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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平公事蹟圖 (번역문)
2015년 10월 10일 한국의 유교책판(儒敎冊版)을 출판 문화사적
측면에서 그,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홍충평공 사적고(洪忠平公事蹟考) 책판중 도적(圖蹟)의 서문(序文)과
그림 판본으로 만들어진 八도적(八圖蹟)을 아래와 같이 소개 하고자
합니다.
1, 서문(序文)
옛날에 맥태감(麥太監)이 송(宋)나라 악비(岳飛)를 위하여 정충록
(精忠錄)을 지으면서 그의 사적(事蹟)으로 삼십사사(三十四事)를
그렸고 우리나라의 안방준(安邦俊)은 후율 조부자(趙夫子 趙中峰,
憲)를 위하여 항의편(抗義篇)을 지으면서 그의 사적(事蹟)으로,
八사(八事)를,그렸다.이와 같은,두,가지의,문헌(文獻)과,찬술(贊述)도
있고 스스로 자신의 저작(著作)도 있고 후세사람에 의한 찬시도
있으니 이와 같이 문자로써의 기록으로도 족하거늘 이,외에 무슨
도면까지 덧붙이리요, 그러나 반드시 도면이 있어야 한다 하기로
두 분께서는 기탄없이 하여 후세에 인쇄까지 하여 반포(頒布)해도
비판의 소리가 없으니 이렇게 함이 옳음을 알겠도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그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상기할 수 있다,
하였으니 글로 인하여 상기함은 마음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으로 상기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 같이 못하니
눈으로 본다면 마음으로 상기하는 바가 더욱 간절하게 되고,글로써
다하지 못한 것을 가히 충족할 수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연고로
그림을 더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아 ! 우주(宇宙)는 무궁(無窮)하고 인생(人生)은 싸락눈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니 옛 사람을 되살려 현세에 함께 할 수 없고,현세의
사람을 소급하여 옛 것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혼탁한 세상에 태어나 천고(千古)의 탁월한 행적을 사모하여,감격해
마지않아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책을 어루만지기만 하여도 오히려
해가 저무는구나. 그러나 글은 그의 사적(事蹟)만을 말해줄 뿐이요
그의 모습을 말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옛 책에 이르기를 어제 일 같이 역력(歷歷)하게 한다 해도 옛 일일
뿐이니 오직 귀로 들을 뿐이요, 눈으로 보지는 못하는 것이다.
만약에 옛날의 환상이 현세에 나타나 눈앞에서 나열된다면 어찌
화공의 손을 빌려 그리지 아니 할 수 있으리요.
이는 그림으로,그의 공(功)을 나타내는 것이니 글과 그림을 아울러,
하는 것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의 예와 같은 것이리라.
앞에서 말한 二公(악비<岳飛>,趙重峰)의 그림은 이와 같은 뜻에서,
옳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에,
글과 아울러 반드시 그림을 덧붙여 만드는 것이다.
우리 선조께서 주자(朱子)보다도 먼저 태어나시어 나라에 교육이
없던 때라 조정에서 강명(講明) 할 때에는 공자(孔子)의 도(道)로써
강명(講明)하였으니 이는 끊어지는 교육에 희망의 복음이라 이를
만하여 가히 그림을 그려 붙일 만하다 하겠다.
마침내,주공과,공자(孔子)의,도(道)를,저,버리지,않고,순절을,하였으니
이는 비록 수사(洙泗; 공자<孔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에 출입
하는 학자라도 능히 미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하리요.
