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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파미르하이웨이를 가다 3- 무르갑
* 고원위의 역참마을, 무르갑
파미르의 타지크쪽 입구 도시인 호로그(Krog)에서 M41도로를 타고 달려도 무르갑(Murghab)까지는 311km나 되는 장거리이다. 그러나 와칸주랑의 랑가르에서 M41도로로 올라선 다음 필자의 중간 숙박지였던, 파미르의 최대의 유적군락지의 중심 마을 알리추르에서는 무르갑은 다음 마을이어서 그리 멀지 않아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지만, 이 도로는 이름은 거창한 ‘하이웨이’ 이지 사실은 포장도로보다는 대부분의 구간이 비포장의 길이다. 그래서 몇몇 구간은 험난한 도로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해빙기에는 산사태나 눈사태로 인해 툭하면 도로가 끊겨서 몇 시간, 심지어는 며칠 동안 불통될 때가 있음으로 이곳을 달려보고 싶은 나그네들은 장기전을 각오하는 여유로운 마음과 며칠 동안의 물과 비상식 등을 준비하고 그 길로 들어서는 것이 좋다. 왜냐면 알리추르와 무르갑 이외에는 중간에는 아무런 숙소가 없는 황량한 황무지이기 때문에 만약 타고 가던 차량이 고장이라도 나면 큰 낭패를 맞보기 때문이다.
무르갑은 ‘새들의 강’이라는 부르는 무르갑 강 유역에 자리 잡은, 파미르 두 번째 도시로써 실크로드가 번영할 당시는 서역이나 인도로 나가는 길목의 오아시스 역참(驛站)도시로써 번성하였지만, 현재의 무르갑은 그런 옛스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도시로 변해버렸다.
최근 들어 중국의 무지막지한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키르기즈 그리고 타직과 교역량이 많아지고 그 영향으로 철로 만든 막대한 수량의 컨테이너들이 무한정 파미르고원으로 밀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렵게 집을 짓는 대신에 값 싼 컨테이너 자체를 주택으로 사용하거나 옛 바자르 터에 두 줄로 컨테이너 여러 개를 일렬횡대로 연결해서 그 중간으로 사람들이 다니며 물건을 살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상가를 조성해 놓았다. 이름하여 생소한 이름의 ‘컨테이너 바자르’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별로 머물고 싶은 곳은 아니나, 북쪽의 키르기즈의 오쉬쪽에서 넘어 오는 나그네는 해발고도 적응 차, 동쪽의 중국에서 오는 현주민들은 장사차, 남쪽의 타직에서 오쉬로 넘어가는 길손은 숨고르기 차, 이 삭막한 고원도시에서 하루 이틀 머물다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무르갑에서의 하루는 무미건조하다. 그저 하루 종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슬리핑백 뒤 집어 쓰고 그 동안 밀린 잠을 자는 것이 전부이다. 유일한 낙이 있다면 저녁 나절 쯤, 눈 여겨 보았던 카페 중에 한 곳에 들려 간단한 국수인 라그만과 맥주를 시켜서 홀짝거리며, 역시 할 일 없어 그곳에 모여든 코쟁이 나그네들과 각기 지나온 곳의 정보를 나누는 정도일 것이다. 이들 카페는 벽이나 간판에 영어로 ‘Cafe’ 라고 써 있기에 찾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 <파미르지도> 무르갑 부근 지도
▼ 무르갑 이정표
▼ 무르갑의 명물인 컨테이너 바자르
▼ 무르갑 전경
▼ 무리갑의 카페
▼ 관광 안내소
* 낙타들의 사랑장면은 절대 보지 마라.
먼저 글에서 낙타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만 것 같아 이야기를 계속 하기로 한다. 이 글을 정리를 하다 보니 우리들은 낙타에 대해 많은 것을 잊고 살았던 같다. 먼저 생물학적 자료들1)은 각주로 돌리고 우선 시 한 구절 다시 읊어보자.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신경림 시인의 ‘낙타’ 전반부>
이미 앞에서 이 시는 소개한 바 있음을 기억하실 것이다. 이른바 절창시(絶唱詩)이다. 사실 필자는 그 동안 그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먼 하늘만 바라보며 한 주일을 보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마치 필자의 유서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황혼 나이의 실크로드의 마니아가 그림 속의 낙타를 타고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 속으로 들어가는 이미지는 그럴싸하지 않는가? 그래서 내킨 김에 몇몇 친한 벗들에게 이 시를 마치 내 마지막 유서처럼 보내면서 그들을 놀라게 하는 짓궂은 장난도 처 보기도 했다.
