원白奴향院에서 이명선, 서만달, 백기만 둥과 함께 약6 개월간 공부하다. 이 무렵 대구 소재의 교남학교(嶠南學校)에 다닌 것으로 전하지만 확실한 것 은 아니라고 한다.
-1923-19세 계해/대정12년
백학학원 교원으로9개월간 근무하다(이활1)
1923(20세)
대구 남산동 662번지로 이사하다. 이 무렵 일본에 가서 약 1년간 지내다가 왔다고 한다. 대구에서 김관제金职濟.김현경金助敬.강신묵袭信黙둥과 사귀면서 재정적 도움을받았다고 한다.
-1924-20세 갑자/대정13년
4월,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束京 신전구神田6 금성고둥예비학교(정칙正則 예비학교; 소행)에 입학하여 1년간 재학하다(이활1).
1925(22세)
백형 원기와 아우 원일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雜烈圓에 입단하여 활동하다(기려수필).
1926(23세)
대구 조양회관(朝陽)에서 개최하는 신문화강좌에 참여하다. 이정기李定基와 함께 중국 북경에 가다.
-1926-22세
7월,북경 중국대학 상과(1925년8원경,사회학과; 이활1)에 입학하석 7개월 재학하다(소행). 중국 대학에서 수학하다 2년 중퇴하다(이활1).
1927(24세)
북경에서 귀국하다. 이 해 가을 의사琅士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10월 18일)에 연루 되어 원기,원일, 원조 둥과 함께 검거되다. 이들 가운데서 원조는 학생신분이라서 곧바로 풀려나고 나머지는 2년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고 전하지만, 그 기간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1928-24세 무잔/소화3 년
구속중. 조선일보에 아우 이원조의 시「전영사」가 입선하다.
-1929—25세 기사/소화4년
5월,중거불충분으로 면소되어 출소하다(이활1).
12월 27일경,무혐의로 종결되다(이활,동아일보).
1927년 10월 18일 대구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선사한 사건이 발생 후 2년 만에 예심이 종결되어 대구지방법원에 회부되다. 그 사건의 주동자는 보병대 출신의 칠곡漆谷 장진홍张供弘이며 이에 관련된 피고는 다음과 같다.
이정기李定基 이원록李跺祿 이원기李源供 이원유李源裕 조재만 이경식李京楢 마종석馬種石 김형갑佥炯甲 조우제妞佑濟 강진규 장진홍张氟弘 김기용金基用 황진영 黄银瑛 박관영朴奴永 정용해鄭而海 소림봉치小林峯治 이봉식李8사5 박문선朴文酋 정방락 鄭芳洛” (동아일보 호외, 1929.12.28).
조선일보에 아우 이원조의 소설「탈가」가 선외가작으로 입선하다.
-1930—26세 경오/소화5년
아들 동윤 탄생하다(만 2세에 사망).
1월 3일,「말」(조선일보) 발표하다.
1월 10일,대구청년동맹 간부로 구속되다(중외일보, 1930.1.21),
1월 19일,이상쾌,정윤 둥과 함께 방면되다.
학생동요사건이 각지에서 일어난 후로부터 대구경찰은 신경이 극도로 과민하야 신간대구지회新幹大邱支舍 대구청년동맹 간부들을 수삼 차 단속적으로 검거하여 10 여 일 혹 7,8일씩 두었다 함은 이미 누차 보도하였거니와 지난 10일에 청년동맹간 부 박명줄 외 4,5인이 금속되어 있는 중 지난 19일 밤에 이상쾌李相快 이원삼李源三 정윤 3씨만은 방면되었다더라.”(-대구청맹靑盟간사 3씨 무사석방" 중외일보,1930.1.21),
2월 18 일,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
2월 18일,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
좌左와 같이 지국원을 임명하였사오니 애독 첨위僉 位는 조량照亮하소서
기자이활李活.
중외일보사대구지국"("지국사고",중외일보,1930. 2.18)
3월 6일,대구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석방되다.
3월 1 일을 앞두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하여진 대구 경찰서에 검속된 본보 대구지국 기자 이활李活과 부내 府内 남산정南山町 이봉로李凪魯,이원철李源과 안동 풍산소작희 간부 이준문李準文 둥 몇 사람만은 우선 석방되었다더라”(대구서에서 3씨는 석방, 중외일보,1930. 3.6)
6월 6일,영일군 기계면 현내동 이상하 군에게 대구부 남성정南城町 19 중외일보지국 이활 이름으로 편지 보내다.
