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김륭
우리 동네 구멍가게와 약국 사이를 어슬렁거리던 고양이, 쥐약을 먹었대요 쥐가 아니라 쥐약을 먹었대요 우리 아빠 구두약 먼저 먹고 뚜벅뚜벅 발소리나 내었으면 야단이라도 쳤을 텐데.....
구멍가게 빵을 훔쳐 먹던 놈은 쥐인데 억울한 누명 둘러쓰고 쫓겨 다니던 고양이, 집도 없이 떠돌다 많이 아팠나 보아요 약국에서 팔던 감기몸살약이거나 약삭빠른 쥐가 먹다 남긴 두통약인 줄 알았나 보아요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고양이, 구멍가게 꼬부랑 할머니랑 내가 헌 프라이팬에 담았어요 죽어서는 배고프지 말라고 프라이팬을 비행접시처럼 타고 가라고 토닥토닥 이팝나무 밑에 묻어 주고 왔어요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2009. 문학동네
배추벌레
김륭
배추 뽀얀 엉덩이를 얼마나 힘들게 기어올랐는지 몰라요
배추벌레가 배춧잎을 갉아먹고 있어요
수없이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는 또 얼마나 찧었는지
온몸에 멍이 들어 푸르뎅뎅한 배추벌레에게
배춧잎은 밥이 아닐지 몰라요
꿈틀꿈틀 꿈일지 몰라요
배추밭에 줄지어 앉은 배추들 좀 보아요
미장원에 파마하러 온 동네아줌마들 같아요
조심조심 볏짚으로 머리띠 묶어주는
우리 엄마에게 들킬까 봐 죽은 듯 숨을 고르는
배추벌레 한 마리
마침내 배춧잎 사이로 하늘이
뻥, 뚫리고요 팔랑팔랑 날아오르는
배추흰나비 좀 보아요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2009. 문학동네
밥풀의 상상력
김륭
밥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질경이나 패랭이, 원추리 씀바귀 노루귀 같은
예쁜 풀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줄래요
주렁주렁 쌀을 매단 벼처럼 착하게 살래요
밥그릇 싸움 같은 어른들의 말은
배우지 않을래요
말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며느리배꼽이나 노루귀 같은 예쁜 말만 키워
입 밖으로 내보낼래요
온갖 벌레 울음소리 업어 주는 풀처럼 살래요
어른들이 밥 먹듯이 하는 욕은
배우지 않을래요
치매 걸린 외할머니 밥상에 흘린
밥알도 콕콕 뱁새처럼 쪼지 않을래요
풀씨처럼 보이겠죠
잔소리 많은 엄마는 잎이 많은 풀이겠죠
저기, 앞집 할머니도 호리낭창
예쁜 풀이에요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2009. 문학동네
김륭 시인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1988년 불교문학 신인상
1989년 조선대 중국어과 졸업
2005년 제1회 월하지역문학상 수상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당선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9년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