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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巖集卷之二 潘南朴趾源美齋著 / 煙湘閣選本○神道碑
嘉義大夫行三道統制使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謚忠烈李公神道碑銘 幷序
嗚呼。當淸人建號之初。刦執我使。必欲一得其庭拜。是固將聲噪於天下曰。朝鮮禮義之邦。率先諸國而帝我也。爲使者。噫其急矣。其頭可斫而不可叩。其膝可斷而不可跪者。苟非如故統制使李公之爲。使環東海數千里之國。將何以自明於天下乎。力可以拔瀋陽擧全遼。而不能勝弱國一介之使。威足以服蒙古四十餘王。不終朝而破杜松二十萬之衆。不能折匹夫之腰而膝之庭。獲玉璽陳符命。沛然自以爲得之于天者。若彼其易焉。其得我使之一拜。若是之難也。然而事在疆域之外。有非國人之所快覩。則身旣生還。跡涉受書。當時辱國之論。惡可已乎。其後明邊帥之奏天子。中原遺民之所圖畫。稍稍得之於傳聞之中。而國疑漸釋。始加褒贈之典。然其敵庭强悍之蹟。尙在國人信惑之間者。于玆百有四十餘年。此固萬世公議之所不能泯。而淸皇帝之所不得掩也。謹按公諱廓。字汝量。系出璿派。其所自祖曰王子敬寧君。考諱裕仁。文科咸鏡道觀察使。倭寇時被害。贈禮曹判書。妣貞夫人慶州崔氏。萬曆庚寅生公。三歲而孤。及長。身長八尺。聲如巨鍾。膂力絶倫。屹然將帥材也。李文忠公恒福憐其孤貧。勸武中甲科。除宣傳官。猛虎入禁苑。公射殺之。賊臣脅文武百官。庭請廢大妃。公不參班。人皆危之。勸公稱疾。公怒曰。不病則當參乎。光海日悖亂。有探公意者。公謝曰。我有母在。未敢從公等。然第努力無我疑。及靖社有密期。東城君申景禋要公俱去。公不應。公時帶御營千摠。朴承宗素信公。急招公謂曰。有告若與大將李興立叛者。吾不若疑。急聚軍敦化門外。以備非常。公遂令軍中曰。今日我特將專號令。敢違者斬。夜義旗指門。軍中擾擾。告有外兵。公乘馬東向立曰。視我馬首。有行且字公者。公陽爲不聞。呼公者東城君也。事定。諸功臣疑公。欲並誅之。延平君李貴力爭曰。使廓不讓陣。誰敢入者。延平君以平山府使擧義。而超拜扈衛大將。則力保公爲中軍。復薦公代平山以庇之。然承宗以首相誅。而嘗爲其所厚。則無以自晰。常鬱鬱不得意。明年适叛報至。公適在理。趣召見。賜弓釖禦敵。猪灘兵潰。自投江。賊購公急。及得公馬死浮水。謂公已死。乃去。公乘流屍得不死。赤身赴都元帥張晩軍。軍中疑公賊諜。欲斬之。晩赦公爲先鋒。使立功自贖。遂破賊復京城。功疑不得勳。出爲安岳郡守。尋移慈山府使。姜弘立引滿州陷義州。列郡瓦解。觀察使尹暄急招公援平壤。道聞平壤已陷。而慈亦失守。狼狽失所。據檄召諸邑兵。將赴節度使。及金起宗代暄爲觀察使。疑公在道顧望不急援平壤。欲斬之。會朝廷屬公能捕誅金德卿,高汗龍者。二賊俱西陲小譯。投滿洲。德卿僞署安州牧使。公請擒二賊自贖。遂設計斬汗龍。擒德卿。擊賊半渡。奪還俘口。追高遮博氏。射殺二從騎。起宗握手歡飮曰。恨相知晩也。遂留爲中軍。悉以軍事委之。敵退。入拜同知中樞府事。出爲慶源府使。旋移永興府使。入爲都摠府副摠管。復出爲濟州牧使。還拜同樞兼摠管。尋除會寧府使。以母老辭不赴。時滿洲已據瀋陽。數侵擾山海關。盡服屬蒙古諸番。然猶以隣道待我。不絶聘報。崇禎九年丙子。滿洲使英兒阿代,馬福塔來遺書。辭甚悖慢。所望非前日者。臺閣及太學諸生。交章請斬其使。凾首奏天子。英兒阿代等。大恐跳出舘。奪馬馳去。棄國書道中。是時士大夫皆避使瀋中。乃以公充回答使。持書追至龍灣。時春信使羅德憲先公發。方留灣上。遂偕行入瀋陽。汗見公等。益慢不肯受幣。迭使舘中誚讓十餘事。汗將郊天。先使鄭命壽誘脅萬端。公拔佩刀。授命壽曰。持我頭去。明日滿洲數十騎。鞭門大呼曰。朝鮮使趣整服。公歎曰。今日死得所矣。遂與羅公東向四拜。遙辭國。手自裂袍。踏壞紗帽。以示不復服。自解髻。騈首交綰。兩相抱持臥。汗遣壯士。挾持公等。驅至壇下。貝勒八固山番子等皆班立。蒙古騎數十萬環壇而陣。汗衣柘黃袍。執圭升壇。受尊號曰寬溫仁聖皇帝。建有國之號曰大淸。改元崇德。壯士擁公立。公輒擲身伸脚臥。壯士爭前執其臂股。抑首揭尻。四擧而覆之地。公則大呼翻身背臥。有近前者。臥輒踢其面。鼻潰血濺。是日觀者。駭惡不忍視。遂倒曳鎖于舘。明日復祀東郊。又擁公等去。公等益暴抗裂眦大罵。眞悖戾不可當。滿洲群臣請釁鼓威衆。汗曰。彼方自求殺。今殺之。反適其願。且有殺使名。不如赦還。遂爲書置裝中。使百餘騎押公。馳至鴉鶻關而去。公等始檢裝。果得汗書。驚曰。書封新印。其中可知。萬一發書。有不中舊式者。將奈何。遂置書店中。馳還脫出柵。邊上讙言。公等拜蹈敵庭。觀察使洪公命耈馳啓。請梟示境上。於是三司及太學生交章請誅。金文正公尙憲力言兩使不驗問。奈何獨先斬之。得末减。公謫宣川。羅戍白馬城。久之朝廷得都督沈世魁奏天子手本。始知公等抗義狀。兩司姑停梟首之啓。然言者猶謂沈帥詐報天朝。及馬福塔以店中所棄書。至盛怒言皇帝郊天。使臣當執禮惟恭。乃廓等悖亂。廷辱天子。何不殺是賊。以謝大國。於是從行譯官申繼愔等。始發舒鳴寃。釋公等謫。是年冬。滿洲大擧襲我。上入南漢城。時公丁崔夫人憂。命起復。入覲圍中。使守城。遣中使勸肉。又親臨勞勉。督戰御史金益煕,黃一皓,金壽益,李厚源,林墰諸公。見公備禦有奇略。許以國士。始信前使瀋中事。圍解。請歸葬崔夫人。制終。拜同樞摠管。出爲忠淸道兵馬節度使。擢拜三道統制使。其在瀋陽。被捶敺。瘀血內腫。下軆不仁。年老田居。屢辭除拜。顯宗乙巳。卒于家。葬楊根郡北鬱業里坐乙原。配貞夫人興陽李氏。應培女。生三男一女。益章,益常,益行。女適尹世美。益章,益常無後。益行五男。誢,訢,譓,諝,諒。林將軍慶業入登州。爲馬弘胄所執。送北京。道見一畵。乃公等不屈狀也。先是。皇明烈皇帝。遣御史黃孫茂。奬諭公節義甚盛。而椵島已破。詔書竟莫能傳。自是天子之使。不復至朝鮮矣。及今淸皇帝論述歷代帝王。以及汗建號時事。題曰御題全韻詩。詩刊五卷。布行天下。詩有朝鮮使不拜獨乖之語。親自詳註言。太宗旣受尊號。而朝鮮使臣李廓羅德憲。獨不拜。太宗諭群臣曰。使臣無禮。欲朕先啓釁戮其使。加我以敗盟之名。朕終不肯逞忿于一時戮其使。其勿問。尋遣歸廓等。其所稱太宗者。汗也。今上三年。特命購其書。覽而嘉歎之。命旌其閭。而謚之曰忠烈。嗚呼。是奚特公等百年之疑快卞於一朝哉。使天下萬世。益義我朝鮮獨不帝滿洲於當時也。遂爲之銘曰。
維我先王。亦維有君。大明天子。我君之君。淸未受命。卽我强隣。入據遼瀋。揮戈四瞋。鄂羅回回。杜爾伯特。扎賴翁牛。烏珠土默。莫不稱臣。益强以傲。羞稱可汗。謀僭大號。我有虎將。曰廓汝量。聘在彼舘。元不忘喪。彼雖自帝。若飽于夢。必借公拜。以誇其衆。辮髮朱帽。焰瞳鬼齶。前擁後驅。若霆摧嶽。淸之帝不。係公一俯。撑宙亘宇。確植如柱。項領土梗。腹背瓮盎。屠膓刳胃。任汝飫脹。獨保此膝。爲天下伸。彼亦赧義。以儆厥臣。巡遠不剮。武騫生還。國言沸騰。喙喙郵訕。謂公媚敵。蹈躍拜舞。洵若斯者。其咽可斧。于存于歿。跡穢名衊。挽河爲盥。誰爲滌之。斲華爲觹。誰爲摘之。幽昧暗黮。誰爲晰之。淸今四葉。號登乾隆。親作歌詩。頌厥祖功。訝公不拜。謂志獨乖。獲此一言。若天難階。觀其所註。理當粉骸。詈公悖常。卽公義勇。自述宏度。非爲公頌。大書特書。非爲公寵。孰章賂帝。孰與慫慂。胡靳一殺。刻公百年。無直不伸。可質蒼天。我聖家法。攘夷尊周。環東爲國。一部春秋。有臣若公。曠世如昨。爰命太常。政府舘閣。考文選號。以旌毅魄。綽楔有儼。揭名列爵。顯報旣崇。九原可作。視此豊珉。色庶無怍。
通篇以疑字爲案。叙事奇崛。得史遷神髓。銘亦奇極典極。學昌黎而換脫得玅。