중유(仲由)와 염구(苒求)는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四과(四科; 덕행
<德行> 언어<言語> 정사<政事> 문학<文學>)를 허락 받았으되,모두
계손씨(季孫氏)의 신하가,되었고,계씨(季氏)는,노나라의,강한,신하라,
이자겸(李資謙)과,거리는 촌수로도 계산할 수 없을만큼 동일하였으 나
그는,능히,문상(汶上)에 두지 못하였다. 곧 두 사람이 공자(孔子) 의
학문도,없는 세상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최자성(崔滋盛)과 김의원
(金義元)을,능가했을지 의문이다. 그들을 우리 선조의 성취한바와
비교한다면,어찌 천지의 현격한 차이라 하지 않으리요. 이는 오직
도(道)를 아는 자라야 알 수 있을 것이요. 보통사람들은 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주욕신사,오하자안(主辱臣死吾何自安; 임금이 욕되면,신하가
죽어야하거늘 나 자신만 편안할 수 있으리)이라는 여덟 글자의,
부결(駙訣)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세우고 한 번 죽는 것을,홍모
(鴻毛)같이 여기고 나라의 운명은 무쇠솥(力鼎) 같이 중하게,여기니
충성심은 가히 일월(日月)을 퀘뚫고 용맹은 족히 태산도 빼어낼,수
있으니 탁월한 충절에 미칠 사람이 없으니 모든 백성들이,감격하여
추앙함이다. 이와 같이 탁월한 충절을 어찌 문자로서의,기록으로
그칠 수 있으리요. 이에 二公(악비,조중봉)의 선례(先例)에,의거하여
공(公)의 성대한 사적(事蹟)만을 취하여 여덟 폭의 그림(八圖)으로
그려 편말(篇末)에 붙이노니 이는 다만 공(公)의 성대한 충열을,
찬양하고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회를 느낀바 있게 하여,본받게
하고자 함이라.
2, 팔도적(八圖蹟)
가,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 뱃길로 송나라에 사신 가신 그림)
고려가 대대로 송(宋)나라를 상국(上國)으로 받을었는데 거란
(契안)이 난리를 치면서부터 육로(陸路)로 토산품을 바칠 길이
막혀 산동성 등주(登州)로,향한,뱃길을,이용하는,수,밖에,도리가
없었다,한번,떠나면,살아,돌아오는,이가,적었고,또는,도달되지도,
못하고 돌아오니 조정(朝廷)에서는 충효(忠孝)에 문학(文學)까지,
겸비한 분을 엄선하여 사신에 충당케 되었다.
그때에 공(公)께서 바로 과거에 급제하여 그에 선택 되셨다.
험란한 만리 길을 갖은 고생을 하면서 송(宋)나라 서울 변경
(汴京)에 도달케 되자 크게 그 나라 임금님 총애와 존경을,
받았고 여러 학사(學士)들과도 문학(文學)을 토론하다가 만,
일년만에 돌아오셨다.
(칭송하는 글)
북으로 송(宋)나라,문물을 관람하고 서쪽에서,돌아오면서,새소식
전하니 사책(史冊)에 오를 훌륭한 일들 공(公)께서 하셨도다.
몰아치는 큰 파도 공(公)께서는 두려워 하지도 않으시고 오직
충성과 신의로 그 임무 잘해 내고 이에 무사히 돌아 오셨다.
나, 청연시강도(淸讌侍講圖 ; 청연각에서 임금님께 강의하는 그림)
신라,고려로 내려오면서 문치(文治)라 하여도 문장(文章)에만
힘쓰다가 예종(睿宗)때에 이르러 비로소 경술(經術)에 힘쓰기
시작되니 청연각(淸讌閣)을 창설하고 크게 경전(經傳)을 가득
채우고 학사(學士) 세 사람을 두는데 당대의 가장 큰 학자로
책임 맞게 한지라 첫,번째,장관(長官)에,임명되어,매일,성리학을
강의 하였다. 임금님의 총애와 대우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고
우리 나라의 경학(經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칭송하는 글)
질서정연한 청연각(淸讌閣)에 준수한 선비들 모여드니 정치의
긴요한 책들은 책장에 있고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은
병풍에 쓰여 있도다. 오직 그 충성 근본 있어 경술(經術)에서
얻은지라 넘쳐 이루어진 것 글은 병려체(騈儷體)요, 글씨는
안진경(顔眞卿)다, 진연륵석도(進宴勒卿)체로다.
다, 진연륵석도(進宴勒石圖 ; 잔치에 참석하고,비석에,글씨,쓴,그림)
때는 예종(睿宗)十二년 六월이다. 지난번에 송(宋)나라 임금을
뵌 사신이 돌아옴에 제(帝 ; 송나라 임금)가 계향술(桂香御酒)
과 용봉다(龍鳳茗團)와 진과보명(珍果寶皿)을 내려 주었다.
이날에 그것으로 잔치를,꾸몃는데,왕께서,친히,술잔을,잡으시고
아홉 순배가 되기까지 즐거움을 극진히 하고 물러 나왔다.