각설하고, 먼저 7080년대의 가수인 이연실의 노래 <목로주점>에 낙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월말이면 월급타서 밧줄을 사고 연말이면 적금타서 낙타를 사자.
뭐, 대충 그런 가사였는데 그녀뿐만 아니라 당시 암울했던 시대에서의 탈출수단이 낙타로 비유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낙타는 저승길뿐만 아니라 적금타서 떠나는 여행길의 길 동무로도 제격인 동물이란 뜻 일게다. 또 어느 시인은 이렇게 읊기도 했다.
낙타구름 떠가는 봄날 낙타는 사람을 배워 사람처럼 흐느끼고,
나는 낙타를 배워 무릎을 꿇는다. <박태일 시인>.
또 다른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과 낙타를 비교하기도 했다.
빨리 가려면 말을 타고 달려라. 멀리 가려면 낙타를 타고 걸어라.
말을 탄 사람은 점점 속도가 떨어지지만, 낙타를 탄 사람은 목적지까지 줄기차게 걸어간다. < 박노해의 ‘말과 낙타’>
사실 낙타를 빼놓고 사막의 그럴듯한 그림을 완성할 수 없듯이 낙타는 사막에 사는 동물을 대표한다. 아니 사막 자체를 상징한다고도 말 할 수도 있으리라. 사막 언저리에 사는 유목민들의 필수적인 가축은 개와 말과 그리고 낙타이다. 우선 개는 늑대 와 같은 위험으로부터 가축을 지켜주고 주인을 잘 따르는 가족 같은 동물이고 말은 유목민들의 이동수단이자 물자 운송수단이며 나아가 우유와 적당한 알콜도수의 마유주(馬乳酒)를 제공해주고 마지막으로 낙타는 아무리 거친 땅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도록 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고대에도 이미 그것을 대변하듯이 당나라의 유명한 테라코타(Terracotta)2)형식의 조소인 당삼채(唐三彩)3)에서도 낙타는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낙타 위에 소그드 악대>이란 이름의 일종의 조소 위에 채색을 입힌 작품인데, 주로 고분의 부장품으로 발굴되고 있다.
여기서 소그드인(Sogdian)이란 바로 현재 우즈벡을 중심으로 한 소그드(Sogd)4)지방의 본토인을 말하는데, 천재적인 상인으로 중국 쪽 기록5)에 등장한다.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했던, 당나라 시절의 유물 중에 낙타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낙타는 길에서 길을 잇는 역사와 문화의 소통의 상징이다.
▼ <낙타 위에 소그드 악대> 당삼채/ 낙타위에 여러 명의 소그드인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는 형상인데, 완성도가 높은 실크로드 예술품의 최고의 걸작에 속한다.
▼ 울음 우는 낙타 당삼채
낙타의 속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다. 우리 머리 속의 각인되어 있는 이미지는 느릿느릿 모래사막을 걸어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막상 낙타 등에 앉아 있으면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그 속도가 빠르다. 일반적인 말의 속도는 시속 45km 정도인데, 낙타경주대회의 속도는 65km까지 나가고 40km 내외로 1시간 가량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낙타는 장거리 이동에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한 때 프랑스가 아프리카에서 낙타부대를 운용한 적이 있는데, 1932년 3월 어느 추격전에서 8일 동안 770km 가량을 이동하면서 적을 공격하였고, 1911년에는 샬레대위의 부하들이 투아레그족을 7천km를 달려가며 추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낙타가 정이 많고 감성이 풍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순하고 유약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낙타는 착한 생김새와 달리 성깔은 아주 고약한 면도 있다고 한다. 낙타라고 살면서 어찌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는가?
사막에 전하는 속설에 의하면. 그럴 때면 낙타의 눈을 가리고 타던 사람의 겉옷을 벗어두고, 낙타 앞에 던져둔 주인은 멀리 숨어있고 낙타의 눈을 풀어주면 낙타가 겉옷만 있는 걸 주인으로 착각해 화가 풀릴 때까지 밟아댄다. 옷이 걸레가 되고 낙타의 화가 풀리면 그때 다시 타고 가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 낙타의 아이큐를 검사해볼 필요가 있겠지만….