李羅姓名。見於一統志。在全韵詩。前特無人表章。故百餘年寥寥無聞耳。
假使當時萬有一或者。心欲偃而力不能不覆。彼將權認爲拜。公將奈何乎。此幸天賦公熊虎之材。以當此境。而其時諸公孰不斥和。而大抵皆文儒也。心剛骨則軟。貌毅質則弱。雖節義建天地。血憤撑宇宙。未必能勇力麤豪如將軍。我爲念此。未嘗不怵然心悸。
연암집 제2권 /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시(諡)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오호라! 청 나라 사람들이 처음 그 국호(國號)를 세우면서, 우리나라 사신을 겁박하여 잡아다가 기필코 한 번 그 뜰에 꿇리고서 큰 절을 받고자 했다. 이는 틀림없이 온 천하에 소리쳐 떠들기를,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서 여러 나라들에 솔선하여 우리를 황제로 섬긴다.”
하려는 것이었으니, 아! 사신된 자는 이보다 더 사정이 급박할 수 없었다. 그 머리가 잘릴망정 조아려서는 안 되고, 그 무릎이 끊길망정 꿇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진실로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사신 노릇 하듯이 하지 아니했다면, 동해(東海) 주변 수천 리의 우리나라가 장차 무엇으로써 천하에 대해 스스로 떳떳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힘은 족히 심양(瀋陽)을 함락시키고 요동(遼東)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약한 나라의 일개 사신을 이기지 못했고, 그들의 위엄은 족히 몽고의 40여 왕을 굴복시키고 하루아침이 못 걸려서 두송(杜松)의 20만 군사를 깨뜨렸지만, 필부의 허리를 꺾어 뜰에 꿇리지는 못했다. 옥쇄를 획득하고 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기세등등하게 하늘로부터 이를 얻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저와 같이 용이했건만, 그들이 우리 사신의 절 한 자리 받기란 이와 같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사건이 영토 밖에서 벌어져 국내 사람들이 통쾌하게 직접 본 바 아니었고 몸이 살아서 돌아온 데다가 저들의 서한을 받아 왔다는 혐의를 받았으므로 그 당시에 나라를 욕되게 했다는 논란이 어찌 그칠 수 있었겠는가!
그 뒤 명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천자에게 아뢴 사실과, 중원(中原)의 망한 명 나라 백성들이 당시의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둔 사실을 전문(傳聞)을 통해서 차츰차츰 알게 되자, 국내의 의심이 점점 풀리어 비로소 표창하고 증직(贈職)하는 특전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 적국의 뜰에서 강하고 굳세게 맞선 사적에 대해서는 상기도 국내 사람들이 반신반의해 온 것이 지금까지 140여 년이었다. 이는 당연히 만세가 되어도 공론(公論)에 힘입어 사라질 수 없을 사적이요, 청 나라 황제로서도 덮어 버릴 수 없었던 사적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확(廓)이요, 자는 여량(汝量)이다. 계통은 선파(璿派)에서 나왔으니, 시조는 왕자 경녕군(敬寧君) 비(裶)였다. 부친의 휘는 유인(裕仁)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함경도 관찰사로서 왜병이 침략했을 때 싸우다 피살되어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 2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세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다. 장성하자 키는 팔 척이요, 음성은 큰 쇠북을 울리는 것 같았으며, 용력이 절등하여 우뚝한 장수의 재목이었다.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그가 고아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무과(武科)를 권하니, 응시하여 갑과(甲科 첫째 등급 )로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는데, 사나운 범이 금원(禁苑)에 들어오자 공이 쏘아 죽였다. 그리고 적신(賊臣)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대궐 뜰에서 대비를 폐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그 반열에 참여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공에게 병을 핑계 대라 권하자, 공은 성을 내며,
“병들지 않았다면 참여해야 된단 말인가?”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날이 갈수록 패악하므로 공의 뜻을 떠보려는 자가 있자 공은 사양하기를,
“나는 어머니가 있으니 감히 그대들을 따르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에 대한 의심은 말고 다만 노력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정사(靖社)에 미쳐 밀약이 있었다.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이 공에게 함께 가자고 요청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공이 이때에 어영청 천총(御營廳千摠 정 3 품 벼슬 )을 맡고 있었는데, 박승종(朴承宗)이 평소 공을 믿었으므로 급히 공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대장 이흥립(李興立)과 더불어 모반한다고 고자질하는 자가 있으나,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으니 급히 군사를 돈화문(敦化門 창덕궁 정문 ) 밖에 모아 비상에 대비하라.”