6월 14일,영일군 기계면 기계 이상혼李相欣 군에게 '대구부 남성정 중외일보지국 이활" 이름으로 편지 보내다.
10월,별건곤에 ‘이활(대구二六四)’ 이라는 이름으로「대구사회단체개관」을발표하다.
-1931-27세 신미/소화6년
1월 21일, 레닌의 탄생일을 기해 대구지역에 뿌려진 격문사건으로 구속되다.
금 21일 대구서 고등계에서는 돌연히 시내 남성정으로 중외일보대구지국을 포 위하고 가택수색을 하는 동시에 동 지국 이활李活 이갑기李甲基 이원일李源一 이하 동 지국 배달부 신봉길申脈吉 둥의 4명을 검거하여 취조 계속 중이라 한다.
그 내용은 금일(21알)이 레닌의 탄생일이므로 경계 중에 일시 예비검속이라 히나 수 문한 바에 의하면 작금에 모종의 불온격문이 있은 사건에 관련인 듯하다고 한다. (대구서 활동 청년 4명 검거, 동아일보, 1931.1.22.)
3월 23일,불기소방면되다.
대구 경찰서에서 비밀결사사"건이라고 1월 이래 검거 취조 중이던 리활李活외 10명에 대한 보안법 급 치안유 지법 위반 사건은 며칠 전에 송국하였었는데 검사가 취조한 결과 23일에 전부 불기소 방면되었다” (“이활 둥 12 명 전부를석방,” 매일신보, 1931.3.25)
8월,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전근하다(이활1).
1931(28세)
외숙 허규許桂의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참여하여 만주에 들어가 활동하다. 군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다시 북경으로 들어가다가 만주사변滿洲賴이 일어나 다른 사람들은 되돌아오고 육사만이 봉천의 김두봉金枓桊을 찾아가 그곳에서 잠시 머물게 된다.
1932(29세)
북경의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에 입교하다.
-1932—28세 임신/소화7년
1월 14~26일,육사생肉坩生이라는 이름으로「대구의 자랑약령시의 유래」(조선일보)를 발표하다. 3월 6,9일,「대구 장연구회 창립보고서」(조선일보)를 발표하다.
3월 29일,「신진작가 장혁주군 방문기」(조선일보)를 발표하다. 3월,조선일보를 퇴사하다(이활1),
3월,조선일보를 퇴사하다(이활1),
5월 하순(4월 하순; 이활2),중국으로가서 봉천 궁도정 삼성 고무공장의 나경석羅敬錫에 의탁하여 7월 20일까지 체재 하다(이활1).
6월 29일,중국 봉천 근화여관栉花旅館에서 “조선 영일군 기계면 현내동” 이상혼에게 "奉天市 西塔大街 三丁目槿 花旅館 六月 卄九朝 陸史” 이름으로 엽서를 보내다. 이 엽 서 에서 한 달 전에 고향을 떠나온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6월,윤세주(尹世宵; 이전부터 알고 있던 중외일보 기자출신)와 교제하며,처남 안병철安炳结도 5월부터 봉천에 체재하다 (이활1),
7월 20일경(27알 소행),안병철,윤세주와 함께 봉천에서 천진으로 가다(이활1),천진에서는 일본조계 추산가의 이중희(李重熙,육사가 대구 살 때 대구 계성중학교 교사 근무)집에서 안병철과 함께 체재하다(소행, 중인). 다시 북경으로 가서 중국대학 친구 조세강(趙世網,당시 중국지방재판소 검사로 근무하고 있던 북경 중국대학 시기의 동창생) 집에서 3주 머무르다(이활1)
9월 중순, 안병철,윤세주,김시현金始顋과 함께 북경에서 남경으로 출발하였으며, 이범석이 마중을 나오다(중인).
10월 20일(10일; 이활1),남경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 기생 학원으로 입교하다(중인).
11월 12일, 손문탄생기념일에 연극을 하다(중인).
1933(30세) 4월 22일
조선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상해上海를 거쳐서 귀국하다.
-1933—29세 계유/소화8년
4월,「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대중』창간호)을 발표하다. 이 잡지 목차에 창간호에 싣지 못한 글 목록 중 李戮史「레닌주의철학의 임무」가 있다.
