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이야기
순천의 동천죽도봉아래 장대공원에는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 목련꽃 등이 화려하게 피면서 4월의 꽃잔치가 흥청망청이더니 동천제방뚝을 따라 사열하듯 늘어선 벚꽃 백리길도 한삼일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던 벚꽃도 하얀 꽃비가 되어 하염없이 내려 동천따라 흘러가버리고 가지만 남아 외롭다는 듯 벚나무는 어느새 파릇파릇 잎이돋아나고 그 아래에선 새빨간 철쭉꽃이 눈부시게 피어서 마지막 꽃잔치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북소리 꽹과리소리 징소리등으로 요란했던 4월의 꽃잔치를 보면서 지금까지 카톡친구들에게 나의 농원에서 피고 지는 꽃들을 중심으로 161회의 꽃이야기를 했었는데 문득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서 맨처음 본 꽃이 무슨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꽃을 좋아하신 부모님 덕택에 사랑채 정원에 심어진 해당화,동백나무,모란꽃, 함박꽃 등을 보면서 자랐지만 그 많은 꽃중에서 가장 인연이 깊은 꽃은 동백꽃이어서 동백꽃을 맨처음 보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올바르게 교육시키기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다녔으며 루쏘는 ‘지구는 인류의 교실이다’라고 했으며 우리들이 사범학교에 다닐때에도 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배웠고 이 사회에 많은 문제아들이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문제아는 없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배우는 문제 가정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데 환경은 중요합니다. 꽃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의 친구인 남천은 ‘어렸을 때 이웃에 꽃과나무가 많은 서울대학교 연습림이 있어서 거기가서 늘 놀았기 때문에 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의 사랑채 정원에는 사계절 예쁜 꽃들이 피었는데 특히 서쪽 담장아래 서있던 나의 키만한 조그만 동백나무에서는 이른봄 아직 풀과 꽃들이 피기전에 2월부터서 방울방울 동백꽃이많이도 맺혀피었습니다. 지금은 매화, 산수유 등의 꽃들이 눈속에서도 피어나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는 주변에서 매화나 산수유는 보기 어려웠기에 추운 겨울을 지나 맨먼저 웃으면서 피는 꽃이 동백꽃이었습니다.
내고향 광양의 자랑은 백운산입니다. 백운산은 남해의 고운 물결을 바라보면서 북쪽으로 병풍을 두른 듯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이 두 팔을 벌리고 서서 남쪽을 바라보는 형국인데 해발1218미터의 상봉이 머리라면 오른팔은 굽혀서 거수경례하듯 따리봉과 도솔봉을 이루고 있고 왼팔은 길게 뻗어서 동쪽을 향했는데 왼손을 쥔듯한 모습이 업굴봉(바구리봉)입니다.
도솔봉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제일줄기는 수천서면과의 경계를 이루며 봉강 일자봉을 거쳐 순천 봉화산까지 이어지며 도솔봉에서 뻗어내린 제2줄기는 봉강면과 옥룡면의 경계를 이루며 광양읍 내우산에서 멎었습니다. 억불봉에서 뻔어내린 3줄기는 광양읍 마로산성에서 멎었는데 이 2줄기와 3줄기 사이로 내고향 옥룡면이 고구마처러 길게 펼펴져 있습니다.
억불봉에서 마로산성까지 뻗어내린 제3줄기의 중간쯤 되는 곳에 가을이면 억새꽃이 하늘거리며 핀다고 해서 갈밭등이라는 이름을가진 봉오리가 있고 이 갈밭등에서 서쪽을 타고 내려오는 곳이 작은 골이고 갈밭등에서 남쪽으로 3백미터쯤 내려오는 곳에 옛날에 말을 길렀다는 마장이 나오는데 마장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골짜기가 큰골인데 큰골에서 흘러내리는 구슬같은 물줄기와 작은 골에서 흘러내니는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 바른 개울입니다. 지금까지 큰골과 작은골이 급하게 경사를 지으며 내려오다가 경사가 끝나고 완만하게 평지가 되는 곳이 바른 개울입니다. 이 바른 개울에서 두 물줄기가 합쳐서 2백미터쯤 내려오면 10여미터의 바위를 타고 덜어지는 폭포가 만든 호소가 있는데 이곳을 용쏘라고 불렀습니다, 용쏘로부터 백여미터 아래서 마을이 개울을 따라 양쪽으로 50여호의 마을이 옹기종기 살았는데 이 곳이 내가 태어난 석실이라는 마을입니다.