하자, 공은 드디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오늘은 내가 특장(特將)으로 지휘를 도맡았으니 감히 어기는 자는 베어 죽이리라!”
하였다. 밤에 반정군의 깃발이 돈화문을 향하자 군중이 동요하였다. 외병(外兵)이 있다고 보고하므로, 공은 말을 타고 동으로 향해 서서,
“내 말 머리만 보고 따르라.”
하였다. 막 공의 자(字)를 부르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공은 짐짓 못 들은 척했는데, 공을 부른 사람은 바로 동성군이었다.
일이 평정되자 여러 공신들이 공을 의심하여 공도 함께 베어 죽이려고 했으나,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그들과 맞서 힘껏 다투면서,
“가령 이확(李廓)이 진(陣)을 물리지 않았더라면 누가 감히 궁궐로 들어갔겠는가?”
하였다. 연평군이 평산 부사(平山府使)로서 의거를 일으켜 일약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제수되자, 공을 힘껏 보호하여 중군(中軍)을 삼았으며 다시 공을 천거하여 평산 부사를 대신 맡게 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나 박승종은 영의정으로서 처형을 당했는데, 공은 일찍이 그에게 신임을 받던 처지라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어 늘 울적하게 지내면서 뜻을 펴지 못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전해 오자, 공은 마침 심리(審理)를 받던 중이었으나, 임금이 급히 불러 접견하고 활과 칼을 내려 주어 출정케 하였다. 저탄(猪灘)에서 적을 막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역적들은 상금을 걸고 공을 잡으려고 서둘렀으나, 급기야 공이 타던 말이 죽어서 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공이 이미 죽었다고 여겨 마침내 가 버렸다. 공은 흘러가는 시체에 올라타서 죽음을 면하게 되자, 알몸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군대로 달려갔으나 군중에서는 공을 역적의 첩자로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장만은 공을 특별히 사면하여 선봉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속죄하게 하였다. 드디어 역적을 쳐부수고 서울을 회복하였으나, 그 공로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책훈(策勳)되지 못했다. 외직으로 나가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가 곧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옮겼다.
강홍립(姜弘立)이 만주족(滿洲族)을 인도하고 와서 의주성(義州城)을 함락시키자 인접 고을들도 따라서 와해되었으므로, 관찰사 윤훤(尹暄)이 급히 공을 불러 평양성(平壤城)을 구원하게 하였다. 공은 도중에서 평양성이 이미 함락되고 자산 역시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근거지조차 잃어버려 낭패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격문(檄文)을 띄워 여러 고을 군사를 소집하여 절도사에게로 달려갈 작정이었는데, 김기종(金起宗)이 윤훤을 대신하여 관찰사가 되자, 공이 도중에 기웃거리기만 하고 급히 평양성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는 공에게 김덕경(金德卿)과 고한룡(高汗龍)이란 자를 얼른 잡아 없애도록 맡겼다. 이 두 역적은 모두 서쪽 변방의 보잘것없는 역관으로 만주족에게 투항하였는데, 김덕경은 만주족에 의해 임시로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된 자였다. 공은 이 두 역적을 사로잡아 스스로 속죄할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계획을 세워 고한룡을 참수하고 김덕경을 사로잡았으며, 강물을 반쯤 건넌 역적들을 공격하여 잡혀가는 우리 백성들을 빼앗아 오고, 고차 박씨(高遮博氏)를 추격하여 그를 호종하는 기병 두 명을 쏘아 죽였다.
그러자 김기종은 손을 잡고 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서로 늦게 안 것이 한스럽소.”
하고, 드디어 만류하여 중군(中軍)으로 삼고 군사에 대한 것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내직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외직으로 나가 경원 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가 곧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옮겼다. 다시 들어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고, 또다시 나가 제주 목사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 사직하고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때 만주족이 이미 심양을 점거하여 자주 산해관(山海關)을 침공하였으며, 몽고의 여러 부족들을 다 복속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교린(交隣)의 도리로써 대우하여 사신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다.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인조 14)에 만주족은 영아아대(英兒阿代)와 마복탑(馬福塔)을 보내와 서신을 전달했는데, 그 사연이 몹시 패악하고 거만하여,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전날과 아주 달랐다. 그래서 대각(臺閣 사헌부ㆍ사간원 ) 및 성균관 유생들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그 사신을 베어 머리를 함에 넣어 명 나라 황제께 아뢰자고 요청하니, 영아아대 등은 크게 놀라 숙소에서 뛰쳐나가 말을 빼앗아 타고 달려가면서 국서(國書)를 도중에 내버렸다.
이때 사대부들은 모두 심양에 사신 가기를 회피했으므로 마침내 공을 회답사(回答使)에 충원시키니, 서신을 가지고 뒤를 쫓아 용만(龍灣 의주(義州) )에 이르렀다. 때마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이 공보다 먼저 출발하여 막 용만에 머물러 있다가, 드디어 동행하여 심양으로 들어갔다.
한(汗)이 공들을 접견하고서 더욱 거만하게 굴며 폐백을 선뜻 받아 주지 않고, 사자(使者)를 숙소로 번갈아 보내어 10여 건의 일을 들어 트집만 잡곤 하였다. 한(汗)이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 하면서, 먼저 정명수(鄭命壽)를 시켜 오만 가지로 회유하고 협박했으므로, 공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정명수에게 주면서,
“내 머리를 가지고 가라!”
하였다. 이튿날 만주족 기병 수십 명이 채찍으로 문을 후려치고 크게 호통 치면서,
“조선 사신은 빨리 예복을 갖추라!”
하자, 공은 탄식하며,
“오늘에야 죽을 자리를 얻었나 보다.”
하고, 드디어 나공(羅公)과 함께 동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드려 멀리서 임금께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고 손수 관복을 찢고 사모(紗帽)를 밟아 뭉개뜨려 다시 입지 않을 뜻을 나타냈으며, 스스로 상투를 풀고 머리를 맞대어 두 가닥을 한데 합쳐 묶고 서로 보듬고 누웠다.
한(汗)이 장사(壯士)를 보내어 공들을 좌우로 끼고서 내달리어 제단 아래 이르자, 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들이 다 줄지어 서고, 몽고의 수십 만 기병이 제단을 빙 둘러 진을 쳤다. 한(汗)은 자황포(柘黃袍)를 입고 규(圭)를 잡고 제단에 올라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尊號)를 받고, 국호를 세워 ‘대청(大淸)’이라 하고 ‘숭덕(崇德)’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장사들이 공을 끼고 서자, 공은 즉시 나자빠져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장사들이 앞을 다투어 그 팔과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억누르고 꽁무니를 쳐들고 사지를 들어 땅에 엎어뜨리자, 공은 크게 호통 치며 몸을 뒤쳐 바로 누우며, 앞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누운 채 발길로 그 얼굴을 차서 코가 깨져 피가 터지곤 하니, 이날 구경하던 자들은 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차마 보지를 못했다. 마침내 거꾸로 질질 끌어다 숙소에 가두었다.