이렇듯 낙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주인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특히 발정기의 암수 낙타들의 사랑장면을 절대 보지 마라. 호기심으로 자신의 죽음을 자초할 수 있다고 한다. 낙타는 자신들이 교미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모든 것들을 특히 싫어해서 동물이든 사람이든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낙타의 흉을 하나 더 보자. 바로 낙타의 입냄새에 대해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낙타는 화가 났을 때는 위액이 섞인 침을 뱉는다. 이 침방울은 사방으로 멀리까지 튀는데, 그런데 이 냄새는 정말로 지독하다. 스컹크란 동물이 냄새로 적을 제압한다고 하는데, 낙타에는 상대가 안될 것이다. 이 침공격을 한번 받아본 나그네들은 다시는 낙타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낙타는 걷는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보통 4족 보행 동물과는 달리 왼쪽다리 두개가 한꺼번에 나가고, 오른쪽다리 두개가 한꺼번에 나가는 이상한 걸음걸이를 한다. 그래서 처음 낙타를 타는 사람들은 적응을 못하고 멀미를 하기도 한다. 이 걷는 방식을 몽골인들은 ‘조로모리’ 식이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움직임이 효율적인데다가 전후구동식보다 훨씬 편안하고 반동이 적어서 마상에서의 자유로운 칼놀림이나 활쏘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군마를 이런 식으로 훈련하기도 한다고 한다. 지금도 올림픽에 나가는 마술경기에서 이런 말걸음을 볼 수 있다.
▼ 낙타 위의 소그드 악대
* 우리나라 역사 속의 낙타
현재로서는 낙타는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이색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몇몇 길목에서의 상황반전에 따라서 낙타는 우리에게 유익하고 친근한 동물이 되어 경제적으로 또한 군사적으로, 말 보다 더 커다란 몫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 기회를 놓쳐 버렸기에 지금도 여전히 낙타는 우리에게 이색적인 동물로 남게 되었다. 그 계기를 한 번 돌이켜보자.
[고려 태조 25년(942)]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서 낙타 50필을 선사하였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갑자기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심히 무도하다. 화친을 맺어 이웃을 삼을 것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그리고 사신 30인을 섬에 유배시키고 낙타들은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다 굶어죽게 하였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정리하고 고려를 세우자, 동북방의 유목민족인 거란족[契丹族, 후의 遼나라]의 야율아보기는 태조 5년(922)에 낙타와 말을 보내 수교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16년 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遼)나라를 세운 다음 태조 25년(942년)에 거란은 또 다시 사신 30명과 낙타 50두를 보내 정식으로 화친을 요청했다.
그러나 태조는 ‘무도(無道)한 나라’하고 하여, 거란의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들은 개성 보정문 안의 만부교(萬夫橋) 아래 매어두어서 굶어죽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훈요십조(訓要十條)’6) 제4조에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지목하여 그 언어와 풍속을 본받지 말도록 하는 강령을 후손들에게 내렸다.
필자는 정치나 군사면에는 별로 관심없는 사람이지만, 이른바 이 ‘만부교사건’은 태조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생각한다. 그 당시 동북아시아 상황은 중원대륙의 최강자를 자처했던 당나라가 멸망하고 북방의 맹주였던 돌궐마저 약화되어가는 시기였기에, 오랫동안 이 두 나라 사이에 끼여 기를 못 피던 거란족이 야율아보기라는 희대의 영웅의 출현으로 통합되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서쪽으로는 위구르 그리고 이제 막 당나라를 대신한 송나라까지 넘보려던 진출하려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거란은 아시아대륙 최대의 강대국이었지만 그러나 당시 중원중심의 사대주의에 젖어 있던 고려 태조는 멀리 떨어져 있는 송나라를 위하여7) 애써 화친을 하러온 거란의 사신을 귀양 보내고 더구나 우호의 선물인 진기한 낙타들을 굶겨죽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돌아올게 빤한 이치임에도 불국토를 지양하며 나라를 새로 세웠다는, 고려 태조 왕건의 감성적인 결정으로 고려는 36년간 3차에 걸친 전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고려8대 현종 때(1019년)에는 거란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상황은 그 후 요(遼)가 금(金)에 멸망하는 1125년까지 약 100년간에는 계속되었다.
