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가 된 미운 오리새끼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참 불행한 철학자였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작품 속에는 내 심장에서 바로 튀어나온 무언가가 들어 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읽다보면 바로 이렇게 여과 없이 자신의 심장에서 바로 튀어나온 무언가가 주를 이루고 있는 곳이 많다. 당시의 불의한 사회를 고발한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자답게 자기 자신의 진실을 에누리 없이 그 최후까지 파고들면서 진리를 말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한 개인에게 절대적으로 진실한 것은 만인에게 진실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특히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애써 자신의 불행이나 비참함을 숨기고자 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자신의 삶의 비참함에 대해서 전혀 숨김없이 진술하고 있다. 특히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그가 진술하고 있는 내용들은 마치 자살을 앞둔 사람의 고백을 연상케 한다.
나의 인생에 관한 고찰은 전혀 무의미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41쪽〕
이제 나에게는 인생이란 쓰디쓴 음료수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악을 먹듯이 한 방울씩 천천히 마셔야만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43쪽〕
어째서 나의 영혼과 정신은 이다지도 메말라 있는 것일까! 〔『이것이냐 저것이냐』, 39쪽〕
나의 인생은 영원한 밤과도 같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60쪽〕
나의 인생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60쪽〕
그런데, 무엇이 키르케고르로 하여금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것일까? 그의 인생은 왜 그렇게 절망적이었던 것인가? 혹자는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불행의 원인을 그의 가족사나 사회적 환경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의 기원이 된 덴마크어의 ‘kirkegård’가 ‘교회의 묘지’를 지칭하는 묘한 사실이 암시해 주듯이 그의 가족사는 우울하고 암울한 것이었으며, 키르케고르 스스로가 자신은 ‘어린 시절’을 겪어보지 못하고 늙어 버렸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식모였던 후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행세하는 아버지에게 너무나 큰 위선을 느끼고 괴로워하였다. 게다가 엄격한 청교도적 삶을 살았던 그의 가정에서 자신이 혼전에 가지게 된 아이라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큰 죄의식에 시달렸다. 7명의 자식들 중 막내였던 그는 거의 존재감이 없이 잊힌 채 살았다. 그에게는 진정 아름다운 어린 시절이나 청년시절이란 것이 없었다. 코펜하겐에서 목회자의 꿈을 안고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국가교회의 관리인으로 타락한 기성 종교인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고 갈등하다 결국은 목회자로서의 꿈을 버려야 했다. 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세속적이라고 비판을 받았고 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종교적이라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였고 안식을 가질 수 있었던 연인 ‘레기네 올센’과 4년의 사귐 끝에 약혼을 하였지만 결국 1년 만에 그 스스로 약혼을 파기 하여야 했다. 이미 종교적 실존의 문턱에 있었던 그는 여전히 심미적인 실존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자신의 약혼녀와 하나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불행한 역사는 키르케고르 자신이 고백하는 말을 근거로 후대 사람들이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 만일 그가 아무런 고백도 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자신의 삶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키르케로르를 매우 행복했던 사람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는 “나는 한 번도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인 없다. 그러나 겉으로는 마치 행복이 줄을 지어 나를 따라다니는 듯 보이고...〔『이것이냐 저것이냐』, 67쪽〕 ”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키르케고르의 일상을 선입견 없이 고찰하였다면 그는 충분히 행복한 조건 속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재력가였고,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키르케고르는 매우 미남이었고, 머리가 총명하여 공부를 아주 잘 하였다고 한다. 오페라를 좋아하여 매주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 극장에 갈 수가 있었고, 제법 성숙하였을 때는 인격이 뛰어났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그래서 자신보다 10살이나 연하였던 저명한 가문의 아름다운 여인 ‘레기네 올센’은 그를 존경하여 4년 동안이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지냈다. 그리고 결국 그녀와 약혼을 할 만큼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행복이 줄을 지어 나를 따라다니는 듯 보이고”라는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불행을 그의 가족사나 그의 사회적 위치나 개인적인 삶의 외적인 조건들 때문은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대다수의 일반인들에 비해서 훨씬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이었다. 그의 불행의 원인은 오직 그의 내면의 문제, 혹은 실존의 문제에서 기인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가 만족감이나 기쁨이나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풍족한 상류사회의 외적인 풍요와는 다른 삶이 주어져야 했는데, 이 삶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그에게 해결되어야만 하는 내적인 문제였지만 그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이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헛수고라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이 그의 문제였던 것일까?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삶이 ‘시인의 존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몸부림치고 저항하지만 헛수고다.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나의 인생은 여전히 시인의 존재다. 이 이상으로 불행할 수가 있을까? 〔『이것이냐 저것이냐』, 60쪽〕