이 용쏘는 제법 물이 많아서 초등학교를 다니기전에는 아버님을 따라 이곳에서 목욕을 하기도 하였는데 아버님 품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새우보다10여배나 큰 징게미라는 왕새우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며 모을 가질이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부터는 친구들과 이곳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용감한 친구들은 10여미터의 폭포 물줄기를 따라 미끄럼을 타기도 했고 바위위에서 용쏘로 뛰어내리기도 했지만 나는 겁이 많아서 뛰어내리지 못했습니다.
용소에서 위쪽으로 20미터쯤 올라가면 이천 서씨 묘소가 있는데 이 묘앞에는 수령 300-400년은 되었음직한 오래된 동백나무가 한그루 서있었는데 이 동백나무가 좋아서 그랬는지 용쏘가 좋아서 그랬는지 중고등학교 다날때에는 아침마다 마을뒤 산길을 돌아 산책을 하고 동백나무아래서 운동을 하고 용쏘에서 세수를 하였습니다. 또 비가 많이와서 폭포에 물이 웅장한 소리를 내고 많이 떨어질 대에는 폭포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웅변 연습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왜정시대부터 해방전후 어려웠던 시절에 15년동안 옥룡 면장을 역임 하셨는데 청렴하셨기 때문에 논 1천여평과 밭 3백여평이 전부였기에 넉넉한 생활은 되지못하였습니다. 적은 농사에 농사를 지을 일꾼도 없었기에 내가 중학교 다닐때나 사범학교 다닐 때에는 생활이 어려워서 어머님께서 30리길이 넘는 백운산 숯막에가서 숯을 받아다가 광양읍에 이고 가서 팔아서 나의 학비를 조달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며 어머님께서는 돼지나 닭을 길러서 용돈을 마련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면장을 오래하셨지만 관료라기보다는 학자였으며 시조를 읊을줄 아는 풍류도 꽤 즐기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집은 대지가 백여평이 넘는 꽤 넓은집이었는데 마당을 경계로 본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서쪽으로 지나는 골목에서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북쪽으로 본채가 있고 남쪽으로 사랑채가 있었습니다. 본채는 4칸으로 맨동쪽에는 부엌이고 다음이 안방이며 마루방 작은방 순으로 이어졌는데 안방문 위에는 커다란 글씨로 ‘壽福‘이라 씌어 있었고 맨왼쪽의 작은방문위에는 左靑龍, 가운데 마루방문 위에는 右白虎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벽면애도 새로로 두줄씩 초소로 날려서 쓴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대문에서 마당으로 들어오기전에 사랑채로 들어가는 조그만 샛문이 있어서 아버님을 만나러 오시는 손님들은 이 샛문을 통해서 정원을 지나 아버님 방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부엌이 있고 아버님 방, 머슴이자는 방, 그리고 여름에 사용하는 다다미방이 있었으며 화장실도 위채와 따로 달려 있었습니다.
사랑채정원에는 소나무, 편백, 회양목 등과 동백, 해당화, 모란, 작약, 국화 등이 심어졌고 여주도 뜰방을 타고 올라가도록 심어져서 여름에는 노랑 여주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또 담장밑에는 대추나무도 있고 감나무도 한그루 있었는데 감나무에는 단감, 월하시, 믹수감 등 세가지 종류의 감을 한나무에 접을 붙여서 어릴 때는 신기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아버님의 호는 休堂으로 아버님 방문위에는 ‘休堂’이라고큰 글씨로 씌어 있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 방에 함께 자고 기거를 했으며 어머님과 누나들은 본채에서 기거를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앉은뱅이 책상위에가 사서오경을 쌓아놓고 수시로 책을 탐독하셨으며 벽장에도 책이 두궤짝이나 들어 있었는데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사서와 오경 등은 물론 난중일기, 임진왜란 등 이순신장군에 대한 책들과 관상, 풍수, 농사직설 등 농업에 관한 책과 동의보감, 광양읍지 등 각종책들을 쌓아놓고 읽으셨습니다. 저녁으로는 거의 날마다 책을 보다가 주무셨기에 아버님께서 잠이 드신후에 안경을 벗겨드리고 책을 정리하는 것은 매일밤 나의 몫이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준비를 하셨는데 과거제도가 없어져 과거를 보지못한 것을 못내 아시워하셨습니다. 또 어버님게서는 역사에 흥미가 있으셨는지 도선국사 이야기, 최산두 선생이야기 등 우리 광양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부터 이성계와 이방원 이야기, 함흥차사 이야기 등 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배우지 못한 이야기들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성종임금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비시킨후 그의 아들 연산군을 세자로 봉할 것인가 말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한번은 왕자들에게 ‘음식가운데 가장 유용한 음식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냈는데 다른 왕자들은 떡 과자 과일 들 여러 이야기를 했으나 연산군은 ‘諸曰鹽입니다.’하고 대답해서 성종이 흡족해서 세자를 삼았는데 세자가 된 뒤에 성종이 세자와 함께 후원을 산책하는 중에 후원에 방목해둔 사슴이 다가와서 연산군의 발을 혀로 핥으려고 하자 연산군이 발로 사슴을 차버려서 성종이 연산군의 성격이 포악스럽다는 것을 느끼고 실망했다는 등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풍수지리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우리 집안 조상님들의 산소자리는 아버님이 직접 자리를 잡아서 모셨으며 그럴 때마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산을 함께 오르시면서 풍수지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또 주역에대한 책도 많이 읽으셔서 관상학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해주셨습니다.
