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학
전문수(본지 주간, 창원대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자연
- 한계령을 넘으며
월출산 상봉이
너무 급하게 치솟아
천 길로 내리 꽂힌 화암(花岩) 계곡
하얗게 씻긴 바위틈을
돌아 내리 쏟아지는 물소리도 웅장하다
앞마당 끝에서
옥수가 찰랑대는
산수식당
( 메뉴=쏘가리, 잡어 매운탕,
사이다, 콜라, 맥주 ,소주)
산수 절경과 동업하는 식당,
매운탕에 월출산 달을
띄워 팔고
솔바람도 부침개로 부쳐 팔고
푸른 물소리는
사이다가 시원하게 팔고
청정 옥수는 콜라가 팔고
청산은
눈 안주로 맥주, 소주가 팔고
열심히 일한 만큼만 흙과
나누어 먹고 산 순박한 이들
농사 일 팽개치고
산수 팔아 살 줄
누가 알았겠나.
갑자기 끓어오르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내 고뇌보다
더 가파른
한계령을 내 차는
이미 넘고 있었다.
문학은 언제나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가와 함께 참된 문학정신이 무엇인가를 되물으며 그 시대마다 당면한 미학적 문제들을 나름대로 고민해왔다고 생각한다. 물의 본질이 투명한 맑음이라고 본다면 강물이 아무리 혼탁해도 다시 그 맑음을 되찾게 되듯 문학 또한 이런 흐름의 이치를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생각된다.
요즈음 우리 사회 전반에 일어나는 여러 형태의 개발 사업들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설정을 근본적으로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문학에서도 생태주의를 내세웠지만 문학역시 생태문학 본질을 올바르게 정립하지 못 한 것 아닌가도 통감 한다. 새삼스럽게 저 루소의 <에밀>이 던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정신을 다시 부연 설명해야 할 만큼 이 한 구절의 근본정신을 전혀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맑음이 물의 본질이듯 생태문학의 본질을 바로 갈파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이 한 구절의 정신을 새삼 되새겨야 여야 한다고 본다.
만일 “문학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이 문장 하나를 이 시대의 화두처럼 제시했을 때 이것은 어느 한 시대를 초월한 문학의 거대 문자 내지 담론이라 생각한다.
세상만사에 그 본질이나 참된 정신이 무엇인가와 같은 무거운 물음을 걸고 보면 우선은 매우 어려운 문제 같고 그 답이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지만 의외로 너무 간단한 상식인 경우가 많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이 말이 이미 일상속의 평범한 말이 돼버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실은 생태 문제의 그 본질임을 망가하는 현상과 같다. 바로 이런 상식으로부터 두렵지 않게 어떤 문제의 정도를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1. 자연과 천리
흔히 모든 존재에는 천리가 그 밑에 깔려있다 말한다. 이 말에 대해 누구나 이의를 달지 않는다. 마치 철학자 헤겔식의 어떤 절대정신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믿는 것처럼 잡다한 삼라만상의 모든 변화 현상을 이 천리가 잘 조정해 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문학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기>라고 했을 때 우리 생태문학이 이런 천리를 형이상학적으로 거듭 챙기며 나아가는 임무를 진 것 아닌가 한다. 천리를 좇아서 문학은 나아가는 것, 매우 무모한 어떤 판단이나 잘못된 세류에 휩쓸려 혼탁을 야기하는 여러 현상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직무유기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문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치 무엇인가의 바른 방향 찾기는 문학의 본능이라고 볼 때 부조리에 대해 꿈틀거리는 것은 당연한 문학 동력이라는 생각이다.
문학의 본질 문제를 물으면서 왜 요즈음 생태 문제냐는 이미 많은 논의들로 익히 아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본질에 접근하는 사고방식이 너무나 말초적인 것에 머무르면 문제다. 가령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등등과 같은 인간의 코앞 제 살기 문제와 같은 시각으로 부끄러운 자기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면 여타의 일시적 유행들처럼 또 하나의 프로퍼갠더에 그칠 것이다.