고려사를 비롯한 우리의 역사는 이 거란족과의 3차의 전쟁 중 마지막 전투를 강감찬장군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이라 자랑스럽게 기록하였지만, 사실상 그 내용으로는 송과 국교를 끊고 거란의 연호를 쓴다는 강화조건이었다 하니 사실상 백기에 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의 분수령이 된 만부교사건에 대하여 우리 국사교과서는 이구동성으로 “태조의 자주적인 북방정책 의지의 표현이었다.”라는 평가로 일관하고 있지만, 동족의 나라인 발해를 무너뜨린 괘씸죄라는 단순한 태조의 인식으로 인하여 고려조의 전반부 반세기의 역사는 온통 거란족과의 싸움으로 소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공자, 맹자의 적자라는 이유만으로 망해가는 송나라, 명나라를 위해 지조를 지키다가 바로 이웃나라이며 아득히 먼 조상 때는 사촌간의 민족인 거란족[遼], 여진족[金], 만주족[淸]에게 얼마나 많은 핍박과 침략을 받았는지 역사책을 뒤져보는 알 일이다. 싸워서 이기지도 못할 바에 차라리 이런 북방민족들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내실을 기하며 때를 기다림만 못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후에 눈 밝은 연암 박지원은 열하를 방문하고 직접 낙타의 중요성을 체험했던지, 그의 『열하일기』중에서 고려 태조의 처사에 대해 한방 날렸다. “아무리 오랑캐를 거부한다지만, 죄 없고 말 못하는 짐승을 굶겨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낙타를 전략적으로 이용해볼 전략적 아이디어는 어디에도 없다. 낙타로써 낙타를 마주 대적했다면 누루하지 군대에게 무릎까지 꿇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거대한 낙타부대를 앞세우고 큰 호말을 탄 북방의 오랑캐들 앞에 작은 조랑말을 타고 마주 선 조선 군대의 이미지는 역시 거시기 하기만 하다. 사서삼경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쓰여 있지 않은건가?
낙타를 전투용으로 사용한 예는 많이 검색된다.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낙타위에 마치 원두막 같은 탑(搭)을 만들어서 전투병을 태우고는 이동하면서 높은 곳에서 화살이나 창을 던지게 하였다는 사실을 묘사한 그림이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중동지방에서는 낙타 위에 탑을 설치하여 일상시는 강한 햇볕을 피하거나 전쟁시에는 전투력의 증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청나라와 몽골 부족간의 전쟁 때도 ‘타성(駝城)’ 이란 기록에 나온다. 1690년 청나라의 영걸 강희제는 북방의 몽골족의 가르단토벌에 나섰는데, 이 때 “낙타 1만 마리의 다리를 서로 묶어 펠트로 덮고는, 그 뒤에 숨어서 성벽처럼 전개했다.” 바로 세계전쟁사에 유례가 없을 ‘타성(駝姓)’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말은 낙타를 꺼려한다고 한다. 일설에는 낙타의 고약한 침공격으로 인한 냄새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말이 저보다 더 크고 우람한 낙타에게 두려움을 느낄 것은 당연하니 말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옛 전투에서 말의 견제용으로 낙타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고 보인다.
낙타에 대한 기록은 그 후에도 계속된다.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탐라를 제주라 개명하고 수산평에 목마장을 설치하고 전문 목부를 두어 몽골말 160마리와 소, 말, 양, 낙타를 방목하게 하였다.8)
▼ 고려사 태조 25년조
▼ 유엔의 낙타 정찰병
▼ 낙타 포병
▼ 고대 페르시아의 낙타 전투병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낙타의 이야기는 왕조실록에 34건이나 검색되고 있다. 그 중 9대 성종 17년(1486)조를 보면, 호조판서 이덕량이 낙타를 사자고 올린 주청에 대하여 성종이 이를 허락한다.
“(전략) 또 낙타[橐駝]는 무거운 짐을 싣고 멀리 갈 수 있으니, 군사를 일으킬 때에 양식을 실어 나를 만하다. 베 60필을 보내어 사오도록 하라.”