이튿날 다시 동교(東郊)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 또 공들을 끌고 갔다. 공들은 더욱 사납게 항거하며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니, 정말로 그 사나움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만주족의 여러 신하들이 흔고(釁鼓)하여 대중 앞에 위엄을 보일 것을 청하자, 한(汗)은,
“저것들이 시방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판인데, 지금 죽이면 도리어 저놈들의 소원을 풀어 주는 것이 되고, 또 사신을 죽였다는 악명을 무릅쓰게 된다. 그러니 놓아 돌려보내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드디어 서한을 만들어 보따리 속에 넣어 주고 기병 100여 명을 시켜 공을 압송하여, 아골관(鴉鶻關)까지 이르러 되돌아갔다. 공들이 비로소 보따리를 점검하고 과연 한(汗)의 서신을 발견하자 놀라며,
“서신에 새 도장을 찍어 봉했으니 그 내용은 뻔하다. 만일 서신을 떼어봤다가 예전 격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장차 어찌하랴?”
하고, 드디어 서신을 여점(旅店)에 놓아두고 말을 달려 돌아와 책(柵)을 벗어났다. 변방에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공들이 적의 뜰에서 절하고 춤을 추었다 했고, 관찰사 홍명구(洪命耈)는 장계를 급히 올려 국경에서 그들을 효시(梟示)할 것을 청했다. 이에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와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상소를 올려 베어 죽이기를 청하므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역설하기를,
“두 사신을 아직 신문해 보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유독 먼저 베어 죽인단 말인가!”
하여 말감(末減)을 얻었다. 그리하여 공은 선천(宣川)으로 귀양 가고, 나덕헌은 백마산성(白馬山城)을 병사(兵士)로서 지키게 되었다.
한참 뒤에 조정에서는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명 나라 황제에게 아뢰는 수본(手本 손수 작성한 보고서 )을 얻어 보고서야 비로소 공들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양사(兩司)에서는 효수(梟首)하자는 계문(啓聞)을 잠시 정지했다. 그러나 말 많은 자들은 오히려 심 도독이 명 나라 조정에 거짓 보고한 것이라 했다. 급기야 마복탑(馬福塔)이 공들이 여점(旅店)에다 버린 서신을 이유로 몹시 성을 내며 하는 말이,
“황제가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사신된 자는 의당 공손히 예를 행해야 할 것이거늘 이확(李廓) 등은 패악스럽게 난동을 부려 뜰에서 천자를 욕보였으니 어찌 이놈을 당장에 죽여 대국에 사과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따라갔던 역관 신계음(申繼愔) 등이 비로소 속을 털어놓고 원통함을 호소하여 공들의 귀양을 풀게 되었다.
이해 겨울에 만주족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습격하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공은 모친 최 부인(崔夫人)의 상을 당했으나, 임금은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포위한 가운데로 들어가 임금을 뵙자, 임금은 공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육식을 권했을 뿐 아니라 친히 왕림하여 위로하고 격려했다. 독전어사(督戰御史) 김익희(金益熙)ㆍ황일호(黃一皓)ㆍ김수익(金壽益)ㆍ이후원(李厚源)ㆍ임담(林墰) 등 여러 공들이 공이 방비하는 데 신기한 계략을 지녔음을 보고, 국사(國士)로서 허여하며, 비로소 전에 심양에 사신 간 때의 일을 믿게 되었다. 포위가 해제되자, 돌아가 최 부인을 장사하기를 요청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발탁되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심양에 있을 적에 하도 두들겨 맞아서, 어혈이 들고 속으로 곪아 하체가 마비되었다. 연로하자 시골에 살며 누차 제수받은 직을 사양했다. 현종(顯宗) 을사년(1665, 현종 6)에 집에서 죽으니, 양근군(楊根郡) 북쪽 울업리(鬱業里) 을좌(乙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興陽李氏)로 응배(應培)의 따님인데 3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익장(益章)ㆍ익상(益常)ㆍ익행(益行)이요, 딸은 윤세미(尹世美)에게 출가했다. 익장과 익상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익행은 5남을 두었는데 현(誢)ㆍ흔(訢)ㆍ혜(譓)ㆍ서(諝)ㆍ양(諒)이다.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등주(登州)에 들어갔다가 마홍주(馬弘周)에게 사로잡혀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길에서 한 그림을 보니 바로 공들이 굴하지 않은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이에 앞서 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가 어사 황손무(黃孫茂)를 보내어 공의 절의를 굉장히 칭찬했는데, 이때는 벌써 가도(椵島)가 깨어진 뒤라 그 조서(詔書)는 마침내 전해질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명 나라 천자의 사신은 다시 조선에 오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청 나라 황제가 역대 제왕으로부터 한(汗)이 국호를 세운 때의 일까지를 논술하여 제목을 《어제전운시(御題全韻詩)》라 했는데, 시는 5권으로 간행되어 천하에 유포되었다. 그 시 속에는, “조선 사신이 절을 아니 하고 유독 틀어졌네.”라는 말이 있고, 친히 주석(註釋)을 자세히 달아 아래와 같이 말했다.
“태종(太宗)이 이미 존호를 받았는데, 조선 사신 이확과 나덕헌이 유독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뭇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사신이 무례한 것은 짐(朕)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나에게 맹약을 무너뜨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이니, 짐은 끝내 한때의 분풀이로 그 사신을 죽이지 않으련다. 그러니 이를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그리고 곧 이확 등을 돌려보냈다.”
거기에서 태종이라 일컬은 자가 한(汗)이었다.
지금 임금 3년(1779)에 특명으로 그 책을 구입해 들여오게 하여 어람(御覽)하고는 가상히 여기고 탄식한 다음, 이확의 집 문에 정표(旌表)하도록 명하고 시호를 충강(忠剛)이라 내렸다.