생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명 근원이고 자연 그 자체다. 문학이 별도의 문화 내지는 예술의 한 장르라고 하지만 인간의 생명 근원인 생태를 문제를 벗어날 수 없다. 문학 정신 또는 문학 본질과 일치된다. 즉 어떠한 양태의 하위 문학 장르도 궁극의 귀결점은 자연의 천리, 섭리, 순리에 귀일될 것이다.
낙엽이 지는 것도 천리요, 하찮은 잡초가 꽃을 피우는 것도 천리며, 가지를 폭풍에 부러뜨리면서도 그 언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도 천리이다. 자연이란 말은 모든 존재가 천리로 스스로 그리되었다는 뜻이다. 이 때 스스로라(自)는 뜻은 자신도 모르게 천지 이치에 의해 절로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연(然)자의 그러함이란 뜻과 합쳐 자연(自然)이란 뜻을 요약하면 자연 곧 천리, 순리, 섭리, 등등과 동의어가 되어 버리고 만다.
결국 자연의 본질을 알려면 천리, 순리, 섭리 등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밖에 없다.
천리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게 한 근원인데, 어떤 존재도 이를 거역할 수 없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 천리 그 앞에는 어떤 것도 굴복한다. 이런 점에서 일단 모든 존재는 크고 작음, 길고 짧음, 가볍고 무거움, 못나고 잘남 등등에 관계없이 일체가 동등의 지위를 갖는다. 또한 나고 죽고 하는 영고성쇠의 순환을 동일하게 갖기에 역시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이처럼 천리는 사물과 현상의 밑바탕에서 동일한 가치와 지위를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모든 존재는 존재 가치의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천리에는 한 마디로 말해서 차별이 없고 귀천과 호오가 없다.
이런 천리를 순진스럽게도 어김없이 절대로 따르는 것이 순리이고 이 천리를 어떤 절대 주재자가 관리할 때 섭리가 된다. 우리들이 흔히 착하다는 선의 가치는 바로 천리를 거역하지 않고 잘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노자>나 도교에서 인간의 순박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것은 천리를 잘 따르는 순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무위자연과 가장 깊이 내통하는 것은 바로 천리와 자연의 일치사상 때문이다. 언제나 쉽게 천리를 배반하는 인간들을 제자리로 되돌려 현실의 고뇌에서 스스로 벗어나게 하고자 함일 것이다.
요약하면 작고 큼의 차별, 높고 낮음의 차별, 많고 적음 차별 등등은 그 이해의 변별성 이외에는 전혀 가치의 차이가 없다는 천리가 곧 자연인 것이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과정을 보면 몇 개의 작은 산봉우리를 단계적으로 정복하면서 마지막 최고봉에 이른다. 이런 일련의 등산 과정을 살 살펴보면 등산에 필요한 복장과 장비에서부터 보폭의 크기, 장애물 피하기, 심지어 호흡법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작은 과정들을 거쳐 목적한 정상에 이른다. 어느 것 하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다. 흔히 정상에 이른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그 정상의 도착을 도운 한 많은 과정은 무시되는 경우가 있다. 만일 그 과정의 여러 단계, 어느 한 단계가 소홀히 되거나 무시되었다면 정상 정복은 좌절되었을 것이다.
이런 등가의 원리가 천리이다. 순리란 바로 이 등가의 원리를 착실하게 따르는 것이다. 생태주의 문학은 바로 이런 자연의 원리를 <철학하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대명제가 전제되는 보다 문학적 철학하기가 아닌가 한다.
2. 참다운 자연 회귀
그러면 이제 우리들의 삶의 현실 문제나 문학 창작 문제로 돌아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이 천리를 어떻게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것일 가를 생각해 볼 단계이다.