4월 이일,1 기생(26명)으로 졸업하다. 졸업식에서「자하실」,「수레」라는 연극을 공연하다(중인). 4월 24일, 남경 석마호동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 계열의 본부가 있던 호가호원胡家花阑을 방문하여, 5월 5일까지 체류히다(중인). 호가호원은 상당히 넓고도 많은 집으로 구성된 곳으로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과 군사간부학교 졸업생들이 함께 집단으로 살았다(김희곤).
5월 6일(15일; 이활1),김원봉金元鳳의 여비로 상해 한일래韓一來의 집(금롱아관; 이활1)에 머무르다(중인). 6월 중순,손문의 비서 양행불播杏佛이 암살(1933,6,18. 오전 8시) 당한 후 그의 장례식장에서 노신을 만나다(「노신추도문」; 이 글에는 1932년으로 오기).
7월 4일, 윤세주에게 귀국 송금을 요청하는 통신을 보내다(이활1),
7월 14일,윤세주가 금릉여관으로 찾아와,귀국하여 운동에 착수하라고 하다(이활1).
7월 15일,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안동에 상륙한 후,호평과 한국으로 돌아오다(이활1,중안). 귀국 후 친구인 유태하의 서울 재동 집에서 2주 머무르고,그 뒤 재동 85번지 문명희文明姫의 집 온돌방 한 칸을 빌려서 취직을 준비히다(이활; 수필「연인기』에 "중S,1933. 9.10."이라는 기록이 나오나 조서 기록과 일치하지 않음)
1934(31세) 5월
서울에서 일본헌병에게 검거되다. 이것은 군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 사건으로 육사는 이때에 약7개월 이상 검속되었다가 풀려났다고 한다. 이 무렵,백형 일하공도 육사의 자금지원 때문에 검거되다.
-1934-30세 갑술/소화9년
1월 8일(소인 1 월 21 알), 이상흔이 “경북 영일군 기계면 기계” 에서 14京城府齊洞五八李先生教史 活氏 下宽"으로 엽서 보내다. 이 때 ‘육사戮史’,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월,「1934년에 임하야 문단에 대한 희망」(『형상』) 발표히다.
3월 22일,처남 안병철의 자수로 군사간부학교 출신이 드러나 구속되다(5월 25일 서울서 피검; 이동영).
6월 17일, 19일,서울본정 경찰서에서「이활신문조서」작성하다.
6월,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되다.
6월 20일,서대문형무소에서 신원카드용사진 촬영.
7월 20일,안동 경찰서 도산 경찰관주재소에서「이원록 소행조서」작성하다.
8월,기소유예가 확정되다.
9월, 이활,「오중대회를 앞두고 외분내열의 중국정정」(『신조선』)발표하다.
10월, 이활,「국제무역주의의 동향』(『신조선』)발표하다.
10월,육사,「창공에 그리는 마음」(『신조선』)발표하다.
1935-31세 을해/소화10년
일자 미상,만주로 가다(이선장의 회고; 이동영).
인문사 근무하다(이동영; 추정)
1월,「1935년과 노불관계전망」(『신조선』) 발표하다.
1월,「위기에 임한중국정국의 전망」(『개벽』) 발표하다.
3월,「공인 깽그단중국청방비사소고」('개벽』) 발표하다.
5월 15일,「중인이원록신문조서」작성히다.
5월 15일,현재 재동문명회의 집에 거주하다(중안).
5월,병원에 입원하여「황혼」(말미에 ‘5월의 병상에서’ 라는 구절이 있다)이라는 시를 쓰다.
6월,「춘수삼제(『신조선』) 발표하다.
12월,「황혼」,『신조선』 발표하다.
1936(33세)
만주의 목단강牧丹江 주변에 있다가 귀국하자마자 검거되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다.
가을,중국작가 노신이 사망하자「노신추도문」을 써서 조선일보에 발표하다.
11월,모부인의 회갑연을대구상서정上西町23번지에서 가졌다.
-1936-32세 병자/소화11년
1월,「실제失題」(『신조선』) 발표하다.
4월,「중국의 신국민운동 검토」(『비판』)발표하다(미확인).
6월29일,이용악이 “서울신당동57의8 이활李活 사형詞兄” 에게 엽서를 보내다.
7월,동해송도원(포항소재)에서 휴양하다(「질투의 반군성」).
8월 4일, 경주 남산 옥룡암에서 ‘시조’ 를 쓴 엽서를 신석초에게 보내다.
8월,「중국농촌의 현상」(『신동아』) 발표하다.
10월 23~29일,조선일보에 이육사,「노신추도문』발표하다.
