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18: 마조의 달구경
마조와 백장, 서당, 남전이 달을 구경하던 차에 마조가 물었다.
“바로 이러할 때는 어떠한가?”
백장이 말했다.
“수행(修行)하기에 딱 좋겠습니다.”
서당이 말했다.
“공양(供養)하기에 딱 좋겠습니다.”
남전은 소매를 떨치고 가버렸다.
마조께서 말했다.
“경(經)은 장(藏: 서당 지장)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해(海: 백장 회해)에게 돌아가는데, 오직 보원(普願: 남전 보원)만이 홀로 물외(物外)로 초월하였구나.”
馬祖與百丈西堂南泉玩月次。祖曰。正與麼時如何。丈曰。正好修行。堂曰。正好供養。
泉拂袖便行。祖曰。經入藏禪歸海。唯有普願獨超物外。
오늘날까지 화두로 전해졌다는 것은 여기에 대해서 이전부터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고 저마다 시비가 분분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눈 밝은 선객의 바른 안목이 절실한 것이다.만약 바른 안목으로 지적하지 않으면 먼 미래에 가서도 여전히 시비만이 분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지금이나 밝은 보름달은 모두를 사로잡는다.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백옥처럼 흰 달이 둥실 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회에 젖게 하는 것이다.
마침 마조선사와 세 제자들 역시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법당의 계단 앞에 떠 있는 것이다. 이때 마조대사께서 물었다.
“바로 이러할 때는 어떠한가?”
바로 지금 이처럼 밝은 달이 구름 한 점 없고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옥구슬처럼 휘영청 한데, 이것을 불법의 이치에 비추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이에 백장스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수행(修行)하기에 딱 좋겠습니다.”
무엇을 수행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은 기도나 염불이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참선이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경전을 읽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백장스님이 생각하는 수행이란 무엇일까? 여기에서는 이 수행을 알아야 이 화두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의 기본 정의는 ‘이치를 그대로 성취하기 위해 가르침을 따라서 닦고 세 가지의 바른 업을 익히는 행위를 말한다. (理修習作行也, 通於身語意之三業)’라고 한다. 여기에서 세 가지란 곧 몸으로 짓는 행위, 입으로 짓는 행위, 마음으로 짓는 행위를 살펴서 악은 그치고 선은 증진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악인가? 탐진치이다. 무엇이 선인가? 무탐, 무진, 무치이다. 탐진치에는 세 종류가 있다. 욕계의 탐진치가 있고 색계의 탐진치가 있고 무색계의 탐진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흔히 욕계의 탐진치의 번뇌를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고 부르고 색계, 무색계의 탐진치의 번뇌를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고 부른다. 오하분결은 곧 탐욕(貪), 분노(瞋), 신견(身見), 계금치견(戒禁取見), 의심(疑)을 말하고, 오상분결은 곧 색계를 탐애하는 색애(色愛), 무색계를 탐애하는 무색애(無色愛), 탁거(掉舉), 만(慢), 무명(無明)을 말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살피고 칠각지,팔정도를 닦는다. 여기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념처관, 별상념주, 총상념주, 사가행,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를 차례로 닦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백장스님이 말하는 수행이란 곧 이와 같다는 것일까?
언젠가 부처님께서는 말하시기를, ‘저 아라한은 적염(赤鹽)의 뜻을 모른다.’라고 하셨다. 아라한이라면 이 모두 수행을 차례로 닦아서 성취를 얻는 자인데, 어째서 그가 모르는 것이 아직도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오직 자신이 공하다는 것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그는 저 일체법이 공하다는 도리는 아직 보지 못한 것이다. 무엇을 일체법이라고 하는가? 「대승백법론」에서는 심법(心法) · 심소법(心所法) · 색법(色法)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 무위법(無爲法)을 합해서 오위(五位: 다섯 종류)라고 부르고 여기에서 다시 세분하여 백 가지로 나누기 때문에 ‘오위백법’이라고 부른다. 이 오위백법이 곧 일체법인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을 줄여서 유위법, 무위법이라고도 분류할 수 있고, 내지는 분별성, 의타성, 진실성이라고도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일체법의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각자에게 맡긴다.
그렇다면 지금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저 백장스님이 말하는 수행이란 결국 무엇인가?도대체 무엇을 닦는다는 것일까? 그것을 알려면 저 적염(赤鹽)의 뜻을 알아야 한다. 적염(赤鹽)이란 곧 붉은 소금을 가리킨다. 이것을 모르면서 그저 중도, 실상, 도, 불성, 본래면목 등등을 운운하는 것은 사상누각인 것이다. 그는 전혀 백장스님을 모르는 것이며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그가 백장스님을 지나치면 어찌 서당스님인들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서당스님은 말했다.
“공양(供養)하기에 딱 좋겠습니다.”