그러자 대사헌 이경동(李瓊仝) 등이 3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상소를 올렸다.
“신(臣)들이 듣건대, 흑마포(黑麻布) 60필(匹)을 보내어 중국에서 낙타를 사오라고 전교를 내리셨다하니, 이에 옳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를 아룁니다.
낙타는 먼 지방의 기이한 동물인데, 비싼 값으로 중국에서 구하는 것은 기이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며, 토성(土性)이 아니면 기르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옳지 않은 것의 첫 번째입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 반대 이유는 요즘 유행하는 신토불이의 논리이고 두 번째는 위의 고려초 태조의 예를 들었고, 세 번째는 “쓸데없는 짐승을 사려고 전세(田稅) 콩 4백석을 쓰려는 것이니…” 라는 경제논리였다.
그러자 성종은 벌떼 같은 신하들의 반대상소가 귀찮아졌던지 애초 전방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무신 이덕량(李德良)9)의 의견을 듣고 낙타를 전략적으로 사용해볼 생각을 가졌던 계획을 접고, 다음과 같이 전교를 내려 백지화 하고 만다.
내 당초의 마음은 이 짐승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단지 중국에서 전쟁할 때 [出征]에 쓴다고 하므로, 내가 사서 한 번 시험하려고 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니 단지 물건을 애완하려는 뜻이 아니지만, 이제 그대들의 바른 의견을 들었으니, 이를 즐거이 따른다.”
온통 공리공론의 사서삼경만 줄줄 외우는 재주만 있던 선비 중에 그 누가 낙타를 타본 경험 있는 지략가가 있어 북방에서 뼈가 굳은 백전노장의 전략과 성종의 깊은 뜻을 거들었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후의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참혹한 상황의 결과도 좀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물론 당시 호조판서이던 이덕량은 무신으로 북방 국경의 야전사령관으로 건주여진족(建州女眞族)10)정벌에 직접 참전하여 아마도 낙타의 전략적인 가치가 말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이를 성종에게 건의 하였으나 반대편 문신들에 의해 여지없이 묵살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세종 다음으로 대왕이라 불리는 성종도 그렇지. “동물원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오랑캐들과의 전쟁 때 사용하려는 계획…” 이라고 좀 더 뻗대 보셨어야지. 에그, 답답해…
그래도 조선조 말기까지 주위에서 낙타를 가끔 볼 기회가 있었던지. 단원의 그림에도 낙타가 등장하고 있다.
참, 6.25 전쟁 때 중공군의 낙타부대가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에 참전했다는 기록까지 보이는 것을 보면 낙타와 우리와 인연은 질긴 면도 있는 것 같다.
▼ 단원 김홍도의 낙타도
그러나 낙타를 타고 앉아 있는 사람은 청나라의 병사로 보인다.
1) 낙타의 조상은 약4천만 년 전에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프로틸로푸스(Protylopus)에서 남아메리카로 내려가서는 야마, 과나코, 비쿠냐 등으로 가지를 치며 진화했다. 그 후 소빙하기가 베링해협의 드러나서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가 연결됐을 때 이 때 낙타도 유라시아로 건너가서 널리 퍼져갔다.
길들여진 시기는 말보다 늦은 편인데, 낙타를 길들인 덕분에 북아프리카의 사막 지대를 넘을 수 있게 돼서,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이 아프리카 중부 지역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낙타는 초식동물이며 사막에 사는 동물이라서, 어떤 식물이든 말랐건 신선하건 모두 다 먹을 수 있다. 또한 낙타는 자신의 혈액을 다른 포유동물이 견딜 수 없는 정도까지 희석시켜도 견딘다. 소변도 진하게 보기 때문에 노폐물 처리에 물을 덜 소비한다. 덕분에 약 30일 정도는 물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혹이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진다.
2) 테라코타는 이탈리아어로 구운(cotta) 흙(terra) 에서 유래한 것으로, 도기나 건축용 소재 등에 사용되는 초벌구이를 뜻한다.
