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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9장1~15절
제목 : 베풂 그 이상의 은혜
바울은 일 년 전에 약속한 헌금을 준비하도록 지침을 전달합니다.
베푸는 자와 받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유익을 일깨우며 참 연보를 독려합니다.
1. 약속한 연보를 위한 준비(1~5절)
1) 성도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쓸 필요가 없다합니다(1절).
“[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성도를 섬기는 일. - 이는 8장에서부터 계속 다루어 온 문제로(8:4=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글라우디오 황제(A.D. 41-54) 때 몰아친 심한 기근으로 인해 생활이 몹시 궁핍해졌기에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 위한 구제 헌금 내는 일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새삼 이 일에 대하여 쓸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 절(2절)에 제시됩니다.
2) 쓸 필요 없는 이유는 너희의 원함을 앎입니다(2절).
“[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 구제 헌금을 모금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편지를 쓸 필요가 없는 까닭은 그 일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강요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아가야는 마게도냐의 남방에 있는 헬라 전토를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바울 당시 아가야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고린도가 그 수도였습니다.
따라서 아가야와 고린도는 동일시될 수 없는 것이고 다만 고린도는 아가야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고린도 교회 역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시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지명으로 겐그레아나 아덴을 들 수 있는데 이 도시들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롬16:1).
한편 본문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사실은 바울이 마게도냐 인들에게 아가야에
서는 일 년 전부터 구제금을 준비하였다고 자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학자들은 8:2, 6, 10과 본절의 연결에 대해,
바울이 8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헌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마게도냐 교인들의 모범에 관해 말한 것처럼, 본장에서는 과거에 마게도냐 교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고린도 교인들의 열심을 소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격동시켰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디센'은 보통
나쁜 의미로서 '자극하다', '분내게 하다'를 뜻 하나에서는
좋은 의미로 '건전한 경쟁의식을 조장(助長)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에 대한 사업을 먼저 시작한 것은 사실인 듯하며(8:10) 이 소식이 마게도냐에 전해졌을 때 그들에게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켰음도 사실인 듯합니다(8:2, 3).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범을 보고 늦게 시작한 마게도냐인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임에도(8:2) 불구하고 이미 구제연보를 마쳤던 반면,
먼저 시작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하고 있으며 이제는 도리어 마게도냐 인들에 의해 자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구제 연보를 끝내지 못한 사실을 마게도냐인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바울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3-5절).
3)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에 있습니다(3절)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 여기서 '이 형제들'은 8:18, 22에 언급된 두 형제와 디도까지 포함합니다.
*8:18,22 “[18]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22]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
바울은 앞에서 디도와 나머지 두 형제를 구분하여 소개했었습니다(8:23).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그것은 아마 양자의 역할이나 위상(位相)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디도는 바울의 대리인 자격으로 간 것이고,
두 형제는 헌금 사업이 아무런 의혹을 일으키지 않고,
공정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견된 일종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양자는 구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이들 모두를 '형제들'로 표현합니다.
이 호칭 속에서 디도 일행은 모두 고린도 교인들의 형제들로서 그들에게 다가가며 그들의 구제금에 대한 열심을 격려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되는 '형제들'이 디도와 마게도냐 교회에서 선출된 두 형제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것은 8장과의 연결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8:18, 22).
그렇지 않고 본장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이 형제들'이 누구를 지시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도 8장과 본장은 한 편지 안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2절 주석참조).
이 일에...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 '이 일'이라 함은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자랑하였던바 고린도 교인들이 일 년 전부터 구제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한 자랑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제들을 보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모금 운동이 바울의 자랑에 비해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4)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부끄러움을 당할까 함입니다(4절)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마게도냐인들이...두려워하노라. -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시작과는 달리 구제금을 다 모으지 못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두 가지로 걱정을 합니다.
첫째는, 만약 바울이 마게도냐인들과 함께 고린도를 방문할 때까지도 구제금 사업이 지지 부진(遲遲不進)한다면 마게도냐인들이 보기에 고린도 교인들은 형제 된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주님께 대한 헌신이 없는 형편없는 성도들로 보일 것입니다.
둘째는, 마게도냐 성도들에게 바울의 신뢰가 실추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며 더 나아가 고린도 교인들을 믿었던 바울 자신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이 현실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5)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습니다(5절)
“[5]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바울의 의지가 다시 드러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 일행을 보내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도록 권고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약속한 연보. - 디도 일행이 해야 할 일은 단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과거에 한 약속을 상기시켜주는 일뿐입니다.