오호라! 이는 어찌 공들에 대해 백 년 동안 내려온 의심이 하루아침에 통쾌히 밝혀진 것일 뿐이겠는가? 천하로 하여금 만세토록 우리 조선만이 홀로 당시에 만주족을 황제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더욱 의롭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드디어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大明)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청(淸)이 천명 받기 전엔 / 淸未受命
이웃의 강국일 뿐이었는데 / 卽我强隣
요동 심양 점령하고 나서는 / 入據遼瀋
창 휘두르고 사방으로 눈 부릅뜨니 / 揮戈四瞋
악라(鄂羅)라 회회(回回)라 / 鄂羅回回
두이백특(杜爾伯特)이라 / 杜爾伯特
찰뢰(扎賴)라 옹우(翁牛)라 / 扎賴翁牛
오주(烏珠)라 토묵(土黙)들이 / 烏珠土黙
모두 신하로 자처하자 / 莫不稱臣
더욱 강경하고 오만해져 / 益强以傲
가한(可汗)이란 칭호 부끄러워 / 羞稱可汗
황제 칭호 넘보려네 / 謀僭大號
범 같은 우리 장수 / 我有虎將
이확(李廓)이요 자는 여량(汝量) / 曰廓汝量
사신으로 저들 관사에 묵으니 / 聘在彼館
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元不忘喪
제아무리 황제라 자처해도 / 彼雖自帝
꿈속에 배부른 격 / 若飽于夢
공의 절을 꼭 받아서 / 必借公拜
군중에게 과시하려 했네 / 以誇其衆
변발에다 붉은 모자 / 辮髮朱帽
부리부리한 눈에 귀신 같은 이빨로 / 焰瞳鬼齶
앞뒤로 끼고 몰아 / 前擁後驅
번갯불에 산 무너지듯 / 若霆摧嶽
청이 황제 노릇 할지 못 할지 / 淸之帝不
공의 절 한 번에 달렸는데 / 係公一俯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서 / 撑宙亘宇
기둥처럼 굳게 박혔네 / 確植如柱
나의 목은 토제 인형이요 / 項領土梗
등과 배는 옹기나 마찬가지 / 腹背瓮盎
창자를 베건 위장을 도려내건 / 屠腸刳胃
네 멋대로 실컷 배를 채우려무나 / 任汝飫脹
오직 이 무릎만은 간직하여 / 獨保此膝
천하 위해 굽히지 않으니 / 爲天下伸
저 역시 의(義)에 부끄러워 / 彼亦赧義
제 신하에게 자중하게 하였네 / 以儆厥臣
장순(張巡) 허원(許遠)처럼 죽지 않고 / 巡遠不剮
소무(蘇武) 장건(張騫)처럼 살아 오니 / 武騫生還
국론이 물 끓듯이 / 國言沸騰
입 달린 자 모두들 탓하고 헐뜯네 / 喙喙郵訕
적에게 아양 떨어 / 謂公媚敵
절 올리고 춤췄으니 / 跳躍拜舞
진실로 이런 놈은 / 洵若斯者
목을 베어야 한다 했네 / 其咽可斧
살아서건 죽은 뒤건 / 于存于歿
업적과 명성 더럽혀지니 / 跡穢名衊
황하 물 끌어다 세숫물 삼은들 / 挽河爲盥
누가 대신 씻어 주리 / 誰爲滌之
화산(華山) 돌 깎아서 송곳을 만든들 / 斲華爲觿
누가 대신 찔러 터뜨려 주며 / 誰爲摘之
깜깜하고 암담한데 / 幽昧暗黮
누가 대신 밝혀 주리 / 誰爲晳之
청은 이제 사대가 되어 / 淸今四葉
건륭이라 연호 세우고 / 號登乾隆
황제 몸소 시가 지어 / 親作歌詩
조상 공덕 찬송했네 / 頌厥祖功
공이 절 아니한 걸 의아해하며 / 訝公不拜
뜻이 유독 틀어졌다 했으니 / 謂志獨乖
이 한 말 얻기란 / 獲此一言
하늘 오르기 어려움과 같네 / 若天難階
시의 주석(註釋) 살펴보면 / 觀其所註
응당 공의 뼈를 가루로 만들었을 텐데 / 理當粉骸
패역(悖逆)하다 꾸짖은 건 / 詈公悖常
공에게는 의용(義勇)일세 / 卽公義勇
제 아량 자랑이지 / 自述宏度
공을 칭송한 것 아니고 / 非爲公頌
대서특필한 것도 / 大書特書
공을 총애한 것 아니라 / 非爲公寵
누가 글 올려 황제 구워삶았으며 / 孰章賂帝
누가 함께 달래고 권했기에 / 孰與慫慂
어찌 한 번 죽임 아끼어 / 胡靳一殺
백 년 동안이나 공을 해쳤나 / 刻公百年
곧은 일은 펴지는 법 / 無直不伸
의심나면 하늘에 물어보소 / 可質蒼天
우리 왕조 역대의 법도는 / 我聖家法
오랑캐 물리치고 중화(中華)를 받드나니 / 攘夷尊周
동해 주변 삼천리 우리나라 / 環東爲國
《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一部春秋
공과 같은 신하는 / 有臣若公
오랜 세월 지났어도 어제런 듯하여 / 曠世如昨
태상시에 명 내리고 / 爰命太常
정부 관각 불러다가 / 政府館閣
글자 살펴 시호(諡號) 정하고 / 考文選號
굳센 넋을 정표(旌表)하니 / 以旌毅魄
작설(綽楔)이 엄연할사 / 綽楔有儼
이름과 작위 높이 걸렸구려 / 揭名列爵
현저한 보답 융숭하였으니 / 顯報旣崇
저승으로부터 되살아나서 / 九原可作
이 크고 아름다운 비석을 본다면 / 視此豐珉
공의 낯빛에 부끄럼 없으리라 / 色庶無怍
글 전체가 ‘의심할 의(疑)’ 자로써 안건(案件)을 삼았다. 사건에 대한 서술이 기발하고 변화가 많으니, 사마천(司馬遷)의 진수를 터득했다. 명(銘) 역시 극도로 기이하고 전아하여,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 )를 배웠으면서도 거기서 환골탈태하여 묘경(妙境)을 얻었다고 하겠다.
이확(李廓)ㆍ나덕헌(羅德憲)의 성명이 《일통지(一統志)》에 보이기는 하지만, 《어제전운시》가 나오기 이전에는 특별히 표창한 사람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백여 년 동안 적막하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당시 만에 하나라도 혹시 마음은 자기 몸을 드러눕게 하고 싶지만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엎드리게 되어, 저놈들이 장차 절을 한 것으로 임시변통으로 인정해 버렸다면 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이는 다행히도 하늘이 공에게 곰과 범 같은 자질을 주어서 이 지경을 견뎌 내게 한 것이다. 그때에 여러 공들도 누군들 척화(斥和)할 생각이 없었으리오마는, 대저 모두 글 짓는 선비들이라 마음은 강하지만 뼈대는 연약하고 외모는 씩씩하지만 체질은 약하니, 비록 절의야 천지에 우뚝 세울 만하고 뜨거운 분노야 우주를 떠받칠 만하다 해도 반드시 용력이 장군과 같이 굳셀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적이 없다.