어쩔 때는 책을 보시다가 가끔 옆에 앉아서 책을 보는 나의 얼굴을 뚫어져라 살펴보시면서 ‘너는 이다음에 벼슬을 할 수 있겠으니 공부를 열심히하라.’는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훗날 사범학교를 다니면서 교육심리학에서 배운 ‘자기충족적 예언‘ ’성취동기육성‘ 이런 심리학용어를 배울때에 ’벼슬을 할 수 있다‘는 아버님의 예언이 나의 마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또 아버님께서는 관상은 불여심상이요 심상은 불여덕성이라는 말도 자주해주시면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나쁜 관상도 좋아진다는 관상이나 사주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해주셨습니다
아버님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첫째는 마을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서 부모니 묘역, 일하는 날자 잡기 방법 등에 관해 물어왔으며 심지어는 장담다구기 좋은날 이사하기 좋은날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두 번째는 산일을 한다거나 공적비를 세운다거나 하면서 찾아와 축문을 써달라는 등 여러사람이 찾아왔는데 이는 주로 면내에 사람들이 많이왔습니다. 셋째는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찾아와서 묻는 사람들인데 이사람들은 군내는 물론 함평이나 장성등 도내에서도 왔고 때로는 저녁내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무시고 가시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 명심보감이나 논어 등을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찾아오는 사람들인데 이중에는 나의 죽마고우인 청원선생도 있습니다. 아무튼 인근에서는 물론 때로는 타시군이나 타도에서도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고 한문에대한 문의뿐만 아니라 시조공부를 하러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을 찾아오시는 손님들은 갑계를 하는 친구들이나 문중사람들 부임인사차 찾아오는 군수 서장들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달려나가서 문을 열고 안내하는 것은 학교를 다니기전까지는 나의 몫이었는데 손님들을 아버님 앞에 인도하고서는 손님과 아버님과의 수인사가 끝나면 다음에는 내가 큰절을 올리며 인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순천에 사시는 모중학교 국어선생님이 술을 받아가지고 와서 아버님에게서 시조를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날 때 부모의 선택은 마음대로 안되고 하늘이 주어지는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훌륭하신 부모님을 만나 세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어렸을때부터 아버님과 기거를 하면서 사람은 근면 성실해야하며 청렴결백하고 공명정대해야 한다는 공맹의 도리를 배웠습니다. 아버님 정원에서 어릴때부터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체험하면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해마다 봄소풍운 동백나무숲으로 이루어진 백계산으로 소풍을 갔기 때문에 동백나무와의 인연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가 동백산으로 불렀던 백계산에는 동백립이 무성했고 맨가운데 분지에는 무덤이 두봉상 있었는데 학생들은 무덤 주위에 앉았고 학년대표들이 무덤위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는 오락행사를 해마다 실시히였습니다. 앞날을 에견했다는 풍수지리학의 원조이신 도선국사께서는 몇백년후에 자기의 무덤이 아이들의 공연무대가 될줄을 알았을깤 몰랐을까? 아무튼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도선국사님의 무덤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놀았습니다. 동백꽃피는 따뜻한 봄날에 이름모를 무덤위에서 노래도 부르고 주변에서 씨름도 하면서 신나게 놀다가 내려오는 길에 ‘옥룡사’라는 간판이 붙은 조그만 절의 앞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올려 마음껏 마시곤 했으니 도선국사께서 자리잡은 정기어린 땅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느니 행운아라 하겠습니다.