그 이상 고린도 교인들이 심리적으로 압력을 받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구제 헌금에 관한 모든 결정은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에 대한 약속을 스스로 지켜 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본절의 내용을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금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 있다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이 간 다음에 마지못해 연보를 한다면 그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보가 아닌 것입니다.
본문의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율로기안'는 '좋은 말', '찬양', '후한 선물', '축복'의 의미를 갖습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의미는 '축복'으로서 '참 연보'는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Bruce)는 것으로 '참 연보'는 의무에 의해서나, 체면 때문에, 또는 자랑이나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책임 의식과 신앙적 사랑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약속한 연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었으며, 이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봉헌자의 자세와 하나님의 은혜(6~11절)
1)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둡니다(6절)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적게 심는 자...많이 심는 자. - '연보'가 '축복'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본절과 관련하여 더 분명해집니다.
본절은 잠 11:24,25;19:17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뿌리는 것에 비례해서 거둔다'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적극적인 헌금의 필요성 및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11:24,25 “[24]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25]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이 베푸는 사람은 그 만큼 많은 것으로 축복을 받지만, 적게 베푸는 사람은 그 아낀 것이 모아지지도 않을 뿐더러 돌아오는 것도 적어 늘 가난할 뿐입니다.
이것은 내세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곧 하늘에 재물을 쌓는 것이므로 그렇게 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지만, 남에게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은 그 쌓아둔 것이 없으므로 받을 상이 없는 것입니다(마6:19-21;눅12:33,34;갈6:7)
*마6:19~21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2)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7절).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 여기서는 연보의 액수가 많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충동적이거나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 내적인 결심에 의해 즐거운 마음으로 연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누가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또는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이 바쳤다면 그것은 참다운 연보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주기 싫은 것을 아까워하면서 연보하거나, 대의명분이나 외부적 압력에 의해 연보를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a cheerful giver, NIV)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즐겁게 주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70인역 잠22:8의 인용입니다(Bruce).
3)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십니다(8절)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 6절부터 시작된 동일한 주제가 점차 발전적으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본절의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주실 능력이 있는데 이는 착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의미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주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복 주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복을 주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니다.
이것은 많은 선행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는 필연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불행에 처한 형제들을 위하여 구제금을 내는 것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선행은 그가 그토록 반대 하는 바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주의에 대한 반대와 모순된다고 볼 수 있는가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단 율법주의와 다른 것은 선한 행위를 하되 의롭게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 결과로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넉넉하여'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안'은 스토아 철학의 견유학파에서 '자족', 또는 '충족'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자족' 또는 '충족'의 스토아적 개념은 인간 자신의 내재적 잠재력 안에서 완전히 만족하는 존재, 즉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만으로서 완전한, 독립적인 인격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스토아적인 '넉넉함'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적 '넉넉함'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 은혜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이스토아적 단어를 사용하되 스토아적 개념이 아닌 기독교적 의미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습니다(9절)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본절은 시112:9(70인역 시 111:9)을 인용한 것으로 가난한 성도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일맥 상통(一脈相通)하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신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112: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의는 영원히 기억되어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런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즉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의'(디카이오쉬네)에 대해서는 마 6:1,2에서 나타난 '의' 개념과 동일하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와(Lietzmann),
바울이 말하는 법적 의미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Barrett).
여기서는 바울의 교리적 '의' 개념인 후자의 입장에서 전자를 포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5)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십니다(10절)
“[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 - 바울은 본절에서 앞절과 같이 직접 인용 형식을 취하지도 않고 구약의 권위에 호소하지도 않지만,
사 55:10과 호 10:12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Martin).
*사55: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씨와 먹을 양식'은 본래부터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추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심을 것을 주시고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주십니다.
6)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11절).
“[11]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을 부요하게해주시는 것은 그들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 고린도 교인들이 후한 구제 연보를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의'가 되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는 유익이 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제 연보의 수혜자들이 그 연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있기까지에는 '우리로 말미암아'
즉 바울 일행의 매개 역할이 중요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구제 연보 사업의 최초 입안자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들이 끝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3. 헌금의 결과(12~15절)
1)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습니다(12절)
“[12]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
이 봉사. -이 말의 의미는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를 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봉사'라는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말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 특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롬 15:27).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렇게 볼 때 바울이 구제 연보 행위를 '봉사'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에 대한 선행의 의미를 넘어 예전적(禮典的)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행위는
하나님께 드리는 자발적인 봉사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는 구제 연보가 가난한 성도들의 부족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그 도움을 받는 자들이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렸다는 표현에서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구제 연보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의미 부여라고 할수있는바, 이에 대해 혹자는 '바울이 실천 없는 신학을 전개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교회들로 하여금 신학적인 맥락으로부터 벗어난 자선 행위를 하도록 하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Barrett).