무엇을 공양이라고 하는가? 공경하는 마음에서 음식물이나 의복 등을 받치는 것을 말한다. 누구에게 받치는가? 불법승 삼보의 이름으로 받치고, 스승이나 어른, 부모, 죽은 망자 등에게 받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신분공양(身分供養)과 심분공양(心分供養)이다. 신분공양은 물질을 받치는 것이고 심분공양은 불공심공양(不共心供養), 무염족심공양(無厭足心供養) 등을 일컫는다. 이는 곧 팔지보살이 무량한 마음을 부처님에게 받치는 것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참고로 「보살지지경」에서는 열 가지 공양을 거론하는데, 곧 신공양(身供養), 지제공양(支提供養), 현전공양(現前供養), 불현전공양(不現前供養), 자작공양(自作供養), 타작공양(他作供養), 재물공양(財物供養),승공양(勝供養), 불염오공양(不染污供養), 지처도공양(至處道供養) 등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서당스님은 어떤 공양을 올리겠다는 것일까?
귀하다는 것을 알고 고마운 줄을 아는 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귀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전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가버렸다.
도대체 그는 어떤 자일까? 그는 곧 저 백장스님의 뜻에도 흡족해하지 않고 서당스님의 뜻에도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이것을 가만히 지켜본 마조선사께서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經)은 장(藏: 서당 지장)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해(海: 백장 회해)에게 돌아가는데, 오직 보원(普願: 남전 보원)만이 홀로 물외(物外)로 초월하였구나.”
경(經)이란 곧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을 가리킨다. 선(禪)이란 곧 조사선(祖師禪)을 가리킨다. 물외(物外)란 곧 사물 밖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물이란 곧 속세의 의미가 있고, 제자의 의미가 있다.따라서 물외(物外)란 곧 속세를 초월한 절대적인 세계, 내지는 스승과 제자의 범주를 뛰어넘은 경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계는 어떤 차원의 세계일까? 그리고 한편 저 마조대사는 어떤 안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 예로부터 시비가 분분했지만 오직 바른 안목만을 대장경의 목록에 수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온 것이 바로 지금 주로 거론되고 있는 선어록들인 것이다.
옛 사람은 노래하였다.
고도(古渡: 옛 나루터)에 바람이 없음에 곧장 낚시를 드리우고
사륜(絲綸: 칙령)을 내린 뜻은 고래와 자라를 낚기 위함이다.
마대사의 말 아래에서 가문의 추함을 드러냈으니
천고에 자손들이 풀 속에서 노닐었다. (담당 심)
古渡無風下直鉤。絲綸意在得鯨鰲。
馬師言下揚家醜。千古兒孫草裏遊。(湛堂深)。
대기대용이여
은산이고 철벽이다.
공양하고 수행함이여
눈은 가로이고 코는 세로로 곧다.
소매를 떨치고 곧장 감이여
만상이 자취를 끊었다.
감히 모든 사람에게 묻노니
도대체 이는 누구인가? (저납 수)
大機大用。銀山鐵壁。供養修行。眼橫鼻直。
拂袖便行。萬象絕跡。敢問諸人。誰是端的。(楮衲秀)。
개복 녕은 말했다.
“마대사께서는 평소에 사권묘수(舒卷妙手: 말고 펴는 묘한 솜씨)가 천연스러웠는데도 역시 구름 속의 기러기를 보는 것을 탐하여 나루터에서 배를 놓쳤다. 만약 점검해낼 수 있다면 털을 뒤집어쓰고 화취(火聚: 화탕지옥)에서 노닐고 뿔을 (머리에) 얹고 진흙(밭)에 뒤섞이리라. 혹 견처가 몽롱하다면 그대를 위해 주석을 하리라.
경이 장에게 돌아가고 선이 해에게 돌아감이여, 아직 납승의 친근함에 이르지 못하였다.
소매를 떨치고 전행(前行: 왔던 길)으로 돌아감이여, 겹겹의 관문을 부수고 활짝 열었다.
그렇다면 (저) 마대사는 보았는가?”
양구(良久)하고는 말했다.
“쉬고 쉬니 장안의 밤마다 집집마다 달인데, 어떤 집에서는 악기를 타고 노래하고 어떤 집에서는 근심스러워하였다.”
開福寧云。馬大師等閒舒卷妙手天然。也是貪觀雲裏鴈。失卻渡頭船。若人撿點得出。披毛遊火聚。戴角混塵泥。其或見處朦朧。為你下箇註腳。經入藏。禪歸海。未是衲僧親到底。拂袖前行歸去來。擊碎重關門大啟。還有見馬師者麼。良久云。休休。長安夜夜家家月。幾處笙歌幾處愁。
여기에 대해 한 구절을 보탠다.
공양하고 수행함이여
계수합장정대(稽首合掌頂戴)이다.
소매를 떨침이여
겹겹의 관문을 뚫고 가난을 자초하였다.
마대사여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다.
고림선원에서 취산 합장
첫댓글 소매를 떨치고 지나감이여
겹겹의 관문을 부수고 활짝 열었다 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