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 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 에 상관 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 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갈 수 있었다.
또한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 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하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 저녁으로 왕 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右文之治(학문 중심의 정치)'와 '作成之化(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문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
일종의 문신(文臣) 재교육 제도인 셈이지요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는 정조 6년인 1781년 2월에 시작 되었습니다
의정부에서 37세 이하의 젊은 문신중에서 인재를 선발하여 올리면
이들을 규장각에서 주관하여 특별 위탁교육을 실시한 것을 말합니다
이때에는 주로 사서삼경과 사서(史書) 위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바로 이들이 초계문신들인데
초계문신에게는 잡무의 면제와 공동문집 간행 등 여러가지 특권도 부여됐지만
학업 성적이 저조하면 그에 상응하는 징계조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행된 초계문신제에서 배출된 초계문신은
시행 첫 해인 1781년에 16명이 선발 되었고
이후 정조가 붕어하는 1800년까지 10회에 걸쳐 모두 138명이 선발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초계문신 출신으로는 정약용,이가환,서유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의 인적 구성을 살펴 보면 흔히 말하는 실학자 그리고 남인,북인 계열의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선발되어 위탁교육을 받은 초계문신은 40세가 되면 면제, 즉 졸업을 하게 됩니다
초계문신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정조 스스로가
초계문신들에게 직접 강의도 하고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임금의 전폭적인 지지와 관심을 받았다는 의미 겠지요
초계문신 출신들이 훗날 정조의 개혁정책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