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인격주의 운동 -
철학사에서 인간에 대한 고려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고대와 중세에는 인간을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그 내면에 신성한 무엇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고려하였고, 근대에는 도덕적 법칙을 산출하는 자율적인 존재로 고려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규정할 수 없으며, 자기 스스로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보았다. 그리고 자연과학적 발달에 기초한 사상가들은 인간이란 단순히 신경조직이 첨예하게 발달한 고등동물로만 이해하는가 하면, 또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이란 단순히 유전자가 자기 생존을 위해 고안한 외피에 불과한 것으로 고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인간의 진리에 가깝거나 적합한 것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인간이 가진 진리의 일부로서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인간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하나의 주제는 ‘개인’과 ‘전체’ 혹은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의 질문이다. 중세의 유명론 논쟁에서는 ‘인간성’이라는 보편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혹은 이름뿐인 ‘추상적 개념’인가? 하는 물음이 그 핵심이었는데, 일반적으로 근대로 올수록 ‘인간성’이라는 보편적인 특성은 개별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소크라테스라는 한 개별자는 ‘인간성’이 지니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 개별자가 그의 존재에 있어서 최후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사유는 근대의 실존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실존주의는 결국 자신에게 의미 있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개별자의 진실을 추구하는 경향성으로 흘렀고, 이는 또한 ‘개인주의’라는 현대인의 정신적인 경향성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한 개인의 양도할 수 없고 환원할 수 없는 유일한 가치를 보장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개인과 개인 간의 분리 그리고 개인과 사회와의 분리를 낳고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보편성을 넘어선 개별자의 실존의 차원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개인이 먼저인가?’ 혹은 ‘공동체가 먼저인가?’하는 해결될 수 없는 질문을 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인격주의 운동’이다. 인격주의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엠마누엘 무니에는 '인격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의하면 ‘인격체(persona)’란 우선적으로 양도할 수 없고,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인 개별자로서의 인격을 말하지만, 이러한 인격은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형성되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격주의에서 인격이란 개별자의 개념보다 더 포괄적인 것이다. 즉 나라는 개인 속에 ‘인간성’이라는 보편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나라는 개인’은 또한 ‘인격체로서의 나’에게 포함되어 있으며, 이 인격체는 사회적 상황이나 나와 무관한 타인에게까지 (즉 공동운명체로서의 인류라는 의미에서) 연결된 관계성으로서의 ‘개인’을 말한다. 이러한 인격체의 개념에서 참된 인격체는 ‘나 자신의 유일한 존재의미’에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회적 책임성’이 더해진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격체로서의 나는 항상 새롭게 규정될 수 있고, 항상 열려있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나의 자아'처럼 고려된다.
보다 잘 산다는 것이 인격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개인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개인주의를 넘어서 자비로움과 헌신이라는 사회적 책임성을 껴안는 보다 열려진 자아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