11월 18일,어머니 환갑(음력 10월 5일) 치르다.
12월,「고향」(『조광』),「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풍림』) 발표하다.
1937(34세)
서울 명륜동으로 이사하여 모부인母夫人,아우 원일源一 둥과 함께 살다.
1938(35세) 11월,
부친 아은공의 회갑연을 가졌다.
1938-34세 무인/소화13년
1월 최린崔麟의 집에 대한 폭발물 투기 및 협박문 우송에 관한 사건으로 일경의 용의선상에 오르다〈사상).
2월 25일,『영화예술』 창간동인 기사(조선일보) 나오다.
3월 2일,「전조기」(조선일보) 발표히다.
3월 6일, 3월 중순에 『풍림』 속간된다는 기사(조선일보)에 “이육사 편집동인”으로 나오다.
3월,「초상화』(중앙시보 수필)발표하다(미확인).
4월, 「초가」(『비판』) 발표히다.
4월 18일, 오장환이 일본에서 육사에게 엽서 보내다.
7월,「강 건너 간 노래』(『비판』) 발표하다.
8월 22일,「자기심화의 길一곤강의 ‘만가’ 를 읽고」(조선일보) 발표하다.
9월,「소공원』(『비판』) 발표하다.
10월,「모멸의 서-조선지식여성의 두뇌와 생활」(『비판』) 발표히다.
가을,신석초가 살고 있는 부여에 가다(수필「고란」.
11월,「아편」(『비판』),「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 (『비판,) 발표하다.
12월 24-28일,「계절의 오행」(조선일보) 발표히다.
겨울, 이육사 부친의 회갑을 맞이하여, 신석초,최용 등과 대구에서 만나 경주 구경하다(신석초).
1939」5세 기묘/소화14 년
종암동으로 이사하여 부모님과 함께 살다.
봄,친구K 맹장 수술하고,육사는 종로 황금정 동대문에서 전차 사고를 당하다(수필「횡액』).
2월,「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비판』) 발표하다.
3월,「남한산성」(『비판』) 발표하다.
3월,「연보(『시학』) 발표하다.
5월,「씨나리오문학의 특징-예술형식의 변천과 영화의 집단성」(『청색지』) 발표하다.
6월,「호수(『시학』)발표하다.
7월 16일.『회월시초』 출판기념식에 참석하다(조선일보).
7월 27일,「횡액」탈고하다(기묘7월 27일).
8월,「청포도」(『문장』) 발표하다.
9월 2일,윤곤강 출판기념식(『동물시집』)에 참석하다(조선일보).
10월,「횡액」(『문장』) 발표하다.
-1941-37세 신사/소화16년
1월,「연인기」(『조광』)발표하다.
1월,「독백」(『인문평론』)발표하다.
1월(상),4월(하),「중국문학 50년사」(『문장』) 발표하다.
2월,딸 옥비 태어나다.
3월,「농촌문화문제특집 설문에 대한 답」(『조광』) 발표하다.
4월,「아미」,「자야곡」,「서울」 발표하다.
4월 26일, 원산 청도장에 머무르다(「골목안」 번역).
4월 25일,원산 임해장에 머무르다(「중국현대시의 일단면」 탈고).
4월 26일, 부친상(향년64세)을 당하여 서울종암동62번지 집에 반소를 마련하다.
6월,「연륜』(『조광』) 발표히다.
6월,「골목안(小巷)」,(『조광』)발표히다,
6월,「중국현대시의 일단면」(『춘추|) 발표하다.
8월,경주 신인사에 머물다 귀경하다(수필「산사기,「계절의 표정』). 박훈산이 선배R과 옥룡암 찾아가 폐결핵으로 고생하는 육사를 만나다(박훈산).
8월,「산사기」(『조광』) 발표하다.
11월 28일, 가깝게 지내던 이병각 시인이 요절(30세)하다.
12월,「파초」(『춘추』)발표하다.
겨울,명동의 성모병원에 폐질환으로 입원히다(신석초).
-1942-38세 임오/소화17년
1월,「계절의 표정」(『조광』) 발표히다.
2월,성모병원에서 퇴원하여 경주안강 기계리의 이영우李英雨의 집에서 쉬다.
5월 7일,김기림이 육사에게 편지를 보내다.
6월 12일(음4월 29알),모친 허씨 별세하다.
