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①
설법을 듣거나 경전을 연구할 때면 반드시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대개 사람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듣거나 읽을 때면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과 견주어본다. 그래서 비슷하면 받아들이고 옳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슷하지 않으면 틀렸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게 된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읽거나 들어야 법우(法雨)가 정신의 토양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부드러운 봄비가 내 영혼의 토양에 스며든다. 오랫동안 땅속 깊이 잠자고 있던 씨앗 하나가 막 웃음꽃을 피운다. 읽거나 들을 때 지나치게 열중할 필요는 없다.
그저 땅처럼 하면 된다. 비가 오면, 땅은 그 비에 온몸을 내맡길 따름이다. 법우가 정신 저 깊숙한 곳에 묻혀있는 씨앗에 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승이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이해와 깨달음의 씨앗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것은 다만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두는 일뿐이다.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나머지는 토양과 씨앗이 알아서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전해졌다. 그것은 근본불교,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다. 근본불교에는 부처님이 생전에 가르치신 모든 가르침이 포함된다. 부처님이 대반열반에 드신지 140년이 지나자 승가는 대중부(大衆部)와 상좌부(上座部)로 갈라졌다.
대중부는 변화를 원했던 이들이고, 상좌부는 그 변화에 반대했던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후 백년이 지나자 상좌부는 두 지파, 즉 설일체유와 분별설부로 갈라졌다. 아쇼카왕의 후원을 받은 분별설부가 갠지스강 유역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는 사이, 설일체유부는 북쪽에 있는 캐시미어로 갔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400년 동안 그 가르침은 오직 구두(口頭)로 전해졌다.
그 뒤 분별설부의 분파인 스리랑카의 탐라사티야에 소속된 승려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야자수 잎에 기록해두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실행에 옮기는데는 다시 백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때까지는 오직 한 승려만이 경전 모두를 외우고 있었는데 그는 좀 교만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른 승려들이 그를 설득해서 경전을 외우게 하고 나서야 받아 적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교만한 승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아무래도 찜찜한 구석이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아리타비구와 같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고는 잘못 전하는 일조차 있었다. 또 한 수백년에 걸쳐 경전을 암송해왔던 승려들 중 일부는 그 속에 깃든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아주 드믈기는 하지만 일부 단어를 바꾸거나 잊어버린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부처님 가르침의 일부는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 왜곡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그 마음을 조복 받고자 갖가지 방법을 써보셨는데 별 효과가 없었다. 어느 경전에는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악물고 혀로 입천장을 누르고 마음을 억눌러 보는 것이 어떨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자기보다 약한 상대방의 어깨나 머리를 감싸 안고 있는 씨름 선수가 상대방의 항복을 받아내자면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계속해서 눌러대는 것처럼 나도 이를 악물고 혀로 입천장을 누르고 마음을 억눌러 보았다. 그렇게 하자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힘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계속해서 집중 상태를 유지한 채 딴생각을 품은 적이 조금도 없었지만, 내 몸과 마음은 평온을 찾지 못했고 녹초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수행을 하자 고행에 수반되는 고통 외에 다른 괴로운 느낌이 들었고, 나는 내 마음을 조복시킬 수 없었다.
부처님은 분명히 그런 식으로 수행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나중에 다른 경전들에 삽입된 아래의 문단은 확실히 정반대의 의미를 띠고 있다.
자기보다 약한 상대방의 어깨나 머리를 감싸 안고 있는 씨름 선수가 상대방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한순간도 늦추지 않고 계속해서 눌러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호오(好惡)로 이루어진 건전하지 못한 생각들을 죄다 멎게 하고자 하는 비구는 그러한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날 때 이를 악물고 혀로 입천장을 누르고 마음을 조복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어떤 것이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인지 알아내고자 한다면 여러 가지 경전을 연구하고 비교해볼 필요가 자주 있다. 그것은 마치 귀중한 보석들을 실로 꿰어 목걸이를 만드는 일과도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어느 한 가르침에 매달리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된다. 비교 연구를 통해 원문에 담긴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우리의 수행에 도움이 되는 확실한 가르침과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을 분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