다시,중귀인(中貴人)을,시켜,서대(犀帶)와,습의(襲衣)를,내리시고
또 편전(便殿)으로 불러 술을 마시며 밤,늦게 끝내고,이,사실을
김연(金緣)에,글을,짓게,하고,공(公)에게,돌에,글씨를,쓰게,하였다
(칭송하는 글)
제(帝)가 보내온 술 향기 좋다. 나의 술상으로 꾸몄으니,서대
(犀帶)와 습의(襲衣)를 내리시고 저녁에 시작한,연회,날,새도록
이어 졌네. 김공은 기문을 짓고 공(公)께서는 글씨를 쓰니 이
이름 돌과 같이 전하리.도적찬(圖蹟贊)은,연천(淵泉),홍공(洪公)
의 지음인데 진연륵석(進宴勒石)과 신봉배위(神鳳陪衛),두,그림
에는 문(文),찬(贊)이 없으므로 二十八대손 진표(震杓)가,그, 도
(圖)에 보충 하였다.
라, 부난고비도(赴難叩扉圖 ; 난(亂)에 달려가 문을 두드리는 그림)
인종(仁宗)이,어려서,직위하였다.이자겸(李資謙)은,왕의,외조부로
나라권세를 마음대로,하므로,왕이 제거하려다가 누설됨에,자겸이
궁궐문 빗장을 부수고 대궐에 들어가 으글대기를 천지가 진동케
하였다. 이 때에 재상이나 백관들은 모두,자겸의,집에,나가 있어
그 난리에 달려가는 사람이 없었다. 공(公)이 마침 늙고 병든
몸으로 밤에 정부청사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변(變)을 듣고
탄식하기를 주욕신사,오하자안(主辱臣死吾何自安 ;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하거늘 나 자신만 편안할,수 있으리)
하였는데 나 어찌 자신의 편안만 생각하랴. 하시고,단신(單身)
으로,말(馬)에 올라,서화문(西華門)으로,달려가니,자겸의,군사가
이미 대궐을 포위하였으며 문이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짝을 두길기면서 외쳐 말하기를 노신(老臣),관(灌)이 와서
대궐에 들어가 호위하기를 청(請)한다 하시었다.
(칭송하는 글)
액운의 때를,만나,못된,것들이,사건을,일으켰다.어두운,밤거리는
시랑의 잇발 칼날 같도다. 임금님께서 다급해 졌는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걱정하리. 몸을 던져 위협에 달려드니 갈증난
말(馬)이 물가로 달려 가듯 하노라.
마, 추신월성도(추身越城圖 ; 밧줄을 잡고 성을 넘는 그림)
왕이 태자(太子)로 있을 때 공(公)의 충성스러움을 알았음에
공(公)이 대궐로 달려왔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시어
끌어 드리고자 하나 적병이 둘러 쌓여,문을,열,수가,없었다.
내시 지록연(智祿延)을 시켜 궐안에서 밧줄을 성(城),아래로
내려 줄을 타고 올라오게 하니 공(公)께서는 밧줄을 잡은채
성벽을 따라,마침내,성(城)을,넘어,들어와서,왕을,모시게,되었다
(칭송하는 글)
그 누가 성(城)이 높다 하였는고 내 넘기를 평지같이 하였네.
그 누가 에워쌈이 깊다 하였는고 나의 달려감은 집에,돌아가듯
하였네, 오직 임금님 계시는 곳이라 죽은들 딴 생각하랴.
저들이여 벼슬자리만 아는,이,이소식,듣기만,하여도,부끄러우리.
바, 신봉배위도(神鳳陪衛圖 ; 신봉문에서 임금을 호위하는 그림)
준경(俊京)의 군대가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한지라 왕을 모시고
신봉문(神鳳門) 쪽으로 나오니 군인들은 왕의 의장(儀仗)인
황산(黃傘)을 보고 모두 늘어서 절하고 만세(萬歲)를 불렀다.
왕께서 묻기를 어찌하여 무장(武裝)을 하였는고 하니 대하여
말하기를,궐안에,도적(盜賊)이 있나이다.하기에 왕은 없나리라.
