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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오늘 본문의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이 산상 수훈 중에 하신 말씀으로
‘거룩한 것’이란~, 하나님이 인간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 자신, 그리고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복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이 복음’은~ 심판을 면할 길이 없었던 타락한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기쁜 소식’으로
‘이 기쁜 소식’을 영접하여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듭난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진주’는 그 당시에 아주 귀한 보물로 이 역시도 언약의 결실로 오신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을 면할 길이 없는 인간에게 최고의 은혜의 선물’인~ 구원의 소식을 전하시면서~
↳ “거룩한 것 즉 복음의 기쁜 소식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 즉 하나님의 언약을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나는 어떤 중심으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가 생각해 봅시다.
‘개와 돼지’는 각각의 습성이 있습니다.
‘개’에 대해서 반려견으로 보편화된 오늘날의 기준이 아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기준으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개’의 습성은,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주인을 따르게는 하지만 그러나~
자기 밥그릇을 빼앗으려 할 때는, 먹이에 대한 본능으로 주인을 물려고 하는 습성을 가진 짐승입니다.
이것이 ‘개’의 ‘더러운 습성이요, 본성’인데,
↳ 그래서 예수님이 ‘개’ 라고 하신 자들은~
거룩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영생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을 듣고도
자기 밥그릇이 빼앗길까봐 주인을 물고 찢어 상하게 하는 ‘개’와 같이
혹시나 자기 것을 빼앗는 것으로 알고, 또 빼앗길 것 같아~
돌아서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훼방하고 죽이기까지 한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이들이 누구인가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하신 것은~
이러한 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눈에 보이는 자기의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주인을 물어 상처를 입히는 ‘개’와 같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 직분을 받기도 하고, 봉사를 하기도 하고, 열심히 교회는 나오기는 하지만
세상의 밥그릇이 목적이 되어 교회에 나오고, 믿는다고 하는 자,
또, 자기 밥그릇이라고 생각하는 물질, 권력, 자존심에 손해가 날 것 같거나, 세상에서 얻을 것이 생기면
그동안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도, 은혜도 잊어버리고, 등져버리는 자들~
또 자기가 생각하는 밥그릇을 얻지 못할 때는 예수님을 원망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또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하셨습니다.
돼지의 특성은 주인에 대한 복종심이 전혀 없고,
진주의 가치는 모르고 당장에 자기 배를 불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짐승입니다.
‘진주’는 오랜 시간동안 껍질 속에서 자기 살을 깍아 내는 엄청난 아픔과 고통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아릅답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주의 가치는 희생, 아름다운 희생에 있지요.
‘진주’도, 언약의 결실로 오신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영원 전부터,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여인의 후손을 보내신다는 언약을~
하나님이 부르신 아브라함 그리고 그 후손들이 수천 년 동안 그 언약을 이스라엘은~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이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핍박을 견디고, 참아내며
결국은 메시야가 오시는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결실대로 ‘진주와 같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 오셨지만
↳ 정작 그 땅의 백성들은~
당장에 자기 배를 불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발로 밟는 ‘돼지와 같은 짐승 같은 자’가 되어~
진주와 같은 예수님도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진주와 같은 구원과 영생의 복음의 가치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 구원과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회개하라고 하신 그 뜻에도~ 관심도 감각도 없이
자기 눈에 있는 들보도 발견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 되어 버려
당장 눈앞에 있는 배부름과 육체의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러운 것(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져
그 더러운 것에 날마다 뒹굴고, 누워있어도 그것이 더러운 것조차 모르는 자가 되었는데
이 모습이 진주의 가치를 모르고 발로 밟는 돼지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돼지와 같은 짐승 같은 자’는~
진주와 같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가치는 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욕심과 자기의 정욕에 눈이 멀고 가려져 있어
하나님의 말씀도~ 사람의 뜻과 사람의 마음에 맞추고, 육신의 정욕적인 것에 맞추어 전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서 빗나간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도 돼지와 같은 특성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를 다니지만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세상의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자입니다.
세상과 음행하는 더러움에 빠져 뒹굴고 있으면서도
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 그 죄의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가치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세상의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세상의 목적이 되어 사는 이것이
진주를 발로 밟는 돼지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것의 가치를 아는 자입니다.
그래서 결코 세상의 것에 더 가치를 둘 수 없고 당장의 배부름 때문에 영원한 것을 발로 밟지 않습니다.
요1 3장 6, 9절에 ‘그 안에 거하는 자, 하나님께로 난 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영원한 것에 가치를 더 두는 자로 세상의 것으로 죄를 범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것이 그 마음에 없는 자, 모르는 자로
세상의 것에 더 가치를 두고 당장의 배부름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개와 돼지’는 결국 같은 자들을 말합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이들을 따르던 무리들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표적을 구한 자들입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믿는 표적을 세상의 것에 두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거룩한 것, 그리고 진주와 같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알아보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자기 밥그릇이 빼앗길까봐 또 당장 눈앞에 있는 세상의 것에 더 가치를 두고
도리어 진주와 같은 예수님에게 돌아서서 찢어 상하게 하고 거룩한 것을 발로 짓밟아 버린 개와 돼지 같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도무지 줄 수 없고 구원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비유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나는 어디에, 무엇에 더 가치를 두고 믿는다 하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몇 주 전에 여러분과 나눈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받는 예수님의 신부는 분명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들만 영원한 것에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머리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과 경험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머리에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믿는 믿음은~
↳ 예수님을 자기 지식의 수준, 자기 경험의 수준 안에 가둘 뿐만 아니라,
믿는다 하는 그 믿음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수준을 뛰어 넘지 못합니다.
또, 구원, 은혜, 사랑의 가치도 자기 머리에 있는 지식의 수준만큼의, 경험의 수준만큼의 가치를 둡니다.
그 이상의 가치를 둘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넘는 믿음의 요구가 있을 때 믿음을 던져 버리거나 외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머리에 있는 지식과 경험으로 믿음 생활을 하고
또 구원과 은혜, 사랑의 가치도 자기 머리에 있는 지식과 경험의 수준만큼의 가치를 두는 자는
언제든지 주인을 무는 개처럼, 진주를 밟아버리는 돼지처럼
예수님을 등져버리고 원망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또 이런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피 흘리신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 사도들,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120문도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그들의 지식과 경험이 아닌, 성령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이 된 것도 사울의 열정, 지식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만이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신부요,
예수님의 신부만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것에 더 가치를 두고 믿음 생활을 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면
그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외면할 수 있는 종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교회입니까?
사도행전, 에베소서, 골로새서, 갈라디아서, 요한계시록 신약의 말씀을 여러분 스스로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달린 문제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것에 더 가치를 두고 믿음 생활을 합니다.
이 은혜가 넘쳐나는 한울타리 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