[주-D001] 가의대부(嘉義大夫) …… 신도비명(神道碑銘) : 가의대부는 종 2 품의 품계이다. 삼도통제사는 곧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종 2 품의 관직이다. 자헌대부는 정 2 품의 품계이다. 자헌대부의 품계가 추증되었으므로, 품계보다 관직이 낮음을 표시하는 행(行) 자가 삼도통제사의 관직 앞에 붙었다. 오위도총부는 조선 시대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軍令) 기관이고, 도총관은 그 우두머리인 정 2 품의 관직이다. 원문에는 시호가 ‘충렬(忠烈)’로 되어 있으나, 이확(李廓)에게 실제로 내린 시호는 ‘충강(忠剛)’이었다. 《正祖實錄 4年 11月 9日, 5年 11月 20日》 혹시 그와 고난을 같이하여 함께 증시(贈諡)되었던 나덕헌(羅德憲)의 시호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전주 이씨 경녕군파 세보(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권지수(卷之首)에도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말미에 ‘통정대부 행 안의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 박지원 지음
〔通政大夫行安義縣監兼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朴趾源撰〕’이라고 되어 있어,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주-D002] 두송(杜松) : 명 나라 말기의 장수로 담력과 지혜가 뛰어나 주요 군직(軍職)을 역임하면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1619년에 양호(楊鎬)가 후금(後金)을 공격할 때 그의 주력(主力)이 되어 함께 출전하였으나, 자신의 용맹을 믿고 경솔하게 진격하다 후금의 군대에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주-D003] 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 제왕이 천명을 받은 증거로서 하늘이 보여 주는 상서로운 조짐을 부명이라 한다. 또한 그러한 상서로운 조짐들을 늘어놓으며 제왕을 예찬하는 글도 부명이라 한다.[주-D004] 덮어 …… 사적이다 : 원문은 ‘不得掩也’인데,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과 《동문집성》에는 ‘得’ 자가 ‘能’ 자로 되어 있다.[주-D005] 선파(璿派) : 전주 이씨(全州李氏)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宗派)를 이른다.[주-D006] 경녕군(敬寧君) 비(裶) : 태종(太宗)과 효빈(孝嬪) 김씨(金氏) 사이에 출생한 왕자이다.[주-D007] 응시하여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 원문은 ‘中甲科’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그 앞에 ‘光海中’이 더 있다.[주-D008] 선전관(宣傳官) : 임금이 행차할 때 호위와 명령 전달 등을 맡던 종 9 품부터 정 3 품까지의 관직이다.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므로 장차 출세가 보장되는 무반(武班)의 명예로운 요직으로 간주되었다.[주-D009] 적신(賊臣)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주도한 이이첨(李爾瞻)을 일컫는다. 《중편연암집》에는 그 앞에 ‘光海君時’가 더 있다.[주-D010] 공의 뜻 : 원문의 ‘公意’인데, 《동문집성》에는 ‘公議’로 되어 있다.[주-D011] 정사(靖社) : 사직(社稷)을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주-D012]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 : 1590~1643. 무신 신립(申砬)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공로를 세워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책훈(策勳)되고 동성군에 봉해졌다.[주-D013] 박승종(朴承宗) : 1562~1623. 광해조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인목대비 폐비에는 극력 반대했다. 반정이 일어나자 자결했다. 인조반정 직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나중에 신원(伸寃)되었다.[주-D014] 이흥립(李興立) : 박승종과 사돈으로서 그의 추천으로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반정군(反正軍)에 합세하여 공이 컸으므로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투항했다가 난이 평정되자 자결했다.[주-D015] 특장(特將) : 어느 한 방면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부대의 주장(主將)을 이른다.[주-D016]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 : 1557~1633.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주-D017] 호위대장(扈衛大將) : 인조반정 이후 왕궁의 호위를 강화할 목적에서 설치한 호위청(扈衛廳)의 우두머리인 정 1 품 관직이다. 설치한 초기에는 ‘호위 4청(廳)’이라 하여 공신인 이귀 등 4인이 대장이 되어 각기 군관(軍官)들을 거느렸다.[주-D018] 공은 …… 처지라 : 원문은 ‘嘗爲其所厚’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公嘗爲其所厚’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19] 뜻을 펴지 못했다 : 원문은 ‘不得意’인데, 《동문집성》에는 ‘意’ 자가 ‘志’ 자로 되어 있다.[주-D020] 이괄(李适) : 원문에는 ‘适’로 되어 있는데, 《중편연암집》과 《여한십가문초》에는 ‘李适’로 되어 있다.[주-D021] 저탄(猪灘) : 마탄(馬灘)이라고도 하며, 황해도 평산의 예성강(禮成江) 상류에 있었다.[주-D022] 장만(張晩) : 1566~1629. 인조반정 직후 후금(後金)의 침략에 대비하여 평양에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자 그 우두머리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었다. 1624년 평안병사 겸 부원수(平安兵使兼副元帥)인 이괄의 반란군이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던 평양을 피하여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장만은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아 추격하여 마침내 서울 근교에서 격파했다. 그 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책훈되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주-D023] 강홍립(姜弘立) : 1560~1627. 명 나라의 후금(後金) 정벌 요청에 응해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서 출정했다가 패하자, 후금에 투항하고 억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강화도에서 양국의 화의(和議)를 주선했다.[주-D024] 윤훤(尹暄) : 1573~1627.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25년 평안 감사로 부임했다. 정묘호란 때 평양을 버리고 성천(成川)으로 후퇴함으로써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주-D025] 공은 …… 듣자 : 원문은 ‘道聞平壤已陷 而慈亦失守’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앞에 ‘公’ 자가 더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26] 김기종(金起宗) : 1585~1635.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종사관으로서 무공을 세워 진무 공신 2등으로 책훈되고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주-D027] 서쪽 …… 역관 : 의주(義州)의 통사(通事)를 이른다.[주-D028] 고차 박씨(高遮博氏) : 박씨(博氏)는 만주어(滿洲語)를 음역(音譯)한 관직 이름이고, 고차(高遮)는 만주족의 이름인 듯하다. 병자호란 직후 청 나라의 차사(差使)로 박씨들이 누차 입국한 바 있다. 《숙종실록》 36년 10월 7일 조의 주(註)에 “박씨(博氏)는 호인(胡人) 군졸의 명목이다.”라고 하였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6월 27일 조에도 책문(柵門)을 지키는 청 나라 관원들에게 줄 예물 명단에 박씨(博氏), 가출박씨(加出博氏), 세관박씨(稅官博氏) 등의 관직이 열거되어 있다.[주-D029] 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 원문은 ‘歡飮’인데, 문맥으로 보아 ‘勸飮’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라고 권하면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주-D030] 영아아대(英兒阿代) : 용골대(龍骨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백기인(正白旗人)으로, 호부 상서를 지냈다. 조선에 누차 사신으로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淸太宗)의 막료로서 참전했다.[주-D031] 마복탑(馬福塔) : 마부대(馬富大 : 또는 馬夫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의 막료로서 참전했다.[주-D032] 회답사(回答使) : 교린(交隣) 관계에 있는 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국서를 보내왔을 때 그에 회답하는 국서를 전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을 이른다.[주-D033]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 :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후금(後金)과 형제 맹약을 맺고 매년 봄과 가을에 사신을 심양에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봄에 보내는 사신을 춘신사라 하였다. 