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연 스님은 숨은 인재에 대해서 임금(현종)에게 다음 얘기를 아뢰었다.
'전에 어떤 신하가 임금께서 내리신 사명을 띠고 금주(衿州, 시흥)를 지나다가 객관에 들어서 유하는데 큰 별 하나가 어느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그 사신은 기이한 생각이 들어서 종자를 인가로 보내보았던 바, 그 인가에서는 젊은 부인이 귀공자를 낳았다고 하옵니다. 사신은 그 아이가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 짐작하고 그 아기를 얻어서 양육을 했사온데, 아기는 자라서 서른 살이 넘은 후에야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성종 임금 때에 한동안 예부시랑을 지냈는바, 그의 이름은 강감찬(姜邯贊)이라 하옵니다'
담연 스님은 감찬에 대한 말을 계속해 아뢰었다.
'감찬은 갑과 장원을 하고 한 때 예부시랑을 지냈으나, 그 생김이 체구 왜소하고 얼굴이 못생긴 편이온데 게다가 항상 남루한 의복을 입어서 남의 눈에는 더욱 초라하게 보이오니 아무도 그를 인재라고 보아주는 자가 없사옵니다. 예부시랑의 현직에 있을 때도 옷차림이 그와 같아서 동료관원들은 자리를 함께 하기를 꺼려 하였사오나 본인은 그런 일에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길을 가다가 구차한 사람을 보자 자기가 탄 녹봉을 그대로 던져주고 빈손으로 돌아간 일도 있다 하옵니다. 그 후에 강감찬은 관운이 과히 흥성하지를 못하니 관계를 떠나 도성 남쪽 별서에 칩거해서 주경야독으로 한세월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빈도가 보옵기로 이 분이야말로 경천위지의 능력을 지닌 유위한 인물인가 하오니 상감께옵서는 이 사람을 불러 일비의 역을 맡게 하옵시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크게 도움이 될 줄로 아뢰옵니다.'
담연은 절은 임금에게 강감찬을 극구 천거하고 자기는 국사가 되는 것을 굳이 사양하여 이 이튿날로 대궐을 떠났다.
임금은 담연을 작별해 보낸 후에 내시 알자를 시켜 담연이 천거한 강감찬을 불렀다.
지난 달에 유방헌이 세상을 떠나 문하시랑 평장사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임금은 내심으로 강감찬을 불러서 그에게 유방헌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임금은 강감찬에게 물었다.
'경은 삼각산에 있는 담연 선사라는 분을 알고 있소?'
'신은 과거에 응ㅅ하던 해에 개국사(開國寺)에서 담연선사를 처음으로 뵈었사옵니다.'...
시중이 총리라면 문하시랑 평장사는 부총리와 같은 중직이다...
사람들은 벼슬을 못해서 일불 고관에 아부하고 요로에 청을 넣어서 벼슬길을 트려고 애를 쓰기도 하는데 강감찬은 주는 벼슬도 굳이 사양하기를 마지않는다...
'신이 관직을 사양함은 봉공할 뜻이 없어서가 아니오라, 중대사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강조(康兆)를 기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정변을 일으켜서 간신 김치양의 무리를 숙청하고 지금의 임금을 옹립한 강조는 상감에게 둘도없는 인물인데, 강감찬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임금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강조를 기(忌)한다고 말했다...
'강조가 사람을 보내서 죽인 것이옵니다. 그 후에 하수자인 안패가 돌아오자 강조는 자신의 과오를 남에게 전가하기 위해 안패의 목을 쳤사오나 그 것으로 강조의 죄가 소멸될 일은 아니옵니다. 강조는 이중으로 살인을 범한 것이옵니다.'
임금은 이로가 분명한 강감찬의 열변에 그 논리가 타당함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강조가 선대왕을 시해했다는 말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의문되는 생각이 없지않았다....
'신이 언젠가는 성상을 받들 날이 없지안으리다. 하오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관직을 맡기가 도저히 불가능하옵니다. 신이 조정에 서게 되오면 자연 마찰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오니 차라리 초야에서 한세월하는 것이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나 신의 장래를 위해 덕이 될까 하옵니다.'...
임금을 배알하고 궐문을 나온 강감찬은 그이 애마인 비조마(飛鳥馬)를 타고 도성 남쪽 웅천 근방에 있는 그의 별서로 걸음을 재촉했다...
책상위에 있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을 펼쳤다. 자신이 느낀 바를 기록해 놓은 수상록이었다...
강감찬은 강조가 정변을 일으켰던 때의 문장을 다시 들추어 보았다.
기유년 2월
순검사 강조가 군사 오천을 동원해서 간신 김치양의 무리를 죽이고 상감을 대궐밖으로 출어케했단다. 고이한 일이다. 김치양의 무리를 숙청하면 했지 언감생심에 신하로서 임금을 추방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되면 앞문으로 쫓긴 여우나 뒷문으로 들어온 이리나 간악하기는 다를 것이 없다하리라.
기유년 3월
강조는 시골로 가시는 임금을 자파의 졸당들로 뒤를 쫓게하여 마침내 임금을 시해하고 이를 자문(自刎)이라 공언했다. 극악무도한 일이다. 백성들로서 듣는 자 모두 분개해 마지않았으니 백일하 그의 죄상이 밝혀질 날 있으리라...
기유년 9월
황공하옵게도 상감께서 신을 불러 조정에 나오라 분부를 내리신다. 상감께서는 등극하신 지가 우금 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선대왕께서 시해를 당한 사실을 모르고 계신다.
신하가 임금을 속임이 이와 같으니 그 죄가 어찌 중하지않을 것이며, 상감을 속인 신하가 백성을 위해서인들 무슨 덕되는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이번에 나를 상감께 천거하신 분은 담 선사인 듯. 굳이 벼슬을 사양하니 상감께서는 국가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군신으로서 할 일을 잊지말라 하신다. 망극하기 그지없는 말씀 길이 가슴에 새기리라.
임금은 담연 스님이 천거하는 강감찬을 조정에 등용코자 하였으나 본인이 굳이 벼슬하기를 사양하니 그 며칠 후인 시월 초하룻날 노신 위수여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기용하고, 진적을 내사시랑 평장사로 승직시켰다... 249 - 258쪽
천추테후 제3권, 최인욱, 1988년, (주)어문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