7월,경주 신인사지 옥룡암에서 요양하다(「고란」). 7월 10일, 옥룡암에서 석초에게 보낸 엽서도 이때 쓰인 듯하다. 이때 경주 금오산 어느 암자에 기거하고 있는 박곤복朴坤很을 방문하다.『고암집』에 “나의 벗 육사군의 찾음,” “임오 첫가을 밤차로 벗을 멀리 보내고”란 구절이 있다(고암 문집).
음력 7월 13일에 맏형(이원기)이 별세하다.
12월 1일,「고란」(「매일신보사진순보』) 발표히다.
-1943—39세 계미/소화18년
1월,신정에 석초에게 북경행 밝히다.
봄,육사와 친분이 있는 이민수李氏樹 선친의 육순을 축하하여 옮은 한시「근하석정선생육순逋 賞石庭先生六旬」,「만등동산晚登」,「주난홍여酒炫興餘」를 남기다.
봄,북경으로 가서 중경과 연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이선장에게 밝히다〈김진화; 이동영).
7월,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하다(이동영).
가을에 피검,북경으로 압송되어 북경 일본영사관감옥에 구금되다(이동영).
10월,김소운(金索雲)의 일어 번역시집『朝鮮詩集(中期)』(東京; 興風砣, 1943)에「청포도,「절정」,「해후」,「아편이 번역되다.
-1944—40세 갑신/소화19년
1월 16일 새벽 5시, 북경시 내구(内區,현재 柬城區) 동창호동 1호에 있던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다.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에 의해 장례 치러지다(이동영; 김희곤).
동생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1960년에 고향 원촌으로 이장).
12월 육사의 외숙 허규가 육사의 말(“육사가 북경으로 가면서 중앙에서 경북의 일은 이선장 씨와 상의하라는 말')을 이선장에게 전하다(김진화).
1946
1월,인천 송현동 아우 원우源祐(또는 源昌)의 집에서 육사의 대상을 지내고, 집안이 모인 자리에서 원우의 셋째 아들 동박束博으로 후사를 잇게 하다.
10월,아우 원조源朝가 주재하여 서울출판사에서「육사시집』초판본을 출간하다.
-1945
12월 17일「광야」「꽃」(『자유신문』) 발표되다.
-1946
10월 20일, 아우 이원조에 의해,「나의 뮤즈」,「해후」가 추가된 『육사시집』(서울출판사)이 출간되다.
-1949
4월 4일,「산」,「화제」,「잃어진 고향」이『주간 서울』「작고시인들의 미발표 유고집』이란 코너에 소개되다.
-1956
「편복」(이동영 소장)과 한시 3편이 육사시집(1956, 범조사)에 발표되다.
1957
가을,대구 한양다실에서 '육사추도의 밤’이 열리다. 이 행사로는 조지훈 의「육사의 민족운동」과 김종길의「육사의 시」둥의 강연과 박양균에 의 해〈초인의 노래〉가 낭독되기도 했다.
-1974
가을,「바다의 마음」(신석초소장)이『나라사랑!에 발표돠다.
-1986
산문 여러 편이 발굴되어 심원섭 편주,『원본 이육사 전집(집문당)에 실리다.
-2000
이육사의 생애를 꼼꼼하게 추적한 김회곤 교수의『새로 쓰는 이육사 평전(지영사)이 나오다.
-2002
오영식(보성고 국어교사) 선생에 의해『주간 서울(1949. 4,4) 에 소개된 시작품 3편이 발굴되다.
-2004
시조(신석초에게 보낸 엽서 소재)와 산문 여러 편이 발굴되어 김용직,손병희 편,『이육사전집 (깊은샘)에 실리다.
월단평
오늘날 교과서에서 저항시인의 대표주자로 배우고, 또 그의 작품이 종종 교과서에 실리는 만큼 단순히 '저항시인'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이육사 시인은 '저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작아 보일 정도로 평생을 정말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애국지사라고 할 수 있다. 39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을 했던 문인들이 독립 이후 온갖 문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간 것을 생각하면.....
https://namu.wiki/w/%EC%9D%B4%EC%9C%A1%EC%82%AC
뉴스 투데이, 이정희,
기사입력 2019-02-23 06:56 최종수정 2019-02-23 06:57
한복을 입고 있는 육사 선생의 모습은 처음입니다.
[이옥비 여사(79살)/이육사 선생 외동딸]
"우리 아버지가 양복만 입고 다니셨잖아요. 그런데 '(한복을 입고 나가니) 정말 보기 좋다고. 육사는 이제 한복을 많이 입으라'고 그랬대요."