거듭 언급하지만 천리는 모든 삶의 성취과정의 어는 단계도 동등하게 취급하는 시작과 끝의 동등성을 가리킨다. 모든 사물을 조금의 차별도 없이 동등가치로 존중하는 정신이 곧 자연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만의 욕심. 인간중심주의 등 타 존재와의 불평등을 버리라는 천심의 정신이다.
따라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뜻은 인간의 마음이 자연, 곧 천리를 순응하라는 뜻이다. 결코 경치 좋은 산수 속으로나 농촌으로 돌아라가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곳은 본디 인간의 본성이 자연성을 지니고 있는 그 천심의 자리, 순심 자리, 착하고 선한 자리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인간 저만의 욕망 중심인 이기주의를 버리고 자연(천리)의 순리를 따르라는 뜻이다. 도심 속에서도 푸른 하늘을 좇아서, 떠도는 흰 구름을 좇아서 순심의 자연성을 되찾으라는 뜻이다. 지독히도 허황한 욕망에 저리고, 턱없이 권력과 배금주의에 오염되고, 질투와 시기심 등등으로 겹겹이 갇혀있는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고 자연성을 찾아 순심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인간 마음의 본디 자연성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경치 좋은 산수 절경으로 찾아가라는 속물성이 아니다. 마음이 자연으로 돌아가 욕심의 때를 벗ㅎ고 천심을 얻지 못하면 전혀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산속에 고급 별장을 지어 삶으로서 타인과의 차별적 우월감으로 우쭐댄다면 전혀 자연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이는 돈 자랑일 뿐이다. 타인들의 시기와 질투심만 조장하는 악을 저지를 뿐이다. 자연심을 찾는 깨달음에 숲 속 별장이 다소 도움이 될 거라는 변명도 실은 억지스러운 거짓이다. 공기 좋은 농촌에 산다고 다 자연으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는 역시 똑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과욕에 쪼들려서 하루하루 사는 게 괴로우면 이는 자연으로 돌아 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심의 천리나 순리는 최소한의 분수에 맞는 소박함이기 때문이다. 즉 조금의 욕망 찌꺼기가 끼지 않은 담박함이다. 따라서 산수를 이용한 무분별한 영리적 행위, 사치스러운 자연 경치 누리기 내지 자연 희롱 등등은 사람들을 욕심으로 들뜨게 해서 천심의 본 자리로부터 점점 떠나게 한다.
결코 이런 형국은 인간이나 사회나 국가의 뒷날이 밝을 수 없다. 관광 개발이나 치산치수란 자연성을 방해하는 것을 바로잡는 것이지 인간의 호화로운 욕망을 채우거나 한껏 들뜨게 하는 것은 아니다.
3. 생태주의 본질
이제 문학의 생태 문제로 되돌아와서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볼 단계가 된 것 같다. 문예 미학이 시대적 조건에 따라서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인간 자연성의 본자리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생태시학의 궁극적 결말은 인간의 천심 찾기, 천심 철학하기 즉 자연심 찾기이다. 아무리 미시적인 키치미학이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양태가 어떤 것이라도 인간이 자연성의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꿈같은 몽상이 될지라도 언젠가는 인간이 도달할 유토피아는 모든 인간이 순리대로 사는 일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다양한 장르로 문학이 분화되어 갈수록 이 꿈에 점점 더 다가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저간의 환경오염 문제나 환경파괴 문제 같은 환경질병 문제를 다루는 문학 장르는 는 근원적인 인간 심성 치료를 제쳐두고는 한갓 구호에 그쳐 밀초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의 본성인 자연성 찾기 내지는 천심 찾기와 같은 문예 미학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18세기의 루소가 <에밀>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한 외침은 21세기 오늘을 위해서 더욱 선명해진다. <노자> < 장자 >가 왜 도덕경이 되는지도 새삼 깨우치게 된다.
결국 생태주이 문학의 본질은 인간의 자연성을 찾도록 심성치료 문학이다.
덧글 0 트랙백 0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URL로 공유
더보기
이번호의 머리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전
다음
TOP
로그인
PC버전
Copyright ⓒZUM internet. All rights reserved