자신의 인생이 시인의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왜 문제이며, 시인의 존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의 존재에서 더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는 어떠한 존재일까? 키르케고르가 말하고 있는 시인의 존재란 윤동주나 김소월같이 실제로 시를 창작하는 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 번도 시인이 된 적이 없었고, 시를 쓴 적도 없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시인의 존재’란 사실 ‘낭만주의적 정신’을 상징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낭만주의란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한 어떤 이상적인 것을 희망하거나 지향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사랑이든, 정치적 이념이든, 예술가의 이상이든 현실적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어떤 ‘갈망’을 포기하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고 끝까지 추구하는 것이 ‘낭만주의의 정신’이다. 사실 철학적으로 볼 때 시인들은 본질적으로 ‘낭만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를 쓰는 창작 작업이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인에게 있어서, 이 시가 노래하는 것을 실존적인 의미로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가가 노동자의 일생을 감동 있게 그려나가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노동에서는 면제를 받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詩를 통해서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의인의 모습을 노래하는 한 시인이 불행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은 자신이 노래하는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있는 것처럼, 키르케고도 자신이 통찰하고 있는 그 진리에 자신이 도달할 수 없음을 절감하였고, 그리고 이러한 절망이 그에게는 너무나 크고 엄청난 것이기에 다른 어떤 좋은 것들도 무의미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인의 생활에는 본질적으로 그 바탕에 그가 원하는 바의 것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절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들의 백합 공중의 새』109쪽]라고 고백하고 있다. 결국 키르케고르가 ‘시인의 실존’을 가지고 있기에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이해하고 자신이 통찰하고 있는 그 바라마지 않는 진리가 자신에게는 진실이 혹은 실재가 되지 못하고 다만 ‘희망’으로 다만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불행의 원인은 오직 그의 내적인 문제였고, 그가 되고자 하였던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존재론적인 문제였다. 키르케고르가 오직 내면적인 문제에 골몰하였고 전혀 세상의 이해나 명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은 대다수의 주요 저서들에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요한 클리마쿠스’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독창적이고 놀라운 그의 저작들을 세상에 내어 놓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숨긴다는 사실은 세상의 찬사에는 관심이 없으며 다만 진리를 전한다는 한 가지 사실만을 중시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가 진정 원했던 것, 즉 자신의 ‘삶의 실재’이기를 바랐던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진정한 종교적 실존’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 다른 말로는 그는 진정 ‘믿음의 기사’가 되고자 하였지만, 그에게는 ‘믿음의 기사’가 될 용기가 없었다. 이 믿음의 기사는 일체의 이성적인 것이나 확실성을 뒤로한 체 그리고 세속적인 모든 희망들을 뒤로 한 채 ‘단독자’로서 절대자 앞에 나서는 자였고, 희랍의 철학자들이 학문적 관심사로만 다루었던 ‘아페리옹’ 즉 ‘무한함’과 ‘신성함’의 문제를 자신의 절대적인 생의 문제로 고려하였다. 중세기의 신비가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속을 떠났다. 그들은 불교의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일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말 그대로 출세간하여 수도원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수도원의 삶이란 ‘천국을 앞당겨 사는 삶’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이러한 행운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하나의 다른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일들에서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였음에도 세상의 한 가운데서 살아가며, 세상과 교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대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즉 초월적이고 초-현실적인 실존의 지평이 현실의 한 가운데서 빛을 발하고, 신성한 종교적인 빛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 세상의 언어로 해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제도화된 종교의 세속적인 변화들과 학문으로 환원되어 버린 믿음의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 키르케고르의 노력이었고 이는 새로운 철학함의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은 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세속적으로 보였고, 철학자들에게는 너무나 종교적으로 보였다. 그는 평생을 혼자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으며, 마지막 죽기 전까지 종교의 핵심을 공허한 사변으로 대치하고 있었던 헤겔의 철학에 맞서 싸웠다.
1855년,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다음의 두 고백은 자신의 인생을 집약하여 말해주고 있다.
티 없이 기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면! 그러나 나는 일찌감치 늙어버렸고 죄 많고 피곤하구나! [『들의 백합 공중의 새』, 109쪽]
그녀와의 약혼과 파혼은 정녕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하느님과 나와의 약혼이다.〚『유혹자의 일기』, 276쪽〛
오직 신의 의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 인생을 바친 한 철학자가 스스로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러한 겸허한 키르케고르의 태도는 “세상에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떠 올리게 한다. 이러한 키르케고르를 두고 독일의 실존주의자 하이데거는 “당시의 시대의 운명에 상응하는 유일한 종교적인 저자”〔『어느 곳으로도 향하지 않는 길』, 310쪽〕라고 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신이 부여한 예언자적인 소명처럼 믿고, 고독하게 마지막 죽을 때 까지 이러한 소명을 멈추지 않았던 키르케고르는 분명 한 마리 미운오리새끼였다. 그리고 사후 거의 한 세기동안 그는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바르트, 하이데거, 가브리엘 마르셀 등의 실존철학자들에 의해 그의 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실존의 철학자들은 키르케고르에게 암울한 현대사회에 빛을 밝혀줄 현대철학의 선구자, 실존주의의 선구자라는 이름을 헌정하였다. 그는 마치 안델센의 동화에 나오는 미운오리새끼처럼 평생을 미운오리새끼로 살다가 사후 100년 만에 비로소 하늘을 날아가는 흰 기러기가 된 것이다.
키르케고르, 『들의 백합 공중의 새』, 표재명 역, 종로서적, 1980.
, 『유혹자의 일기』, 임춘갑 역, 종로서적, 1980.
, 『이것이냐 저것이냐』, 임춘갑 옮김, 도서출판 치우, 2012.
=쇄렌 키르케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