독립을 위한 이론과 실제를 배우기 위해 의열단 조선혁명 군사간부학교로 떠난 1932년, 그러니까 28살 전.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원조 생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2956&cid=46645&categoryId=46645
이칭별칭| 호 여천(黎泉), 임목아(林木兒)
출생 사망| 1909년 ~ 1955년
성격| 평론가, 언론인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성별| 남
본관| 진성(眞城)
개설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여천(黎泉)·임목아(林木兒). 경상북도 안동 출생. 이황(李滉)의 13대 손인 이가호(李家鎬)의 4남이며 이육사(李陸史)의 동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는 조부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대구교남학교(嶠南學校)를 거쳐, 1935년 일본 도쿄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고종의 친척 이정원(李貞媛)과 혼인하였고,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임화(林和)·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고,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초대 서기장을 역임하였으며, 당시 조선공산당 기관지로 발간된 『해방일보』와 좌익계 일간지인 『현대일보』 발간에도 관여하였다.
1947년 말에 월북, 북에서 중앙본부선전선동부 부부장직에 있었으며, 6·25 직후 1953년 8월 남로당 숙청 때 임화·설정식(薛貞植) 등과 함께 ‘미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투옥, 1955년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8년『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전영사(餞迎辭)」가 입선되고, 1929년 소설 부문에서 「탈가(脫家)」가 선외가작으로 뽑혔지만 시인이나 소설가로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1932년『조선중앙일보』에 「신춘당선문예개평」과 1933년『조선일보』에 「시에 나타난 로맨티시즘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평론 활동을 시작하여 1930년대 우리 비평계를 주도하는 전문적인 비평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2년에서 광복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집필을 중단하였으며, 광복 후 1945년과 1946년에는 다시 왕성한 평론 활동을 보였다. 월북하기까지 그가 남긴 전체 평문은 100편이 넘는다.
그의 비평이 전개된 과정을 정리해 보면, 첫째 단계가 ‘행동의 문학’이다. 초기 평문에서 문학은 사회 현실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고 비판, 변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부르주아문학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둘째는 ‘태도의 문학’이다. 이는 문학의 정치적 실천이 용납되지 않고 프로문학이 침체 국면에 접어들자 사회 현실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 내지는 모럴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셋째는 ‘지성론·교양론’ 등으로 문학이 인간의 내면 생활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지성, 강인한 정신, 명석한 기지가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단계는 1930년대 말에 제기되는 ‘제3의 논리’다.
상실된 비평정신과 비평의 영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장 보편 타당한 당대의 시대의식을 비평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방기에 이르러서는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에 근거한 ‘인민적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내세웠다.
성장 환경에서 형성된 이념 지향성, 서구 문학 전공(불문학, 앙드레 지이드 연구가 졸업 논문이었음.)을 통해 획득한 교양과 균형성, 신문기자 생활에서 체득한 저널리즘적인 감각과 순발력 등은 그의 비평 세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었다.
그의 비평은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논리의 전환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리얼리즘 정신의 고양과 문학의 이념성 회복이라는 일관된 방향 위에서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문학사상사론』(김윤식, 일지사, 1992)
『오늘의 문학과 문학의 오늘: 이원조 평론집』(이동영 편, 형설출판사, 1990)
『북(北)의 예술인』(이철주, 계몽사, 1966)
『건설기의 조선문학』(조선문학가동맹, 1946)
「이원조 문학비평의 변모」(이동영, 『한국학보』 70, 1993)
「이원조 비평의 전환논리」(신재기, 『문학과 언어』 10집, 1989)
[네이버 지식백과] 이원조 [李源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의열단
[ 義烈團 ]
요약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
구분 무력독립운동 단체
설립일 1919년
설립목적 항일독립
주요활동/업무 일본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소재지 중국 만주 지린성
1920년대에 일본 고관(高官)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는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1919년 3·1운동 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路線)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抗日秘密結社)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폭파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기로 했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鐘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 10조는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이와 같이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수뇌·타이완총독·매국노·친일파거두·적탐(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지적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폭탄제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으로는 ① 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 ②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③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④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⑤ 상하이 황포탄 의거 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효제동 의거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⑧ 도쿄[東京] 니주바시[二重橋]폭탄투척 사건 ⑨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申采浩)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文化主義)·외교론(外交論) ·준비론(準備論)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民衆革命)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사회주의 이론을 1926년부터 점차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변화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12월 베이징[北京]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열단 [義烈團]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