나덕헌(1573~1640)은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훈되었다. 1636년 춘신사로서 회답사인 이확과 함께 심양에 가 청 태종이 칭제건원(稱帝建元)하는 의식에서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 이후 오히려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교동수사(喬桐水使) 겸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지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주-D034] 한(汗) : 고대 북방 민족의 족장(族長) 또는 왕(王)을 일컫던 말로 가한(可汗), 칸(khan)으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청 태종을 이른다.[주-D035] 정명수(鄭命壽) : 평안도의 천민으로 1619년 강홍립의 군대를 따라갔다가 포로가 되자 잔류하여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때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갖은 횡포를 부렸다.[주-D036] 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 : 패륵은 청(淸) 종실(宗室)의 봉작(封爵)의 하나이다. 청 종실의 봉작은 친왕(親王), 군왕(郡王), 패륵(貝勒), 패자(貝子)의 순서로 되어 있다. 팔고산은 곧 팔기병(八旗兵)을 이른다. 팔기병은 병졸 300인이 하나의 우록(牛彔)을 이루고, 다섯 우록이 하나의 갑라(甲喇)를 이루고, 다섯 갑라가 하나의 고산(固山)을 이루어, 모두 여덟 고산이 된다. 번자는 형사(刑司)에 소속되어 체포와 형장(刑杖)을 맡은 벼슬아치를 이른다.[주-D037] 자황포(柘黃袍) : 뽕나무 즙을 물들여 만든 적황색의 도포로, 수당(隋唐) 이래 황제들의 복색(服色)으로 사용되었다.[주-D038] 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 원문은 ‘駭惡’인데, ‘駭愕’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깜짝 놀라’로 번역되어야 한다.[주-D039] 이튿날 …… 갔다 : 원문은 ‘明日復祀東郊 又擁公等去’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明日復擁公等去’로 되어 있다.[주-D040] 흔고(釁鼓) : 전쟁을 할 때 사람을 죽여 그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두 조선 사신을 죽이자는 뜻이다.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祭纛’으로 되어 있고, 《여한십가문초》에는 ‘祀東郊 又釁鼓’로 되어 있다.[주-D041] 보따리 속 : 원문은 ‘裝中’인데, 《중편연암집》과 《여한십가문초》에는 ‘公裝中’으로 되어 있다.[주-D042] 아골관(鴉鶻關) :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에 있는 관문의 이름이다.[주-D043] 책(柵) : 요령성의 압록강 부근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 일대에 말뚝을 박아 국경 출입을 통제한 시설물을 이른다. 그곳의 책문(柵門)을 통해서만 사신 왕래와 교역이 이루어졌다.[주-D044]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 원문은 ‘讙言’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譁言’으로 되어 있다.[주-D045] 홍명구(洪命耈) : 1596~1637. 인조반정 이후 등용되어, 병자호란 때 평안 감사로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해 달려가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주-D046] 말감(末減) : 가벼운 죄에 처하는 것을 이른다.[주-D047] 백마산성(白馬山城) : 평안도 의주(義州) 백마산(白馬山)에 있던 성으로,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지켰던 곳이다.[주-D048]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 : 명 나라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의 군대가 후금의 군대에 쫓긴 끝에 국경을 넘어 평안도 철산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게 되자, 1623년 명 나라는 후일을 도모하려고 가도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다. 모문룡이 조정의 명에 따라 요동(遼東)에 출전했다가 실패하고 죽은 뒤, 가도로 도망한 그 잔당 사이에 누차 내분이 일어난 끝에 장사꾼 출신으로 그 딸이 모문룡의 첩이었던 심세괴가 도독이 되었다. 심세괴는 1637년 청 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중편연암집》과 《여한십가문초》에는 도독 앞에 ‘明’ 자가 더 있다.[주-D049] 기복(起復) :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으로,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상중에 벼슬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특별히 조정에 불러 올리는 제도를 이른다.[주-D050] 독전어사(督戰御使) …… 임담(林墰) : 독전어사는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어사로, 병자호란 때 군 통솔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관직이다. 김익희(金益熙 : 1610~1656)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로서 후일 대제학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황일호(黃一晧 : 1588~1641)는 척화파(斥和派)로서,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재임할 때 명 나라를 도와 청을 치려고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청 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수익(金壽益 : 1600~1673)은 의주 부윤, 병조 참의, 목사(牧使) 등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후원(李厚源 : 1598~1660)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3등으로 책훈되고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후일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담(1596~1652)은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주-D051] 아들은 익장(益章) : 원문은 ‘益章’인데, 《중편연암집》과 《여한십가문초》에는 ‘男益章’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52] 임경업(林慶業) …… 압송되었는데 : 임경업(1594~1646)은 1640년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함에 따라 출전했으나 오히려 명 나라 군대와 협력했다. 이 사실이 탄로 나자 청 나라의 압력으로 국내에서 체포되어 청 나라로 압송되던 도중 해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 표착(漂着)한 뒤 등주(登州)에서 명 나라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되어 병사를 거느렸다. 그러나 청 나라가 마침내 북경을 함락하고 명 나라 조정이 남경(南京)으로 후퇴하자, 임경업은 1645년 명 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속아서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주-D053] 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 :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장렬제(莊烈帝) 의종(毅宗 : 재위 1627~1644)을 이른다.[주-D054] 황손무(黃孫茂) : 1636년 심세괴가 상주한 내용을 본 명 나라 의종(毅宗)이 우리나라를 표창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감군어사(監軍御使) 황손무를 가도(椵島)로 파견했으나, 그 이듬해 내분으로 인해 황손무는 도독 심세괴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주-D055] 공의 절의 : 원문은 ‘公節義’인데, 《중편연암집》과 《여한십가문초》에는 ‘公等節義’로 되어 있다.[주-D056] 조선 :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속국(屬國)’으로 되어 있다.[주-D057] 《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 : 청 고종(淸高宗) 건륭제(乾隆帝)가 지은 것으로, 106운(韻)에 맞추어 상평성(上平聲) 15수는 청 나라의 발상(發祥)부터 태조(太祖)ㆍ태종(太宗)의 사적을 다루었고, 하평성(下平聲) 15수는 세조(世祖)ㆍ성조(聖祖)ㆍ세종(世宗)의 사적을 다루었으며, 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 76수는 요(堯)ㆍ순(舜)부터 명 나라 최후의 복왕(福王)까지의 사적을 다루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어제시집(御製詩集)》 4집(集) 제 47 권, 제 48 권, 제 49 권에 수록되어 있다.[주-D058] 조선 …… 틀어졌네 : 원문은 ‘朝鮮使不拜獨乖’로 되어 있으나 《어제전운시》에 실린 것과 차이가 있다. 그 전문은 “조선 사신이 있었는데, 절을 아니 하고 뜻이 유독 틀어졌네. 가식적으로 명에 대한 예의를 지켜서, 나를 격분시켜 그 무리를 죽이게 하려는 게지.〔乃有朝鮮使 不拜志獨乖 知爲假守禮 激我戮其儕〕”라고 되어 있다.[주-D059] 태종(太宗)이 …… 돌려보냈다 : 《어제전운시》의 실제 주와 차이 난다. 