어서 무장(武裝)을 벗고 돌아가거라 하시면서 당신 수중에
있는,은폐(銀幣)를,줄에 달아,내리어,기뻐하게,하고,이중(李仲)을
시켜 더,잘알도록 지시했는데 준경(俊京)이 칼로 이중(李仲)을
위협하여 쫒아버리고 군사로,하여금,다시,그전과 같이,포위하여
쏘는 화살이 어전에 미치는 지라 급히 방패로 막아 면하게
되자 자겸(資謙)이 최학란(崔學鸞)을 시켜 주청하되 작난한,
자를 내어 보내소서 하니 이는 김찬(金粲)과 오탁(吳卓)을
가리킴이라 몰래 작난 자(作亂者)를 질책하는 듯이 왕을 협박
하니 왕이 아무 말을 못 하셨다.
(칭송하는 글)
간흉한 놈을 없애버리는 계획이 무너지자 화(禍)가 신봉문
(神鳳門)에 박두 했도다. 왕이 친히 모습을 나타내고 내탕
은폐(銀幣)까지 내렸으나 오히려 시끄러움을,그치게,못,했구나.
김찬(金粲),오탁(吳卓)을,마음대로 빼돌리고,칼로는,이중(李仲)을
막는도다. 화살이 왕에게 미치니 어느 여가에 그 밖의 무리를
구하겠는가.
사, 산호보종도(山呼步從圖 ; 산호정 까지 보행으로 시종하는,그림)
공(公)이 이미 입시(入侍)하되 왕의 곁을 떠나지 아니한지라,
자겸(資謙)이 그 무리 척준경(拓俊京)으로 더불어 궁궐에 불을
지르고 왕을 핍박해 급하게 되었다. 불은 동화문(東華門)에서
시작되었는데 잠깐 사이에 내침으로 번져 궁인(宮人)들이 모두
놀라서 피신한지라 왕이 불을 피하여 도보(徒步)로 산호정
(山呼亭)에 이르니 정자는,후원(後苑)에,있어 조금거리가,있었다
시종이 다 흩어지고 오직 근신(近臣),몇,사람 뿐이라,공(公)이
좌우로 돌보아 왕의 몸을 보전하였다.
(칭송하는 글)
훨훨 타,오르는 변란의 불은 금석(金石)이 모두 녹는 것,같거늘
오직 충정의 옥이야말로 불 속에서도 더욱 하얗게 된다.
나의 걸음 비록 둔하지만 나의 마음 더 한층 붉을 뿐이다.
왕께서 이러한 신하 있으니 위태로운데,있어도,안온하도다.
아, 서화순절도(西華殉節圖 ; 서화문에서 순절하신 그림)
그,이튿날,불길은,더욱,치열하였으니,자겸(資謙)이,왕을,핍박하여
남궁(南宮)으로 나오시게 한지라 왕께서는,할,수,없이 도보로
서화문(西華門)으로 나가는데 준경(俊京)이 그의 장수 장성
(張成)을 시켜 왕께 시위(侍衛)한 사람을 모두 죽였다.
장군 오탁(吳卓)이 왕을 인도하여 앞으로 나가려 한데 장성
(張成)이 칼을 빼어 갑자기 어전(御前)에 들어와 오탁(吳卓)을
잡아 죽이니 그 때에 내전(內殿)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재앙(災殃)을 면할 수 없었다. 공(公)은 늙고 병든,
몸으로 도보(徒步)를 할,수 없었다. 힘을 내어 부축이고 끌리어
왕을 따라 서화문(西華門)에 이르러서 그들에게 변(變)을,
당하게 되었다.
(칭송하는 글)
아득한 천지사이 정기(正氣)는 멸하지 아니한 지라 때로는
상산태수(常山太守)였던 안고경(顏杲卿)의 충절로 죽은 유발
(遺髮)도 되고 때로는 시중(侍中)이었던 혜소(嵇紹)의 임금
진혜제(晉혜帝)를 위해 죽은 유혈(遺血)도 되도다.
우뚝한 저 서화문(西華門)에 뛰어난 충절의 자취 빛나니 모든
신자(臣子)들 그 붉은 단심(丹心)을 보라.
가선대부행.승정원좌승지,겸,동지춘추관의금부사규장각검교직각
(嘉善大夫行承政院左承旨兼同知春秋館義禁府事奎章閣檢校直閣)
홍 석 주(洪奭周) 찬(撰)
문정공파 중앙종회 부회장 (文正公派中央宗會副會長)
홍 석 환(洪錫煥) 근역(謹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