3) 당삼채는 중국 당대의 도기로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주로 장안·낙양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었고, 묘릉에 부장되었다. 도질(陶質)의 소지에 화장한 다음 녹·갈·황·백의 연유로 화려하게 칠하였으며, 또는 코발트의 남유(藍釉)를 칠한 것도 있다. 여러 가지 형태의 남녀 인물상, 신상, 진묘수(鎭墓獸), 말, 낙타 등의 각종 명기. 당대 귀족의 취미, 생활양상을 잘 나타내고 또 당시 유행한 서아시아풍 의장과 복식이 가끔 보인다. 아마도 측천무후(재위 690∼705) 경부터 출현하여 후장(厚葬)의 풍습이 높아짐에 따라 크게 유행하였으나, 안록산의 난(756) 이후에는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나 발해삼채, 요삼채, 송삼채 등과 페르시아 삼채 등에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고 한다.
4) ‘트랜스 옥시아나’라고도 부른다. 현 우즈벡 북쪽에 있는 내륙해인 아랄(Aral)해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흘러드는 시르다리아 강과 남쪽으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있는 땅을 말하는데, 현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구쏘련 연방의 중앙아시아 국가의 땅을 가리킨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소그디안(Sogdian)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당시 로마나 중국 모두에서 상술의 달인들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5) 「당회요(唐會要)」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꿀을 먹이고 아교를 손 안에 쥐어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입으로는 항상 감언을 놀리며 아교가 물건에 붙듯이 손에 돈을 가지게 되었으면 하는 염원이다. 그들은 장사를 잘하며 적은 이윤이라도 다툰다. 남자는 20세가 되면 다른 나라에 보내는데, 중국에도 온다. 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간다. 』
6) 942년(태조 25년)에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으로 고려의 헌장(憲章)에 해당된다
7) 왕건은 중국측 사신이 그를 방문했을 때 "발해는 본래 우리 고려와 친척의 나라인데 저 배은망덕한 거란이
신의를 저버리고 불시에 기습하여 발해를 멸망시켰으므로 이 짐승만도 못한 거란을 짐과 그대의 나라가 연합하여 무너뜨리자" 고까지 하였다.
8) <본문> 원에서 탐라를 방성(房星)의 분야(分野)라 하여 말 1백 60필과 소ㆍ낙타ㆍ나귀ㆍ양을 갖다가 수산평(水山坪) 에 방목하였다. 탐라는 왜국과 해상의 통로가 되므로 원나라에서 합포(合浦)에서와 같이 경비를 엄중히 하였다. (수산(水山)은 지금 정의현(旌義縣) 동쪽 24 리에 있다고 합니다)
9) 이덕량(1435~1487)은 세조와 성종 시대의 무신으로 세조3년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고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회령부사가 되어 공을 세웠고 성종4년(1473) 문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경기도 관찰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처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정벌에 공을 세워 형조판서, 대사헌,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0) 고려 말부터 몽골의 세력약화를 틈타 북방개척이 진전되면서 만주에 살던 여진족과의 충돌이 잦아졌는데, 대륙을 통일한 명나라는 여진족에 대해서 회유와 강경책을 병행하여 여진족의 건주위(建州衛)자치주를 인정했다. 한편 조선은 나름대로 이들을 회유하여 초기에는 비교적 평온한 관계가 유지되었으나 여진이 국경을 침입해 약탈하는 사건이 빈발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여러 차례 정벌을 시도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고하고 여진은 계속 세력을 확충했다, 청을 건국한 누루하치가 바로 건주위 여진족 출신이란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댓글 *막판 피치에 응원 드립니다 ᆞ
수고 많으시구요 ᆞ 낙타사랑ᆞ
많이 하세요 ᆞ저승길에 낙타와 함께 하시려면 . ㅎㅎ
낙타의 눈물에서 낙타사랑으로 다시
낙타의 유서로 바뀌였군요 ㅎㅎㅎ
역시 역사문화 산책 다운 차별화된 내용이군요. 어디서 이런 자료들이....ㅠㅠ
당삼채 낙타에 그런 뜻이....
카슈카르 사막에서 초미니 카라반을 해보는 솨람......비단길여사
장하다. 비단여사~ 낙타에서 떨어지면 약도 없다던데.... ㅎㅎㅎ
어유~ 떨어지실라
같은 곳을 갔다 온 나는 왜 몇줄밖에 쓸게 없었을까?
대신 뭘 쓸 욕심에 경치는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다닙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