그 전문은 “태종이 존호를 받고 나서 뭇 신하들에게 선유(宣諭)하니, 모두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했으나 유독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유시(諭示)하기를, ‘조선 사신이 무례한 경우를 이루 열거하기 힘들지만, 이는 조선 국왕이 원한을 맺으려는 의도를 품고, 짐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짐에게 맹약을 저버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일 뿐이다. 짐은 종래 한때의 하찮은 분풀이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이 쩨쩨하게 굴어 두 나라는 이미 원수지간이 되었다. 전쟁할 때에도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내면 역시 보낸 사자를 즉시 죽이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조회(朝會)하러 온 경우이겠는가?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곧 그 사신을 돌아가게 하면서 서신으로 조선 국왕을 힐책하고, 다시 그 사신에게 유시하기를, ‘너희 왕이 만약 스스로 죄를 후회할 줄 안다면 응당 자제를 인질로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짐은 즉시 대군을 일으켜 너희의 국경에 닥칠 것이니,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였다.〔太宗旣受尊號 宣諭群臣 皆行三跪九叩禮 惟朝鮮使臣羅德憲李廓不拜 太宗諭曰 朝鮮使臣無禮處 難以枚擧 是皆朝鮮國王有意構怨 欲朕先啓釁端 戮其使臣 加朕以背棄盟誓之名耳 朕從不肯逞一時之小忿 如此瑣屑 卽兩國已成仇敵 戰爭之際 以事遣人 亦無卽戮其來使之理 況朝會乎 其勿問 尋遣其使臣歸 以書詰責朝鮮王 復諭其使臣曰 爾王若自知悔罪 當送子弟爲質 不然 朕卽擧大軍 以臨爾境 雖悔何及乎〕”라고 되어 있다.[주-D060] 지금 임금 …… 내렸다 : 정조 2년(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가 북경에 체류하던 중 수역(首譯) 이언용(李彦容)이 《어제전운시》 4책을 빌려 와서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귀국 후 서장관 심염조(沈念祖)가 임금에게 보고하여 동지사(冬至使)가 이 책을 구입해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조 3년에 《어제전운시》의 기록을 근거로 이확과 나덕헌에게 증시(贈諡)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나덕헌과 달리 이확은 그의 고향과 자손을 몰라 어명을 중지했다가, 그 이듬해 심염조의 건의에 따라 재차 증시하도록 명했으며, 정조 5년 이확에게 충강(忠剛)이란 시호가 내렸다. 《入燕記 下 6月 12日》 《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卷之首 嘉林君派 七世 廓》 《正祖實錄 3年 9月 3日, 4年 11月 9日, 5年 11月 20日》[주-D061] 악라(鄂羅)라 …… 토묵(土黙) : 악라는 곧 악라사(鄂羅斯)로 러시아(Russia)의 음역(音譯)이다. 회회(回回)는 회흘(回紇)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위구르(Uighur)족을 이른다. 두이백특(杜爾伯特)은 내몽골 철리목맹(哲里木盟) 4부(部)의 하나로, 청 나라 초기에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를 세우고 흑룡강성(黑龍江省) 용강도(龍江道)의 동남쪽에 자리잡았다. 찰뢰(扎賴)는 찰뢰(扎賚)라고도 하며 내몽골의 찰뢰특부(扎賚特部)를 이른다. 철리목에 통합되었으며 본거지는 거란(契丹) 땅이다. 옹우(翁牛)는 내몽골의 옹우특부(瓮牛特部)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 동북쪽에 거주했다. 오주(烏珠)는 내몽골의 오주목심부(烏珠穆沁部)로 역시 고북구의 동북쪽에 거주했다. 토묵은 내몽골의 토묵특부(土墨特部)로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남쪽, 성경(盛京)의 변두리에 거주했다. 《淸史稿 卷77 志52 地理24 內蒙古》[주-D062] 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용사는 제 머리가 잘려 잃게 될 것을 잊지 않는다.〔勇士不忘喪其元〕”고 하였다.[주-D063] 변발에다 붉은 모자 : 모두 만주족의 풍습이다. 청 나라 때 남자의 예모(禮帽)는 붉은 실로 짠 모위(帽緯)로 장식하였다.[주-D064] 나의 …… 마찬가지 : 토경(土梗)은 흙으로 빚은 인형으로, 비에 젖으면 무너진다고 하여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옹앙(瓮盎)은 곧 옹기로, 흔해 빠져서 역시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주-D065] 장순(張巡) 허원(許遠) : 장순과 허원은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주-D066] 소무(蘇武) 장건(張騫) : 소무는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武帝) 천한(天漢) 원년(기원전 100)에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들에게 구금되어 회유를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기원전 81년 소제(昭帝)가 흉노와 화친을 하자 19년 만에 한 나라로 돌아왔다. 장건은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에 월지국(月氏國)으로 사신 가다가 도중에 흉노에게 사로잡혀, 전후 11년 동안 억류를 당하여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았다. 마침내 그곳을 탈출하여 본래의 목적지인 월지국에 갔다가, 한 나라를 떠난 지 13년 만에 돌아왔다.[주-D067] 절 올리고 춤췄으니 : 원문 중 ‘拜舞’가 《연상각집》에는 ‘抃舞’로 되어 있다. 또한 ‘蹈躍’은 ‘跳躍’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跳躍抃舞’가 되어, “기뻐 날뛰며 손뼉 치고 춤췄으니”로 번역되어야 한다.[주-D068] 화산(華山) …… 만든들 : 화산은 중국 오악(五嶽) 중의 서악(西嶽)으로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 남쪽에 있는데, ‘화산지금석(華山之金石)’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금석(金石)이 난다고 한다. 《淮南子 地形訓》[주-D069] 청은 …… 되어 : 명 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자결하고, 청 세조(淸世祖) 순치제(順治帝)가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북경을 차지한 때부터 쳐서 4대가 된다. 원문의 ‘今’ 자가 《동문집성》에는 ‘興’ 자로 되어 있다.[주-D070] 하늘 …… 같네 :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선생님께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은 하늘을 사다리 타고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고 하였다.[주-D071] 시의 …… 물어보소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手復詳註 孰與慫慂 自述宏度 非爲公寵 胡靳一劉 刻公百年 寔破積疑 撥露覩天 帝口雖詈 筆則斯揚 公所見乖 允爲國光’으로 되어 있다.[주-D072] 동해 …… 우리나라 : 원문의 ‘國’ 자가 《여한십가문초》에는 ‘域’ 자로 되어 있다.[주-D073] 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一袞一鉞 曰維春秋’로 되어 있다.[주-D074] 태상시(太常寺) : 봉상시(奉常寺)의 옛 이름으로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다.[주-D075] 정부 관각 : 정부는 의정부(議政府)를 이르고, 관각은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봉상시에서 삼망(三望 : 세 가지 시호 후보)과 함께 시장(諡狀)을 홍문관에 보내면, 홍문관에서 삼망을 의논한 뒤 봉상시 관원과 다시 의정(議定)하고, 의정부로 넘겨 서경(署經)하는 절차를 거쳐 시호가 정해진다.[주-D076] 글자 …… 정하고 : 조선 시대의 시법(諡法)에서 사용하는 글자는 모두 301자로 그 범위 내에서 시호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세종(世宗) 때, 《주례(周禮)》의 시법(諡法)에 나오는 28자와 《사기(史記)》의 시법에 나오는 194자에다, 《의례(儀禮)》,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참조하여 107자를 추가해서 시호로 사용할 수 있게 정했다.[주-D077] 작설(綽楔) : 효자(孝子)나 충신(忠臣) 등을 정표(旌表)하기 위하여 문 옆에 세운 대(臺)를 이른다.[주-D078] 환골탈태 : 원문은 ‘換脫’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脫’ 자가 ‘奪’ 자로 되어 있다.[주-D079] 《일통지(一統志)》 : 청 나라 건륭 29년(1764)에 청 고종(淸高宗)의 명에 따라 지어진 지리지(地理志)인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이른다. 이 책 권421 ‘조선조(朝鮮條)’를 보면, “조선 사신 나덕헌ㆍ이확이 돌아갈 때 서신을 보냈으나, 조선국왕이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주-D080] 그 때문에 …… 뿐이다 : 원문은 ‘故百餘年寥寥無聞耳’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耳’ 자 앞에 ‘今得此銘 庶可以照耀千古’라는 내용이 더 있다.[주-D081] 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 원문은 ‘公將奈何乎’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公將奈何奈何乎’로 되어 있다.[주-D082] 이는 …… 주어서 : 원문은 ‘此幸天賦公熊虎之材’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此幸’이 ‘此何幸’으로 되어 있다.[주-D083] 그때에 …… 선비들이라 : 원문은 ‘其時諸公 孰不斥和 而大抵皆文儒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其時斥和諸公 大抵皆文儒也’로 되어 있다.[주-D084] 두려워서 : 원문은 ‘怵然’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𢥠然’으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