백운사가 알려지게 된 것은 90년대초에 KBS대하드라마 태조왕건이 방영되면서부터입니다.
백운사를 창건한 도선국사는 영암사람으로 속성은 김씨인데 일찍이 공부를 많이 하였으나 뜻하는 바가 있어 출가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좋은 터를 찾아 절을 짓고 길지를 찾아 다니다가 순천에서 광양으로 들어와 하동쪽으로 나가는 길에 지금의 섬다리를 건너다 북쪽을 바라보니 백운산이 병풍처럼 둘러있으니 아무래도 생김새가 비범함을 느끼고 옥룡천을 따라 북상하면서 좌우의 산천경개에 취해 감탄하다가 옥룡면 삼정자라는 마을에서 백계산을 발견하고서는 그때부터 백계산까지약 1.5킬로미터의 길을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올라갔다고 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전국방방곡곡을 돌며 찾았던 이상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때가 도선국사가 37세되던 해인 864년이며 이곳에다 옥룡사를 창건하고 898년 72세로 입적할 때가지 불공을 드리면서 후진을 양성하며 살았습니다. 이 때 절의 터 기운을 보강하기위해 동백나무를 심었는데 지금은 약 18만제곱미터에 약 5천주의 동백나무가 있고 수령이 3백년-4백념된 나무도 3천여구루나 됩니다.
조섬시대에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가 조선에서 제일 살기좋은 곳은 호남이요 호남에서 제일 살기좋은 곳은 광양이며 광양에서 제일 살기좋은 곳은 성황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암행어사는 민정을 살피는 임무가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의 질을 따져서 이야기 했을 것이며 특히 삶의 질 가운데서도 먹고 사는 문제로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했으니 자급자족도를 따져서 공기좋고 따뜻하고 땅이 기름지며 뒤에는 산이요 앞에는 바다라 농산물 수산물이 풍부했으니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만 몇백년이 지난 지금은 광양제철단지가되어 셰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빛나는 고을이 되었으니 도선국사나 어사 박문수의 생각이 틀림은 아닌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 삼천리의 빛나는 기가 모이는 곳으로 백운산아래 백계산을 점 찍었고 박문수어사는 산물이 풍부해서 살기좋은 곳으로 광양을 꼽았으니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은 자부심을 갖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백계산 동백림에 봄이 하마 어지렸다.가슴속 옛기억이란 이리도 쓰라린건가? 그대들 부디와 눕고 앉고 거닐어보세. 내 차마 못보는 뜻은 그제사 짐작하리.’이은상 선생님의 백계산이라는 시조입니다. 백계산 동백림은 2007년 12월17일 천연기념물 48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백운산이 북쪽으로 병풍처럼 가리고 있으니 도선국사가 누워계시는 곳은 참으로 천하명당처럼 아늑해 보입니다. 이나라 풍수지리의 원조인 도선국사께서 터를 잡아 후진을 양성했던 백운사를 복원하고 후손들에게 이 땅이 길지이고 복지임을 인식시키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고장을 만들어 길이 후손에게 복된 터전을 물려주도록 해야겠습니다.
동백나무는 난온대 기후식물로 남부지방에서만 자생하고 있으며 꽃말은 ‘그대만을 사랑합니다’입니다. 동백나무는 내가 태어나서 아버님의 정원에서 처음 본 나무이고 또 어릴 때는 뒤산 용쏘에서 초중학교를 다닐때에는 해마다 봄소풍을 가서 만났던 나무이며 사범학교 다닐때는 방학때마다 찾아가서 책을 일고 꿈을 길렀던 마을의 용소와 함께 나에게 빛난정기를 준 나무입니다. 온갖꽃과 나무들이 추워서 겨울잠을 자는 2월에 벌써 피어서 아름다움을 주는 동백꽃입니다. 어릴 때부터 일생을 함께해온 꽃이기에 더욱 정답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그리운님! 코로나19 때문에 무척 힘드시죠? 지난번 161차꽃이야기에서는 향기로운 프리지어꽃을 한아름 보내드렸으니 그 향기에 취하시고 행운이 가득하시리라 믿습니다. 동백꽃말도 정답고 흐뭇합니다. 이제 이 강산에서 코로나가 추방될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계속 용기를 가지시고 힘내시어 활기찬 새날을 창조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4월22일 석 송 정 절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