2)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13절)
“[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의 직무(12절)를 잘 수행해 내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나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즉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며 그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롬1:5).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연보 행위는 그들이 가진 바 복음 안에서의 믿음을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보여준 것입니다.
(2)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 고린도 교인들의 구제 헌금으로 예루살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이유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자신들을 도움으로써 고린도 교인들과 형제애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방 땅에도 복음을 통한 참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이 생겨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그리스도인으로 서의 성품과 덕행이 복음의 본토인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까지 인정을 받을만큼 보편성을 갖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3)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14절)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 고린도 교인들의 예루살렘 성도들에 대한
헌신적인 섬김은, 위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했고,
자신들로서는 중보의 기도를 받을 수 있는 동지를 얻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중보(仲保) 기도를 한다는 것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형제애가 생겨났음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이와 같이 두 교회가 민족과 역사 그리고 문화적배경이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연대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기독교가 더 넓게 뻗어 나가는 역사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런 변화는 할례를 받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었을 만큼 유대인 성도와 헬라인 성도 사이에 있었던 좋지 않은 감정들(행 15:1-21)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 '사모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 피포둔톤'은 '그리워하다', '애정을 보여주다'의 뜻으로 바울이 그의 개종자들을 만나보고 싶어하는 것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였습니다(롬 1:11;빌 1:8; 살전 3:6).
본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고린도 교인들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과 교우 관계를 맺고 형제애를 나누기 원한다는 것은 단지 예루살렘 교인들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경제적
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기꺼이 구제 연보를 하는 것은 단순한 구제의 행위를 지나 하나님의 은혜를 성취(成就)하는 것이었습니다(8:6).
4)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5절)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고린도 교인들이 베푼 은혜는 그들 스스로에게서 온전한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그 참된 의미가 발견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또 도울 수 있는 물질적 여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의 '은사'(카리스)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고린도 교인들의 풍성한 연보와 그것으로 말미암는 예루살렘 성도들과 고린도 성도들 간의 화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14절)를 의미합니다(Calvin, Tasker).
(2)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을 의미합니다.
연보에 대하여 언급하는 전후 문맥상으로 볼 때
(1) 의 견해가 적합한데 '은사'에 대한 바울의 용례나(롬 8:32) 이 말 앞에 '말할 수없는'(아네크디에게토)이란 수식어가 있는 것을 보면
(2)의 견해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Harris)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6,7절).
받은 은혜(11절)에 감사하며 즐거이 드리는 자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러니 마지못해 드리거나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참 연보(5절)일 수 없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겠다는 마음도, 내 이름을 드러내려는 마음도 경계해야 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부요하심에 어울리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2) 받은 위로로 위로하게 하시듯(1:4), 받은 재물로 곤궁한 형제(이웃)를 돌보라고 하십니다(8~11절).
나눔을 통해 예기치 못한 기쁨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물질의 열매가 더해졌다면 의와 기쁨과 감사의 열매를 더할 기회로 삼으십시오.
욕심으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구하기보다 많이 나눌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이 참된 복이 아닐까요?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그 선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더욱 풍성하게 체워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연보를 통해 예루살렘 성도들을 도우려는 고린도 교회의 열정은 바울의 기쁨이고 자랑이었습니다(1~5절).
그 선한 결심은 마게도냐 교회의 헌신적인 참여(8:1~5)를 이끌어냈지만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선한 열정에서 비롯된 약속이라도 이행되지 않읍면 무익하고 헛된 약속일 뿐입니다.
그 열정의 불씨를 되살려 열매 맺게 하려고 바울은 동역자들을 보냅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는 선교나 구제, 봉사 등에서 후원교회나 후원자로서 작정한 대로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까?
뜻은 있지만 의지가 약해 단념한 일이나, 힘들어도 힘을 내서 마땅히 섬겨야 할 일이 있다면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합시다.
2) 헌금은 필요를 채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체의 영혼을 되살려 그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합니다(12~15절).
믿음과 순종의 증거이고 성도의 교제가 됩니다.
내는 자나 받는 자나 서로 하나가 되어 누리는 열매이고 축복입니다.
영혼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내 물질을 사용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